우리 마을 주치의 / 곽주현
그는 우리 마을 주치의였다. 감기, 몸살이 있거나 농사일로 다쳐도 그가 달려왔다. 누가 부르지 않아도 출근 도장을 찍듯 거의 이틀에 한 번씩은 얼굴을 내밀었다. 환자가 없으면 당산나무 아래 우두커니 앉아 있거나 할 일 없이 골목 저 골목을 서성거렸다.
사람들은 그를 ‘신 의사’라 불렀다. 성이 신씨여서 그랬다. 내 고향 마을과 5킬로미터 남짓 떨어진 산기슭에서 혼자 산다고 했다. 꼭 자전거를 타고 나타났다. 핸들이 까맣게 녹슬고 안장도 너덜너덜한 고물 자전거다. 마을 어귀에 다다르면, 내려서 끌고 터벅터벅 걸어 들어왔다. 깡마른 체격에 추레한 차림이었으나 눈빛은 강했다. 그는 항상 손잡이가 낡은 오래된 가죽가방을 들고 다녔다. 얼핏 보면 정처 없이 떠도는 나그네 같다.
가방에는 청진기, 주사기, 해열제, 소화제 등이 들어 있었다. 누가 열이 난다고 하면 해열제를 주고, 배가 아프다고 하면 청진기를 꺼내 몸 이곳저곳을 진찰했다. 병이 위중하다 싶으면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그러나 웬만한 질병은 그가 다 치료했다. 그러고서도 진료비는 실비만 받았다. 덤으로 막걸리 한 병만 사다 주면 좋아했다. 그걸 마시면서 환자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리를 뜰 무렵에는 곧 좋아질 거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그에게 치료를 받고 나면 자잘한 아픔은 쉽게 사라졌다. 그래서 그는 마을 사람들에게 용하다고 소문이 났다. 이 집 저 집을 다니며 치료하다가도 점심때가 되면 곧잘 우리 집 마루에 걸터앉았다.
나는 젊었을 때도 건강이 좋지 않아서 신 의사와 자주 만났다. 어느 해 여름방학이었다. 몸에 열이 오르고 폭염주의보가 계속되는 찜통 날씨인데도 오슬오슬 춥고 떨렸다. 그분 댁에 전화했지만 멀리 출타하고 없다고 했다. 감기인가 싶어 약국에서 약을 지어 먹었다. 좋아졌다가 약을 끊으면 다시 똑같이 그랬다. 할 수 없이 병원을 찾았다. 거기서도 감기라면서 주사를 맞고 1주일 분의 약을 줬다. 여전히 먹을 때뿐이고 계속 오한이 계속되고 토하기도 했다.
10여 일이 지나 그가 왔다. 그간 앓았던 일을 말하니 고개를 끄덕끄덕하고는 청진기를 꺼낸다. 몸 이곳저곳을 살피더니 입을 크게 벌려 보라고 한다. 혀를 이리저리 들여다보고는 심각한 표정을 짓는다. 전염병에 걸린 것 같다며 다른 병원으로 가자고 한다. 검사 결과 그가 예진한 대로 장티푸스라는 병명이 나왔다.
이런 일도 있었다. 치질 때문에 애를 먹다가 외과에 갔다. 증상이 심해서 수술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고 한다. 어쩔 수 없어서 날짜를 예약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그분이 우리 집에 들렀다. 외과 수술이라 그가 진료할 수 없을 것이라 여기고 지나가는 말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환부를 한번 보자고 한다. 살피고 난 후, 외출하지 말고 기다리라며 급하게 자전거를 몰고 나간다.
한참 만에 다시 와서는 엎드리라 한다. 애들이 갖고 노는 물총만큼 커다란 주사기를 꺼낸다. 보기만 해도 겁이 나서 나도 모르게 손사래를 치며 뒤로 물러섰다. 잠깐 참으면 금방 끝난다며 웃으며 손목을 잡아끈다. 어찌나 아픈지 주사를 맞는 동안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몇 달이 지나자 그렇게 괴롭히던 출혈과 통증이 없어졌다.
그는 자격증이 없는 소위 돌팔이 의사였으나 어떤 병은 전문의 못지않은 실력이 있었다. 궁금해서 어디서 의술을 배웠냐고 넌지시 물었다. 거북스럽게 웃으며 별것 아니라고 대답을 피한다. 유명 의과 대학에 다닐 때 사회주의 활동하다가 잘못되었다고도 하고 오랫동안 병원에 근무했다는 등의 말이 떠돌았다. 어디까지나 소문일 뿐 아무도 그의 이력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도시로 이사했다. 이삿짐을 싸고 그에게 전화했다. 그동안 치료해 준 고마움을 잊지 않겠다고 인사했다. 몇 년 후에 고향에 들러 소식을 물었다. 마을을 방문한 지 오래되었다고 한다.
“신 의사님, 당신은 나와 마을의 의사(醫師)이자 의인(義人)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