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0811 / 새 일을 다 이루신 하나님 (사43:15-21)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옙스키는 사회주의 혁명 단체에 가입했다는 죄로 1849년, 28세의 나이로 사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영하 50도가 넘는 추운 겨울날 형장으로 끌려가 기둥에 묶였는데 형 집행까지 5분의 시간 여유가 주어지게 되었습니다.
인생의 마지막 5분을 어떻게 쓸까를 고민하는 중에 2분이 지나가 버렸고 남은 3분간, 지난 28년이란 세월을 어떻게 살았는지를 생각해 보니 순간순간을 소중하게 살지 못한 것이 후회되었습니다. 그리곤 문득, 다시 한번 살 수 있다면 정말 인생을 가치 있게 쓸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때 군인들이 총에 탄환을 장전하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모든 걸 체념하려는 순간 한 병사가 멀리서 특명이요 하면서 손수건을 흔들며 달려왔습니다. 도스토옙스키를 살리라는 황제의 명령이었습니다.
간신히 사형을 면하게 된 도스토옙스키는 사형장에서 생각했던 대로 가치 있는 인생을 살기 위해 곧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였고 남은 생애 동안 매 순간 ‘이 5분을 어떻게 쓸까?’를 생각하며 그 5분을 믿음으로 살았다고 합니다.
사실 5분이라는 시간은 어떤 이에게는 짧은 시간일 수 있으나 누군가에게는 한없이 긴 시간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생의 행과 불행이 일순간에 뒤집어지는 일이 왕왕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인생을 사는 중엔 항상 ‘이 5분을 어떻게 쓸까?’와 같은 질문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
한숨 쉬며 탄식하며 5분을 보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최선일까요? 그렇게 하는 것이 과연 인생에 도움이 될까요?
아니라면. 쉼 없이 지나가는 인생의 5분, 5분마다 우린 어떻게 해야 최선을 향해 나가는 삶을 살게 될까요?
한때 시중의 베스트셀러 중에 ‘긍정의 삶’이라는 것과 ‘내려놓기’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읽어 보니 믿음의 실천적인 면에서 굉장히 좋은 내용들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책들을 읽으실 때면 항상 그 책들이 지향하는 두 가지 방향성을 알고 읽으시면 더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나는 과거에 대한 것이요. 또 하나는 미래에 대한 것입니다
긍정의 삶을 보면 과거의 부정적인 것을 벗어버리고 미래를 향해 긍정적인 믿음을 가지고 나가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으며, 내려놓기도 보면 이전에 세상에서 가졌던 모든 지위와 욕구들을 다 내려놓고 내려놓은 그 빈자리에 앞으로 채워 주실 하나님의 은혜만을 소망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세상적으로나 신앙적으로나 좋은 교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책들을 읽으실 때면 주의해야 할 것이 있는데, ‘행위의 우선순위’를 놓치게 되면 긍정의 삶이나 내려놓기나 모두 인본주의가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자칫 놓치게 되는 행위의 우선순위는 무엇일까요?
‘결과’를 생각하기 전에 우선은 ‘원인’을 알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왜 긍정의 삶을 살아야 하며 왜 내려놓아야 하는가에 대한 이유를 분명히 알고 그리해야 비로소 그것들이 믿음이 될 수 있는 겁니다.
인생을 늘 긍정적으로 사는 것도 좋지만 원인을 모르고 그렇게 하면 낙천주의자는 될지언정 그리스도인을 되지 못합니다. 또한 내려놓는 것은 좋지만 원인을 모르고 하게 되면 미니멀 라이프는 될 수 있어도 그리스도인의 삶은 되지 못합니다.
무릇 그리스도인이라면 인생을 사는 중엔 늘 행위의 우선순위가 중요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사람이 낙심하거나 탄식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현재 되어진 결과 때문에 그리되는 겁니다. 결과만을 생각하다 보니 잘못된 결과에 이르게 된 과거를 후회하게 되는 것이고, 원치 않은 결과만을 놓고 보니 미래도 비관하게 되는 겁니다.
이런 이유에서 우리가 인생에서 제대로 된 긍정의 삶을 살며 내려놓기를 하려고 하면 결과가 아니라 원인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행위의 우선순위에서 결과보다 앞서야 하는 원인은 무엇일까요?
‘왜?’라는 질문을 해보면 답이 나옵니다.
왜 긍정의 삶을 살아야 할까요? 왜 세상 것들을 내려놓아야 할까요?
우리가 하나님을 믿기에 그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인생에서 ‘하나님을 믿으니까.’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보세요. 하루하루가 죽어라 죽어라 하는 삶이고 뜻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형편임에도 ‘잘될 거야. 잘될 거야.’라고 한다 해서 뭔들 잘 되겠으며, 태생이 소위 말하는 흙수저이고 가진 게 하나도 없다고 하면 내려놓으려니 뭘 내려놓아야 그 빈자리가 채워진단 말일까요?
그러나 그 모든 순간에도 ‘내가 하나님을 믿으니까.’가 전제되기만 하면 하나님으로 인해 ‘잘될 거야.’라든가, 내가 흙수저며 가진 게 없다는 생각까지도 내려놓게 되면 결과는 그야말로 우리가 믿은 대로 하나님께서는 나에게도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되게 해 주실 것이기에 하나님을 믿으니까를 전제로 우린 긍정의 삶을 살 수가 있고 내려놓는 삶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비단 그런 제목의 책들이 출간되었기에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미 성경에서는 그런 책들보다 훨씬 앞서서 긍정의 삶과 내려놓는 삶에 대한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본문에서 이사야는 이미 이들 두 가지 삶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즉 성도들을 향해 과거에 대한 신앙과 미래를 바라보는 믿음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과거는 돌이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이미 지나간 일은 바꿀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바꿀 수도 없고 바뀌지도 않을 이미 되어진 일들을 자꾸 생각해 봐야 남는 건 후회와 한숨과 근심만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살아온 인생을 통째로 부정하려는 말은 아닌 것이, 우리 인생에서 ‘하나님을 믿으니까.’가 전제되기만 하면 하나님은 이미 되어진 일들까지도 재료로 삼아 앞으로 되어질 일들을 바꾸고 변화시키고 축복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분이시기에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과거는 내려놓을 수가 있는 것이고 미래는 긍정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게 되는 겁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보자면 본문은 우리에게 긍정의 삶과 내려놓는 삶을 살기 위한 몇 가지 권면을 주고 있습니다.
18절을 보세요.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전일, 옛날 일은 다 지나간 일입니다. 그렇다고 이 말씀이 그것들을 모두 부정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문맥을 보면 18절 말씀은 둘로 나누어서 해석해야 합니다.
이전일을 기억하지 말라는 말은 과거에 좋지 못했던 일은 최대한 잊어버리라는 것이고,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는 말은 과거의 좋았던 일들도 기억하지 말라는 겁니다.
우선은 과거에 좋지 못했던 일은 최대한 잊어버려야 합니다.
사람들은 저주를 싫어하지만 실상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내가 나를 저주하며 살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과거에 좋지 못했던 기억을 끊지 못하는 것이 나에 대한 최대의 저주입니다. 그런데 누가 그 기억을 끊어줍니까?
내가 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내가 끊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끊기만 한다면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를 아무도 저주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과거에 좋지 못했던 일을 기억하지 않는 것은 내가 새로운 인생, 넉넉한 인생을 살기 위해 필수적입니다.
또한 좋았던 기억도 하지 말라는 말은 소위 말하는 ‘왕년에’라는 의식도 버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왕년에’라는 게 뭡니까? 본문이 말하는 ‘옛날엔’이란 말입니다.
주변에서 그런 말을 하는 분께 묻거나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에게 자문해 보세요. 과거에 잘 나갔으니 그래서 어쩌라고요?
왕년에가 지금의 나를 재기하게 해 주는 것이 아니며, 옛날에가 현재의 내 형편을 회복시켜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라면 지나간 과거를 후회하는 것 못지않게 지나간 과거에 매달려 사는 것도 피하라는 겁니다. 대신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축복받는 그리스도인이고자 하면 우린 현재 내가 해야 할 일에만 집중하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집중해야 할 그 일은 무엇일까요?
19절 초반부에 답이 있습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과거가 나빴든 혹은 잘 나갔더라도 현재는 하나님이 행하실 새로운 일만 기대하며 사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게 현재를 사는 우리가 집중해서 해야 할 일입니다.
19절에 이어 20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고 했습니다.
흔히들 인생은 광야와 같고 사막과 같다는 비유를 하곤 합니다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인생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광야에 길을 내시고 사막에 강을 내십니다.
이런 하나님이 내가 믿는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그게 믿음입니다.
이렇게 보면 본문의 18절은 과거에 대한 권면이고, 19절 이후는 미래에 대한 약속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권면과 약속을 받음에 있어 18절을 위해서는 우리의 결단이 필요하지만 19절로 20절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우리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라면 이전에 있었던 여러분의 경험과 그 경험들로 인해 여러분 인생에 짙게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를 믿지 마시고 하나님께서 주신 미래의 약속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물론 하나님을 믿으며 산다 해도 당장엔 인생이 잘 안 풀리고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잊지 말아야 할 더 중요한 사실은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의 실패까지도 우리의 미래를 위해 멋지게 활용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과거의 경험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세요. 우리는 믿는 만큼 행복할 수 있고 믿음 대로 평안할 수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도 시험에 빠질 수 있고, 진심을 다해 충성하고 헌신 봉사하는 사람도 시험에 들 수 있지만, 그런 중에도 늘 ‘나는 하나님을 믿으니까.’를 확신하며 사는 사람은 절대 시험에 머물러 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곧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듯이 하나님을 믿는 저와 여러분의 인생에도 살길을 내시고 필요한 복을 내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새 일을 행하실 것이다.’
이게 우리가 하나님을 믿어야 하고 계속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어차피 바뀌지 않는 것이라면 어제까지는 실패했고 원치 않은 일이 있었다 해도 지금은요?
지금부터는 ‘나는 하나님을 믿으니까.’에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겁니다.
어제까지는 병 들고 나약했다 할지라도 지금부터는 ‘나는 하나님을 믿으니까.’에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겁니다.
우리가 ‘나는 하나님을 믿으니까.’라는 고백만 할 수 있다면 하나님도 가만 계시지만은 않습니다. 성경에서 약속하신 하나님은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를 위한 살길과 복 받을 새 일을 행해 주셨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본문에서 ‘새 일’로 번역된 히브리어 원어는 ‘하다쉬’인데 ‘새로운’이라는 뜻도 있지만 원뜻은 ‘재건하다’, ‘수선하다’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새 일을 행하신다는 말은 혹여라도 망쳐진 우리 인생을 재건하고 수선하신다는 의미라 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하나님은 그 일을 이미 해 주셨을까요? 아니면 이제부터 해 주신다는 걸까요?
요한복음 19:30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시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때 ‘이루었다’는 헬라어 원어가 ‘텔레오’인데 직역하면 ‘끝내다’, ‘완성하다’라는 뜻입니다.
뭔가 구약과 신약 사이에 연결점이 있어 보이지 않으십니까?
본문 19절과 요한복음의 말씀을 연결시켜 보세요. 구약에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새 일을 신약에 와서 예수님이 다 이루셨다는 말씀이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재건해 주시고 수선해 주시고 복되게 해 주시겠다는 그 일들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다 이루어주셨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새 일을 이미 다 이루셨으니, 누구라도 이제 받기만 하면 되겠지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받게 될까요?
마가복음 11:24절 말씀을 보면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기도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에게도 약속하신 새 일을 행해 주실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새로운 일을 행하고자 하십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오직 하나만 잘 하기를 기대하십니다. 그 하나가 바로 하나님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한 새 일을 다 이루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본문 21절에서도 보면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때 찬송하라는 말은 찬송가를 부르라는 말이 아니라, 우리 말로 의역하자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를 알아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언제 어디서든 하나님이 나를 위해 새 일을 다 이루실 것을 믿으면 됩니다.
요한복음 20:29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해답’을 주시는 게 아니라 ‘약속’을 주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해답을 보았다면 누구라도 쉽게 믿을 수 있겠지만 약속이기에 확신이 없다면 보이지 않기에 믿을 수 없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은 우리가 약속을 믿는 믿음을 가지게 되면 그로 인해 기뻐하시는 겁니다. 믿음이 곧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이 백성이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신 말씀은 하나님의 약속이 내게서도 이루어질 것을 믿으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모리아 산에서의 아브라함을 보세요. 정말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순종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던가요?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이게 무슨 말씀일까요? 그러면 지금까지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반신반의하셨다는 말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다만 ‘이제야’라는 말씀은 하나님 편에서가 아니라 아브라함 편에서의 말인 것입니다. 즉 이제야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인정해 주셨다는 게 아니라 이제야 아브라함이 어떻게 믿어야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받는 믿음이 되는 지를 깨달았다는 말인 것입니다. 즉 뫃리아 산 사건을 통해서 아브라함은 ‘아하! 하나님은 내게 이런 믿음이 있기를 원하시는구나.’ 내지는 ‘오라! 이렇게 믿으니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구나.’를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요호와 이레의 복을 받은 아브라함은 이후 믿음의 조상으로까지 믿음이 성장함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린 어찌해야겠습니까?
우리가 약속을 믿을 때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하시니 언제든 고난 중에 승리, 실패 중에 살길, 질병 중에 치유, 실망 중에 기쁨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살 것을 결단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새 일을 행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그 일들을 다 이루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믿는다면 우린 그 믿음의 끝을 보아야 하지 않겠는지요?
어떤 상황에서든 하나님을 믿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세요. 그리하여 끝내 하나님이 약속하신 새 일들이 나에게서도 이루어지는 복을 받는 축복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