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9월, 생지옥 같았던 그곳에서 돌아온 뒤 며칠 동안을 혼돈混沌 속에서 내가 나를 잊은 채, 아니 억지로 잊은 것처럼 보냈다. 그 후로도 나는 몇 개월 동안 그때를 생각하며 몸서리쳤고 절망의 늪에서 빠져 나오지 못했다. 꿈속에서 나는 취조를 받고 고문을 받다가 소스라쳐 깨어났고, 땀으로 범벅이 된 몸으로 긴긴 밤을 새우기도 했다.
그때 그들은 왜 나하고 동생을 함께 끌어갔을까?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제주도에서 같이 노동을 했었고, 같이 카페를 열었기 때문에 아마도 ‘국가보안법“으로 엮은 뒤 학생들 몇몇을 끌어들여서 ‘형제 간첩 단.’ 사건으로 엮고자 했을 것이다.
”너 간첩이지, 제주 서부두에서 밤 배타고 평양에 가서 김일성에게서 돈 받아 가지고 왔지“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녀?“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만, 그들이 나와 동생을 간첩으로 몰아버린 뒤 전북대학교 학생들 몇 몇과 제주도에서 만났던 몇 사람을 엮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가난한 두 형제, 신정일과 신 아무개가 제주도에서 간첩들에게 포섭되어 북한으로 가서 김일성을 만나 어마어마한 자금을 지원 받았다. 그들은 전북대학교를 중심으로 한 간첩활동을 하다가 일망타진되었다, 내 얼굴과 주모자들의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신문과 방송을 통해 보도되었을 지도 모른다. 이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 그런데 아무리 전북대를 중심으로 형제 간첩 단 사건으로 엮고자 해도 엮을 수가 없고, 무고로 붙잡혀 갔음이 밝혀지자 나와 동생을 풀어준 것이었다.
그들은 나를 불법으로 체포해 가면서도 체포영장도 보이지 않았고, 그들은 나에게 그곳이 어떤 곳이라고도 말하지 않았다.
“너 여기서 죽어 나가도 아무도 몰라. 너 여기서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그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이었는지 그곳을 다녀 온 뒤에야 실감할 수 있었다. 가끔씩 저수지에서 돌을 매단 채 죽은시체가 올라오기도 하고, 한 밤에 철길에서 행려병자처럼 신분증도 없이 시체로 나타날 수도 있다는 사실, 그 사실을 뒤늦게야 알고, 그들의 말이 나를 협박하기 위한 엄포만이 아니었음을 알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듯 했다.
그 때 그곳에서 돌아온 뒤 우리는 한 번도 그 일을 말하지 않았다, 상처를 들쑤셔 다시 상처를 입지 않기 위한 자구책이었다고 할까?
얼마 전에 그때의 상황을 동생에게 물었다.
“너는 어쨌니?”
“형님, 그때 제가 많이 아팠잖아요. 약을 사다가 주면서 취조와 고문이 멈추지 않아 쌩 똥을 쌌잖아요.”
그 말을 뜨는 순간, 어찌나 가슴이 먹먹하면서 눈물이 솟구치던지, 그랬구나. 지금까지 내가 몰랐던 그때 그 일, 그때 내 옆방에서 들리던 울부짖음이나 간헐적으로 들리던 그 신음 소리가 동생이 내지르던 소리였을지도 모른다.
나는 독한 인간이라서 쌩 똥도 싸지 않고 버텼는데, 동생은 아픈 가운데에서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었는데, 나는 그 옆방에서 고문을 받으면서도 그런 사실을 까마득히 몰랐다는 것이 더 소름이 끼쳤다.
인간은 어쩌면 하나같이 모두 이방인인지도 모른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 옆방에서 아파도 알지 못하고, 그가 울고 있거나 죽어 나가도 전혀 알지를 못하는 것이다.
동생이 그때 내 뒤를 따라서 그곳에 같이 끌려오리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신음소리를 꿈속에서도 동생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아니 인간이 아는 것은 무엇인가? 아무 것도 없고,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 곤경에 처해도 곁에서 도와줄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 그것뿐이다.
어쩌면 그때 그들은 나와 동생을 희생양으로 삼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아니 그랬다.
그들은 우리 집에 드나들던 그 몇몇 학생들을 집어넣은 뒤 제주도에 있는 동안 여러 차례 밀입북을 하여 지령을 받은 뒤 학생을 포섭한 간첩단 사건으로 엮으려 했던 것이다.
나중에 알려진 바지만 소설가 한수산과 시인 박정만이 중앙일보에 연재하던 <욕망의 거리> 때문에 서울의 보안사에 끌려가 나하고 비슷한 최조와 고문을 받았다.
또한 부산에서 사회과학독서모임을 하던 학생과 교사, 회사원등이 당시 불온서적을 학습했다는 이유로 영장도 없이 체포되어 모진고문과 협박을 받은 뒤 기소한 부산지역 최대 용공조작사건인 부림 사건이 만들어진 것은 그해 9월이었다.
그들은 그해 9월에 끌려가 고문을 받았고, 그 재판의 변호인이 바로 노무현 변호사였고, 그가 훗날 대통령이 되었는데, 나는 그들보다 열흘 쯤 빨리 끌려갔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하고 동생이 겪은 것과 똑 같은 부림 사건과 같은 일들이 나라 곳곳에서 얼마나 많이 진행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나야 말로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 대학을 다닌 것도 아니고, 민주화 운동을 한 것도 아닌 내가 그런 일을 겪었을 것을 어느 누가 알기나 하겠는가? 그러나 나는 그 때 그 일을 어느 누구에게도 말할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나와 동생은 그들에게 기소도 되지 않아 재판도 받지 않았다. 그래서 세상의 그 어떤 사람들도 알지 못한 채 묻혀버린 사건이라서 변호인도 필요치 않았고, 그래서 언론에도 보도되지 않은 사건이었다.
(...)
그때 나 역시, 물고문으로 죽을 수도 있었는데, 아직도 내가 이 지상에서 해야 할 일이 있어서 그랬는지 천우신조로 풀려나 이렇게 후일담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때 자술서를 다 쓰고 나올 때 “죽는 날까지 이곳에 왔었다는 사실을 알려선 안 된다.”는 서약서 까지 쓰고 나왔었다. 그런데 그때가 1981년 8월 그 엄혹했던 전두환 정권 초기에 누구에게 그 사실을 알릴 것인가?
그 뒤, 1980년 대 중반 학생운동이 정점으로 치달아 갈 때, 수많은 학생들이 며칠씩 경찰서에서 집시법위반으로 구류를 살고 나오기도 하고, 감옥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들이 그곳에서 보낸 나날을 나라를 구한 것처럼, 또는 큰 싸움터에서 큰 전공이나 세운 것처럼 무용담을 이야기 할 때에도 나는 가만히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기 때문에 그저 잊고자 했던 모질어서 슬픈 세월이었다. 이렇게 살아 있는 것만도 용한 긴 세월이었다. 그렇게 험난한 세월을 보냈는데도 나는 그때 그 엄청난 일을 잊고 살았다. 아니 잊으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잊었을 것이다.(...)
그때 내가 운영하는 카페 <당신들의 천국>을 자주 들렀던 시인 이광웅(오송회 사건) 선생에게, 아니면 다른 사람, 시인캠프나 문학기행을 통해서 만났던 김남주 시인이나. 김준태 시인, 김용택 시인이나 도종환 시인, 아니 그렇게 오래 여러 곳을 다니고 편지를 주고받았던 김지하 시인에게도 그때 그 일을 이야기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
그 때 내 나이는 그 엄청난 충격을 감당하기에는 너무 젊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 겪은 그 상황을 가슴 깊숙한 곳에 숨겨놓고, 아니 묻어놓은 채 살았다.
그 외에 다른 이유는 없었을까?
“그대가 입 밖에 내는 말이 침묵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아니거든 말을 하지 말라”고 말한 수피교 사람들의 말을 너무 신뢰했었고, ‘보고 듣고 침묵하라. 그러지 아니하면 삶의 쓴 맛을 보게 되리라.“ 스페인의 속담이 옳다고 여겼던 것은 아닐까?
그 때 그 일은 내 일생일대의 가장 큰 사건이자 충격이었다.
연약한 머리를 망치나 도끼로 두드려 맞은 것 같은, 아니 큰 산이 나를 향해 우르르 덮어버린 듯한 그러한 충격이었다. 그래서 너무 영혼 깊숙이 침투하여 어느 순간 숨어버렸고, 그래서 기억의 공간에서 까마득하게 사라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나는 그때 운동권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국가 기관에서 보았을 때는 불온 불순분자였고 좋은 먹이감이었다. 이도 저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 어떤 쪽으로부터도 지원은커녕 인정도 못 받았던 (...)
그러다가 문득 숙명처럼 그 때 그 시절이 떠올랐고, 1985년의 습작노트에서 그곳을 다녀 온 뒤 쓴 몇 편의 시를 찾아냈다.
아득한 기억 속의 꿈처럼 느껴졌던 그 일, 금세 나타났다가 사라져버린 신기루가 아닌가 여겨졌던 그 일, 그곳에서 보낸 몸서리치도록, 뼈에 사무치도록 고통과 절망으로 몸부림쳤던 그 시절이 오랜 나날 동안 시도 때도 없이 내 영혼 속을 비집고 들어와 나를 괴롭혔다.
제주도에서 곰방 일을 할 때 밤이면 밤마다 벽돌과 모래를 져 올리는 꿈만 2년 반에 걸쳐 꾸었고 돌아와서도 오랫동안 벽돌을 져 올리는 꿈을 꾸었다. 그 때 그 일을 겪고 나서도 그랬다. 수많은 나날, 수많은 밤, 나는 시도 때도 없이 그곳으로 끌려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고문 받는 꿈을 꾸었다. 그런 꿈을 꾸고 난 날 아침이면 온 몸이 파김치처럼 축 늘어져 병자처럼 시름시름 아팠던 세월이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되었던가.
그러다가 한 달 두 달 띄엄띄엄 꾸다가 일 년에 몇 번 그렇게 간첩혐의로 끌려가는 꿈을 꾸었다.
나는 그때 그 사건을 통해 깨달았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외국인은 서로 간에 인간이 아니다.”라는 플리니우스의 말이 그때 그 시절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이 시간에도 이렇게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기부라는 조직 속에 몸담고 있는 사람 역시, 외국인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은 것이다.(...)
모골毛骨이 송연하고 몸서리치는 그 사건을 겪고 나서, 집으로 돌아가니 집안사람들이 경찰청이나 기무사를 비록해서 갈만한 곳은 다 찾았다고 했다. 하지만 도저히 행방을 알 수가 없었다고 한다.
친척들이 지상에서 나를 찾고 있는 동안 나는 안기부 지하실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취조와 고문을 받고 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이나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