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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독립운동사 원문보기 글쓴이: 신동현
망우리공원 관리사무소 인근 순환로를 기점으로 좌측 방향으로 가면 동락천 약수터가 나오고 다시 5분 정도더 걸으면 오른쪽에 만해 한용운의 묘가 보인다. 독립지사이며 시인으로 유명한 만해의 이름을 모르는 이는 없을 터. 하지만 그의 삶을 온전히 아는 이는 드물다. 그 때문일까. 만해의 묘소를 찾는 많은 이는 묘소의 비석을 보고 깜짝 놀란다. 승려인 만해의 묘 옆에 부인이 묻혀 있기 때문이다.
만해의 묘비에는 ‘만해한용운선생묘 부인유씨재우(夫人兪氏在右)’라고 씌어 있다. 여기서 ‘부인유씨재우’는 ‘유씨 부인이 만해의 오른쪽에 묻혀 있다’는 의미인데 혹자는 만해의 부인을 ‘유재우(兪在右)’라고 잘못 읽는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박장대소할 일이지만 그런 사람이 실제 적지 않다. 여기서 ‘오른쪽’은 바라보는 자의 위치에서가 아니라 고인이 묻힌 자리를 중심으로 해석해야 한다.
승려의 결혼을 許하라
2006년 5월7일자 오마이 TV 인터뷰 기사에서 ‘태백산맥’의 작가 조정래는 ‘자신의 부친이 대처승이 된 것은 일본이 종교마저 황국화하기 위해 승려들을 대처승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여기에는 이설이 적지 않다. 이와 관련, 만해는 조선총독에게 “대처승을 허(許)해달라”고 ‘건백서’를 보낸 바 있다. “조선 불교의 부흥을 위해, 승려가 거지 행각을 하면서 돌아다니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고, 보통 사람처럼 결혼도 하고 가정도 가져 안정된 바탕에서 승려생활을 해야 불교가 발전할 수 있다”는 소신에서였다.
그는 ‘조선불교유신론’(1913)에서, “육체를 타고나서 식욕이나 색욕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헛소리일 뿐이다. 억제할수록 더욱 심해질 뿐이고 오직 어지러운 상태에 이르지만 않으면 군자다. 그 욕망을 억지로 억누른다면 은근한 음행을 범하게 돼 풍속을 어지럽힐 가능성이 높다. 불교를 아내 삼아 평생 독신으로 살 영웅이 있다면 그를 존경하지만, 평범한 이의 수준에 맞추자면 관세음보살이 미인으로 몸을 나타내 음탕한 사나이를 제도했다는 고사대로 하나의 방편으로 수행자에게 결혼을 허해야 한다”고 했다.
이런 만해의 언사를 기초로 “당시 만해를 따르던 청년 조종현(조정래의 부친)은 만해의 뜻에 감화돼 스스로 대처승이 되었다”(‘만해 한용운’, 임중빈. 범우사, 2000)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한발 더 나아가 만해는 총독부에 승려의 대처(帶妻)를 청원한 자신의 행위를 친일이라고 비난한 불교계 인사들의 주장에 대해 현실적 논리를 들어 조목조목 반박했다.
“이것은 당면 문제보다도 30년 이후를 예견한 주장이다. 앞으로 인류는 발전하고 세계는 변천하여 많은 종교가 혁신될 텐데 우리 불교가 구태의연하고 그 서열에 뒤질 것이다. 그리고 지금처럼 금제를 할수록 승려의 파계와 범죄는 속출하여 도리어 기강이 문란해질 것이 아닌가. 후세 사람들은 나의 말을 옳다고 할 것이라 믿는다. 그런데 한 나라로서 제대로 행세를 하려면 적어도 인구는 1억쯤은 되어야 한다. 인구가 많을수록 먹고사는 방도가 생기는 법이다. 우리 인구가 일본보다 적은 것도 수모의 하나이니 우리 민족은 장래에는 1억의 인구를 가져야 한다.”(‘한용운 평전’, 고은, 향연, 2004)
만해는 또 불교의 진흥을 위해선 “절이 산에서 내려와야 한다”고 했는데, 결국 절이 산에서 내려오지 않고 대처도 하지 않아서일까, 지금의 불교는 기독교에 비해 위세를 떨치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최근 일본이 인구를 1억명 수준으로 유지하기 위해 1000만명의 이민을 받아들일 계획이라는 뉴스를 접하고 보니, 만해의 탁견과 예언이 새삼스럽기 그지없다.
만해에 대한 또 다른 시각
시인 고은은 ‘한용운 평전’에서 만해에 대한 일방적 신격화를 저어하며 이렇게 밝히고 있다.
“우리는 근대 민족사 또는 근대 문화사에 관련된 인간론이 늘 변절과 고절의 극단으로 분류해서 민족의 편에 서 있는 자를 신격화하고 그렇지 못한 자를 폄훼하는 경향이 농후한 사회에서 살아왔다. 이런 사회에서는 한 사람을 진정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310쪽)
‘한용운 평전’은 여러 대목에서 만해에 대한 무조건적 추앙을 비판하고 그에 대해 알려지지 않은 면면을 드러낸다. 연설에 뛰어나고 지조가 강하며 지도자적 능력을 갖추었음은 인정한 반면, 수시로 파계를 한 승려답지 않은 행동, 첫 번째 처와 아들에 대한 무정함, 문학적으로 자기보다 앞선 최남선에 대한 시기심, 그를 숭모해 찾아온 청년들에 대한 냉정한 대응 등에 대해서는 일체의 수식 없이 그대로 전하고 있다. 이런 내용에 대해 많은 이가 반론을 제기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평생 대처하지 않고 수행에 정진해온 승려들의 입장에선 만해가 아무리 위인이라 한들 높은 점수를 주기 어려웠을 터이다. 고은은 이 책에서 “위인의 무조건적인 신격화 또한 우리의 눈을 가리는 행위”라고 일갈한다.
만해의 묘비(뒷면 약전(略傳))를 통해 본 그의 일생은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다.
“4212년(1879) 8월 29일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한응준의 차남으로 출생. 본관은 청주. 모는 온양 방씨. 4220년(1887) 향숙에서 경사를 수학. 4244년(1911) 만주에 망명 독립운동. 4246년(1913) 조선불교유신론을 발행. 4247년(1914) 불교대전을 발행. 4250년(1917) 정선강의채근담을 발행. 4250년(1917) 12월 오세암에서 선정중 오도(悟道). 4251년(1918) 월간교양잡지 유심을 창간. 4252년(1919) 3·1 운동을 선도하고 행동강령으로 공약 3장을 공표. 옥중에서 독립의 소신을 장문으로 발표 3년형을 받음. 4256년(1923) 민립대학설립운동을 지원. 4257년(1924) 조선불교청년회를 조직하고 총재에 취임. 4259년(1926) 십현담주해 및 님의침묵을 발행. 4260년(1927) 신간회 중앙집행위원 및 경성지회장에 피선. 4262년(1929) 광주학생의거시 민중대회를 발기. 4264년(1931) 불교지를 인수 편집발행인 취임. 4266년(1933) 성북동에 심우장을 건축하고 흑풍 등의 소설과 다수의 문장을 발표. 4276년(1943) 조선인학병지원을 반대. 4277년(1944) 6월 29일 심우장에서 입적 세수 66 법랍 39. 4295년(1962)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수여. 만해사상연구회 識 안동 김응현 書”
여기서 세수(世壽)는 세속의 나이, 법랍(法臘)은 중이 된 후로부터의 나이를 말한다. 대한민국장은 건국훈장 중에서 가장 훈격이 높다. 참고로 대한민국장 수여자는 총 30명(그중 5명은 중국인)이고 다음으로 대통령장 93명(중국인 10명, 영국인 베델 1명), 독립장 788명, 애국장 3258명, 애족장 3868명, 건국포장 557명의 순이다(민족정기선양센터. 2008년 6월 19일 현재). 도산 안창호가 1973년 도산공원으로 이장되면서 망우리공원에 묻힌 인사 중 현재 대한민국장 수여자는 만해가 유일하다. 묘비에 쓰인 글자 중 ‘識’은 ‘식’이 아니라 표지(標識)처럼 ‘지’로 읽어야 한다. 만해사상연구회가 글을 짓고 현대 서예의 대가 김응현(1927~2007)이 묘비문을 썼다.
혼자 살던 만해는 55세 때 신도의 소개로 간호부인 노처녀 유씨와 결혼하고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 등 지인들의 도움을 얻어 심우장을 지어 살았는데, 심우장은 총독부가 보이지 않도록 북향으로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심우장의 편액은 위창 오세창이 쓴 것이다. 심우장에서 ‘심우(尋牛)’는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한 선종(禪宗)의 열 가지 수행 단계 중 하나, 즉 ‘자기의 본성인 소를 찾는다’는 심우(尋牛)에서 유래했다.
만해는 기미 독립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끝내 지조를 지킨 오세창 등과는 죽을 때까지 교유했으나, 변절한 최린, 최남선 등과는 아예 관계를 끊고 살았다. 1944년 지병인 신경통으로 와병하다 조선의 독립을 1년 앞두고 유명을 달리했다. 시신은 일본인이 주인인 서울 홍제동 화장터를 피해 멀리 떨어진, 한국인이 경영하는, 미아리의 작은 화장터를 굳이 찾은 후 불교식으로 화장했고, 타지 않고 남은 치아는 항아리에 담아 망우리묘지에 안장했다. 현재 묘지 관리자는 부인 유씨와의 사이에 낳은 딸 한영숙씨로 되어 있다.
“님은 갔지만은 우리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님의 침묵’ 중에서)
만해의 묘를 지나 관리사무소 방향으로 조금만 내려가면 길 오른쪽 바로 아래에 글이 많이 새겨진 희끄무레한 비석이 하나 보인다. 비석의 크기도 평균 이상이다. 비석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기미년독립선언 민족대표 삼십삼인중 고 박희도 선생지묘”(앞면)
“고(故)선생은 단기 4222년(1889) 6월 11일에 해주에서 출생하여 그 후 기미독립선언 민족대표 삼십삼인 중의 한 사람으로 항일투쟁을 하다 투옥되었으며 출감 후에도 계속해서 민족의 신생활운동교육사업에 이바지하던 중 단기 4284년(1951) 9월 26일에 서거하다. 단기 4291년(1958) 7월 8일 건립 육군정훈학교 장병 일동”(뒷면)
박희도와 육군정훈학교
바로 위에 있는 묘가 부모님의 묘인데 비석 뒤에 차남으로 박희도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이지만 그 이름이 생소하다. 비문 내용 그대로라면 대표적 독립지사로 관리사무소의 안내도에도 이름이 올라 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박희도는 일제 말기의 행위로 친일파로 낙인찍힌 사람이다. 3·1운동 때는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 간사로 다른 기독교 대표들과 함께 독립선언서에 서명해 2년간 복역했고, 출옥 후에도 ‘신생활사’를 설립, ‘신앙생활’을 발간하며 독립운동과 신앙운동에 힘쓰다 다시 2년간 복역하는 등 나라를 위해 헌신했으나, 두 번째 출옥 이후로는 점차 자치론으로 경도되고 마침내 1939년 1월 ‘동양지광(東洋之光)’을 창간해 적극적으로 친일행위에 나섰다. 이러한 친일 행적 때문에, 박희도의 묘는 산책로를 사이에 두고 만해의 묘와 지근거리에 있지만, 세인이 바라보는 시선의 거리는 대극적이다. 아니, 그는 아예 우리 시야에 들어오지도 않고 오랫동안 잊힌 존재가 되고 있다.
박희도가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조사를 받고 풀려난 후, 1951년 사망 때까지의 행적은 어느 자료에도 보이지 않는다. 이 공백을 메우는 단서가 바로 고인의 비석에 나타난 육군정훈학교에 있을 것으로 생각해 이 학교의 후신인 육군종합학교에 문의한바, 비석이 세워진 1958년 당시의 이 학교 교장은 윤태호 준장인 것으로 추정되며 학교는 용산구 한남동에 있었다는 사실만 확인되고 그 이상은 알 수 없었다.
변절자에 대한 차가운 시선
그러다 얼마 전 ‘신동아’ 2월호에 ‘도산 안창호와 태허 유상규’ 편을 쓰면서 만난, 유상규의 장남 유옹섭씨(준장 예편)의 도움으로 박희도가 사망 전까지 육군정훈학교에서 강의를 했다는 증언을 얻을 수 있었다. 친일의 불명예 때문에 그 누구도 고인에 대해 비석 하나 제대로 세워주지 않았지만 육군정훈학교는 그의 사후 7년 만에 한국 기독교계의 큰 인물이었으며 민족대표 33인의 한 분이었고 말년에는 묵묵히 백의종군하며 교육자로 생을 마친 그를 추념하며 비석을 세워준 것이다.
1934년에는 박희도를 중앙보육학교장에서 물러나게 한 사건이 있었다. 1934년 3월 17일 조선중앙일보는 “교육계의 대불상사, 제자들을 유인하야 정조유린을 감행”이라는 제목으로 박희도의 ‘정조유린’ 사건을 크게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중앙보육학교장 박희도는 제자이자 친구의 부인 윤신실을 자기 집에 하숙시키던 중 ‘정조를 유린’했는데 후에 그 사실을 알게 된 남편이 언론에 이를 폭로했다 한다. 연이어 3월 19일자에는 각계인사의 의견까지 싣고, 3월 29일에는 전면에 선정적인 기사를 가득 채웠다. 그러나 이 사건은 나중에 피해자가 진술을 번복해 진실은 오리무중에 빠져 알 수 없게 됐고, 결국 재판까지는 가지도 않고 흐지부지 신문 지상에서 사라졌다. 마치 영화 ‘라쇼몽’처럼 박희도, 윤신실, 남편의 말이 다 달랐다. 그러나 어쨌거나 물의를 일으킨 박희도는 중앙보육학교장을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중앙일보는 동아, 조선과 함께 3대 민간지로 당시 사장은 여운형이었다. 기미독립선언 33인의 한 사람으로 민족의 지도자 격인 박희도에 관한 추문을 일방 당사자의 말을 그대로 연일 대서특필한 것은 현재의 언론적 시각으론 이해하기 힘들다. 따라서 이 기사는 언론의 책임이나 선정성 여부를 떠나 저명인사 박희도에 대한 당시의 여론이 어떠했는지를 잘 말해준다.
기미독립선언 각계 민족대표 서명 당시, 최남선 등은 뒤에서 도와주겠지만 이름 올리기를 꺼렸던 것과 달리, 박희도는 31세의 젊은 나이로 기독교 대표의 한 사람으로 기미독립선언 민족대표 서명에 기꺼이 참여했고 이후로도 조선의 독립을 위해 꾸준히 일했지만, 1926년 자치단체 ‘연정회’ 부활에 참여하면서부터 자치론에 경도되기 시작해 신간회의 해체(1931) 무렵에는 자치론자 최린 등과 뜻을 같이하게 된다. 박희도의 친일행적은 1939년 ‘동양지광’ 창간 후부터 뚜렷하게 그 흔적이 나타나지만, ‘정조유린’ 사건이 발생한 1934년 당시 이미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친일파(자치론자)였기에, 보도에 있어 과거 민족대표였다는 명예는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조선중앙일보의 보도 태도는 오히려 ‘잘 걸렸다’는 투다.
또 같은 해 9월 20일에는 박희도와 같이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천도교 신파 지도자 최린(1878~납북, 1958?)이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화가 나혜석(1896~1946)으로부터 정조유린에 대한 위자료청구소송을 당한 기사가 동아일보와 조선중앙일보에 실렸다. 소송의 내용은 “정치 시찰차 파리를 방문한 최린이 당시 파리에 있던 나혜석과 정분이 나 수십 회에 걸쳐 ‘정조유린’을 하면서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를 보살펴주겠다는 약속을 했으나 정작 그녀가 남편과 이혼하자 모른 척했으므로 이에 1만 2천원의 위자료를 보상하라”는 것.
이 사건은 나혜석이 스스로 진실을 밝히고 있어 둘의 관계는 명백했지만, 나혜석에게는 친일파 인물에 대한 공격이라는 주변의 응원(예를 들면 최린과 대립적인 천도교 구파 등)도 심리적 우군으로 작용했을 공산이 크다. 동아일보 등의 언론에서도 사건의 당사자 최린의 인격은 존중되지 않았고, 오히려 총독부가 나서서 기사 삭제를 강제했다. 이 사건으로 8월 31일 최린이 박희도 등과 함께 결성한 친일단체 시중회(時中會)는 큰 타격을 입었다.
한편 천도교 계열인 개벽사의 잡지 ‘제일선’ 1932년 7월호에는 ‘대경실색, 가장행렬화보’라는 제목으로 저명인사 7명의 합성사진과 촌평이 실렸는데 한용운과 박희도는 (5)번과 (6)번으로 나란히 실렸다. 두 사람을 바라보는 세인의 엇갈린 시선을 극명하게 엿볼 수 있다.
‘(5) 誘之不動(유지부동) 한용운씨 : 사진을 자세히 보십시오. 女: 키-스를 해주어요. 한: 웨! 점잔치 못하게 이러시오. 女: 점잔이 다 무어 말너비트러진거야! 엉 어서 키-스 해주어… 응. 이와가티 섹씨가 조르나 한용운씨는 그래도 끔적아니하고잇습니다. 이 사진이 ‘카메라’놈의 작난이 아니고 사실 이러한 경우를 우리 한씨가 당한다면?
(6) 곱사춤의 명인 박희도씨 : 박희도씨가 곱사춤으로 당대의 명인이(아니)라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바입니다. 이것을 분개한 박씨는 이삼일전에 불국 파리를 건너가 그곳에 유명한 땐서와 이와가티 곱사춤을 추는 광경을 텔레비존으로 본사에 피송하야 독자제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햇습니다. ‘카메라’놈도 행셋머리가 고약해!’
촌평에서 ‘제일선’은 한용운을 여인(일본)의 유혹에도 꿈쩍하지 않는 지조의 인물로, 박희도는 여인의 어깨에 팔을 얹은 곱사춤의 명인으로 비유했다.
이렇듯 민족대표 33인 중에 자치론으로 기운 박희도와 최린 등에 대한 민족의 시선은 따가웠다. 자치론은 적극적 독립운동을 약화시키고, 일제의 정책에 놀아난 것으로 간주됐으며, 따라서 그들의 이름 앞에는 ‘변절자’ ‘친일파’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그들은 적대의 대상이 됐다. 그러나 ‘자치론=비겁한 민족주의’라는 논리는 너무나 단정적인 견해다. 만약 이 논리만이 바르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과거 진보세력을 무조건 친북좌파라고 매도했던 독단적 흑백논리와 다를 바 없다. 또,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전쟁에 광분한 일제의 총칼 밑에서 많은 인사가 저지른 적극적 친일 행위가 당사자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치욕이요 아픔이라는 점에서 바라보면 더욱 그러하다.
“변절은 했을망정 조선의 양심”
‘죽은 자들은/ 산 자들의 짐이다/ 살아서 흘린 피/ 살아서 남긴 욕/ 살아서 피운 꽃/ 모두 짐이다’(남태식 ‘짐’).
시인 남태식의 시처럼, 독립군이 흘린 피와 한용운이 피운 꽃뿐만 아니라 박희도가 남긴 욕(辱) 또한 우리가 짊어지고 가야 할 짐일 뿐이다. 친일파 연구로 평생을 바친 임종국(1929~1989) 선생은 책 ‘실록 친일파’(돌베개, 1996) 중 ‘일제 말 친일군상의 실태’ 대목에서 “…친일행위를 인신공격의 자료로 삼으려는 경향도 있었다. 그러나 이 점에서 반민법(반민족행위처벌법)은 분명히 시효가 지났다. 또한 이런 자에게 묻노니, 그대는 저 여인을 돌로 칠 수 있다고 자신하겠는가? 전비(前非)로써 현재의 지위를 위협당할 사람도 없겠거니와, 이로써 위협을 하려는 자 있다면, 그 비열함이야말로 침을 뱉어 마땅한 일일 것이다”라고 했다. 그는 또 같은 책 ‘민족대표 33인 중의 훼절’ 대목에서 이렇게 밝혔다.
“민족대표 33인 중 10%의 변절이 한국인에게 수치만 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한 민족의 한 시대의 비극이 그들의 추문이 될 수도 없는 것이다. 친일자의 전부에 해당할 말은 아니지만, 적어도 민족대표 중의 4명(필자 주: 박희도, 최린, 정춘수, 최남선. 최남선은 33인에 속하지 않으나 3·1독립선언서를 기초)만큼은 한 시대의 민족의 비극을 고뇌하면서 살다간, 변절을 했을망정 그래도 조선의 양
심이었다. 이들 4명의 죄상보다는 식민정략의 정체에 대한 인식이 앞서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지금도 우리 사회에서는 친일파 문제가 여전히 논란에 휩싸여 있지만, 이미 오래전에 ‘종교의 마음’(육군정훈학교)은 고인(故人) 박희도에게 생전의 공(功)을 비석에 새겨 주고 부모 밑에 고이 잠들게 했다. 성경의 한 구절을 옮기며 글을 맺는다.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의 천부께서도 너의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 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 하시리라.”(마태복음 6장 14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