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 사이판 전투(Battle of Saipan, 1944년 6월 11일∼7월 9일)
미드웨이 해전 이래 과달카날, 알류산 열도, 애투, 타라와, 마킨 섬에 이르기까지 졸전만 줄창 거듭하며 줄줄이 패전한 일본군은 1943년 9월 인도네시아 - 뉴기니 - 필리핀 - 마리아나 제도를 잇는 이른바 “절대국방권”을 설정한다. 일종의 최후 방어선으로, 이 선에서 기필코 연합군의 공세를 막아내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1944년에 들어서자 절대국방권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그 방어선의 최전선이었던 마셜 제도가 뚫려버리고 길버트 제도와 솔로몬 제도 전체가 넘어가 버렸다
계속되는 승리와 막대한 물량으로 자신감을 되찾은 미국은 일본 본토와 가까우며, 새로이 개발된 미 육군 항공대의 초장거리 폭격기 B-29
의 기착지로도 매력적인 북마리아나 제도의 사이판 섬에 대한 공략을 준비한다. 일본군은 부랴부랴 사이판의 방어 준비를 서둘러 사이판 남부에 비행장을 건설하고 타포차우산 일대에 레이더 기지까지 설치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사이판 섬 방어시설을 확실하게 보장합니다.
도조 히데키, 사이판 방어시설 강화를 계속 요구하는 해군의 구사카 류노스케 중장에 보내는 서신에서
육군은 미군이 상륙하기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위의 편지를 전달한 육군 대좌
그러나 개전 초기의 어뢰 문제를 해결한 미 해군의 잠수함이 들끓는 바람에 사이판으로 향하던 일본 육군과 해군의 수송선이 대거 격침되면서 수많은 물자와 장비와 병력이 바닷속으로 사라져버렸으며, 살아남은 수송선조차도 사이판에 접근을 못 하고 가까운 대만이나 오키나와로 발길을 돌렸기 때문에 사이판에는 애초의 계획과는 거리가 먼 3만 여명의 병력만이 집결할 수 있었고, 격침된 수송선에서 구조된 병력은 장비를 대부분 상실해 맨몸에 가까운 상태라 전력이라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또한 사이판을 공격하기 전, 미 해군 함대가 주변의 일본 육해군 비행장을 초토화시켜놓아서 항공력까지 전무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중국 전선에서 국민당 육군의 예상치 못한 선전으로 인하여 마리아나 제도로 전용하려던 관동군 병력들의 발이 묶여 버린 것도 일본으로선 치명타였다. 원래 일본 대본영은 1943년 말에 중국 중부 방면군에서 육군 제3사단과 제13사단을 마리아나 제도로 보내기로 결정했으나, 동정호 서안의 도시인 상덕에서 벌어진 전투가 계획된 기간 이상으로 질질 끌다가 끝나자, 아예 대륙타통작전을 새로 수립하면서 해당 사단의 마리아나 제도 파견을 취소했다. 그 바람에 괌과 사이판에 각각 2개 사단을 배치시켜 방어하려던 원래의 발상이 1개 사단으로 축소되면서 심각한 전투력 저하가 발생한 것이다.
병력들을 모두 사이판에만 집중시킬 수도 없었다. 괌이나 티니안도 덤으로 방어해야 했던 데다, 당시 대본영에서는 미군이 마리아나보다는 팔라우 쪽으로 먼저 치고 와서 필리핀을 수복할 교두보로 삼을 거라고 생각했던 의견들도 만만치 않았고, 최소한 미군이 그 둘 중에서 간보는 시간이라도 필요할 거라는 생각에 사이판에 그렇게 일찍 오리라고는 예상도 못 하고 있었다. 게다가 ‘팔라우-필리핀’ 루트를 경시했다가는 본토와 자원 생산지의 연결이 확 끊기는 사단이 생길지도 모르니 저쪽을 경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마셜 제도 전투에서 보았듯 미군의 정보력은 생각보다 대단했고, 약한 고리가 있다면 그 곳을 먼저 옥쇄지로 만들어 놓았을 테니 말이다.
이렇게 된 원인으로는 사이판 전투 3개월 전에 일어난 해군 을 사건 때문이었다. 해군 을 사건이란, 3월 30일 팔라우에 미 해군이 대공습을 감행해 큰 피해를 입자 연합함대 사령장관 코가 미네이치와 참모장 후쿠도메 시게루 등 주요 연합함대 지휘관들이 후퇴하려고 수송기를 타고 민다나오 다바오 기지로 이동하던 중 폭풍에 휩쓸려 추락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코가 미네이치 등 주요 간부는 대부분 추락사, 후쿠도메 시게루는 세부 섬에 추락해 간신히 살아남았는데, 이 수송기에는 지휘관들 뿐 아니라 앞으로 코가 사령장관이 주도하는 일명 新Z작전 서류가 같이 있었다. 문제는 대부분의 지휘관은 이때 쓸려갔지만 저 新Z작전 서류가방은 세부 섬 인근에 둥둥 떠 있었던 것. 후쿠도메는 필리핀 게릴라에 포로로 잡혀서 어찌어찌 포로교환 후 본국으로 돌아가지만, 저 잃어버린 新Z작전 서류가방은 현지 주민→게릴라를 거쳐 미 육군에 인계되어 그대로 작전의 전모가 드러났지만, 정작 연합함대는 포로가 된 후쿠도메의 처분가지고 옥신각신하다가 작전개요가 미군에게 싹 털린 걸 전혀 몰랐다. 그 덕에 연합함대가 뭘 어떻게 할지 뻔히 보이는 미 해군은 우선 목표를 사이판으로 정했고, 일본 해군이 제대로 함대결전 목표점을 정하기도 전에 사이판에 진을 치고 사이판에 뒤늦게 함대결전을 하겠다고 온 연합함대를 미리 준비하고 맞아들이게 된다.
지휘관 인선 또한 최악이었는데, 수비대의 핵심인 43사단장 사이토 요시츠구 중장은 기병 병과 출신으로, 기병 부대에서 오래 복무하긴 했지만, 그다지 두각을 나타내진 못하고 관동군에서 보충마창장, 군마보충부장, 즉 군마를 관리하고 조달하는 업무를 맡다가 사이판에 발령난 사람이었다. 물론 보급부대에 근무했다고 무능한 건 아니긴 하지만, 오직 일선 전투 부대와 도쿄의 참모본부만을 중요시 여기는 일본군에서 야전을 오래 떠나 있던 보급부대 담당 장교한테 총지휘관을 맡겼다는 것은 총체적 난국이었다.
그나마 해당 지역을 관할하는 중부태평양사령관에 나구모 주이치 중장이 자리하고 있었으나, 나구모 역시 미드웨이 해전 참패 이후 한직들만 전전하다 부임한 상황이었다.
일본군의 예상보다 훨씬 이른 1944년 6월 미군이 사이판을 공격한다. 6월 11일에 먼저 도착한 항모기동부대 소속 함재기들이 대대적인 공격을 가하면서 사이판을 비롯한 마리아나 제도 상공의 제공권을 장악했고, 13일에는 미군의 함포사격인 남부 해안 일대를 강타했다. 6월 15일 미 해병대 2사단과 4사단 7만명이 본격적인 상륙작전을 개시하였다. 그에 맞서는 일본군은 절반이 채 안 되는 3만 1천명이었다. 일본군 사령관 사이토 장군은 해안방어전술로 미군을 상대하기로 결정하였으나 미 해군은 이에 대비해 15일과 16일 이틀간 전함 15척, 순양함 11척을 동원해 16만 5천발의 포탄을 쏴대면서 일본의 해안 방어를 무력화시키고 전투기 전력과 수송선단을 싹 다 날려버린다.
그래도 해안에 죽치고 있던 일본군은 원래 작전인 해안방어전술을 사용하기 위해 미리 해상에 표적 깃발을 부표로 달아놓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으므로 함포사격에서 살아남은 일본군 생존자들은 다가오는 미군에게 맹렬히 저항했고, 상륙이 완료되고 교두보가 확보될 때까지 미군은 1,000여 명의 사상자와 장갑차 20대의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일본군의 저항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한계에 이르러 결국 47여단과 전차 9연대 4중대가 전멸하고 만다. 밤엔 역시 어김없는 일본군의 야습이 있었지만 미군의 화력에 말 그대로 소멸된다. 상륙 첫날 미군은 폭 1km의 교두보를 형성해 내륙 10km 지점까지 진출하는 전과를 올렸다.
한편 사이판을 구원하고 미 해군 기동함대를 격멸하기 위해 달려온 일본 해군 연합함대는 필리핀 해 해전에서 역공세를 당하고, 사이판은 일본 대본영에게 버려진 채 완전히 고립되어 버린다. 사령관 사이토는 잔여병력을 타포 차우 산악지대로 후퇴시키고 동굴을 활용해 미군의 진격을 저지했다. 일본군은 섬 안의 전차들을 모조리 긁어모아 미군이 상륙한 둘째 날(6월 16일) 밤, 야습을 건다. 37대의 전차로 이루어진 일본군 기갑부대는 어둠을 틈타 돌격을 감행했는데, 이는 태평양 전선에서 벌어진 전차전 중 가장 큰 규모의 전투였다고 한다. 언덕 밑에 자리를 잡았던 미군은 갑작스러운 기습에 처음에는 당황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이 보유했던 하고 전차에 달린 저조한 성능의 37mm 주포와 일본군의 두루뭉술한 계획, 야습의 이점인 어둠이 미군의 조명탄으로 인해
무용지물이 된 점으로 인해 미군 장병들은 일부 전차가 방어선을 돌파하여도 침착하게 대열을 추스른 뒤 일본군 전차들을 차례차례 격파한다. 근거리에서의 싸움이 계속되는 등, 꽤나 혼란스러운 전투였지만 미군은 가벼운 손실만 입고 전투에서 이기게 된다. 이날 밤 전투에서만 일본군이 손실한 전차는 사이판 방어군 기갑 전력의 3/4 정도라고 한다.
이때까지도 일본군은 연합함대가 자신들을 구하러 오는 줄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연합함대를 격퇴시키기 위해서 떠난 미 기동부대를 연합함대를 피해 도주하는 것으로 오인하고 기뻐하였지만 사흘 후 바다를 메운 함대는 미 해군이었다.
승기를 잡은 미군은 대공세를 감행했고 일본군은 속수무책으로 소탕 당했다. 게다가 6월 24일에는 일본 대본영에서 사이판 포기 결정을 내려버렸다. 제공권과 제해권은 미군에게 완전히 넘어왔고, 7월 3일 사이판 최대의 도시였던 가라판은 미군의 손에 떨어졌다.
그나마 살아남은 일본군은 산지와 동굴에 숨어서 끝까지 항전하려 했으나, 앞서 언급된 해안방어전술 때문에 식량과 장비와 탄약을 해안선에 분산 배치한 실수를 범했으므로 이들 물자들이 개전 초기에 미군의 손 안에 떨어지자 장기적인 저항은 말할 것도 없고 당장 먹고 살 수단
도 없는 절박한 처지에 놓였다. 그리고 사이판 섬은 과달카날이나 부겐빌 같은 큰 섬이 아니므로 미군의 입장에서는 비행장 주변에 교두보를 만들고 방어하는 전략보다는 차라리 섬 전체를 토벌하는 것이 방어적인 면에서나 비용적인 면에서나 우월하기 때문에 섬을 완전 점령하기로 결정하였다.
7월 5일, 함대를 잃고 사이판에서 해군 육전대를 이끌던 해군중장 나구모 주이치 제독이 권총 자살했다. 그 뒤를 이어 사이판 방어 책임자였던 육군의 사이토 장군도 자살했고, 이날 새벽 4,000명이 넘는 모든 잔존 일본군이 태평양 전쟁 최대 규모의 반자이 어택을 감행하고 전멸함으로써 사실상 일본군의 저항은 끝장났다. 일부 육군 장병들은 더 이상 투항할 곳이 없자 그대로 절벽에서 뛰어내려 자결하였고, 이 절벽은 현재 ‘자살 절벽’이란 명칭이 붙었다. 아래 설명될 반자이 절벽과는 가까이 있는 곳이지만 다른 장소이며, 주로 일본군은 고지대인 자살 절벽에서, 민간인들은 해안가에 위치한 반자이 절벽에서 투신했다. 일본의 귀축영미(鬼畜英米) 프로파간다에 세뇌되어 미군의 잔혹함을 두려워한 많은 현지 일본인 민간인들 또한 절벽에서 투신하여 자결했다. 자신의 아이를 절벽에 먼저 던지고 뒤를 따르는 식이였다고 한다.
한편, 미군 내부에서도 심각한 문제가 일어났는데, 6월 24일 사이판 상륙 지상군 지휘관인 제5상륙군단장 홀랜드 스미스 해병 중장이 육군 제27보병사단장 랄프 스미스 육군 소장을 해임한 것이다. 위 지도에서 보듯 27사단은 일본군의 주력부대가 있는 곳을 담당했기 때문에 진격 속도가 늦었고 23일에는 일본군 주저항선에서 격전을 벌이느라 진격이 멈추었다. 그러나 7개월 전 마킨 섬 전투에서부터 27사단장 랄프 스미스 육군 소장의 지휘능력에 의심을 가지고 있던 홀랜드 스미스 해병 중장은 평소 급한 성격 때문에 앞뒤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랄프 스미스 육군 소장의 공격정신이 부족하다고 지레 짐작하여 상급 지휘관인 미 제5함대 사령관 스프루언스 제독의 승인을 얻은 뒤 그를 해임한다. 덕분에 랄프 스미스 소장의 직속상관이던 태평양 방면 육군사령관 로버트 리처드슨 중장은 폭발했고, 사이판 전투가 끝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니미츠 제독의 허락 하에 사이판으로 날아가 육군을 시찰했다. 문제가 터질 것을 예상한 스프루언스 제독은 홀랜드 스미스 해병 중장 및 리치몬드 켈리 터너 해군 중장을 불러 리처드슨 육군 중장이 뭔 말을 하더라도 화내지 말아달라고 약속할 것을 부탁했다. 스미스 중장은 자기가 한 짓이 후폭풍을 불러올 거라고 생각은 했는지 그에 동의했으나, 켈리 중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홀랜스 스미스 해병중장은 리처드슨 육군중장의 행사가 끝나기를 기다려 해병 제4사단장 해리 슈미트 소장과 함께 리처드슨 중장의 사령부를 찾아갔으나, 리처드슨은 그에게 대놓고 폭언을 퍼부었다. 이 때 스미스 중장은 ‘울부짖는 미치광이(Howling Mad)’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의 다혈질 성격답지 않게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러나 켈리 해군중장은 리처드슨 육군 중장이 지휘계통을 무시하고 함부로 행동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고, 처음엔 지휘계통을 지켜달라고 말했으나 리처드슨이 따르지 않자 ‘무시무시한 터너(Terrible Turner)’답게 폭언을 퍼부으며 맞섰다.
이 사건은 중부 태평양 지역의 전 군을 지휘 통제하는 미 제5함대(사령관 레이먼드 A. 스프루언스 해군 대장)가 편성된 이후 5함대 내에 주요 보직을 해군과 육군 중 누가 맡을 것인지를 놓고 벌어진 미묘한 신경전을 심화시켰다. 각 군 합동작전에서는 현역 해병사단과 주방위군 27보병사단의 전력차이나, 해병대와 육군의 전투교리 차이 등을 고려했어야 하고, 통합군 사령관이라는 직책은 타군과의 연계를 공고히 하고 소외감을 주어서는 안 되는, 즉 정치적인 능력도 상당히 요구되는 직위였음에도 불구하고 홀랜드 스미스 장군은 그 부분을 간과한 것이다. 그 결과 미 해군과 육군의 갈등이 폭발한다.
타라와 전투에서 해병대의 엄청난 인명손실로 홀랜드 스미스 해병 중장은 전 국민적 비난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여론은 이번 사건에 우호적이지 않았다. 즉, 해군의 지상부대인 해병대는 육군이 지휘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났다. 태평양 함대 사령관 니미츠 제독은 예하 해군부대와 육군부대의 갈등에 대해서 불필요한 감정싸움이라고 생각했고, 합참과 육군에서도 공감했기 때문에 육군은 랄프 스미스 육군 소장을 태평양에서 빼냈고, 홀랜스 스미스 해병 중장의 상급 지휘관인 미 태평양 함대 사령관 니미츠 제독, 미 해군참모총장 겸 함대총사령관 킹 제독은 육군참모차장 조셉 맥너니 중장의 제안을 받아들여 사이판 전투가 종료된 후 그 즉시 그를 아무 실권이 없는 태평양 함대 해병대Fleet Marine Force(FMF) Pacific 사령관으로 영전시키는 형식으로 일선 전투 임무에서 빼버렸다.
또한 이 사건으로 인해 홀랜드 스미스 장군은 해군과 육군에게 공공의 적으로 낙인찍히면서 태평양 함대 해병대를 대표하는 인물이면서도 항복조인식에조차 참석하지 못하였다. 자신이 요청을 했으나 니미츠 제독이 거절했다고 한다.
랄프 스미스 육군 소장은 당연히 군경력이 끝장났고, 해임 이후 하와이 수비대 대장이었던 육군 제98보병사단장과 보직을 맞바꾸어 잠시 지내다 본토에 있는 캠프 로빈슨에서 보병보충대장(훈련소장)을 지내고, 주프랑스 미국대사관의 국방무관으로 근무하다 1948년 대령으로 전역했다. 이후 105세까지 장수하다가 1998년 사망하였다.
사실 홀랜드 스미스 중장을 전폭적으로 밀어준 것은 스프루언스 제독이었으나, 육군은 그를 거의 비난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랄프 스미스 소장 해임 건으로 인해 스프루언스 제독이 그것을 불허하면 육군과의 관계는 유지할 수 있었겠지만, 그러면 북부상륙부대 사령관인 홀랜드 스미스 중장의 권위는 치명타를 입어 해병대의 사기 저하는 물론이고 지휘가 거의 불가능해지는 사태가 벌어진다. 그것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홀랜드 스미스 중장을 제외하고 태평양 방면에 대신 앉힐 수 있을 만한 해병대 장성도 없었다. 거기에 북부상륙부대는 해병대가 주축이었던 바, 홀랜드 스미스 중장 대신 육군 장성을 앉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육군도 이 사정을 알고 있어 스프루언스 제독에 대한 비난은 거의 하지 않았다.
여담으로, 신포탑 치하 한대가 이 전투 당시 긴박한 상황 속에서 미 해병대에게 노획되어 사용되었는데, 이 치하는 사이판 전투는 물론, 태평양 전쟁 종전까지 미군 소속으로 사용되었다가 현재는 미 육군 병기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6월 16일 새벽에 일본군은 여자와 아이들이 포함된 민간인들을 방패막이로 삼아서 야습을 감행했다. 민간인들이 항복하러 오는 줄 알았던 미 해병대 제4해병사단 제25연대는 그 뒤에 일본군이 숨어서 따라오는 것을 보고 포격으로 응수할 수밖에 없었고, 일본군은 격퇴 당했다.
이후에도 민간인들의 운명은 끔찍했다. 평소 일본군으로부터 미군은 악마라는 세뇌를 받아왔던 그들은 미군에게 투항하지 않고 잇따라 자살해 버린 것이다. 미군은 이들에게 계속 투항을 권고하는 한편 좋은 대우를 약속했지만 주민들은 이미 그 말이 귀에 들어올 리 만무하였기 때문에, 전투가 사실상 끝난 9일, 사이판의 북쪽 절벽에선 5천 여 명의 민간인이 미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덴노 헤이카 반자이’를 외치며 모두 바다 속으로 투신자살했다. 당시 미군이 촬영한 기록영상들도 남아있다.
현재 이 장소에는 만세절벽(Banzai Cliff)라는 명칭이 붙어있으며 당시 자살한 이들을 기리는 위령탑이 남아있다. 그런데 일본인 위령탑, 조선인 위령탑, 오키나와인 위령탑이 각각 따로 있다. 이렇게 위령탑이 많은 이유는 당시 사이판은 일본이 사탕수수 농장을 잔뜩 가꿔 놓은 상태여서 인부로 조선인, 오키나와인들도 많이 와 있었고, 역시 일본인 민간인과 함께 죽은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민간인이 자발적으로 자살한 건 아니고, 망설이던 사람들도 분명히 있었다. 한 예로 미국 육군 병사가 자살하려고 망설이던 민간인을 발견했는데, 그 직후 곁에 있던 일본 육군 병사가 자살을 독촉하기 위해 민간인들을 사살했다. 이 만행에 분노한 미군은 문제의 일본군을 즉결처분해 버렸다고 한다.
한편 이 때 뛰어내렸다가 기적적으로 나뭇가지에 걸려 살아남은 일본 여성도 한 명 있어서 나름 화제가 되었다. 이 전투에서 일어났던 일화 중 동굴에서 겁먹은 아기의 입을 막기 위해 옷으로 입을 막았다가 아기가 사망하는 일도 일어났다.
이 때까지 일본군이 민간인까지 현지에서 강제징집해서 싸우거나, 일본 민간인들이 자발적으로 일본군과 같이 싸운 전례는 있었어도 일본군이 자국 민간인들에게 자살을 강요하거나 살해하는 사태가 대량으로 발생한 것은 사이판 전투가 최초이며, 바로 인근 섬인 티니안 섬에서는 그런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많은 의문점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바로 이런 참상을 불러온 원인이 밝혀졌다. 일본 제국의 천황인 쇼와 덴노가 1944년 6월 30일에 칙명을 내려서 사이판의 민간인에게 자살을 권유한 것이었다. 그 이유는 사이판에 거주하는 일본 민간인이 잡혀서 미국의 선전방송에라도 나가게 되면 일본의 사기가 떨어지고 미국의 사기가 오르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이 명령에 도조 히데키 총리대신조차도 ‘폐하께서 이러실 리가 없다’며 칙명을 중간에서 가로채서 멋대로 보류하는 상황까지 발생했으나, 결국 7월 1일 사이판 전투의 지휘관들에게 히로히토의 칙명이 방송으로 전달되었다.
사이판 전투를 앞두고 미국 언론에서 미군의 일본군 전사자 사체 훼손 사건이 보도된 것도 원인이 되었다. 위 사건은 미국 내에서 보도되었기 때문에 조작이라 볼 의심의 여지가 없었고, 당연히 일본에도 전해져 보도되었다. 게다가 비주얼적으로도 충격적이었기 때문에 이후 일본 민간인은 미군에 대하여 공포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공포심은 이후에도 이어져 미군 상륙작전 시 일본인 민간인이 잇따라 자살하는 계기가 되었다.
사이판 전투에서 일본 측 민간인은 2만 200여 명이 쓸모없이 목숨을 끊었는데, 이는 그 지역 민간인 전체의 3분의 2에 해당되는 규모였다. 즉 사이판 전투에선 무고한 민간인들마저 일본 군국주의의 희생자들이 되었던 것이다.
미군은 3400명이 넘는 사망자, 일본군은 26000명가량 나온바 1:7의 비율이 된다. 하지만 미군 부상자가 10,364명이나 되어 사상자 기준으로는 1:1.8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여기에 민간인 사망자도 2만명이 넘었다. 대부분의 민간인 사망자는 자살자, 또는 강요에 의해 죽은 자들이다.
사이판 점령 후 미 육군은 섬에 활주로를 건설하고 목표했던 B-29에 의한 일본 본토에 대한 폭격을 개시했다. 미국은 사이판 점령으로 태평양에서의 승리는 시간문제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이후 유럽 전선에 편하게 집중하여 독일군을 맘껏 유린한다.
물론 사이판을 점령하기 이전에도 중국에 배치된 기지에서 B-29가 출격해 일본 본토를 폭격하긴 했다. 그러나 이는 상당히 비효율적이었다. 거리가 너무 멀어서 B-29에게도 부담이 될 정도였던 데다, 아직 중국 본토와 제대로 된 육상 보급로가 연결되지 않아서 항공편으로 찔끔찔끔 보급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험한 지형과 기상 환경 탓에 적지 않은 비전투 손실이 발생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이판을 점령하면서 이러한 문제점은 완전히 해결되었다. 사이판에서 출격하면 B-29로 일본 본토까지 충분히 왕복이 가능한데다, 해상 보급을 통해 안정적인 보급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이판 전투가 일본 제국 수뇌부에게 준 충격은 거대했다. 이전에도 여러 번 패배했지만 사이판 전투의 패배는 여러모로 수뇌부에게 그 의미가 컸기 때문이다. 사이판 함락 이전의 전투들은 미드웨이 해전이나 과달카날 전역과 같이 공격전에 실패했거나, 애투 섬 전투와 같이 전략적으로 큰 의미가 없는 곳에서의 방어전이었거나, 타라와 전투와 같이 지연전 목적으로 확장해 놓은 전선에서의 방어전이었거나 하는 식이어서 수뇌부 입장에서도 패배에 대한 변명거리가 충분히 존재했다. 제대로 된 방어망이 여유를 가지고 구축된 곳에서 벌어지는 대규모 방어전에서 일본군이 질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전쟁 전부터 일본이 위임통치 했던 지역인 사이판에서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서 벌인 전투에서 육군과 해군이 전멸을 당하면서, ‘우리 구역에서 맘먹고 제대로 싸워도 일본군이 힘을 못 쓰고 깨지는구나.’라는 사실을 수뇌부들이 뼈저리게 느끼게 된 것이다. 말 그대로 진검승부라고 여겼던 전투에서 그야말로 학살을 당하면서 ‘이쯤 되면 우리가 빠져야 될 때가 아닌가?’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본격적인 계기가 된 것이다. 실제로 이전 임팔 전투 때만 해도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던 히로히토 덴노도 이 때를 기점으로 의견 개진을 중단한다.
사이판 함락으로 일본군의 절대국방권은 산산조각 났고,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도조 히데키 내각이 붕괴하고 고이소 구니아키 내각이 성립되었다.
해군군령부총장 나가노 오사미 원수는 전후 미군 조사에서
“사이판을 잃었을 때 우리에게 지옥이 다가왔다.”
라고 언급했으며, 고가 미네이치 제독의 참모장 후쿠도메 시게루 중장은 “사이판을 잃었을 때 마지막 기회가 사라져 버렸음을 깨달았다.”
라고 평했다. 야마모토 이소로쿠 사후 연합함대 사령장관이 된 고가 미네이치 제독은 사석에서 일본이 승리할 확률은 3%도 되지 않는다고 평했으나 그 희박한 확률조차도 사이판 함락 후에는 0%로 떨어졌다. 즉 사이판 함락으로 일본 제국의 멸망은 확정되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사이판 전투와 필리핀 해 해전으로 일본해군의 항모기동부대가 전멸해 버렸다.
2. 일본 본토가 B-29의 폭격 사정거리 안에 들어왔다.
3. 미군 잠수함의 작전반경이 크게 늘어났다.
4. 도조 내각 붕괴와 함께 일본 정부의 전쟁수행의지와 군의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
이후, 고노에 후미마로 전 총리나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 등의 의한 출구전략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다. 외교적 접촉이 가능했던 소련, 스웨덴, 스위스 대사관을 중심으로 조금이라도 나은 조건으로 평화협정을 얻어내기 위해 강화를 추진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편, 육군 제18보병연대의 오오바 사카에 대위는 생존한 부하 장병들과 민간인을 모아 타포차우산(Mountain Tapochau)에서 1944년 7월부터 1945년 12월 1일까지 저항을 벌여 ‘사이판의 여우’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나 일본에서 옥쇄하지 않고 살았기 때문에 반역자로 찍혔고, 비무장한 군인들을 공격한 적도 있었기에 미군에게도 비겁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후에 그의 일화는 미 해병대 출신의 작가 돈 존스(Don Jones, 1924년 ∼ )가 1982년에 출간한 실화를 각색한 소설인 ‘Oba, The Last Samurai: Saipan 1944년~1945년’로 소개되었으며, 이 소설은 2011년에는 히라유마 히데유키 감독이 찍은 ‘태평양의 기적, 폭스라고 불리운 남자’라는 영화로 만들어졌다. 당연하게도 일본군은 잘 싸웠다라는 정신승리가 대부분이다.
미드웨이 해전 이래 과달카날, 알류산 열도, 애투, 타라와, 마킨 섬에 이르기까지 졸전만 줄창 거듭하며 줄줄이 패전한 일본군은 1943년 9월 인도네시아 - 뉴기니 - 필리핀 - 마리아나 제도를 잇는 이른바 “절대국방권”을 설정한다. 일종의 최후 방어선으로, 이 선에서 기필코 연합군의 공세를 막아내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1944년에 들어서자 절대국방권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그 방어선의 최전선이었던 마셜 제도가 뚫려버리고 길버트 제도와 솔로몬 제도 전체가 넘어가 버렸다
계속되는 승리와 막대한 물량으로 자신감을 되찾은 미국은 일본 본토와 가까우며, 새로이 개발된 미 육군 항공대의 초장거리 폭격기 B-29
의 기착지로도 매력적인 북마리아나 제도의 사이판 섬에 대한 공략을 준비한다. 일본군은 부랴부랴 사이판의 방어 준비를 서둘러 사이판 남부에 비행장을 건설하고 타포차우산 일대에 레이더 기지까지 설치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사이판 섬 방어시설을 확실하게 보장합니다.
도조 히데키, 사이판 방어시설 강화를 계속 요구하는 해군의 구사카 류노스케 중장에 보내는 서신에서
육군은 미군이 상륙하기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위의 편지를 전달한 육군 대좌
그러나 개전 초기의 어뢰 문제를 해결한 미 해군의 잠수함이 들끓는 바람에 사이판으로 향하던 일본 육군과 해군의 수송선이 대거 격침되면서 수많은 물자와 장비와 병력이 바닷속으로 사라져버렸으며, 살아남은 수송선조차도 사이판에 접근을 못 하고 가까운 대만이나 오키나와로 발길을 돌렸기 때문에 사이판에는 애초의 계획과는 거리가 먼 3만 여명의 병력만이 집결할 수 있었고, 격침된 수송선에서 구조된 병력은 장비를 대부분 상실해 맨몸에 가까운 상태라 전력이라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또한 사이판을 공격하기 전, 미 해군 함대가 주변의 일본 육해군 비행장을 초토화시켜놓아서 항공력까지 전무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중국 전선에서 국민당 육군의 예상치 못한 선전으로 인하여 마리아나 제도로 전용하려던 관동군 병력들의 발이 묶여 버린 것도 일본으로선 치명타였다. 원래 일본 대본영은 1943년 말에 중국 중부 방면군에서 육군 제3사단과 제13사단을 마리아나 제도로 보내기로 결정했으나, 동정호 서안의 도시인 상덕에서 벌어진 전투가 계획된 기간 이상으로 질질 끌다가 끝나자, 아예 대륙타통작전을 새로 수립하면서 해당 사단의 마리아나 제도 파견을 취소했다. 그 바람에 괌과 사이판에 각각 2개 사단을 배치시켜 방어하려던 원래의 발상이 1개 사단으로 축소되면서 심각한 전투력 저하가 발생한 것이다.
병력들을 모두 사이판에만 집중시킬 수도 없었다. 괌이나 티니안도 덤으로 방어해야 했던 데다, 당시 대본영에서는 미군이 마리아나보다는 팔라우 쪽으로 먼저 치고 와서 필리핀을 수복할 교두보로 삼을 거라고 생각했던 의견들도 만만치 않았고, 최소한 미군이 그 둘 중에서 간보는 시간이라도 필요할 거라는 생각에 사이판에 그렇게 일찍 오리라고는 예상도 못 하고 있었다. 게다가 ‘팔라우-필리핀’ 루트를 경시했다가는 본토와 자원 생산지의 연결이 확 끊기는 사단이 생길지도 모르니 저쪽을 경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마셜 제도 전투에서 보았듯 미군의 정보력은 생각보다 대단했고, 약한 고리가 있다면 그 곳을 먼저 옥쇄지로 만들어 놓았을 테니 말이다.
이렇게 된 원인으로는 사이판 전투 3개월 전에 일어난 해군 을 사건 때문이었다. 해군 을 사건이란, 3월 30일 팔라우에 미 해군이 대공습을 감행해 큰 피해를 입자 연합함대 사령장관 코가 미네이치와 참모장 후쿠도메 시게루 등 주요 연합함대 지휘관들이 후퇴하려고 수송기를 타고 민다나오 다바오 기지로 이동하던 중 폭풍에 휩쓸려 추락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코가 미네이치 등 주요 간부는 대부분 추락사, 후쿠도메 시게루는 세부 섬에 추락해 간신히 살아남았는데, 이 수송기에는 지휘관들 뿐 아니라 앞으로 코가 사령장관이 주도하는 일명 新Z작전 서류가 같이 있었다. 문제는 대부분의 지휘관은 이때 쓸려갔지만 저 新Z작전 서류가방은 세부 섬 인근에 둥둥 떠 있었던 것. 후쿠도메는 필리핀 게릴라에 포로로 잡혀서 어찌어찌 포로교환 후 본국으로 돌아가지만, 저 잃어버린 新Z작전 서류가방은 현지 주민→게릴라를 거쳐 미 육군에 인계되어 그대로 작전의 전모가 드러났지만, 정작 연합함대는 포로가 된 후쿠도메의 처분가지고 옥신각신하다가 작전개요가 미군에게 싹 털린 걸 전혀 몰랐다. 그 덕에 연합함대가 뭘 어떻게 할지 뻔히 보이는 미 해군은 우선 목표를 사이판으로 정했고, 일본 해군이 제대로 함대결전 목표점을 정하기도 전에 사이판에 진을 치고 사이판에 뒤늦게 함대결전을 하겠다고 온 연합함대를 미리 준비하고 맞아들이게 된다.
지휘관 인선 또한 최악이었는데, 수비대의 핵심인 43사단장 사이토 요시츠구 중장은 기병 병과 출신으로, 기병 부대에서 오래 복무하긴 했지만, 그다지 두각을 나타내진 못하고 관동군에서 보충마창장, 군마보충부장, 즉 군마를 관리하고 조달하는 업무를 맡다가 사이판에 발령난 사람이었다. 물론 보급부대에 근무했다고 무능한 건 아니긴 하지만, 오직 일선 전투 부대와 도쿄의 참모본부만을 중요시 여기는 일본군에서 야전을 오래 떠나 있던 보급부대 담당 장교한테 총지휘관을 맡겼다는 것은 총체적 난국이었다.
그나마 해당 지역을 관할하는 중부태평양사령관에 나구모 주이치 중장이 자리하고 있었으나, 나구모 역시 미드웨이 해전 참패 이후 한직들만 전전하다 부임한 상황이었다.
일본군의 예상보다 훨씬 이른 1944년 6월 미군이 사이판을 공격한다. 6월 11일에 먼저 도착한 항모기동부대 소속 함재기들이 대대적인 공격을 가하면서 사이판을 비롯한 마리아나 제도 상공의 제공권을 장악했고, 13일에는 미군의 함포사격인 남부 해안 일대를 강타했다. 6월 15일 미 해병대 2사단과 4사단 7만명이 본격적인 상륙작전을 개시하였다. 그에 맞서는 일본군은 절반이 채 안 되는 3만 1천명이었다. 일본군 사령관 사이토 장군은 해안방어전술로 미군을 상대하기로 결정하였으나 미 해군은 이에 대비해 15일과 16일 이틀간 전함 15척, 순양함 11척을 동원해 16만 5천발의 포탄을 쏴대면서 일본의 해안 방어를 무력화시키고 전투기 전력과 수송선단을 싹 다 날려버린다.
그래도 해안에 죽치고 있던 일본군은 원래 작전인 해안방어전술을 사용하기 위해 미리 해상에 표적 깃발을 부표로 달아놓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으므로 함포사격에서 살아남은 일본군 생존자들은 다가오는 미군에게 맹렬히 저항했고, 상륙이 완료되고 교두보가 확보될 때까지 미군은 1,000여 명의 사상자와 장갑차 20대의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일본군의 저항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한계에 이르러 결국 47여단과 전차 9연대 4중대가 전멸하고 만다. 밤엔 역시 어김없는 일본군의 야습이 있었지만 미군의 화력에 말 그대로 소멸된다. 상륙 첫날 미군은 폭 1km의 교두보를 형성해 내륙 10km 지점까지 진출하는 전과를 올렸다.
한편 사이판을 구원하고 미 해군 기동함대를 격멸하기 위해 달려온 일본 해군 연합함대는 필리핀 해 해전에서 역공세를 당하고, 사이판은 일본 대본영에게 버려진 채 완전히 고립되어 버린다. 사령관 사이토는 잔여병력을 타포 차우 산악지대로 후퇴시키고 동굴을 활용해 미군의 진격을 저지했다. 일본군은 섬 안의 전차들을 모조리 긁어모아 미군이 상륙한 둘째 날(6월 16일) 밤, 야습을 건다. 37대의 전차로 이루어진 일본군 기갑부대는 어둠을 틈타 돌격을 감행했는데, 이는 태평양 전선에서 벌어진 전차전 중 가장 큰 규모의 전투였다고 한다. 언덕 밑에 자리를 잡았던 미군은 갑작스러운 기습에 처음에는 당황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이 보유했던 하고 전차에 달린 저조한 성능의 37mm 주포와 일본군의 두루뭉술한 계획, 야습의 이점인 어둠이 미군의 조명탄으로 인해
무용지물이 된 점으로 인해 미군 장병들은 일부 전차가 방어선을 돌파하여도 침착하게 대열을 추스른 뒤 일본군 전차들을 차례차례 격파한다. 근거리에서의 싸움이 계속되는 등, 꽤나 혼란스러운 전투였지만 미군은 가벼운 손실만 입고 전투에서 이기게 된다. 이날 밤 전투에서만 일본군이 손실한 전차는 사이판 방어군 기갑 전력의 3/4 정도라고 한다.
이때까지도 일본군은 연합함대가 자신들을 구하러 오는 줄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연합함대를 격퇴시키기 위해서 떠난 미 기동부대를 연합함대를 피해 도주하는 것으로 오인하고 기뻐하였지만 사흘 후 바다를 메운 함대는 미 해군이었다.
승기를 잡은 미군은 대공세를 감행했고 일본군은 속수무책으로 소탕 당했다. 게다가 6월 24일에는 일본 대본영에서 사이판 포기 결정을 내려버렸다. 제공권과 제해권은 미군에게 완전히 넘어왔고, 7월 3일 사이판 최대의 도시였던 가라판은 미군의 손에 떨어졌다.
그나마 살아남은 일본군은 산지와 동굴에 숨어서 끝까지 항전하려 했으나, 앞서 언급된 해안방어전술 때문에 식량과 장비와 탄약을 해안선에 분산 배치한 실수를 범했으므로 이들 물자들이 개전 초기에 미군의 손 안에 떨어지자 장기적인 저항은 말할 것도 없고 당장 먹고 살 수단
도 없는 절박한 처지에 놓였다. 그리고 사이판 섬은 과달카날이나 부겐빌 같은 큰 섬이 아니므로 미군의 입장에서는 비행장 주변에 교두보를 만들고 방어하는 전략보다는 차라리 섬 전체를 토벌하는 것이 방어적인 면에서나 비용적인 면에서나 우월하기 때문에 섬을 완전 점령하기로 결정하였다.
7월 5일, 함대를 잃고 사이판에서 해군 육전대를 이끌던 해군중장 나구모 주이치 제독이 권총 자살했다. 그 뒤를 이어 사이판 방어 책임자였던 육군의 사이토 장군도 자살했고, 이날 새벽 4,000명이 넘는 모든 잔존 일본군이 태평양 전쟁 최대 규모의 반자이 어택을 감행하고 전멸함으로써 사실상 일본군의 저항은 끝장났다. 일부 육군 장병들은 더 이상 투항할 곳이 없자 그대로 절벽에서 뛰어내려 자결하였고, 이 절벽은 현재 ‘자살 절벽’이란 명칭이 붙었다. 아래 설명될 반자이 절벽과는 가까이 있는 곳이지만 다른 장소이며, 주로 일본군은 고지대인 자살 절벽에서, 민간인들은 해안가에 위치한 반자이 절벽에서 투신했다. 일본의 귀축영미(鬼畜英米) 프로파간다에 세뇌되어 미군의 잔혹함을 두려워한 많은 현지 일본인 민간인들 또한 절벽에서 투신하여 자결했다. 자신의 아이를 절벽에 먼저 던지고 뒤를 따르는 식이였다고 한다.
한편, 미군 내부에서도 심각한 문제가 일어났는데, 6월 24일 사이판 상륙 지상군 지휘관인 제5상륙군단장 홀랜드 스미스 해병 중장이 육군 제27보병사단장 랄프 스미스 육군 소장을 해임한 것이다. 위 지도에서 보듯 27사단은 일본군의 주력부대가 있는 곳을 담당했기 때문에 진격 속도가 늦었고 23일에는 일본군 주저항선에서 격전을 벌이느라 진격이 멈추었다. 그러나 7개월 전 마킨 섬 전투에서부터 27사단장 랄프 스미스 육군 소장의 지휘능력에 의심을 가지고 있던 홀랜드 스미스 해병 중장은 평소 급한 성격 때문에 앞뒤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랄프 스미스 육군 소장의 공격정신이 부족하다고 지레 짐작하여 상급 지휘관인 미 제5함대 사령관 스프루언스 제독의 승인을 얻은 뒤 그를 해임한다. 덕분에 랄프 스미스 소장의 직속상관이던 태평양 방면 육군사령관 로버트 리처드슨 중장은 폭발했고, 사이판 전투가 끝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니미츠 제독의 허락 하에 사이판으로 날아가 육군을 시찰했다. 문제가 터질 것을 예상한 스프루언스 제독은 홀랜드 스미스 해병 중장 및 리치몬드 켈리 터너 해군 중장을 불러 리처드슨 육군 중장이 뭔 말을 하더라도 화내지 말아달라고 약속할 것을 부탁했다. 스미스 중장은 자기가 한 짓이 후폭풍을 불러올 거라고 생각은 했는지 그에 동의했으나, 켈리 중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홀랜스 스미스 해병중장은 리처드슨 육군중장의 행사가 끝나기를 기다려 해병 제4사단장 해리 슈미트 소장과 함께 리처드슨 중장의 사령부를 찾아갔으나, 리처드슨은 그에게 대놓고 폭언을 퍼부었다. 이 때 스미스 중장은 ‘울부짖는 미치광이(Howling Mad)’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의 다혈질 성격답지 않게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러나 켈리 해군중장은 리처드슨 육군 중장이 지휘계통을 무시하고 함부로 행동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고, 처음엔 지휘계통을 지켜달라고 말했으나 리처드슨이 따르지 않자 ‘무시무시한 터너(Terrible Turner)’답게 폭언을 퍼부으며 맞섰다.
이 사건은 중부 태평양 지역의 전 군을 지휘 통제하는 미 제5함대(사령관 레이먼드 A. 스프루언스 해군 대장)가 편성된 이후 5함대 내에 주요 보직을 해군과 육군 중 누가 맡을 것인지를 놓고 벌어진 미묘한 신경전을 심화시켰다. 각 군 합동작전에서는 현역 해병사단과 주방위군 27보병사단의 전력차이나, 해병대와 육군의 전투교리 차이 등을 고려했어야 하고, 통합군 사령관이라는 직책은 타군과의 연계를 공고히 하고 소외감을 주어서는 안 되는, 즉 정치적인 능력도 상당히 요구되는 직위였음에도 불구하고 홀랜드 스미스 장군은 그 부분을 간과한 것이다. 그 결과 미 해군과 육군의 갈등이 폭발한다.
타라와 전투에서 해병대의 엄청난 인명손실로 홀랜드 스미스 해병 중장은 전 국민적 비난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여론은 이번 사건에 우호적이지 않았다. 즉, 해군의 지상부대인 해병대는 육군이 지휘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났다. 태평양 함대 사령관 니미츠 제독은 예하 해군부대와 육군부대의 갈등에 대해서 불필요한 감정싸움이라고 생각했고, 합참과 육군에서도 공감했기 때문에 육군은 랄프 스미스 육군 소장을 태평양에서 빼냈고, 홀랜스 스미스 해병 중장의 상급 지휘관인 미 태평양 함대 사령관 니미츠 제독, 미 해군참모총장 겸 함대총사령관 킹 제독은 육군참모차장 조셉 맥너니 중장의 제안을 받아들여 사이판 전투가 종료된 후 그 즉시 그를 아무 실권이 없는 태평양 함대 해병대Fleet Marine Force(FMF) Pacific 사령관으로 영전시키는 형식으로 일선 전투 임무에서 빼버렸다.
또한 이 사건으로 인해 홀랜드 스미스 장군은 해군과 육군에게 공공의 적으로 낙인찍히면서 태평양 함대 해병대를 대표하는 인물이면서도 항복조인식에조차 참석하지 못하였다. 자신이 요청을 했으나 니미츠 제독이 거절했다고 한다.
랄프 스미스 육군 소장은 당연히 군경력이 끝장났고, 해임 이후 하와이 수비대 대장이었던 육군 제98보병사단장과 보직을 맞바꾸어 잠시 지내다 본토에 있는 캠프 로빈슨에서 보병보충대장(훈련소장)을 지내고, 주프랑스 미국대사관의 국방무관으로 근무하다 1948년 대령으로 전역했다. 이후 105세까지 장수하다가 1998년 사망하였다.
사실 홀랜드 스미스 중장을 전폭적으로 밀어준 것은 스프루언스 제독이었으나, 육군은 그를 거의 비난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랄프 스미스 소장 해임 건으로 인해 스프루언스 제독이 그것을 불허하면 육군과의 관계는 유지할 수 있었겠지만, 그러면 북부상륙부대 사령관인 홀랜드 스미스 중장의 권위는 치명타를 입어 해병대의 사기 저하는 물론이고 지휘가 거의 불가능해지는 사태가 벌어진다. 그것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홀랜드 스미스 중장을 제외하고 태평양 방면에 대신 앉힐 수 있을 만한 해병대 장성도 없었다. 거기에 북부상륙부대는 해병대가 주축이었던 바, 홀랜드 스미스 중장 대신 육군 장성을 앉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육군도 이 사정을 알고 있어 스프루언스 제독에 대한 비난은 거의 하지 않았다.
여담으로, 신포탑 치하 한대가 이 전투 당시 긴박한 상황 속에서 미 해병대에게 노획되어 사용되었는데, 이 치하는 사이판 전투는 물론, 태평양 전쟁 종전까지 미군 소속으로 사용되었다가 현재는 미 육군 병기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6월 16일 새벽에 일본군은 여자와 아이들이 포함된 민간인들을 방패막이로 삼아서 야습을 감행했다. 민간인들이 항복하러 오는 줄 알았던 미 해병대 제4해병사단 제25연대는 그 뒤에 일본군이 숨어서 따라오는 것을 보고 포격으로 응수할 수밖에 없었고, 일본군은 격퇴 당했다.
이후에도 민간인들의 운명은 끔찍했다. 평소 일본군으로부터 미군은 악마라는 세뇌를 받아왔던 그들은 미군에게 투항하지 않고 잇따라 자살해 버린 것이다. 미군은 이들에게 계속 투항을 권고하는 한편 좋은 대우를 약속했지만 주민들은 이미 그 말이 귀에 들어올 리 만무하였기 때문에, 전투가 사실상 끝난 9일, 사이판의 북쪽 절벽에선 5천 여 명의 민간인이 미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덴노 헤이카 반자이’를 외치며 모두 바다 속으로 투신자살했다. 당시 미군이 촬영한 기록영상들도 남아있다.
현재 이 장소에는 만세절벽(Banzai Cliff)라는 명칭이 붙어있으며 당시 자살한 이들을 기리는 위령탑이 남아있다. 그런데 일본인 위령탑, 조선인 위령탑, 오키나와인 위령탑이 각각 따로 있다. 이렇게 위령탑이 많은 이유는 당시 사이판은 일본이 사탕수수 농장을 잔뜩 가꿔 놓은 상태여서 인부로 조선인, 오키나와인들도 많이 와 있었고, 역시 일본인 민간인과 함께 죽은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민간인이 자발적으로 자살한 건 아니고, 망설이던 사람들도 분명히 있었다. 한 예로 미국 육군 병사가 자살하려고 망설이던 민간인을 발견했는데, 그 직후 곁에 있던 일본 육군 병사가 자살을 독촉하기 위해 민간인들을 사살했다. 이 만행에 분노한 미군은 문제의 일본군을 즉결처분해 버렸다고 한다.
한편 이 때 뛰어내렸다가 기적적으로 나뭇가지에 걸려 살아남은 일본 여성도 한 명 있어서 나름 화제가 되었다. 이 전투에서 일어났던 일화 중 동굴에서 겁먹은 아기의 입을 막기 위해 옷으로 입을 막았다가 아기가 사망하는 일도 일어났다.
이 때까지 일본군이 민간인까지 현지에서 강제징집해서 싸우거나, 일본 민간인들이 자발적으로 일본군과 같이 싸운 전례는 있었어도 일본군이 자국 민간인들에게 자살을 강요하거나 살해하는 사태가 대량으로 발생한 것은 사이판 전투가 최초이며, 바로 인근 섬인 티니안 섬에서는 그런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많은 의문점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바로 이런 참상을 불러온 원인이 밝혀졌다. 일본 제국의 천황인 쇼와 덴노가 1944년 6월 30일에 칙명을 내려서 사이판의 민간인에게 자살을 권유한 것이었다. 그 이유는 사이판에 거주하는 일본 민간인이 잡혀서 미국의 선전방송에라도 나가게 되면 일본의 사기가 떨어지고 미국의 사기가 오르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이 명령에 도조 히데키 총리대신조차도 ‘폐하께서 이러실 리가 없다’며 칙명을 중간에서 가로채서 멋대로 보류하는 상황까지 발생했으나, 결국 7월 1일 사이판 전투의 지휘관들에게 히로히토의 칙명이 방송으로 전달되었다.
사이판 전투를 앞두고 미국 언론에서 미군의 일본군 전사자 사체 훼손 사건이 보도된 것도 원인이 되었다. 위 사건은 미국 내에서 보도되었기 때문에 조작이라 볼 의심의 여지가 없었고, 당연히 일본에도 전해져 보도되었다. 게다가 비주얼적으로도 충격적이었기 때문에 이후 일본 민간인은 미군에 대하여 공포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공포심은 이후에도 이어져 미군 상륙작전 시 일본인 민간인이 잇따라 자살하는 계기가 되었다.
사이판 전투에서 일본 측 민간인은 2만 200여 명이 쓸모없이 목숨을 끊었는데, 이는 그 지역 민간인 전체의 3분의 2에 해당되는 규모였다. 즉 사이판 전투에선 무고한 민간인들마저 일본 군국주의의 희생자들이 되었던 것이다.
미군은 3400명이 넘는 사망자, 일본군은 26000명가량 나온바 1:7의 비율이 된다. 하지만 미군 부상자가 10,364명이나 되어 사상자 기준으로는 1:1.8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여기에 민간인 사망자도 2만명이 넘었다. 대부분의 민간인 사망자는 자살자, 또는 강요에 의해 죽은 자들이다.
사이판 점령 후 미 육군은 섬에 활주로를 건설하고 목표했던 B-29에 의한 일본 본토에 대한 폭격을 개시했다. 미국은 사이판 점령으로 태평양에서의 승리는 시간문제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이후 유럽 전선에 편하게 집중하여 독일군을 맘껏 유린한다.
물론 사이판을 점령하기 이전에도 중국에 배치된 기지에서 B-29가 출격해 일본 본토를 폭격하긴 했다. 그러나 이는 상당히 비효율적이었다. 거리가 너무 멀어서 B-29에게도 부담이 될 정도였던 데다, 아직 중국 본토와 제대로 된 육상 보급로가 연결되지 않아서 항공편으로 찔끔찔끔 보급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험한 지형과 기상 환경 탓에 적지 않은 비전투 손실이 발생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이판을 점령하면서 이러한 문제점은 완전히 해결되었다. 사이판에서 출격하면 B-29로 일본 본토까지 충분히 왕복이 가능한데다, 해상 보급을 통해 안정적인 보급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이판 전투가 일본 제국 수뇌부에게 준 충격은 거대했다. 이전에도 여러 번 패배했지만 사이판 전투의 패배는 여러모로 수뇌부에게 그 의미가 컸기 때문이다. 사이판 함락 이전의 전투들은 미드웨이 해전이나 과달카날 전역과 같이 공격전에 실패했거나, 애투 섬 전투와 같이 전략적으로 큰 의미가 없는 곳에서의 방어전이었거나, 타라와 전투와 같이 지연전 목적으로 확장해 놓은 전선에서의 방어전이었거나 하는 식이어서 수뇌부 입장에서도 패배에 대한 변명거리가 충분히 존재했다. 제대로 된 방어망이 여유를 가지고 구축된 곳에서 벌어지는 대규모 방어전에서 일본군이 질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전쟁 전부터 일본이 위임통치 했던 지역인 사이판에서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서 벌인 전투에서 육군과 해군이 전멸을 당하면서, ‘우리 구역에서 맘먹고 제대로 싸워도 일본군이 힘을 못 쓰고 깨지는구나.’라는 사실을 수뇌부들이 뼈저리게 느끼게 된 것이다. 말 그대로 진검승부라고 여겼던 전투에서 그야말로 학살을 당하면서 ‘이쯤 되면 우리가 빠져야 될 때가 아닌가?’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본격적인 계기가 된 것이다. 실제로 이전 임팔 전투 때만 해도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던 히로히토 덴노도 이 때를 기점으로 의견 개진을 중단한다.
사이판 함락으로 일본군의 절대국방권은 산산조각 났고,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도조 히데키 내각이 붕괴하고 고이소 구니아키 내각이 성립되었다.
해군군령부총장 나가노 오사미 원수는 전후 미군 조사에서
“사이판을 잃었을 때 우리에게 지옥이 다가왔다.”
라고 언급했으며, 고가 미네이치 제독의 참모장 후쿠도메 시게루 중장은 “사이판을 잃었을 때 마지막 기회가 사라져 버렸음을 깨달았다.”
라고 평했다. 야마모토 이소로쿠 사후 연합함대 사령장관이 된 고가 미네이치 제독은 사석에서 일본이 승리할 확률은 3%도 되지 않는다고 평했으나 그 희박한 확률조차도 사이판 함락 후에는 0%로 떨어졌다. 즉 사이판 함락으로 일본 제국의 멸망은 확정되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사이판 전투와 필리핀 해 해전으로 일본해군의 항모기동부대가 전멸해 버렸다.
2. 일본 본토가 B-29의 폭격 사정거리 안에 들어왔다.
3. 미군 잠수함의 작전반경이 크게 늘어났다.
4. 도조 내각 붕괴와 함께 일본 정부의 전쟁수행의지와 군의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
이후, 고노에 후미마로 전 총리나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 등의 의한 출구전략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다. 외교적 접촉이 가능했던 소련, 스웨덴, 스위스 대사관을 중심으로 조금이라도 나은 조건으로 평화협정을 얻어내기 위해 강화를 추진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편, 육군 제18보병연대의 오오바 사카에 대위는 생존한 부하 장병들과 민간인을 모아 타포차우산(Mountain Tapochau)에서 1944년 7월부터 1945년 12월 1일까지 저항을 벌여 ‘사이판의 여우’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나 일본에서 옥쇄하지 않고 살았기 때문에 반역자로 찍혔고, 비무장한 군인들을 공격한 적도 있었기에 미군에게도 비겁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후에 그의 일화는 미 해병대 출신의 작가 돈 존스(Don Jones, 1924년 ∼ )가 1982년에 출간한 실화를 각색한 소설인 ‘Oba, The Last Samurai: Saipan 1944년~1945년’로 소개되었으며, 이 소설은 2011년에는 히라유마 히데유키 감독이 찍은 ‘태평양의 기적, 폭스라고 불리운 남자’라는 영화로 만들어졌다. 당연하게도 일본군은 잘 싸웠다라는 정신승리가 대부분이다.
미드웨이 해전 이래 과달카날, 알류산 열도, 애투, 타라와, 마킨 섬에 이르기까지 졸전만 줄창 거듭하며 줄줄이 패전한 일본군은 1943년 9월 인도네시아 - 뉴기니 - 필리핀 - 마리아나 제도를 잇는 이른바 “절대국방권”을 설정한다. 일종의 최후 방어선으로, 이 선에서 기필코 연합군의 공세를 막아내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1944년에 들어서자 절대국방권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그 방어선의 최전선이었던 마셜 제도가 뚫려버리고 길버트 제도와 솔로몬 제도 전체가 넘어가 버렸다
계속되는 승리와 막대한 물량으로 자신감을 되찾은 미국은 일본 본토와 가까우며, 새로이 개발된 미 육군 항공대의 초장거리 폭격기 B-29
의 기착지로도 매력적인 북마리아나 제도의 사이판 섬에 대한 공략을 준비한다. 일본군은 부랴부랴 사이판의 방어 준비를 서둘러 사이판 남부에 비행장을 건설하고 타포차우산 일대에 레이더 기지까지 설치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사이판 섬 방어시설을 확실하게 보장합니다.
도조 히데키, 사이판 방어시설 강화를 계속 요구하는 해군의 구사카 류노스케 중장에 보내는 서신에서
육군은 미군이 상륙하기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위의 편지를 전달한 육군 대좌
그러나 개전 초기의 어뢰 문제를 해결한 미 해군의 잠수함이 들끓는 바람에 사이판으로 향하던 일본 육군과 해군의 수송선이 대거 격침되면서 수많은 물자와 장비와 병력이 바닷속으로 사라져버렸으며, 살아남은 수송선조차도 사이판에 접근을 못 하고 가까운 대만이나 오키나와로 발길을 돌렸기 때문에 사이판에는 애초의 계획과는 거리가 먼 3만 여명의 병력만이 집결할 수 있었고, 격침된 수송선에서 구조된 병력은 장비를 대부분 상실해 맨몸에 가까운 상태라 전력이라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또한 사이판을 공격하기 전, 미 해군 함대가 주변의 일본 육해군 비행장을 초토화시켜놓아서 항공력까지 전무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중국 전선에서 국민당 육군의 예상치 못한 선전으로 인하여 마리아나 제도로 전용하려던 관동군 병력들의 발이 묶여 버린 것도 일본으로선 치명타였다. 원래 일본 대본영은 1943년 말에 중국 중부 방면군에서 육군 제3사단과 제13사단을 마리아나 제도로 보내기로 결정했으나, 동정호 서안의 도시인 상덕에서 벌어진 전투가 계획된 기간 이상으로 질질 끌다가 끝나자, 아예 대륙타통작전을 새로 수립하면서 해당 사단의 마리아나 제도 파견을 취소했다. 그 바람에 괌과 사이판에 각각 2개 사단을 배치시켜 방어하려던 원래의 발상이 1개 사단으로 축소되면서 심각한 전투력 저하가 발생한 것이다.
병력들을 모두 사이판에만 집중시킬 수도 없었다. 괌이나 티니안도 덤으로 방어해야 했던 데다, 당시 대본영에서는 미군이 마리아나보다는 팔라우 쪽으로 먼저 치고 와서 필리핀을 수복할 교두보로 삼을 거라고 생각했던 의견들도 만만치 않았고, 최소한 미군이 그 둘 중에서 간보는 시간이라도 필요할 거라는 생각에 사이판에 그렇게 일찍 오리라고는 예상도 못 하고 있었다. 게다가 ‘팔라우-필리핀’ 루트를 경시했다가는 본토와 자원 생산지의 연결이 확 끊기는 사단이 생길지도 모르니 저쪽을 경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마셜 제도 전투에서 보았듯 미군의 정보력은 생각보다 대단했고, 약한 고리가 있다면 그 곳을 먼저 옥쇄지로 만들어 놓았을 테니 말이다.
이렇게 된 원인으로는 사이판 전투 3개월 전에 일어난 해군 을 사건 때문이었다. 해군 을 사건이란, 3월 30일 팔라우에 미 해군이 대공습을 감행해 큰 피해를 입자 연합함대 사령장관 코가 미네이치와 참모장 후쿠도메 시게루 등 주요 연합함대 지휘관들이 후퇴하려고 수송기를 타고 민다나오 다바오 기지로 이동하던 중 폭풍에 휩쓸려 추락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코가 미네이치 등 주요 간부는 대부분 추락사, 후쿠도메 시게루는 세부 섬에 추락해 간신히 살아남았는데, 이 수송기에는 지휘관들 뿐 아니라 앞으로 코가 사령장관이 주도하는 일명 新Z작전 서류가 같이 있었다. 문제는 대부분의 지휘관은 이때 쓸려갔지만 저 新Z작전 서류가방은 세부 섬 인근에 둥둥 떠 있었던 것. 후쿠도메는 필리핀 게릴라에 포로로 잡혀서 어찌어찌 포로교환 후 본국으로 돌아가지만, 저 잃어버린 新Z작전 서류가방은 현지 주민→게릴라를 거쳐 미 육군에 인계되어 그대로 작전의 전모가 드러났지만, 정작 연합함대는 포로가 된 후쿠도메의 처분가지고 옥신각신하다가 작전개요가 미군에게 싹 털린 걸 전혀 몰랐다. 그 덕에 연합함대가 뭘 어떻게 할지 뻔히 보이는 미 해군은 우선 목표를 사이판으로 정했고, 일본 해군이 제대로 함대결전 목표점을 정하기도 전에 사이판에 진을 치고 사이판에 뒤늦게 함대결전을 하겠다고 온 연합함대를 미리 준비하고 맞아들이게 된다.
지휘관 인선 또한 최악이었는데, 수비대의 핵심인 43사단장 사이토 요시츠구 중장은 기병 병과 출신으로, 기병 부대에서 오래 복무하긴 했지만, 그다지 두각을 나타내진 못하고 관동군에서 보충마창장, 군마보충부장, 즉 군마를 관리하고 조달하는 업무를 맡다가 사이판에 발령난 사람이었다. 물론 보급부대에 근무했다고 무능한 건 아니긴 하지만, 오직 일선 전투 부대와 도쿄의 참모본부만을 중요시 여기는 일본군에서 야전을 오래 떠나 있던 보급부대 담당 장교한테 총지휘관을 맡겼다는 것은 총체적 난국이었다.
그나마 해당 지역을 관할하는 중부태평양사령관에 나구모 주이치 중장이 자리하고 있었으나, 나구모 역시 미드웨이 해전 참패 이후 한직들만 전전하다 부임한 상황이었다.
일본군의 예상보다 훨씬 이른 1944년 6월 미군이 사이판을 공격한다. 6월 11일에 먼저 도착한 항모기동부대 소속 함재기들이 대대적인 공격을 가하면서 사이판을 비롯한 마리아나 제도 상공의 제공권을 장악했고, 13일에는 미군의 함포사격인 남부 해안 일대를 강타했다. 6월 15일 미 해병대 2사단과 4사단 7만명이 본격적인 상륙작전을 개시하였다. 그에 맞서는 일본군은 절반이 채 안 되는 3만 1천명이었다. 일본군 사령관 사이토 장군은 해안방어전술로 미군을 상대하기로 결정하였으나 미 해군은 이에 대비해 15일과 16일 이틀간 전함 15척, 순양함 11척을 동원해 16만 5천발의 포탄을 쏴대면서 일본의 해안 방어를 무력화시키고 전투기 전력과 수송선단을 싹 다 날려버린다.
그래도 해안에 죽치고 있던 일본군은 원래 작전인 해안방어전술을 사용하기 위해 미리 해상에 표적 깃발을 부표로 달아놓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으므로 함포사격에서 살아남은 일본군 생존자들은 다가오는 미군에게 맹렬히 저항했고, 상륙이 완료되고 교두보가 확보될 때까지 미군은 1,000여 명의 사상자와 장갑차 20대의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일본군의 저항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한계에 이르러 결국 47여단과 전차 9연대 4중대가 전멸하고 만다. 밤엔 역시 어김없는 일본군의 야습이 있었지만 미군의 화력에 말 그대로 소멸된다. 상륙 첫날 미군은 폭 1km의 교두보를 형성해 내륙 10km 지점까지 진출하는 전과를 올렸다.
한편 사이판을 구원하고 미 해군 기동함대를 격멸하기 위해 달려온 일본 해군 연합함대는 필리핀 해 해전에서 역공세를 당하고, 사이판은 일본 대본영에게 버려진 채 완전히 고립되어 버린다. 사령관 사이토는 잔여병력을 타포 차우 산악지대로 후퇴시키고 동굴을 활용해 미군의 진격을 저지했다. 일본군은 섬 안의 전차들을 모조리 긁어모아 미군이 상륙한 둘째 날(6월 16일) 밤, 야습을 건다. 37대의 전차로 이루어진 일본군 기갑부대는 어둠을 틈타 돌격을 감행했는데, 이는 태평양 전선에서 벌어진 전차전 중 가장 큰 규모의 전투였다고 한다. 언덕 밑에 자리를 잡았던 미군은 갑작스러운 기습에 처음에는 당황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이 보유했던 하고 전차에 달린 저조한 성능의 37mm 주포와 일본군의 두루뭉술한 계획, 야습의 이점인 어둠이 미군의 조명탄으로 인해
무용지물이 된 점으로 인해 미군 장병들은 일부 전차가 방어선을 돌파하여도 침착하게 대열을 추스른 뒤 일본군 전차들을 차례차례 격파한다. 근거리에서의 싸움이 계속되는 등, 꽤나 혼란스러운 전투였지만 미군은 가벼운 손실만 입고 전투에서 이기게 된다. 이날 밤 전투에서만 일본군이 손실한 전차는 사이판 방어군 기갑 전력의 3/4 정도라고 한다.
이때까지도 일본군은 연합함대가 자신들을 구하러 오는 줄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연합함대를 격퇴시키기 위해서 떠난 미 기동부대를 연합함대를 피해 도주하는 것으로 오인하고 기뻐하였지만 사흘 후 바다를 메운 함대는 미 해군이었다.
승기를 잡은 미군은 대공세를 감행했고 일본군은 속수무책으로 소탕 당했다. 게다가 6월 24일에는 일본 대본영에서 사이판 포기 결정을 내려버렸다. 제공권과 제해권은 미군에게 완전히 넘어왔고, 7월 3일 사이판 최대의 도시였던 가라판은 미군의 손에 떨어졌다.
그나마 살아남은 일본군은 산지와 동굴에 숨어서 끝까지 항전하려 했으나, 앞서 언급된 해안방어전술 때문에 식량과 장비와 탄약을 해안선에 분산 배치한 실수를 범했으므로 이들 물자들이 개전 초기에 미군의 손 안에 떨어지자 장기적인 저항은 말할 것도 없고 당장 먹고 살 수단
도 없는 절박한 처지에 놓였다. 그리고 사이판 섬은 과달카날이나 부겐빌 같은 큰 섬이 아니므로 미군의 입장에서는 비행장 주변에 교두보를 만들고 방어하는 전략보다는 차라리 섬 전체를 토벌하는 것이 방어적인 면에서나 비용적인 면에서나 우월하기 때문에 섬을 완전 점령하기로 결정하였다.
7월 5일, 함대를 잃고 사이판에서 해군 육전대를 이끌던 해군중장 나구모 주이치 제독이 권총 자살했다. 그 뒤를 이어 사이판 방어 책임자였던 육군의 사이토 장군도 자살했고, 이날 새벽 4,000명이 넘는 모든 잔존 일본군이 태평양 전쟁 최대 규모의 반자이 어택을 감행하고 전멸함으로써 사실상 일본군의 저항은 끝장났다. 일부 육군 장병들은 더 이상 투항할 곳이 없자 그대로 절벽에서 뛰어내려 자결하였고, 이 절벽은 현재 ‘자살 절벽’이란 명칭이 붙었다. 아래 설명될 반자이 절벽과는 가까이 있는 곳이지만 다른 장소이며, 주로 일본군은 고지대인 자살 절벽에서, 민간인들은 해안가에 위치한 반자이 절벽에서 투신했다. 일본의 귀축영미(鬼畜英米) 프로파간다에 세뇌되어 미군의 잔혹함을 두려워한 많은 현지 일본인 민간인들 또한 절벽에서 투신하여 자결했다. 자신의 아이를 절벽에 먼저 던지고 뒤를 따르는 식이였다고 한다.
한편, 미군 내부에서도 심각한 문제가 일어났는데, 6월 24일 사이판 상륙 지상군 지휘관인 제5상륙군단장 홀랜드 스미스 해병 중장이 육군 제27보병사단장 랄프 스미스 육군 소장을 해임한 것이다. 위 지도에서 보듯 27사단은 일본군의 주력부대가 있는 곳을 담당했기 때문에 진격 속도가 늦었고 23일에는 일본군 주저항선에서 격전을 벌이느라 진격이 멈추었다. 그러나 7개월 전 마킨 섬 전투에서부터 27사단장 랄프 스미스 육군 소장의 지휘능력에 의심을 가지고 있던 홀랜드 스미스 해병 중장은 평소 급한 성격 때문에 앞뒤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랄프 스미스 육군 소장의 공격정신이 부족하다고 지레 짐작하여 상급 지휘관인 미 제5함대 사령관 스프루언스 제독의 승인을 얻은 뒤 그를 해임한다. 덕분에 랄프 스미스 소장의 직속상관이던 태평양 방면 육군사령관 로버트 리처드슨 중장은 폭발했고, 사이판 전투가 끝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니미츠 제독의 허락 하에 사이판으로 날아가 육군을 시찰했다. 문제가 터질 것을 예상한 스프루언스 제독은 홀랜드 스미스 해병 중장 및 리치몬드 켈리 터너 해군 중장을 불러 리처드슨 육군 중장이 뭔 말을 하더라도 화내지 말아달라고 약속할 것을 부탁했다. 스미스 중장은 자기가 한 짓이 후폭풍을 불러올 거라고 생각은 했는지 그에 동의했으나, 켈리 중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홀랜스 스미스 해병중장은 리처드슨 육군중장의 행사가 끝나기를 기다려 해병 제4사단장 해리 슈미트 소장과 함께 리처드슨 중장의 사령부를 찾아갔으나, 리처드슨은 그에게 대놓고 폭언을 퍼부었다. 이 때 스미스 중장은 ‘울부짖는 미치광이(Howling Mad)’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의 다혈질 성격답지 않게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러나 켈리 해군중장은 리처드슨 육군 중장이 지휘계통을 무시하고 함부로 행동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고, 처음엔 지휘계통을 지켜달라고 말했으나 리처드슨이 따르지 않자 ‘무시무시한 터너(Terrible Turner)’답게 폭언을 퍼부으며 맞섰다.
이 사건은 중부 태평양 지역의 전 군을 지휘 통제하는 미 제5함대(사령관 레이먼드 A. 스프루언스 해군 대장)가 편성된 이후 5함대 내에 주요 보직을 해군과 육군 중 누가 맡을 것인지를 놓고 벌어진 미묘한 신경전을 심화시켰다. 각 군 합동작전에서는 현역 해병사단과 주방위군 27보병사단의 전력차이나, 해병대와 육군의 전투교리 차이 등을 고려했어야 하고, 통합군 사령관이라는 직책은 타군과의 연계를 공고히 하고 소외감을 주어서는 안 되는, 즉 정치적인 능력도 상당히 요구되는 직위였음에도 불구하고 홀랜드 스미스 장군은 그 부분을 간과한 것이다. 그 결과 미 해군과 육군의 갈등이 폭발한다.
타라와 전투에서 해병대의 엄청난 인명손실로 홀랜드 스미스 해병 중장은 전 국민적 비난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여론은 이번 사건에 우호적이지 않았다. 즉, 해군의 지상부대인 해병대는 육군이 지휘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났다. 태평양 함대 사령관 니미츠 제독은 예하 해군부대와 육군부대의 갈등에 대해서 불필요한 감정싸움이라고 생각했고, 합참과 육군에서도 공감했기 때문에 육군은 랄프 스미스 육군 소장을 태평양에서 빼냈고, 홀랜스 스미스 해병 중장의 상급 지휘관인 미 태평양 함대 사령관 니미츠 제독, 미 해군참모총장 겸 함대총사령관 킹 제독은 육군참모차장 조셉 맥너니 중장의 제안을 받아들여 사이판 전투가 종료된 후 그 즉시 그를 아무 실권이 없는 태평양 함대 해병대Fleet Marine Force(FMF) Pacific 사령관으로 영전시키는 형식으로 일선 전투 임무에서 빼버렸다.
또한 이 사건으로 인해 홀랜드 스미스 장군은 해군과 육군에게 공공의 적으로 낙인찍히면서 태평양 함대 해병대를 대표하는 인물이면서도 항복조인식에조차 참석하지 못하였다. 자신이 요청을 했으나 니미츠 제독이 거절했다고 한다.
랄프 스미스 육군 소장은 당연히 군경력이 끝장났고, 해임 이후 하와이 수비대 대장이었던 육군 제98보병사단장과 보직을 맞바꾸어 잠시 지내다 본토에 있는 캠프 로빈슨에서 보병보충대장(훈련소장)을 지내고, 주프랑스 미국대사관의 국방무관으로 근무하다 1948년 대령으로 전역했다. 이후 105세까지 장수하다가 1998년 사망하였다.
사실 홀랜드 스미스 중장을 전폭적으로 밀어준 것은 스프루언스 제독이었으나, 육군은 그를 거의 비난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랄프 스미스 소장 해임 건으로 인해 스프루언스 제독이 그것을 불허하면 육군과의 관계는 유지할 수 있었겠지만, 그러면 북부상륙부대 사령관인 홀랜드 스미스 중장의 권위는 치명타를 입어 해병대의 사기 저하는 물론이고 지휘가 거의 불가능해지는 사태가 벌어진다. 그것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홀랜드 스미스 중장을 제외하고 태평양 방면에 대신 앉힐 수 있을 만한 해병대 장성도 없었다. 거기에 북부상륙부대는 해병대가 주축이었던 바, 홀랜드 스미스 중장 대신 육군 장성을 앉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육군도 이 사정을 알고 있어 스프루언스 제독에 대한 비난은 거의 하지 않았다.
여담으로, 신포탑 치하 한대가 이 전투 당시 긴박한 상황 속에서 미 해병대에게 노획되어 사용되었는데, 이 치하는 사이판 전투는 물론, 태평양 전쟁 종전까지 미군 소속으로 사용되었다가 현재는 미 육군 병기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6월 16일 새벽에 일본군은 여자와 아이들이 포함된 민간인들을 방패막이로 삼아서 야습을 감행했다. 민간인들이 항복하러 오는 줄 알았던 미 해병대 제4해병사단 제25연대는 그 뒤에 일본군이 숨어서 따라오는 것을 보고 포격으로 응수할 수밖에 없었고, 일본군은 격퇴 당했다.
이후에도 민간인들의 운명은 끔찍했다. 평소 일본군으로부터 미군은 악마라는 세뇌를 받아왔던 그들은 미군에게 투항하지 않고 잇따라 자살해 버린 것이다. 미군은 이들에게 계속 투항을 권고하는 한편 좋은 대우를 약속했지만 주민들은 이미 그 말이 귀에 들어올 리 만무하였기 때문에, 전투가 사실상 끝난 9일, 사이판의 북쪽 절벽에선 5천 여 명의 민간인이 미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덴노 헤이카 반자이’를 외치며 모두 바다 속으로 투신자살했다. 당시 미군이 촬영한 기록영상들도 남아있다.
현재 이 장소에는 만세절벽(Banzai Cliff)라는 명칭이 붙어있으며 당시 자살한 이들을 기리는 위령탑이 남아있다. 그런데 일본인 위령탑, 조선인 위령탑, 오키나와인 위령탑이 각각 따로 있다. 이렇게 위령탑이 많은 이유는 당시 사이판은 일본이 사탕수수 농장을 잔뜩 가꿔 놓은 상태여서 인부로 조선인, 오키나와인들도 많이 와 있었고, 역시 일본인 민간인과 함께 죽은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민간인이 자발적으로 자살한 건 아니고, 망설이던 사람들도 분명히 있었다. 한 예로 미국 육군 병사가 자살하려고 망설이던 민간인을 발견했는데, 그 직후 곁에 있던 일본 육군 병사가 자살을 독촉하기 위해 민간인들을 사살했다. 이 만행에 분노한 미군은 문제의 일본군을 즉결처분해 버렸다고 한다.
한편 이 때 뛰어내렸다가 기적적으로 나뭇가지에 걸려 살아남은 일본 여성도 한 명 있어서 나름 화제가 되었다. 이 전투에서 일어났던 일화 중 동굴에서 겁먹은 아기의 입을 막기 위해 옷으로 입을 막았다가 아기가 사망하는 일도 일어났다.
이 때까지 일본군이 민간인까지 현지에서 강제징집해서 싸우거나, 일본 민간인들이 자발적으로 일본군과 같이 싸운 전례는 있었어도 일본군이 자국 민간인들에게 자살을 강요하거나 살해하는 사태가 대량으로 발생한 것은 사이판 전투가 최초이며, 바로 인근 섬인 티니안 섬에서는 그런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많은 의문점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바로 이런 참상을 불러온 원인이 밝혀졌다. 일본 제국의 천황인 쇼와 덴노가 1944년 6월 30일에 칙명을 내려서 사이판의 민간인에게 자살을 권유한 것이었다. 그 이유는 사이판에 거주하는 일본 민간인이 잡혀서 미국의 선전방송에라도 나가게 되면 일본의 사기가 떨어지고 미국의 사기가 오르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이 명령에 도조 히데키 총리대신조차도 ‘폐하께서 이러실 리가 없다’며 칙명을 중간에서 가로채서 멋대로 보류하는 상황까지 발생했으나, 결국 7월 1일 사이판 전투의 지휘관들에게 히로히토의 칙명이 방송으로 전달되었다.
사이판 전투를 앞두고 미국 언론에서 미군의 일본군 전사자 사체 훼손 사건이 보도된 것도 원인이 되었다. 위 사건은 미국 내에서 보도되었기 때문에 조작이라 볼 의심의 여지가 없었고, 당연히 일본에도 전해져 보도되었다. 게다가 비주얼적으로도 충격적이었기 때문에 이후 일본 민간인은 미군에 대하여 공포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공포심은 이후에도 이어져 미군 상륙작전 시 일본인 민간인이 잇따라 자살하는 계기가 되었다.
사이판 전투에서 일본 측 민간인은 2만 200여 명이 쓸모없이 목숨을 끊었는데, 이는 그 지역 민간인 전체의 3분의 2에 해당되는 규모였다. 즉 사이판 전투에선 무고한 민간인들마저 일본 군국주의의 희생자들이 되었던 것이다.
미군은 3400명이 넘는 사망자, 일본군은 26000명가량 나온바 1:7의 비율이 된다. 하지만 미군 부상자가 10,364명이나 되어 사상자 기준으로는 1:1.8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여기에 민간인 사망자도 2만명이 넘었다. 대부분의 민간인 사망자는 자살자, 또는 강요에 의해 죽은 자들이다.
사이판 점령 후 미 육군은 섬에 활주로를 건설하고 목표했던 B-29에 의한 일본 본토에 대한 폭격을 개시했다. 미국은 사이판 점령으로 태평양에서의 승리는 시간문제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이후 유럽 전선에 편하게 집중하여 독일군을 맘껏 유린한다.
물론 사이판을 점령하기 이전에도 중국에 배치된 기지에서 B-29가 출격해 일본 본토를 폭격하긴 했다. 그러나 이는 상당히 비효율적이었다. 거리가 너무 멀어서 B-29에게도 부담이 될 정도였던 데다, 아직 중국 본토와 제대로 된 육상 보급로가 연결되지 않아서 항공편으로 찔끔찔끔 보급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험한 지형과 기상 환경 탓에 적지 않은 비전투 손실이 발생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이판을 점령하면서 이러한 문제점은 완전히 해결되었다. 사이판에서 출격하면 B-29로 일본 본토까지 충분히 왕복이 가능한데다, 해상 보급을 통해 안정적인 보급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이판 전투가 일본 제국 수뇌부에게 준 충격은 거대했다. 이전에도 여러 번 패배했지만 사이판 전투의 패배는 여러모로 수뇌부에게 그 의미가 컸기 때문이다. 사이판 함락 이전의 전투들은 미드웨이 해전이나 과달카날 전역과 같이 공격전에 실패했거나, 애투 섬 전투와 같이 전략적으로 큰 의미가 없는 곳에서의 방어전이었거나, 타라와 전투와 같이 지연전 목적으로 확장해 놓은 전선에서의 방어전이었거나 하는 식이어서 수뇌부 입장에서도 패배에 대한 변명거리가 충분히 존재했다. 제대로 된 방어망이 여유를 가지고 구축된 곳에서 벌어지는 대규모 방어전에서 일본군이 질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전쟁 전부터 일본이 위임통치 했던 지역인 사이판에서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서 벌인 전투에서 육군과 해군이 전멸을 당하면서, ‘우리 구역에서 맘먹고 제대로 싸워도 일본군이 힘을 못 쓰고 깨지는구나.’라는 사실을 수뇌부들이 뼈저리게 느끼게 된 것이다. 말 그대로 진검승부라고 여겼던 전투에서 그야말로 학살을 당하면서 ‘이쯤 되면 우리가 빠져야 될 때가 아닌가?’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본격적인 계기가 된 것이다. 실제로 이전 임팔 전투 때만 해도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던 히로히토 덴노도 이 때를 기점으로 의견 개진을 중단한다.
사이판 함락으로 일본군의 절대국방권은 산산조각 났고,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도조 히데키 내각이 붕괴하고 고이소 구니아키 내각이 성립되었다.
해군군령부총장 나가노 오사미 원수는 전후 미군 조사에서
“사이판을 잃었을 때 우리에게 지옥이 다가왔다.”
라고 언급했으며, 고가 미네이치 제독의 참모장 후쿠도메 시게루 중장은 “사이판을 잃었을 때 마지막 기회가 사라져 버렸음을 깨달았다.”
라고 평했다. 야마모토 이소로쿠 사후 연합함대 사령장관이 된 고가 미네이치 제독은 사석에서 일본이 승리할 확률은 3%도 되지 않는다고 평했으나 그 희박한 확률조차도 사이판 함락 후에는 0%로 떨어졌다. 즉 사이판 함락으로 일본 제국의 멸망은 확정되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사이판 전투와 필리핀 해 해전으로 일본해군의 항모기동부대가 전멸해 버렸다.
2. 일본 본토가 B-29의 폭격 사정거리 안에 들어왔다.
3. 미군 잠수함의 작전반경이 크게 늘어났다.
4. 도조 내각 붕괴와 함께 일본 정부의 전쟁수행의지와 군의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
이후, 고노에 후미마로 전 총리나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 등의 의한 출구전략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다. 외교적 접촉이 가능했던 소련, 스웨덴, 스위스 대사관을 중심으로 조금이라도 나은 조건으로 평화협정을 얻어내기 위해 강화를 추진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편, 육군 제18보병연대의 오오바 사카에 대위는 생존한 부하 장병들과 민간인을 모아 타포차우산(Mountain Tapochau)에서 1944년 7월부터 1945년 12월 1일까지 저항을 벌여 ‘사이판의 여우’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나 일본에서 옥쇄하지 않고 살았기 때문에 반역자로 찍혔고, 비무장한 군인들을 공격한 적도 있었기에 미군에게도 비겁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후에 그의 일화는 미 해병대 출신의 작가 돈 존스(Don Jones, 1924년 ∼ )가 1982년에 출간한 실화를 각색한 소설인 ‘Oba, The Last Samurai: Saipan 1944년~1945년’로 소개되었으며, 이 소설은 2011년에는 히라유마 히데유키 감독이 찍은 ‘태평양의 기적, 폭스라고 불리운 남자’라는 영화로 만들어졌다. 당연하게도 일본군은 잘 싸웠다라는 정신승리가 대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