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녀, 기황후 貢女 奇皇后
“모진 비바람에 쓸리고 할퀴어 마모된 돌멩이가 더욱 야물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13
“아주 열심일세.”
고 환관이 마련해 준 별채의 전부가 우겸의 독자적인 공간이 되었다. 오늘도 안마당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활시위를 당기고 있는 그에게로 고 환관이 찾아왔다.
“제 역할을 찾을 때 까지는, 할 수 있는 것을 해야지요. 헌데, 이 시간까지 어찌 저택에 계십니까.”
“황성 안에 태감이 어디 나 하나뿐인가. 곧 등청할 것이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그가 마른 땀을 닦아내며 활을 내려놓았다. 그 날 이후의 적대적인 감정을 버리고 철저히 중립적인 태도를 지키려는 우겸과, 남은 개인적인 야심은 모두 버렸다는 듯 꽤나 호의적으로 변한 고 환관이 서로를 마주한다.
“아니 아니. 할 말은 무슨. 내가 자네에 대해 좀 더 알아야, 그에 걸맞은 요직을 찾아 줄 수 있질 않겠나. 그래서 들러본 것일세.”
우겸이 슬몃 웃으며 수건을 내려놓는다.
“제가 원한다 했던 요직이란 것이 막대한 부나 권력을 동반한, 그런 것이라 여기고 계신 것은 아니시겠지요.”
“허면-”
“여기 남기로 결정한 이유를 잘 아실 것입니다. 곁에서 은을 보좌할 최고의 사람이 되려하는 것뿐입니다.”
“역시 그런 것이었군.”
“‘역시’라니요.”
“아니, 아무것도.”
“........”
“혹, 잊은 것은 아닌가.”
“무엇을 말입니까.”
“이 제국의 황후가 되겠다던 그 아이가 한 때 자네의 정혼자였다는 사실 말일세.”
그의 말에 조금 소리 내어 웃는 우겸을 고 환관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우겸은 웃음을 거두고 여유로운 어투로 말했다.
“‘정혼자였다’라는 말씀은 거두셔도 좋을 겁니다. 태감께서 말씀하시는 ‘그 아이’가 여전히 저의 정혼자임에는 변함이 없으니까요.”
“호오, 그거 대단한 자존감이구만.”
“현 황제가 은을 손 안에 감쌀 수 있을만한 인사인지, 그것부터 확인한 뒤에 판단하도록 하지요.”
절대 우위를 확신하는 듯한 그의 말에 고 환관도 흐뭇하게 웃어보이고는, 그만 자리를 뜨려는 듯 몸을 반쯤 돌려세우며 말했다.
“그럼 난 이만 가보겠네. 자네의 그런 자존감과 그 아일 향한 마음과 그 대단한 궁술이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요직이라면 딱 한 가지뿐이겠구만.”
“.........?”
“앞으로는 검술이든 궁술이든 게을리 하지 말고 더 열심히 정진해주게.”
//貢女 奇皇后//
평부사가 황후궁에 도착했을 때, 주 황후는 친하게 지내던 -지금은 병으로 요양 중인- 한 귀족부인에게서 온 편지에 답장을 적어 마무리 짓는 중이었다. 단아한 글씨들이 또박또박 적힌 종이를 접어내림과 동시에 바깥에서 궁인의 고함이 있었다.
“황후마마, 평부사께서 듭시었사옵니다.”
황후의 손동작이 일순 멈추고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마음마저 평화롭지 못한 지금 같은 때라면, 도움이 되지 않는 친정의 그 누구도 마주하고 싶지 않은 것이 사실이었지만, 재차 오라비를 내쳐 황성 안에 요상한 소문을 만들어 낼 필요는 없다 생각했다. 오랜 틈을 두고서야 허락을 내리는 그녀의 목소리가 방 밖의 평부사에게 전해졌다.
“황후마마, 그간 평안하시었는지요.”
달갑지 않은 그 넉살은 여전했다. 들어서는 얼굴에 비친 웃음이 반가움으로 느껴져야 할 터인데 여전히 밉기만 하니 황후는 아예 적당히 시선을 피해버리는 쪽을 택했다. 그리고 눈치 좋은 평부사는 그런 아우의 속내를 이미 읽어냈다.
“아직도 저로 인한 노여움이 풀리지 않으신 모양이군요.”
“아시는 분이 어찌 또 찾아오셨답니까.”
“하하, 황후마마의 옥안이 뵙고 싶어 견딜 수가 있어야지요.”
“농은 되었습니다.”
“어찌 그리 안색이 어두우십니까. 폐하와 말다툼이라도 하신 것입니까.”
“언제 말다툼이나 할 정도로 제게 관심이 있으셨어야 말이지요.”
말을 맺기 무섭게 황후는 곧 후회했다. 제가 무슨 심정으로 이리 뿔이 났는지 결국 제 입으로 다 토설해버린 꼴이 되었다. 속내를 들켜버린 황후는 흐흠, 헛기침을 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 제가 쓰던 편지의 겉봉을 닫아 낙인으로 봉인하는 일을 계속한다. 평부사는 황후에게 들키지 않을 만큼 고개를 돌려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마마, 심려하시는 일이 있으시면 모두 제게 말씀하시라 진언드리지 않았습니까.”
“........”
“뭐, 이제 곧 마마께서 심려하실 일도 모두 없어질 테지만 말입니다.”
“그건 무슨 뜻입니까.”
여전히 의미심장한 미소를 흘리고 있는 제 오라비를 향해 궁금증 가득한 눈빛을 보내보지만 얻어지는 답이 없어 답답해 할 무렵, 차를 들이겠다는 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평부사와 황후 사이, 잠시간의 고요를 가르고 은이 들어와 다소곳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두 사람이 앉은 탁상 가까이로 와 다기들을 내려놓고 찻물을 우려냈다. 제법 능숙하게 아니, 이젠 손에 완전히 익은 일인 양 척척 제 몫의 일을 하는 모습을 황후와 평부사가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 은이 두 잔의 다기에 알맞게 찻물을 따라 내리는 것을 보며 황후가 입을 연다.
“거기까지, 되었으니 그만 나가 보거라. 필요한 것이 있으면 부르마.”
“예, 황후마마.”
은은 황후의 명령에 따라 찻주전자를 내려놓는다. 돌아서는 순간에 잠시 평부사의 차가운 미소와 마주했지만 은은 서둘러 방을 나섰다. 어쩐지 달갑지 않은 미소라 여기며 은은 밖으로 나오자마자 한숨을 돌렸다.
“저 아이, 한족(漢族)이 아니로군요.”
“그렇답니다.”
“허면 고 태감이 데려왔다던 공녀입니까.”
“..그리 들었습니다.”
평부사가 제 손에 집어든 다기 속 맑은 찻물을 들여다보다가는 흡족하다는 듯이 한 모금 음미하며 삼켰다. 저 아이가 고 환관이 데려온 공녀라면 분명 황제의 총애를 목표로 심어놓은 ‘그 아이’일 것임에 틀림없었다. 실제로도 그러했지만, 그는 마치 모든 것을 다 알겠다는 듯 황후를 향해 입을 열었다.
“소신 짐작하건데, 저 아이 역시 마마의 심기를 어지럽히는 원인이 되고 있진 않는지요.”
황후는 오라비의 어투에서 예리한, 그리고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거기까진 신경 쓰실 일이 아닙니다.”
“그렇습니까.”
“그보다, 평부사라는 것은 꽤나 한가한 직위로군요. 군사조직의 장이 이렇듯 차나 마실 수 있는 세상이라니.”
“하하, 그것도 오늘로 마지막일까 싶어 이리 들렀습니다. 폐하께서 직접 연금을 풀어주시고 지난 잘못을 덮어주겠다 하셨으니 넙죽 절이라도 올리고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가야지요.”
“잘 알고 계신 것 같으니, 전과 같은 실수는 없으시길 바라겠습니다.”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몇 가지 영양가 없는 사소한 집안 이야기들로 시간을 보낸 뒤 평부사는 이만 돌아가 보겠다며 일어선다. 시선조차 주지 않은 황후를 향해 목례를 한 평부사는 빈 찻잔을 내려두고 걸음을 돌리기 전 한 마디를 남겼다.
“헌데, 좀 전의 그 아이 말입니다. 태감이 들인 아이라면 좀 더 유심히 살피실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혹, 제 신세라도 한탄하여 귀한 차에 못된 장난을 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분명 절더러 들으라고 부러 그런 말을 흘리고는 뭐가 좋다고 웃으며 사라지는 오라비의 뒷모습을 내내 지켜본다. 뭔가 제가 모르는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이겠거니, 황후는 짐작해본다. 못된 장난을 치고 있는 쪽은 외려 제 오라비 쪽이겠거니.
//貢女 奇皇后//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게야..!”
“폐, 폐하...!”
옷자락을 펄럭이며 급히 걸음을 옮기는 황제의 뒤로 꼬리를 물듯 수많은 환관, 궁인들이 따르고 있었다. 노여움에 찬 목소리가 그가 가는 길목을 울리고, 발을 떼는 그의 뒤로는 고 환관이 바짝 뒤따랐다.
“성문 앞에 민중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 하옵니다. 폐하.”
“이유는! 이유가 무엇이라는 게야!”
“거기까진 미처.. 소신이 미욱한 탓이옵니다.”
그 사이 황제의 발걸음이, 성문을 내려다볼 수 있는 성내 전각에 다다랐다. 과연 새까맣게 운집한 민중들이 한 목소리로 무언가를 외치고 있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폐하! 소인들의 정성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수십, 수백에 가까운 민중들은 제각각 귀중품이 든 보따리나 짐꾸러미를 들고 황성을 향해 외치고 있었다. 태묘의 복건에 저들의 작은 힘이나마 기꺼이 보태겠노라고.
“폐하, 들리시옵니까. 저들이 모두 한 목소리를 내고 있사옵니다. 모두 폐하의 뜻대로 이루어지고 있사옵니다..!”
감격에 찬 누군가의 감탄 섞인 말에도 황제는 동요하지 않은 채 성문 밖의 모습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것은 내가 생각한 뜻이 아니다.”
그가 한 손을 들어 화답하자 민중들이 환호로 답했다.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그의 머릿속엔 자연히 누군가의 말간 얼굴이 그려졌다.
첫댓글 오늘처음댓글다는건데 1등으로달았네요ㅋㅋ
막 자운영 다 읽고 오늘 처음읽었는데 자운영만큼 재밌어요 ^^ 하지만 제발 마지막은 자운영처럼
세드앤딩이 아니였으면 좋겠어요ㅋㅋ신돈에서의 기황후는 손톱으로 양귀비찍어먹었는데ㅋㅋ
기은이도 황후가되서 그러면ㄷㄷㄷ..설마 그러지는않겠죠??
장미향기★ 님★ 자운영이라는 단어가 생소하리만치 오래된 이야기같은 느낌이 드네요^^ 아마 신돈에서의 모습과는 조금 닮았어도 다른 길을 가는 기황후가 그려질 것 같네요. 앞으로도 '공녀 기황후' 잘 부탁드려요, 꼬릿말 감사합니다^^
황제의 은에 대한 사랑이 더 깊어질 듯한 예감 ! ㅎㅎ
후안 님★ 그 예감이 부디 적중하셨길!ㅎ 다음화도 꼭 확인해주세요, 꼬릿말 감사합니다^^
와우 ㅋㅋㅋ 은이가 짱되겠네요 그나저나 찻잎은 어찌되는건가요
까불지마ㅋ 님★ 은이가 짱되길 저도 바라고 있겠습니다ㅎ 찻잎에 관한 부분은 앞으로의 전개분에서 드러날 예정입니다, 지켜봐주세요^^
은이 말한대로 되었네요ㅎㅎㅎㅎ 곧 애정이 물씬 담긴 씬을 볼 수 있을까요?? ㅎㅎㅎㅎㅎㅎㅎ다음편이 기대되네요!!
유리별미곰 님★ 애정이 물씬 담긴 씬이라면.. 아직은 기다려주셔야..;;ㅎㅎ 조만간에 찐하게 한번 담아봐야죠ㅎㅎ 다음화에서 뵐게요, 꼬릿말 감사합니다^^
이번화부터 찻잎사건이 일어날 줄 알았는데 ㅋㅋ 은에 대한 사랑이 더욱 갚어지겠군여ㅎㅎ 훈훈한 스멜이~~ㅎㅎ
헤르티아 님★ 찻잎사건ㅎㅎ 그렇게 금방 드러나진 않을거예요, 좀 더 지켜봐주세요. 훈훈한 스멜, 고대로 안고 좋은 결과가 되었으면 좋겠네요. 꼬릿말 감사합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별이 님★ 물론이지요. 께끗하게 단장된 후궁에 은이만 들어가면 되려나요, 다음화에서 뵙겠습니다. 꼬릿말 감사해요^^
은이가 역시..이제 황후와 은이만의 충돌이 남은건가요~ 몸조심하시구 건필하세용♡
황후랑 은이는 사이가 나쁜가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