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노 이혼, 유책과 파탄 사이
최태원·노소영 이혼재판의 재산분할 및 위자료 문제가 세간의 화제가 되면서 38년 전 내가 한국일보 사회부 법조기자였을 때 썼던 기사가 기억에 떠올랐습니다. 1986년 10월 11일자 사회면 톱기사로 오른 이 기사의 제목은 ‘부부관계 사실상 파탄 땐, 잘못한 쪽 청구로도 이혼’이었습니다.
천문학적 금액의 재산분할로 화제를 모으고 있는 이혼소송의 두 주인공 최태원 회장(외쪽)과 노소영 씨. <사진출처 : 뉴시스>
그때까지만 해도 이혼에 책임이 있는 배우자가 신청한 이혼청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남편의 외도가 주된 이혼의 사유였던 때에 남자의 이혼신청을 받아주면 아내의 권리를 보호할 길이 없다고 본 것입니다. 최소한 호구지책도 없이 아내를 집 밖으로 내몰지는 못하게 한다는 취지였습니다.
그런 시대에 가정법원이 외도로 가정을 파탄 낸 남편이 제기한 이혼소송을 받아들인 것이므로 상당히 시대를 앞선 판결이었습니다. 이 사건에서 남편은 아내에게 자신의 전 재산인 자신 명의의 아파트를 넘기고, 자녀의 양육책임을 지기로 했음에도 이혼요구를 거부하자 소송을 냈었습니다.
재판부는 이에 대해 “아내의 이혼 거부가 재결합의 의사보다는 금전적 요구가 목적인 것으로 판단된다”며 이혼을 허용했습니다. 유책 배우자의 이혼청구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유책주의에서 사실상 깨진 결혼은 인정하자는 파탄주의로의 전환을 선도한 판결로 주목됐습니다.
이 판결 이후 이혼청구사건에서 파탄주의를 용인하는 추세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그중에는 아내의 외도를 이유로 남편이 청구한 이혼소송도 더러 있었습니다. 최태원·노소영 이혼소송도 그 범주에 들겠습니다만, 유책배우자의 이혼청구를 받아들이지 않는 유책주의는 지금도 여전히 민법상의 원칙으로 남아있습니다.
최·노 이혼소송 이후, 노 씨는 일부일처제와 34년간 부부관계로 지켜온 가정의 가치를 중요시한 판결이라고 말했습니다. 이혼의 유책사유가 전적으로 최 회장의 외도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판결은 사실상 파탄주의에 의한 이혼 허용이면서, 재산분할과 위자료 산정에서는 엄중하게 유책주의를 적용한 케이스라고 하겠습니다.
2심은 최 회장의 보유재산가치를 4조115억 원으로 책정하고 이 중 35%에 해당하는 1조3,808억 원을 노 씨의 재산분배 몫으로, 20억 원을 정신적 위자료로 인정했습니다. 1심의 재산분배 몫 665억 원, 정신적 위자료 1억 원을 각각 20배로 늘린 겁니다. 국내 이혼 재판에서 사상 유례가 없는 천문학적 액수입니다.
최 회장의 유책사유 중에서 외도 외에 이렇다 하게 밝혀진 것은 없습니다. 노 씨에 대한 불만이 없지 않았을 터이지만 성격차이라고만 했습니다. 단순히 동거녀와 살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이혼을 청구한 꼴이니, 사회적으로 이혼의 적실성을 인정받을 여지 또한 적었습니다.
노 씨 측은 아버지 노태우 대통령의 후원이 있었기에 SK가 1992년 이동통신 사업에 진출, 오늘날 굴지의 통신회사가 될 수 있었다는 생각을 해왔던 터에, SK에 유입된 노 대통령의 비자금 300억 원이 직접적인 후원의 물증으로 2심 재판부로부터 인정받았습니다.
이에 대해 최 회장 측은 노 대통령의 이동통신 지원설에 대해선 오히려 특혜설로 인해 사업권을 포기하는 불이익을 당한 케이스라며, 최종 사업자 선정이 노태우 정부 뒤인 김영삼 정부 때 이뤄졌음을 강조했습니다.
당시 SK의 통신산업 진출이 기술과 자금 면에서 경쟁자들보다 나은 조건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김영삼 대통령 후보 시절 SK의 이동통신 사업자 선정이 일시 보류되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은 선거 전략상의 문제였지, 노태우 정부의 결정의 연장선에서 진행된 사업이라 함이 옳다고 봅니다.
두 사람은 노태우 대통령이 취임하던 1988년 현직 대통령의 딸과 재벌 아들로서 부러울 게 없는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SK 창업자인 최종현 회장 사후, 1998년 최태원 회장체제가 출범했고, 원로들의 자문과 임직원들의 헌신으로 SK는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그 기간의 상당부분을 두 사람은 부부로 살았으므로 노 씨가 최 회장 재산의 반분을 요구한 것을 과하다 할 수도 없습니다.
지금 SK는 법원의 판결로 보유지분을 팔게 돼 주주의 안정성이 위협받게 됐다고 걱정하고 있습니다. 또 선대의 경영 노력이 과소평가되었으며, 불법자금이 유입된 기업이라는 불명예를 안게 됐다고 판결에 불만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1, 2심 법원의 판단에 대한 최종적인 판단은 최 회장의 상고에 따라 대법원이 내릴 것이지만 대부분의 국민들은 아내와 자녀를 버린 최 회장의 처사에 대해 냉랭한 편입니다.
그렇다 해도 이 송사에는 아리송한 구석이 있습니다. 이혼의 귀책사유가 과연 최 회장에게만 있는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그가 밝힐 수 없지만 심저(心底)에 박혀있던 이혼사유는 없었을까 하는 의문입니다.
재판에서 드러난 노 씨 측의 최 회장 재산형성 기여 주장이 이혼 전부터 부지불식간에 내색됐던 것은 아닌지, 그것이 최 회장의 아내에 대한 불신과 공포의 원인으로 작용했던 것은 아닐까 추측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