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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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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찰 스크랩 미타도량 팔공산 은해사(銀海寺)
현림 추천 0 조회 317 15.12.11 22:55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미타도량 팔공산 은해사(銀海寺)

 

팔공산 은해사는 경상북도 영천시 청통면 팔공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신라원효스님의 탄생지인 경산의 제석사, 설총 선생이 성장지인 경산의 반룡사,

고려 일연스님께서 삼국유사를 편찬하신 군위의 인각사를 비롯하여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머물렀던 하양의 환성사,

청송 주왕산 대전사 등 40여개의 전통사찰을 말사로 거느리고 있는 조선 31본산이며,

또 경북 5대본산이며, 현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0교구 본산으로

경북지방의 대표적 사찰로 꼽히는 천년 고찰이다.

 

 

 

 

이 절(은해사)는 신라 헌덕왕1(809)년에 혜철국사(惠哲國師)가 해안평(海眼坪)에 창건한 사찰로,

처음에는 해안사(海眼寺)라고 불리었다.

그 뒤 1270(원종 11)에 홍진국사(弘眞國師)가 중창하였고, 1275(충렬왕1)에는 원참(元?)이 중건하였으며,

1485(성종 16)에는 죽청(竹淸)과 의찬(義贊)이 묘봉암(妙峰庵)을 중창하였다.

1543(중종 38)에는 보주(寶珠) 등이 중수하였으며, 1545(인종 1)에는

천교(天敎)가 지금의 장소로 법당을 옮겨 새로 절을 지었다.

그때 법당과 비석을 건립하여 인종의 태실(胎室)을 봉하고 은해사라고 하였다.

 

 

 

 

대구 동화사(桐華寺)와 더불어 팔공산의 대표적인 사찰로 보조국사 지눌(知訥)스님이

거조암에서 신행결사(信行結社)를 도모한 이래 주목을 받게 된 은해사는

특히, 홍진국사가 머문 뒤에는 선교양종(禪敎兩宗)의 총본산으로서 사격(寺格)이 고양되었고,

조선 후기의 고승 영파(影坡)가 이곳을 중창한 뒤로는 화엄교학(華嚴敎學)의 본산으로서 그 명성을 드날렸던 절이다.

 

 

(범종루)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지장전, 산령각(山靈閣), 설선당, 심검당, 단서각,

종루,보화루, 승당, 요사채, 객실 등이 있으며, 그 밖에 1999년 성보박물관이 완공되었다.

대웅전과 보화루의 현판은 추사(秋史)의 글씨라고 전해지며,

대웅전 안에 봉안되어 있던 극락구품회탱(極樂九品會幀)1750년에 성청(性淸)과 옥련(玉蓮)이 그린 뛰어난 작품이나

수년 전의 도난사건 이후 따로 보관하고 있다.

(현재의 극락보전이 바로 옛 대웅전인데 이는 2008년 중수할 때 전각명을 바꾸었다.)

 

 

(청동북)

 

 

 

그리고 이 절과 부속 암자에는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3점의 문화재와 기타 60여 점의 사중 보물, 24동의 건물이 있다.

지정문화재로는 중국식 건축양식을 본뜬 국보 제14호의 영천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

보물 제486호인 영천 은해사 백흥암 수미단(須彌壇), 보물 제514호인 영천 은해사 운부암 금동보살좌상 등이 있고,

산내 암자로는 운부암, 거조암, 기기암, 백흥암, 묘봉암, 중암암, 백련암, 서운암 등이 있다.

 

 

(호연당) 

 

은해사는 특히 교구 본사 중 본존불로 아미타불을 모시는 미타도량으로도 유명하다.

신라 41대 헌덕왕 1(809) 혜철국사가 해안평에 창건한 사찰 해안사(海眼寺)로부터 비롯된 은해사(銀海寺)

, 보살, 나한 등이 중중무진으로 계신 것처럼 웅장한 모습이

마치 은빛 바다가 춤추는 극락정토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또 은해사 주변에 안개가 끼고 구름이 피어 날 때면 그 광경이 은빛 바다가 물결치는듯하다고 해서 은해사라고도 한다.

신라의 진표율사는 한길 은세계가 마치 바다처럼 겹겹이 펼쳐져있다(一道銀世界 如海重重)

라고 표현한 바 있다 

 

(조사당)

 

은해사는 현재 말사 39개소, 포교당 5개소, 부속암자 8개소를 관장하고 있는 대본사이다.

1943년까지만 하더라도 은해사에는 건물이 35245칸에 이르러 대사찰의 위용을 자랑했지만,

현재 은해사 본사내에는 19개 건물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단서각(單捿閣)

가람의 명칭 중에 단서각이란 전각은 생소하여 조사해 보았더니 나반존자를 모시는 독성각의 다른 이름이다.

나반존자는 독성수(獨聖修) 또는 독성존자(獨聖尊者)라 불리는 나한이다.

말법시대에서 미륵불이 출현하기 전까지 중생들에게 복을 주고, 재앙을 없애주고, 소원을 들어준다는 나한이다.

독성(獨聖)이란 말은 홀로 인연의 이치를 깨달아서 도를 이룬 소승불교의 성자들에 대한 통칭으로 사용되었으나,

나반존자(那畔尊者)홀로 깨친 이라는 뜻에서 독성 또는 독성님이라고 부르고 있다.

 

 

나반존자라는 명칭은 석가모니의 10대 제자나 5백 나한의 이름 속에 보이지 않고,

불경 속에서도 그 명칭이나 독성이 나반존자라는 기록을 찾아볼 수 없으며,

중국의 불교에서도 나반존자에 대한 신앙은 생겨나지 않았다.

나반존자에 대한 신앙은 오직 우리나라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신앙형태이다.

우리나라 사찰에 모셔지는 나반존자의 모습은 하얀 머리카락을 드리우고 있으며,

눈썹은 매우 길게 묘사되어 있고 미소를 띤 경우가 많다.

 

이에 대해서 최남선(崔南善)절의 삼성각(三聖閣)이나 독성각(獨聖閣)에 모신

나반존자는 불교의 것이 아니라 민족고유신앙의 것이다. 옛적에 단군을 국조로 모셨으며,

단군이 뒤에 산으로 들어가서 산신이 되었다고도 하고 신선이 되었다고도 하여 단군을 산신으로 모시거나

선황(仙皇)으로 받들었다. 그래서 명산에 신당을 세우고 산신 또는 선황을 신봉하여왔는데,

불교가 들어오면서 그 절의 불전 위 조용한 곳에 전각을 세우고 산신과 선황을 같이 모셨으며,

또 중국에서 들어온 칠성도 함께 모셨다.”라고 하였다. 이는 나반존자상을 단군의 상으로 파악한 것이다.

 

 

그러나 불교계 일부에서는 나반존자를 모신 독성각 건립에 대한 기록이 조선 후기에만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불교의 전래시기에 이를 포섭하여 모신 것으로는 보지 않고 있다.

그리고 나반존자를 말세의 복밭으로 보고, 복을 줄 수 있는 아라한의 한 사람으로 신앙하고 있으므로,

18나한의 하나인 빈두로존자(賓頭盧尊者)로도 보고 있다.

특히, 사찰에서는 독성기도(獨聖祈禱)를 많이 올리고 있는데,

이는 나반존자의 영험이 매우 커서 공양을 올리고 기도하면 속히 영험을 얻게 된다는 데 기인한다.

이는 독성기도를 올릴 때 외우는 찬송 가운데

나반존자의 신통이 세상에 희유하여 행하고 감추고 변하기를 마음대로 한다.”고 한 구절 속에서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나반존자는 삼명(三明)과 자리이타(自利利他)의 능력을 지니고 있는 아라한으로 알려져 있다.

삼명(三明)은 과거를 꿰뚤어보는 숙명명(宿命明), 미래를 통찰할수 있는 천안명(天眼明),

현세의 번뇌를 끊을 수 있는 누진명(漏盡明)을 말한다. 자리이타(自利利他)는 나와 남을 다 이롭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나반존자는 사찰의 독성각 또는 삼성각에 봉안되며, 독성각에는 나반존자상이나 탱화를 단독으로 모시고,

삼성각에는 칠성·산신 등과 함께 모시고 있다.

 

산신각

 

 

 

 

 

 

 

@은해사 대웅전은 2008년 새로 중수하면서 극락보전으로 바뀌고 주련도 바뀌었다.

지금의 극락보전의 주련은 제1회대한민국미술대전(1982) 대상자였던 소헌(紹軒) 정도준(鄭道準)씨가 썼다.

 

<극락보전의 주련>

極樂堂前滿月容(극락당전만월용)

玉毫金色照虛空(옥호금색조허공)

若人一念稱名號(약인일념칭명호)

頃刻圓成無量佛(경각원성무량불)

 

서방정토 극락세계 만월같은 아미타불

금빛몸 백호광명 온 세상을 비추네

누구나 일념으로 아미타불 부르면

찰라에 무량공덕 원만히 이루리라

 

 

@삼장보살탱화(三藏菩薩?畵)

경북도 유형문화제 제342. (견본) 287x235cm 영조31(1755)조성.

상단 중앙에는 천장보살(天藏菩薩), 좌측에는 지지보살(地持菩薩), 우측에는 지장보살(地藏菩薩) 세분을,

하단에는 각 보살의 협시(脇侍)를 모신 불화(佛?)이다.

천장보살은 대비력(大悲力), 지지보살은 지행력(智行力), 지장보살은 서원력(恕願力)을 표상하시는 분이다.

 

 

 

 

 

 

 

@후불탱화(後佛?畵)에는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을 모셨다.

아미타불 뒤에는 신광(身光), 모란꽃, 연꽃, 극낙조가 도안되어 있다.

 

<원 대웅전 주련>

佛身普照十方中(불신보조시방중)

三世如來一體同(삼세여래일체동)

廣大願雲恒不盡(광대원운항불진)

汪洋覺海渺難窮((왕양각해묘난궁)

 

부처님 법신은 시방에 두루하시니

삼세여래도 모두 한결같으시네

광대한 서원의 구름은 항상 다함이 없으시고

드넓은 깨달음의 바다는 아득하여 헤아리기 어려워라.

출처: 석문의범(釋門儀範)/대한불교진흥원<한국사찰의 편액과 주련>>에서

 

 

 

설선당

 

지장전

 

 

 

 

 

 

 

 

 

 

 

 

 

 

 

 

 

 

 

 

 

 

 

 

 

 

 

 

 

 

 

 

 

 

<불광(佛光)>

은해사에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글씨들이 많이 남아 있다. 불광(佛光), 대웅전(大雄殿), 보화루(寶華樓), 은해사(銀海寺), 일로향각(一爐香閣), 산해숭심(山海崇深) 등 추사글씨의 야외전시장으로 불릴 만큼 많은데 은해사에 남아 있는 추사의 글씨들은 추사가 제주도 유배를 끝낸 1848년부터 북청으로 재차 유배를 가게 된 1851년 사이의 작품으로 이 당시 추사의 나이가 60을 넘긴 시기였으므로 글의 완숙미가 최고였을 때였다. 은해사의 성보박물관에 들어서면 입구에 <佛光>이란 편액이 제일먼저 눈에 들어오는 데 편액치고 그 생김이 특별하다. 佛光에 얽힌 일화를 소개한다.

 

은해사가 1847년 대화재를 당한 이후 1849년에 중건불사를 하게 되었는데 이때 불광각(佛光閣)의 편액에 걸기 위한 글을 추사에게 부탁하여 받은 글씨가 바로 佛光이다 

당시 은해사 주지가 추사에게 불광각에 걸 글을 부탁했는데 며칠이 지나도 소식이 없자 주지가 직접 추사를 방문했더니 추사는 벽장문을 열고 그곳에 가득히 쌓인 불광이라는 여려 글씨 중 제일 마음에 드는 한 폭을 건네주었다. 이를 받아든 주지는 돌아와서 편액으로 만들고자 했더니 佛光가 무려 세로가 130cm나 되어 편액으로 걸기는 부적합하여 가로세로비를 맞추어 짤라서 편액으로 걸었다. 후일 이 소식을 들은 추사는 사람을 시켜 편액을 떼오라고 해서 마당에서 불태워 없애버렸다고 한다. 주지가 이 소식을 듣고 달려 나와 추사에게 사죄하고 다시 추사가 처음 건네 준 글씨 원본대로 편액을 만들어 걸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지금 은해사에는 그 불광각이라는 전각은 남아 있지 않고 그 편액만 성보박물관에 보존하고 있다.

 

@괘불 보물제1270

 

업경대

 

@빗모란꽃살문

 

@은해사 청동북 및 북걸이(금고및금고거) 보물제1604

 

 

 

 

 

 

 

천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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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5.12.12 07:17

    첫댓글 _()_나무 아미타불,

  • 15.12.12 07:49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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