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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01. 필리핀 해 해전(Battle of the Philippine Sea)
태평양 전쟁 기간 중, 1944년 6월 19일∼20일 마리아나 제도 부근 해상에서 미국 해군과 일본 해군 사이에 벌어진 해전이다.
미군의 진공이 일본의 절대방위선인 마리아나 제도에 도달하자, 일본군은 그 동안의 침묵을 깨고 절치부심해서 재건한 함대항공력을 총동원해 미 함대를 공격한다. 그리하여 1944년 6월 19일에 미국 해군의 레이먼드 스프루언스 제독 휘하 태평양 함대 소속 제58기동부대와 일본 해군의 오자와 지사부로 제독 휘하 제1기동함대가 필리핀과 마리아나 제도 사이의 해상에서 맞붙었다.
태평양 전쟁의 주요 해전사를 조망하는 시각에서 보면 과달카날 전역의 산타크루즈 해전 이후 미국 해군과의 정면충돌을 피하던 일본 해군의 항모부대가 다시 전면에 등장한 전투다.
인류 역사상 역대 해전사로 확대해 보면 5번째로 벌어진 함대항공전이자 역대 최대 규모의 함대항공전이며 동력선이 해군의 주력 장비가 된 이후에 벌어진 해전들 중에서는 사상 3번째로 큰 규모의 해전이다.
이 전투의 결과 일본 해군은 사실상 몰락해버렸고 미군은 일본 본토침공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이 전투 이후의 태평양 전쟁의 경과를 살펴볼 때, 어떤 의미에서는 일본 해군이 주야장천(晝夜長川) 생각하던 결전과 다를 바 없는 해전이었다.
중요성에 비해 국내에서는 의외로 지명도가 낮은 편이라 미국 측이 붙인 별칭인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The Mariana Turkey Shoot)’ 또는 일본 측 명칭인 ‘마리아나 해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일본에서 필리핀 해 해전이라고 하면 필리핀 탈환전에서 일어난 해전을 말한다. 문제가 있다면 일본에서 부르는 필리핀 해 해전은 일본군 해군이 사실상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전환점을 맞이하고 과달카날 전투로 대변되는 솔로몬 전역의 소모전 이후로, 태평양전쟁은 줄곧 미군의 일방적이고도 착실한 공세 일변도였다. 과달카날 전투 이후로 쏟아져 나온 미국의 물량은 이러한 미군의 공세를 든든하게 뒷받침했다. 게다가 신병기들은 물량뿐만 아니라 퀄리티도 일본군의 그것을 압도했다.
미군의 진격은 크게 두 갈래로 이뤄졌는데, 하나는 미 해군 함대 총사령관 겸 참모총장 어니스트 킹 제독이 입안하고 태평양 함대 사령관 체스터 니미츠 제독이 실행을 총괄하던 중부태평양 돌파이고, 다른 하나는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주장한 육군 위주의 뉴기니-민다나오 축선으로의 진격이었다. 전자는 중부 태평양 한가운데의 섬들을 하나하나 점령하여 이를 발판으로 남아있는 일본 함대의 활동을 제한하여 상륙군의 안전을 확보한 뒤, 대만과 중국을 거쳐 일본으로 향하는 것이었고, 후자는 태평양 남서쪽에 띠처럼 이어진 섬들을 따라 북상하여 필리핀을 재탈환하고 미군이 일본에게 필리핀을 빼앗기기 전에 지어두었던 군사시설과 일본군이 새로 지어둔 군사시설을 확보하여 필리핀을 병참기지화 시킨 뒤, 여기서 단번에 일본으로 진격하는 안이었다. 이 두 가지 작전은 둘 다 그럴듯한 명분과 실질적 이득이 있었기 때문에 서로 절충점을 찾지 못했고, 결국 두 가지 안 모두 실행하는 것으로 결론이 난다.
그리고 그 다툼의 와중에 어니스트 킹 제독은 미 육군항공대의 지지를 얻고자 마리아나 제도의 점령을 제시하게 된다. 마리아나 제도는 미 해군 입장에서는 일본 본토 침공을 위한 훌륭한 전진기지가 될 수 있었고 미 육군항공대 입장에서는 B-29의 안정적인 작전기지가 될 수 있었다. 서로의 이해가 맞아떨어지면서 1944년 6월을 예정으로 마리아나 제도 침공이 결정되었다.
마리아나 침공을 총 지휘할 현장 지휘관은 미드웨이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레이먼드 스프루언스 제독이었다. 당시 그는 중부태평양해역군의 총지휘관이었으며 그의 휘하에는 강력하고도 거대한 항모기동부대, 상륙부대, 보급부대들이 있었다.
중부 태평양 돌파의 핵심 전력인 항모기동부대 제58기동부대의 지휘관은 마크 미처 제독이었다. 사실 그는 스프루언스 제독과는 불편한 관계에 있었다. 미드웨이 해전에서의 삽질과 보고 누락 및 은폐로 인해 당시 직속상관이었던 스프루언스의 눈밖에 나버렸던 그는 한동안 수상기 기지 사령관 등 한직을 전전해야 했다. 당시 이제 막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한 항공병과 안에서는 주요 인재였기 때문에 얼마 안가 과달카날 등 주요 전장에 배치되긴 했지만 항모기동부대 근처에는 얼씬도 못했다. 그러나 1943년 11월의 길버트제도 침공 작전에서 그 당시 막 몸집을 불린 항모기동부대의 소극적인 운용과 미숙함이 드러나자 윌리엄 홀시 제독을 비롯한 항공병과 제독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아서 항모기동부대에 복귀하게 되었다. 이른바 미처 샴푸로 불리는 미처 제독 특유의 공세적인 항모운용이 마셜제도 침공과 트럭환초 공격에서 진가를 발휘하자 스프루언스도 그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미처 제독 말고도 제58기동부대에는 그 당시 미 해군 안에서 쟁쟁한 인재들이 포진해 있었다. 전쟁초기에 일본해군의 등쌀에 기를 못 펴던 미 해군 구축함대에 새로운 전술로 구축함대의 진가를 되살린 알레이 버크 제독이 미처 제독의 참모장으로 있었으며, 휘하 참모들과 항모 전단장 및 각 항모의 함장들 또한 유능한 인재들로 채워져 있었고, 항모들의 호위역인 고속전함부대는 과달카날 해전에서 승리한 윌리스 리 제독이 지휘하였다. 이들 휘하의 영관급 지휘관들도 유능함으로 따지면 순위권에 드는 인재들이었으며, 심지어 미처 제독 옆에는 일본군의 무선 감청 내용만 전문적으로 분석하여 보고하는 전담 장교가 붙어 있었다.
이렇게 덩치뿐만 아니라 실력까지 끌어올린 미 해군 항모기동부대는 1944년 들어서 일본군의 외곽 방어선을 마구 뒤흔들어 놓는 대활약을 벌이게 되었다.
과달카날 전역에서 패한 일본군은 양 갈래로 다가오는 미군의 진공을 막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를 위해 일선 부대를 보강하고 국지적으로나마 반격을 꾀하기도 했지만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으며, 그 와중에 손실은 계속 쌓여만 갔다. 게다가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전선 시찰을 나갔다가 미군에게 전사했다. 전선의 규모가 자신들의 능력을 초과했음을 깨달은 일본군은 1943년에 절대방위선을 정하고 방어를 강화하려 했지만 1944년 초에 이르자 결국 지금껏 누적된 피해를 제대로 보충하지 못하면서 미군과 전력차이가 크게 벌어지게 된다. 그래도 미군이 진격해오려면 시간이 걸릴 거라는 일본군의 예상과는 다르게 전선도 빠르게 밀려나서 1944년 2월초에 마셜 제도가 사실상 미군의 손에 떨어졌고, 일본군의 진주만이었던 트럭 환초는 2월 중순에 미 해군 항모전단의 공습에 박살나 버렸다. 연합함대의 주력은 미군의 공격을 간신히 피했지만 중요 근거지였던 트럭 환초와 캐롤라인 제도 일대를 버리고 필리핀 동쪽, 서부 뉴기니 북쪽에 위치한 팔라우로 도망가야만 했다. 이미 43년 말에 동부 뉴기니 일대와 솔로몬 제도 일대가 대부분 연합군 손에 떨어진 상황에서 후방기지인 트럭 환초가 박살나자 이 일대를 담당하는 일선 전진기지였던 라바울은 매일같이 미군의 공습에 시달리는 신세가 되면서 기능을 잃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중국 동부와 동남아시아 지역을 여전히 차지하고 있었고 서태평양 지역의 제해권 역시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본토와 남방 자원 지대 사이의 해상 교통로는 미군 잠수함들의 통상파괴활동에 의해 크게 위축되었다. 이로 인해 본토의 물자 부족, 특히 식량 부족이 점차 가시화되기 시작했으며 군수품 제작에 필요한 석유, 고무, 철광석, 구리, 주석의 유입도 급감했다. 본토에서 일선부대로 가는 군수품 보급 역시 타격을 입게 되었고, 이는 연합함대를 위시한 일본해군의 움직임에도 영향을 주게 된다.
하지만 일본군의 저항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격전을 거치면서 와해되어 버린 항모 전대를 재건하려는 움직임은 계속 이어져서 함대결전에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연료나 낭비하며 연합함대 사령부의 호텔 노릇이나 하던 제1함대가 44년 2월 드디어 해대되고 3월에는 제1기동함대가 주력함대로 새로이 편성, 그 지휘관으로 오자와 지사부로 중장이 임명된다. 그는 수상함 경력만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항공 전력에 관심이 커서, 진주만 공습과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 해군의 주역이었던 항모 기동부대 제1항공함대의 탄생에 큰 역할을 한 바 있을 정도였다. 연공서열만 아니었으면 태평양 전쟁 발발 당시에 일찌감치 항모 기동부대의 지휘관이 되었을 인물이었다. 또한 이 항모전대를 지원하기 위한 지상 발진 항공기 부대 신편 제1항공함대를 창설하였다. 이른바 Z계획에 의한 지상 발진 항공기 부대 편성은 항모 전대 재편성 이전부터 시작되었으며 태평양 일대의 기지 항공대를 통합한 단일 지휘체계 아래 주요 거점에 배치하여 항모 전대와 함께 미군의 진격을 저지한다는 것이었다. 지휘관은 산타크루즈 해전에서 미 함대에 끈질긴 공격을 가해 호넷을 격침시킴으로서 미군 장교들 사이에 깊은 인상을 남긴 가쿠다 가쿠지 중장이었다.
야마모토의 후임인 고가 미네이치 제독은 제1항공함대의 지원 아래 제1기동함대를 주력으로 삼아 뉴기니 북쪽의 팔라우를 기점으로 미군의 공세에 대비하려 했으나 일본군의 예상을 훨씬 앞지른 미군은 1944년 3월 말에 팔라우를 공격 하며 고가의 시도는 좌절되고 본인마저 실종되고 만다. 그 와중에 고가의 부관이 연합군의 포로로 잡히면서 일본군의 방어계획이 미군 손에 들어갔다.
고가의 후임인 도요다 소에무 제독 역시 위와 비슷한 계획을 수립했으나, 문제는 미군이 언제 어디서 들이닥칠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남으로는 동부 뉴기니 일대를 장악한 맥아더가 1944년 4월에 서부 뉴기니의 거점이었던 홀랜디어(이리안자야)를 침공하면서 서부 뉴기니를 넘보기 시작했고, 동으로는 미 항모부대가 4월말까지 마리아나 제도와 팔라우, 캐롤라인 제도를 폭격하고 맥아더의 홀랜디어 침공작전을 지원한 뒤 돌아가는 길에 트럭을 다시 공격하여 2월 중순의 폭격이 끝난 뒤에 충원되었던 항공대마저 무력화 시키는 등 중부태평양과 서남태평양 일대에서 그야말로 한바탕 난리를 쳤던 판이었다. 이 때문에 그는 동년 5월에 연합함대의 주력을 모든 방면에서 대응 가능한 한편, 인근에 질 좋은 유전이 있어서 본토로부터의 연료 보급으로부터도 어느 정도 자유로운 타위타위로 옮기게 된다. 이것이 직간접적으로 패착이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1944년 5월말, 맥아더는 홀랜디어 북쪽 인근의 비약(Biak) 섬을 침공했다.
그러자 일본 해군의 시선은 일제히 팔라우와 필리핀 남부의 민다나우 그리고 서부 뉴기니 일대로 집중되었다. 안 그래도 캐롤라인제도 부터 서부 뉴기니까지 미 항모부대가 한차례 휩쓸고 갔던 상황이어서 미 해군의 주력도 이쪽으로 올 것이라 예상하던 차에 서부 뉴기니 일대, 특히 비행장이 있는 비약을 잃게 되면 팔라우 일대에서 미 해군을 저지하는데 심각한 차질이 벌어지리라 생각했다. 이에 따라 일본 해군은 이 해역에 잠수함들을 집중 배치하는 한편, 비약 섬에 항공기를 증원하고 연함함대로 하여금 비약 섬에 지상병력(해군육전대)을 증원하는 ‘혼작전’을 벌인다. 하지만 이 모든 시도는 결과적으로 마리아나 제도에 대한 방어를 약화시키는데 일조했다.
이 해역에 일본군 잠수함들이 배치된 것을 알아차린 미군은 적극적인 대잠작전에 나서게 된다. 일본군은 전쟁 기간 내내 일정 패턴을 따라 잠수함을 배치시키곤 했다. 미군은 팔라우 일대에서의 일본군 잠수함 배치 패턴을 파악했고, 일선 대잠작전에 투입된 미군 구축함들은 일본군 잠수함의 위치를 손쉽게 알 수 있었다. 5월부터 7월까지 이뤄진 이 대잠작전에서 일본군이 이 일대에 투입한 잠수함 26척 중 총 17척이 손실되었다. 이 바람에 일본군 잠수함대는 완전히 무력화 되었고, 본 게임인 필리핀 해 해전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이 작전 도중 미 해군 호위구축함 잉글랜드는 12일간 일본군 잠수함 6척을 격침시키고 대통령 표창까지 받게 되며 킹 제독은 이 소식에 ‘잉글랜드라는 이름은 미 해군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라는 말도 남겼다.
항공기 증원 역시 그대로 손실로 이어졌다. 5월에서 6월초에 비약 섬으로 증원된 항공기는 합계 220여대에 이르렀으나, 대부분 격전 와중에 손실되었다. 이 증원은 제1항공함대가 주력이었는데, 제1항공함대는 안 그래도 원래 계획대로 준비되지 않았던 데다 맥아더의 공세가 시작되기 전부터 미군의 공세에 대응하려 여기저기 분산 투입되면서 계속 손실이 쌓여가던 참이었다. 결국 필리핀 해 해전 발발 시점에서 제1항공함대는 제1기동함대에 대해 제대로 된 지원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이 항공기들이 비약 섬으로 향하지 않고 마리아나 제도로 배치되었다면 전투 발발 시점에서 지상기지들이 나름 대항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제1항공함대를 창설하던 당시 최초 목표는 1,500대의 대규모 편제였으나, 항공기 생산량이 일선의 소모율을 감당하지 못했다. 미 함대가 마리아나 제도에 들이 닥치던 당시 제1항공함대의 총 보유전력은 560대에 불과했고, 그 중 마리아나 제도에 배치된 건 136대에 불과했다. 이후 타 기지에서 증원을 받아서 250대 가량의 일본기들이 지상기지를 거점으로 본 전투에 참가한다.
이로 인해 일본 해군/연합함대가 구상하던 미 해군과의 결전 계획은 본 게임이 시작되기 전부터 어긋나 버렸다.
수상함들을 이용한 지상병력의 증원은 미군 잠수함의 감시로 인해 실패하고 만다. 이미 미군은 암호해독을 통해 연합함대의 전반적인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었고, 이에 따라 배치된 미군 잠수함들은 연합함대가 타위타위 및 그 일대에 들어서자 연합함대의 일거수일투족을 낱낱이 감시하여 미군 수뇌부에 보고하고 있었다. 이 잠수함들은 단순한 감시역할로 그치지 않고 여차하면 일본군 수상함정들을 공격하곤 했다. 비약 섬으로 향하던 일본 함대 역시 이들에 의해 낱낱이 감시당했고, 이 정보를 바탕으로 반격에 나선 미군에 의해 쫓겨나고 말았다.
이들 미군 잠수함들의 존재는 타위타위로 이동한 제1기동함대에도 악영향을 끼쳤다. 타위타위에는 지상비행장이 없었으므로 모든 비행훈련이 항공모함에서 이뤄져야 했는데, 잠수함들 때문에 항공모함들은 도저히 출항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맥아더의 공세에 일본 해군/연합함대가 남태평양에 시선을 뺏긴 사이, 중부태평양을 가로질러서 미 해군의 진짜 주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1944년 6월 6일 마셜 제도에서 미국의 제58기동부대가 출격하여 마리아나 침공 부대가 출발하던 11일경에 마리아나 제도 인근에 도착했다. 58기동부대는 도착과 동시에 마리아나 제도의 일본군 지상비행장들을 쑥대밭으로 만들면서 이 일대 일본군의 항공전력을 일소해 버리고 제공권을 장악했다. 미군의 주장에 따르면 이때 일본군이 입은 항공기 피해는 적어도 150대 정도이다. 이후 사이판 전투가 개시될 때까지 마리아나 제도의 일본군 지상 시설과 해상세력은 일소되었으며, 마리아나 제도 북쪽의 이오지마와 보닌 제도 역시 함대를 일부 보내서 무력화시키면서 일본군 항공전력의 증원을 막았다. 이로 인해 제1항공함대가 어찌어찌 끌어 모은 지상기지의 항공기들은 대부분 무력화되었다.
일본군은 9일에 58기동부대의 출격을 파악하고 계속해서 정찰기를 보내 58기동부대의 위치를 파악하려고 시도했다. 13일에 마리아나 제도가 본격적으로 공격받자 연합함대는 크게 충격을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들이 예상하던 미 해군의 공격방향이었던 팔라우 동남부 해역보다도 훨씬 북동쪽, 거기에다 일본 본토와의 거리 역시 상대적으로 가까운 곳을 아직 방어준비가 덜된 상태에서 기습했기 때문이다. 그때서야 미 해군이 중부 태평양을 침공루트로 삼았음을 알게 된 연합함대는 비약 섬으로 보낸 함대를 부랴부랴 불러들였고, 제1기동함대의 출격을 명령했다. 물론 이들의 행적은 미군 잠수함들에게 계속 감시당하고 있었다.
18일에 이르자 양 측의 정찰기들이 교전을 벌일 수준으로 근접했다. 그리고 운명의 19일이 밝아왔다.
일본 해군에서도 몇 안 되는 유능하고 합리적인 지휘관 중 한 명이었던 오자와 제독은 일본 함재기의 유일한 장점인 항속 거리(100Km 이상 우위에 있었다)를 이용해 미 함재기의 항속 거리 밖에서 치고 빠지는 아웃레인지 공격을 구상했다. 더불어 신중한 스프루언스 제독이 상륙함대의 보호를 위해 상륙지에서 멀리 벗어나지 않으려 한다는 심증까지 정확하게 꿰뚫었다. 그러나 미군의 전력 규모에 대해서는 자신들처럼 항모 3척이 1개 전단을 이룬다고 생각하여 15척이 아닌 12척으로 실제보다 낮게 파악하고 있었으며, 미군 지휘관이 스프루언스 대장이었기에 미드웨이 해전 당시처럼 복수의 기동함대로 분산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공교롭게도 스프루언스 대장 또한 이때까지의 경험을 토대로 일본 함대가 분산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에 대응하여 경항모 치토세, 치요다, 즈이호 3척을 중심으로 그 호위로 이제까지 호텔 노릇이나 하던 잉여였던 야마토급 전함 야마토, 무사시를 배치한 C부대를 전방에 내세우고, 약 190Km 후방에 정규 항공모함인 다이호, 쇼카쿠, 즈이카쿠로 이루어진 핵심전력인 A부대와 개조항모 히요, 준요, 그리고 경항공모함 류호로 이루어진 B부대를 통합 운용했다. 이 배치를 한 이유는 전방 C부대의 전함과 순양함의 정찰기 세력을 적극 활용하여 미군을 먼저 찾는 한편, 미군이 공격해올 경우 C부대를 통해 미군의 공격력을 흡수하여 주력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만약 미군이 실제로 공격에 나설 경우 십중팔구 전방부대와 교전이 발생할 것이고 C부대가 미군의 공격을 받아내는 동안 후방의 주력부대는 안전한 상태에서 58기동부대를 공격할 수 있을 것이며 설령 미군이 후방의 주력함대를 알아채고 공격대를 보내더라도 전방부대의 요격망을 뚫고 공격해야 하는 위험을 부담해야 하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마주칠 전방부대의 요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거기에 괌에 있는 지상발진 항공대 또한 여유 있게 미군 함대를 공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하지만, 이 진형은 안 그래도 부족한 구축함들을 분산시키는 꼴이어서 대잠에 취약했고 이는 나중에 비극을 초래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공세에 나설 때는 복수로 분산(했다고 생각)한 미군의 양동작전에 대비해, B부대의 함재기를 예비로 두고 나머지 병력을 모두 공격에 투입하기로 했다. 다만 이때 자신의 함재기를 4파로 분리해 제파식으로 출격하게 했는데, 제파공격 자체는 한 번에 지나치게 많은 공격기들이 달려 나가 몇몇 표적만을 지나치게 집중공격 하는 걸 막기 위한 지극히 상식적인 조치였다. 하지만, 수적 열세와 조종사들의 기량 문제를 정확하게 깨닫지 못한 것이 결과적으로는 실수가 되고 말았다.
한 가지 참고할 것은 본 해전에서 오자와는 함대를 세 개 부대로 갈랐지만 실질적으로는 통합하여 운용하였다. 오자와는 휘하 부대가 독단적으로 공격에 나서는 것을 철저히 통제했으며 3개 부대가 사실상 한 덩어리가 되어 움직였다. 이는 상대방인 미 해군의 스프루언스 제독이 본 해전에서 오자와를 상대했던 방법과도 같으며, 또한 이때까지 연합함대가 구상하던 것과는 달랐다. 태평양 전쟁 기간 중 일본 해군은 부대를 세분화하고 여러 방향에서 적을 공격하는 전법을 사용했다. 앞서 미군에 노획된 작전 문서에 담긴 방어 계획도 이런 식이었다.
또 하나 참고할 것은 오자와는 괌을 비롯한 마리아나 일대의 지상기지를 자신들 함재기들의 작전 거점으로 활용하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항모에서 발진한 함재기들이 미 함대를 공격한 뒤에 마리아나 일대의 지상기지에 착륙하여 연료와 무장을 보급 받고 다시 미 함대를 공격한 뒤에 항모로 복귀하는 이른바 왕복폭격을 구상했다고 알려져 있다. 실제로 오자와 휘하의 부대장 중 하나가 미 함대 발견 직후 이 생각으로 공격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오자와는 이러한 부하의 시도를 막았다. 오자와는 왕복폭격에 별 기대를 하지 않았으며, 공격에 나선 함재기들의 사정이 여의치 않을 때나 지상기지로 향하는 정도만 허락했다.
오자와는 마리아나 일대의 지상기지는 가쿠다 중장의 제1항공함대의 작전기지로 인식하였으며, 함재기로 공격에 나설 때 제1항공함대와 협력 하에 함재기와 지상기지의 항공기들이 미 함대를 협공하는 걸 우선시하였다.
오자와가 선공에 나선 것은 초기 항모전의 상식인 ‘선공이 최고다.’라는 사상이 한 몫 한 걸로 보인다. 오자와 역시 파일럿들의 기량문제를 완전 모르지는 않았겠지만, 일단 선공을 걸면 미군이 방어측이 되므로 기량차이는 극복할 수 있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일본군은 해전에 돌입하기 전 색적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오자와 기동부대가 미군 항모전단을 발견하고 공격대를 띄운 시점에서 미군은 아직 오자와 기동부대의 정확한 위치를 찾지 못한 상태였다. 다시 말해서 먼저 보고 먼저 쏜 상황이라고 판단한 것. 게다가 앞서 언급되었듯이 미군의 실제 규모는 파악하지 못한 채 수적으로 그리 꿀리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도 선제공격을 결심하는데 한몫했다. 그래서 전투 초반에 오자와 기동부대의 참모진들은 꽤나 낙관적인 전망을 갖고 있었다.
문제는, 미군이 일본 함대의 정확한 위치를 찾지는 못했지만 앞서 언급했듯 스프루언스 대장이 이때까지의 경험을 토대로 일본군이 양동으로 수송함대를 공격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상륙함대의 안전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기에 공격적인 미처 제독을 통제하기 위해서 직접 지휘한다는 것이다.
미군의 경우 전투 돌입 전까지 일본군과의 교전을 어떻게 진행할 것인가에 대해 갈등이 있었다.
마리아나 제도 공격의 총사령관인 스프루언스 제독은 오자와 제독의 예상대로 상륙지의 엄호를 위해 함대가 처음 자리 잡은 위치에서 멀리 벗어나지 않으려 했다. 그는 마리아나 제도 공격 전체를 책임진 입장에서 일본함대와의 전투보다 상륙함대의 엄호를 우선시했다.
반면 58기동부대의 지휘관인 미처 제독은 적극적으로 일본군을 찾아서 공격하려고 했다. 실제로 17일에 무선감청과 잠수함의 감시를 통해 일본함대의 존재가 확인되자 그는 휘하의 고속전함들로 하여금 일본함대와 야간전을 벌이고 동이 트면 함재기로 마무리하려고 했다. 그러나 고속전함부대의 지휘관인 윌리스 리 제독이 극구 반대하면서 무산되고 말았다. 그 자신이 경험한 미 해군의 야간전 능력이 일본군보다 한 수 아래였던 것과 고속전함부대 휘하 수상함들이 전쟁기간동안 대공 전투만 줄곧 치렀지 함정들과의 교전 경험이 없었던 것이 미처 제독의 구상을 반대한 이유였다.
스프루언스 제독은 상륙부대의 엄호가 우선임을 명확히 하면서 적극적인 공세에 나서려는 휘하 항모부대 지휘관들의 반발을 눌렀다. 앞서 입수된 일본군의 기본적인 작전 계획이 이전부터 일본 해군이 해왔던 분산공격 이었던 데다, 전투 개시 시점에서 그가 파악한 일본 함대의 위치가 제각각이었던 것이 스프루언스 제독의 판단에 큰 영향을 끼쳤다. 스프루언스는 예전에도 그랬듯이 이번에도 일본함대가 전력을 분산하고 양동작전을 벌여서, 자신의 항모전단이 일본함대를 쫓아 상륙부대에서 멀어진 사이, 다른 일본 함대가 상륙부대를 위협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한편 스프루언스는 일본 해군의 규모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당시 미 해군이 파악한 오자와 함대의 규모는 ‘함재기 약 450대에 항모 9척을 중심으로 한 약 50척 규모’였는데 실제로도 ‘함재기 436대에 항모 9척을 포함한 50척’이었다. 당시 일본 해군이 투입한 함재기 숫자는 당시 미 해군 함대가 보유한 전투기 숫자보다도 적었다. 따라서 스프루언스는 자신 휘하의 함재기들을 공격에 분산시키지 않고 오로지 일본 해군 항공대를 요격하는 데에 집중시켰다.
이 시기 미 해군은 함상전투기를 이용한 원거리 함대방공의 틀이 제대로 갖춰져 있었다. 각 함대, 함정에 꾸려진 전투정보실(CIC)는 전쟁 초에 비해 능력이 크게 개선된 대공 레이더를 이용해서 적기를 예전보다도 더 일찍 탐지할 수 있었고 대량으로 보급된 우수한 통신장비들에 힘입어 아군 기체들을 전장 상황에 맞게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으며 F6F 헬캣이라는 걸출한 함대 방공 전투기는 전간기에 살아남은 우수한 베테랑 조종사들과 그들의 경험으로 육성된 정예 신참 조종사들에 의해 운용되면서 일본 함대의 함재기들을 충분히 제압할 수 있었다. 덕분에 전투기에 의한 함대 방공의 효율성이 전쟁 초기보다 크게 높아져, 이 시기엔 당당히 함대 방공의 한 축이 되어 있었다.
전통적인 함대방공 체계인 대공포 역시 만만치 않아서, 대공레이더와 전투정보실의 통제 하에 VT신관을 사용하는 127mm 양용포 → 2∼4연장 40mm 대공포 → 20mm 기관포로 이어진 대공망에는 사각이 없었다. 덧붙여 수많은 실전을 겪으며 완성된 미 함대 특유의 함대원형진의 내공은 전혀 만만하지 않았다. 이렇게 완성된 미국 함대의 대공포화는 이미 태평양 전쟁 중반부터 그 흉악함을 과시하고 있어서, 미 함대 공격에 나선 일본기들의 규모가 작은 경우엔 오로지 대공포화에 의해서만 전멸하는 일도 벌어지곤 했다. 본 해전이 벌어지기 이전에 마지막으로 벌어진 함대항공전이었던 산타크루즈 해전 당시, 미 함대는 전투기에 의한 원거리 요격에 실패하여 항모 1척을 잃었고 1척이 지옥문턱을 오갔긴 했지만, 미 함대의 대공포화에 오히려 일본측이 함재기를 더 많이 잃고선 재공격을 포기했었다.
미 함대는 이미 F4F 와일드캣이나 F2A 버팔로와는 급수가 다른 ‘지옥에서 온 고양이’ F6F 헬캣으로 기종전환을 끝낸 상태였으나, 일본 함대는 전쟁 초기에 비하여 성능 개선이 그다지 이뤄지지도 못한 제로센을 아직도 주력 전투기로 굴리고 있었다. 헬캣은 와일드캣의 후계기로 나온 설계부터 다른 새로운 기체지만, 제로센은 말 그대로 개량만 실시한, 후계기가 아닌 기종명의 뒤에 개량됐다는 표지만 붙은 A6M 그대로였다. 급강하폭격기와 뇌격기의 경우 양측 모두 저마다 신형기를 위주로 배치했지만 일본군의 경우 구형기의 비중이 미군보다 상대적으로 높았으며 그렇다고 신형기의 성능이 뛰어나지도 않았다. 오히려 과달카날에서 벌어진 소모전의 여파로 본격화한 자원 난과 일본 군수체계의 문제점 때문에 공장이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않아 불량품만 수두룩하게 쏟아져 나왔고, 때문에 구형기보다 못한 부분도 많은 상황이었다. 그나마도 수량이 부족해 구형 제로센을 전폭기라는 이름하에 폭탄을 장착하여 공격기로 투입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물량으로 보면 더 심했는데 당시 일본 제1기동함대가 보유한 전투기, 뇌격기, 급강하폭격기 등을 모두 합친 전체 함재기의 수량은 당시 미해군 제58기동부대의 전투기 보유수량 보다도 적었다. 전체 함재기 수량으로 비교하면 보면 435 대 915로, 미 해군이 일본 해군보다 2배는 더 많았다. 항모 이외의 수상함정에 실린 수상기들의 경우 일본함대가 미군함대보다 조금 더 많이 갖고 있었지만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정찰뿐이었다. 그리고 이 수상기 또한 미군이 못해서 자기네들 배에다가 장착 못한 것이 아니었다. 카사블랑카급과 같은 호위항공모함이 함대마다 수십 척씩 따라다니며 보조 비행전력을 지원해주고 있는 상황에서 굳이 한번 띄우면 다시 배에 붙이기도 귀찮은 수상기를 파도에 흔들리는 배에 고정하고, 그것의 운용을 위한 인력과 장비를 부착하느니 그 자리에 대공포라도 하나 더 다는 게 이득이었기 때문에 수상함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이었다.
마리아나 제도 및 항공기 행동범위 내 지상기지에 배치된 제1항공함대의 250대를 합쳐도 숫적 열세는 여전했다. 거기에다 고정목표인 지상활주로에 배치된 특성상 자유롭게 움직이는 항모기동부대의 기습에 취약해서 자칫 무력화될 가능성이 높았고, 상술한 바와 같이 미군의 공격이 시작되자마자 이는 현실이 되어 함대 전에 전투가 벌어지던 시점에서 이들 지상기지의 항공 전력은 크게 약해져 버렸다.
즉 일본은 제공권 장악은 커녕 미 항공대와 맞설 수 있으면 다행인 수준까지 차이가 나고 있었다.
일본군의 경우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의 초기 전투 등으로 기량을 쌓았던 베테랑 조종사들은 이미 미드웨이 해전과 과달카날 전역, 라바울 항공전 등을 거치면서 거의 다 소모된 상태였다. 특히 산타크루즈 해전에서 치명상을 입은 항모기동부대는 개조항공모함 준요를 제외한 전 함대를 일본 본토로 퇴각시키게 된다. 이후 항모기동부대는 재건에 매달렸지만, 전황이 악화됨에 따라 항모기동부대 소속 항공대들을 항모에서 빼내어 지상기지에서의 작전에 투입하는 바람에 또 다시 손실을 입고 함상 작전에 필요한 기량을 쌓지도 못했다. 잃어버린 인원들을 대체할 조종사 양성이 제대로 이뤄졌다면 모르겠으나 당시 일본의 조종사 양성 기관은 적고 능력은 턱없이 부족했다. 애초에 일본군은 단기결전(短期決戰), 함대결전(艦隊決戰) 사상에 너무 심취하여 장기전에 돌입할 경우 소모될 파일럿들의 보충과 질적 향상을 심도 있게 고민해 본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이 전투에 참가한 일본 해군 항모기동부대의 조종사들 대부분은 실전경험도 없었고 해상작전에 필수적인 장거리 해상 항법도 미숙했다. 그 이전에 항모 작전에 필수적인 항모 이착함 기량조차 수준미달이었다. 실제로 전장까지 항해하던 중 어떻게든 약간이라도 조종사의 실력을 늘리기 위해 비행훈련을 실시했으나 몇 대 이륙하지도 않았는데 이륙에 실패해서 바닷물에 비행기를 처박거나 착함에 실패하여 비행갑판에 처박는 사고가 계속 발생하니 출격하기도 전에 소중한 비행기와 조종사를 대량으로 상실한다는 항의까지 들어와서 어쩔 수 없이 훈련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던 것만 봐도 그 당시 일본군 함재기 조종사의 실력은 바닥 그 자체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타위타위에 주둔하던 동안에는 미군 잠수함의 방해로 인해 비행훈련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본디 함재기의 이륙은 항모가 맞바람을 받고 달리는 과정 중에 이루어져야 하는데, 타위타위의 좁은 해역에서는 항모의 고속 항진이 불가능했고, 외해로 나가자니 요소요소에서 설치고 다니는 미군 잠수함이 두렵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타위타위는 바람이 강하게 부는 해역도 아니었던 까닭에 일본 함재기 조종사들은 가만히 정박한 항모에서 바람의 도움도 없이 이착함 훈련을 해야 했다. 이는 당연하게도 비전투손실의 증가로 이어졌다.
다만, 악화된 기량과는 별개로 전투에 나섰던 일본군 조종사들의 사기는 높았는데, 첫 실전이라는 데에 따른 흥분과 미드웨이를 빼면 미 해군과의 전투에서 이렇다 할 패배를 겪지 않은 ‘일본해군 최정예 항모기동부대의 함재기 조종사’라는 자부심이 겹쳤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들을 상대하는 미군 조종사들은 넉넉히 갖춰진 양성기관에서 미드웨이, 과달카날, 라바울을 거친 태평양의 베테랑들과 진주만 공습 전부터 영국으로 건너가 영국 본토 항공전에 영국 에이스 파일럿들과 함께 뛰었던 조종사들이 교육관으로 들어와 지도하는 비행학교에서, 충분한 비행시간을 가진 덕에 임멜만 턴도 가볍게 소화해내는 평균 이상의 기량을 갖고 있었다. 똑같이 싸워왔지만 후진양성에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가 있었던 것이다. 이멜만 턴(곡예비행)의 과정 보기 단적인 예로, 이 해전에서 일본의 항공모함 히요를 격침시킬 때 미국은 두 기로 구성된 뇌격기 두 팀을 좌우로 한 팀씩 보내 한 기는 항공모함을 조준하고 다른 한 기로는 항공모함의 이동경로를 예측해 쏘는 교차식 공격을 사용했는데 이는 전쟁 초기 일본의 베테랑 뇌격대가 사용하던 방법과 거의 동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