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더욱 큰 문제는 대부분의 국민들이 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좌익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으면서도 입으로는 좌익이 내는 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좌익화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이념논쟁을 들추어내느냐, 지금이 어느 시기인데 아직도 빨갱이 안보타령이냐, 남한국민이 그렇게 당할 만큼 바보냐, 국력을 보아라, 남한이 어찌 먹힐 수 있느냐, 냉전세력은 할 수 없다니까..."는 등 어처구니없는 말들만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날로 늘어납니다. 그들은 절대로 자신을 좌익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다음과 같이 거침없이 내 쏟는 말들은 분명 좌익이 입력시켜 준 말들입니다.
"주한미군을 내보내자, 국가 보안법을 철폐하자, 주적론을 폐기하자, 친일파와 기득권 세력을 척결하자, 특정신문과 보수정당을 타도하자, 북한과의 연방제를 지지하자, 미군은 살인집단이다, 6.25는 미국의 한반도 침략전쟁이다, 6.25는 남침인지 북침인지 모호하며 차라리 북침에 가깝다, 한국은 친일파가 세운 정권이다, 남한과 북한은 모두 외세를 등에업고 세운 민족 분열정권이지만 남한은 미국의 식민지다..."
이들 중 하나 또는 그 이상을 주장하는 사람은 좌익입니다.
위의 주장들은 몇몇 대학 교수들과 몇몇 언론, 진보를 가장한 지식인들이 주장하고 있는 것을 그대로 옮겨온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대한민국 각지를 활개치고 돌아다니면서 젊은 학생들에게 자신들의 사상을 주입시키고 반미투쟁을 독려하고, 자신들의 사상을 엮은 책들을 출판하고 있습니다.
환각제 환각제하고 무서워 하지만 이보다 더 무서운 환각제가 어디 또 있겠습니까?
여러분, 월남 패망의 전야를 기억하십니까? 지금 우리 국민들이 하고있는 말들을 월남인들도 30년 전에 똑같이 했습니다.
"월맹인들은 식량이 없어서 영양실조에 걸려 있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데 어찌 감히 세계 제4위, 아시아 최대의 군사 강국인 월남을 넘볼 수 있겠느냐..."
이렇게 모두가 평화무드에 들떠 있었습니다. 사회기강이 해이해 지니까 부정부패가 기승을 부렸습니다. 종교 지도자, 학생들이 연일 주월미군 철수운동 시위를 벌였습니다. 좌익이 시민, 종교단체를 장악했습니다. 안보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미친 사람으로 손가락질 받았습니다.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미군이 철수하자...사이공에는 70여 개의 애국단체, 통일단체들이 수십 개의 언론사를 양산하여 월남의 좌경화 공작에 앞장섰습니다.
이런 틈을 타서 첩자들이 대통령실과 정보기관에까지 침투했습니다. 사령부에서 결정된 일들이 저들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1973년, 드디어 미국과 월남은 월맹이 제안한 "평화협정"에 속아넘어갔습니다. 그리고 미군은 철수했습니다. 미군이 나가자 1975년 4월, 월남이 순식간에 점령됐습니다.
월남의 간첩들은 민족주의자와 평화주의자로 위장했습니다. 월남이 망하기전까지는 대통령 비서실장, 부통령, 대통령 차점 낙선자, 장관, 군장성, 고승, 경찰 및 검찰 고위간부들이 호치명 세력이라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습니다.
통일이 되고 난 후에야 그들이 좌익이었다는 사실이 비로소 밝혀졌습니다. 1000만명이 죽은 다음에 밝혀진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1967년 9월 3일, 월남의 대통령 선거가 있었습니다. 11명의 입후보자가 난립했습니다. 차점으로 낙선한 야당 지도자 쭝딘쥬가 간첩이었다는 사실은 패망후에야 알려졌습니다.
그 간첩이 선거 유세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동족상잔의 전쟁에서 시체는 쌓여 산을 이루고 있다. 우리 조상이 이처럼 외세를 끌어들여 동족들끼리 피를 흘리는 모습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며 얼마나 슬퍼하겠는가. 월맹과 대화를 통해 얼마든지 평화 협상이 가능한데, 왜 북폭을 하여 무고한 인명을 살상하는가. 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북폭을 중지시키고, 평화적으로 남북문제를 해결하겠다"
그의 이같은 말에 월남사회는 남남분단으로 치달았습니다. 월맹은 한쪽에선 평화회담으로, 다른 한쪽에선 대남공작의 양면 작전으로 집요한 공산화 전략을 추구했습니다.
1973년 1월 27일, 드디어 키신저는 월맹에 40억 달러를 주고 평화협정을 맺었습니다.
키신저는 확실한 휴전을 담보하기 위해 휴전감시위원단을 만들었습니다. 캐나다, 이란, 헝가리, 폴란드 4개국이 250명의 휴전감시위원단을 만들어 휴전선을 감시했습니다. 월맹의 외무차관급이 이끄는 150명의 고문단을 사이공에 인질로 받아 놓았습니다.
이것도 믿지 못해 미국은 영국, 소련, 프랑스, 중공 4개국 외무장관까지 서명에 참여시켰습니다. 미군이 보유하던 각종 최신 무기를 모두 월남에 주었습니다. 월남 공군력은 전세계에서 4위를 기록했습니다.
1974년 10월, 월남에서는 유전이 발견되어 온 국민이 흥분에 휩싸였습니다. 월남은 이제 군사력 뿐만이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선진국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나라 전체가 평화무드에 젖어 있던 상태에서 석유까지 발견되자 사람들은 더욱 자유분방함과 안일주의에 빠져들었습니다.
얼마 후, 키신저와 월맹의 레둑토가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결정됐습니다.
레둑토는 "나는 한 일이 별로 없다. 나보다 평화에 기여한 사람이 많다"며 수상을 거부했습니다. 세계는 이를 "동양적 겸양의 표시"라고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그를 더욱 신뢰했습니다.
결국 이 노벨평화상은 비극의 노벨평화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모두가 환상이었던 것입니다. 환상으로 인해 쥐가 고양이를 잡아먹는 이변이 발생했습니다.
월맹은 매년 80만∼100만t의 식량부족, 물자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월남은 군사력과 힘으로 망한 게 아니라 속임수에 넘어가고, 정신이 병들고, 극성맞은 데모에 시달리고, 부정 부패에 찌들고, 간첩들에 놀아나면서도 의심할 줄 몰랐기 때문에 망했습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 국민이 하는 행동이 30년 전의 월남국민이 했던 행동을 그리도 쏙 빼 닮았습니까?
공산주의 때문에 이미 1억 6천만명 이상의 인류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베트남도 1000만명의 양민들이 학살당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재교육 캠프나 정치범 수용소로 들어가서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레닌은 1000만명이나 되는 러시아인들의 농토와 재산을 몰수하고 학살했습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숫자의 양민들이 공산주의자들한테 학살당한 캄보디아의 킬링필드를 기억하십니까?
공산 월맹에 의한 통일이 이루어진 후 월남 국민들은 소형 선박을 이용해 목숨건 탈출에 나섰습니다. 106만명의 월남인들이 보트를 타고 도망가다가 11만명이 바다에 빠져 죽었습니다. 1000만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처형된 숫자 중에는 어린 아기들까지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적화통일 후 8년동안 세계에 문을 걸어잠그고 암흑정치와 공포정치를 해서 자유에 물들었던 사람들을 때려죽이고 굶겨 죽였습니다.
공무원, 지도층 인사, 언론인, 정치인들은 "인간개조 학습소"에 수감됐습니다. 월남군 부대 시설을 개조한 것입니다. 한번 가면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호치명 세력은 자생 빨갱이들과 시민단체, 민주인사, 종교인, 교수, 학생들을 이용만 해먹고 나중에는 모두 비참하게 죽였습니다. 한번 배신자는 언젠가는 또 배신을 한다는 것이지요...
58만 월남 대군은 미국이 넘겨준 최첨단 무기로 무장되어 세계 제4위, 아시아 최대의 군사강국이 돼 있었습니다. 군사력으로 보면 상대조차 안됐지만 월남은 1975. 4. 30일 완전 점령되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습니까? 저들의 속임수와 월남 내부의 좌익들과 안이한 평화무드 때문이었습니다. 국방과 안보를 강조하는 사람은 전쟁에 미친 사람이거나, 정신나간 사람으로 취급됐습니다.
지금의 우리 한국도 바로 이와 똑같습니다.
북한의 주도에 의해 연방제 통일이나 무력 통일이 이루어진다면 우린 어떻게 될까요?
대한민국 국민들 중에서 적어도 절반 이상이 죽습니다. 이미 김정일은 자체적으로 남한 인구의 30% 이상을 같은 민족이 아닌 타도, 처형의 대상으로 분류해 놓았습니다.
대한민국 국민들 절반 이상이 재교육 캠프나 정치범 수용소로 들어갑니다. 세계의 눈이 무서워 한꺼번에 다 죽일수 없기 때문입니다.
좌익들은 저마다 공을 세우기 위해...지식층, 경찰 군인가족, 부자들의 명단을 작성하고 동정을 살펴 밀고를 합니다. 당해보지 않아도 눈에 훤히 들어옵니다...
러시아, 유럽, 아시아, 남미 등에서 성공한 공산화 운동은 불과 5-7%의 좌익세력에 의해 이뤄졌습니다. 월남도 5%의 국내 좌익 세력에 의해 공산화가 됐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얼마인지 아십니까?
얼마전 월간조선은 대한민국 국민의 9.7%, 즉 430만명이 김정일을 선으로 생각한다는 충격적인 기사를 냈습니다.
2002년 4월 27일, 현정부는 끔찍했던 동의대 사건을 민주화운동으로 둔갑시켰습니다.
1989년 5월 2일, 극렬한 학생들이 전경들을 동의대 도서관에 구금했습니다. 그리고 방화를 했습니다. 경찰 7명이 죽고 10명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주동학생 31명에 징역형이 선고됐습니다.
그런데 지금 현정부가 법정의 판결을 갑자기 뒤집었습니다. 화염병으로 경찰을 죽인 학생들이 민주화투사가 됐고, 경찰이 반역자가 됐습니다.
4.3사건, 여수-순천 반란사건도 이러한 역사 뒤집기였습니다.
수많은 반정부 데모 사건 등 좌익 용공분자들에 의해 자행된 국가 전복, 파괴, 방화, 약탈 사건들을 민주화운동으로 둔갑 시키면서 반공을 국시로 오늘날의 경제성장을 이룩한 과거 정부들의 정통성을 송두리째 부정하고 있습니다.
동국대 강모 교수가 이것을 지지하는 연설을 동국대와 한겨레 신문사에서 하면서, 이런 사건들은 북한과 연립통일을 하기 위한 민족운동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그는 미국때문에 우리나라가 통일이 안되었으며 미국만 없었더라면 북한 김일성과 연립통일을 해서 사회주의 국가가 될 수 있었다며 안타까워 했고, 6.25는 미국에 의해서 일어난 조작된 전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더군다나 북한은 친일파 청산을 성공적으로 이룩한 한민족 자주정권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믿기지가 않으십니까?
강모 교수는 아주 유명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한겨레 신문이 주최하는 토론회를 비롯해서 여러 군데에서 저런 소리를 당당하게 떠들었고 많은 학생들로부터 박수와 지지를 받았고, 책까지 출판했습니다.
전교조가 2001년 6월1일 "이 겨레 살리는 통일"이라는 통일교습서를 발간하여 초,중,고 학생들에게 이념 교육을 시키고 있습니다.
그 책에는 각 장마다 사진이 끼어 있습니다. 인민군을 가운데 크게 부각시키고 그 주위를 한국의 얼굴들이 둘러싸고 있습니다. 인민군 중심의 공산주의 사회가 통일의 모델로 영상화되어 있습니다. 북한은 우리의 동포이고, 우리의 주적은 미국과 남한 내부의 보수 기득권 세력이라고 가르칩니다.
영상은 글자보다 수십배 이상의 전달 효과가 있습니다. 어린 학생들에게 이러한 영상을 통해 자신들의 사상을 주입시키고 있습니다.
2001.6.2일, 북한의 대형 선박 3척이 연이어 제주해협을 유린했습니다.
NLL도 침범했습니다. 침범하니까 정부는 짜고치는 고스톱처럼 기다렸다는 듯이 제주해협 무해통항권을 북한에 주겠다고 했습니다. NLL이 너무 긴 것 같으니 일부를 북한에 내 주자고 획책하다가 여론의 질타로 중지했습니다.
2001년 6월에 김대중은 현지 지휘관의 작전 재량권을 회수하여 손과 발을 묶었습니다.
월드컵 3-4위전이 열리던 날...모든 장병들은 화해와 평화만 믿고 북한 해군을 건드려서는 안 되는 우군으로 생각했습니다. 조준 사격을 해서 북한전함을 침몰시키면 안된다는 생각에 그냥 사격만 했습니다. 북한군이 먼저 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북한군들은 우리 장병들을 속이고 미리 탐색하기 위해 6.27일과 28일에도 왔다가 그냥 돌아갔습니다. 우리 장병들이 마음을 풀게 해놓고 치사하게도 뒷통수에서 테러를 가했습니다.
2000년 8.11일, 대통령이 46개 언론사 사장들을 김정일에게 보냈습니다.
그들은 국빈대접을 받으며 행복해 했습니다. 김정일의 술자리 매너에 반했습니다. 더러는 귀국해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김정일을 칭찬하고 다녔습니다. 그들은 상호비방 중지를 내용으로 하는 "남북언론합의문"을 교환했습니다. 그리고 북한에 대한 보도를 저들의 입맛에 맞추어 주었습니다.
그 때 김정일은 그들에게 참으로 무서운 말을 했습니다. "통일은 내 맘에 달려있다, 내 힘은 군력에서 나온다..."
그래도 언론사 사장들은 그 말을 제대로 전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김정일의 이미지를 부각시켜 주었습니다. 그래서 김정일을 위대한 지도자라고 생각하는 국민들이 무려 9.7%나 된다고 합니다. 부인들 사회에서도 김정일 오빠부대가 생겼다고 합니다. 사회가 위험수위를 한참 넘은 것입니다.
한국인들이 이렇듯 환각상태에 빠져있을 때 김정일은 무엇을 했습니까?
2000년 남북정상회담 직후에 김정일이 배포한 지시문이 입수됐습니다.
"나의 통일관은 무력통일관이다, 인민군대는 당이 평화통일의 구호를 높이 들면 들수록 반미 반일 반괴뢰 구호를 더 높이 들고 계급의 총창을 보다 날카롭게 벼려야 한다, 적에 대한 환상을 없애고 계급의 총창을 더욱 날카롭게 벼려라, 원쑤들과 한 번은 싸워서 결판을 내야 한다, 지금 일부 군인들은 정세변화에 헛눈을 팔면서 적과 평화에 대하여 환상을 가지고 대하고 있다. 일부 군인들은 적들이 제공하는 지원 물자와 경제협력 따위에 기대를 걸고 놈들을 환상적으로 대하고 있다. 이런 것이 점점 자라면 敵을 敵으로서가 아니라 벗으로 여기는 청맹과니가 되며 나중에는 적들과 흐지부지하며 돌아 가다가 순간에 먹히울 수 있다"...
북한이 이렇게 할 때 김대중 대통령은 무얼 했습니까?
2000년 6월 15일에 "앞으로 전쟁은 없다"고 선포했습니다. 보안법 철폐를 강행하려 했습니다. 갑자기 중령급 이상 20%를 자르려했습니다. 2000년 12월말까지 무조건 지뢰를 제거하라 했습니다. 북방한계선과 제주도의 두 영해를 북한에 넘겨주자 했습니다. 동부와 서부에 철로를 열어주었습니다. 한국군의 훈련을 축소했습니다. 수백억의 돈을 들여 준비한 6.25 50주년 기념행사를 못하게 했습니다.
1950년, 6.25가 났습니다.
한국군에는 내통자들이 득실거렸습니다.
맥아더의 출동명령을 받은 미 24사단이 7.1일, 폭풍우 속에서 부산에 도착했습니다. 16,000명의 사단은 7.22일까지 오산, 옥천 전투를 거치는 22일간 8,000여명을 잃었습니다.
사단장인 "딘 소장"은 중상을 입은 부하에게 물을 떠다주려다 절벽에 떨어져 36일간 민간인 집에 숨어 있다가 한국인의 밀고로 북한군에 포로가 됐습니다.
미 25사단은 7월10-15일 사이에 부산항에 상륙하여 의성, 상주를 잇는 충청 및 경북 지역에서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하다가 작전 6일만에 3천여 명을 잃었습니다.
7월18일 영일만에 상륙한 미 1기병사단은 바로 그 영동지역에서 북한군 주력을 저지하기 위한 치열한 방어전을 폈습니다. 노근리가 있는 지역이었습니다.
영동 지역에서 치열한 방어전을 펴고 있던 25사단과 1기병사단은 피난민 때문에 골치를 않았습니다.
임산부가 소형무전기를 숨기고 접근해서 북한군 관측장교 역할을 해주었고, 미군 보급차량이 갑자기 피난민들로부터 총격을 받기도 했고, 피난민이 묻어놓은 지뢰에 큰 피해를 입기도 했습니다.
북한군은 미군을 공격하는데 피난민을 총알받이로 이용했고, 지뢰제거용으로 이용했습니다.
임산부, 아기를 업은 엄마들로부터 총격을 받은 미군이 취할 수 있는 행동은 아마도 제정신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지금 또다시 전쟁이 발생한다 해도 노근리 사건은 얼마든지 재발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전쟁의 비극입니다...
노근리 측은 248명의 억울함을 주장하지만 억울함은 노근리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미군은 얼마나 억울합니까? 참전 인원 179만명, 피해자 13만7,250명, 사망 및 실종자 41,677명입니다.
밴프리트 장군이 아들을 잃었습니다. 워커 중장이 자식과 함께 참전했다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도 자기 아들을 한국전쟁에 내보냈습니다.
한국인들 중에서 전쟁나면 아들과 같이 목숨을 바칠 사람 있습니까?
이에 대해 좌익들은 "미국은 자기들의 이익에 의해 피를 흘렸다"고 말합니다. 미군을 "양민을 죽인 살인마"라고 욕합니다. 저들이 미국을 미워하는 것은 미국 때문에 한반도의 적화통일이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남한도 엄청난 피해였습니다.
민간인 피해 387,744명, 우군 피해 776,360명, 한강교가 폭파될 때 피난민 800여명과 국군들이 사망했습니다.
12만여 명의 양민이 인민군에 의해 도륙당했습니다. 오발된 전투기 폭탄, 미군의 포탄, 한국군의 포탄에 의해 죽은 병사들과 양민들도 수만 명입니다.
이렇게 죽는 게 전쟁입니다...이 속에 노근리의 248명이 있는 것입니다.
한겨레 신문, MBC, 오마이뉴스, 주한미군 철수운동본부, 범민련, 한총련 등은 입을 맞춘 듯이 똑같은 시기에 똑같은 논조로 한국군과 미군을 학살자로 매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 언론과 단체들은 월남전에 참전했던 한국군을 월남 양민들을 죽인 학살자라고 매도했고, 바로 그 다음에는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미군을 학살자로 매도했습니다.
월남에 참전한 한국군을 학살자로 먼저 매도한 것은...여론 탐색과 미군에 대한 본격적인 공격을 퍼붓기 위한 철저한 사전준비였고, 그것은 궁극적으로 주한미군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을 확신시키려는 고도의 전략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북한 목표물에 대한 정보를 우리 스스로 얻을 수가 없습니다.
미국 위성이 두 가지 종류의 사진을 찍습니다. 하나는 고도사진이고 다른 하나는 일반사진입니다. 이 두개의 사진을 특수 컴퓨터에 넣으면 목표물이 보는 각도에 따라 3차원으로 떠오릅니다.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공격해야 하는지에 대한 임무분석이 비로소 가능해 집니다.
이렇듯 미군의 역할은 우리에게 절대적입니다.
북한군은 12,500문의 야포, 7,000대의 탱크, 13,500문의 대공포, 15,000기의 대공미사일, 950기의 전투기, 600기의 스커드, 남한을 4번 뒤덮을 수 있는 화생무기, 서울을 한시간 이내에 불바다로 만들 수 있는 엄청난 양의 미사일과 대구경 야포, 대륙간 탄도 미사일 및 대남용 미사일들을 대량으로 보유하고 있지만 한국군은 북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할 수 있는 아무런 무기를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특히 북한이 가지고 있는 24발짜리 240미리 방사포 2,300문을 위시해, 프러그 미사일, 170미리 곡사포, 스커드 미사일들이 일시에 공격하면 수도권 전체가 일시에 참사로 변해버립니다.
이러한 전력격차는 주한미군만 나가면 한국군 단독으로는 상대조차 할 수 없는 엄청난 격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평양방송은 지금도 남한의 청년들에게 주한미군 퇴치운동을 열렬히 벌이라고 독려하고 있습니다. 올해 4.20일에도 평양방송은 남한 청년들에게 "반미투쟁을 열렬히 벌이라"고 독려했습니다.
주한미군만 없으면 3일 이내에 남한을 석권할 작전 계획도 가지고 있고 그 성공 가능성도 매우 높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