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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첫사랑 하는 남자.
“ 요즘 말이야, 사장님 좀 이상한 것 같지 않아?”
누군가 말을 꺼내자 여기저기서 ‘맞아!’ 하는 소리가 봇물 터지듯 흘러나왔다. 직원 휴게실은 언제나 젊은 사장의 얘기로 가득 차곤 했는데 오늘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들 할 말이 많은 듯한 얼굴이었다.
“ 요즘 구름 위에 사는 사람처럼 기분이 둥둥 떠 있는 게. 안 저러던 사람이 저러니까 이젠 무서울 지경이야. 아깐 인사를 다 받아주더라니까? 내가 좋은 아침이에요, 사장님-. 이러니까 세상에… ‘네. 좋은 아침입니다.’ 그러면서 씩, 웃는데. 그거야 말로 형광등 100개 켜놓은 듯한 미모더라, 이 말씀이지.”
“ 웃는 사장님이라니. 서, 섬뜩했겠다.”
“ 아냐, 나쁘지 않았어. 아니, 오히려 생각보다 무지 괜찮았어. 잘생긴 비주얼에 웃기까지 하니 내가 정신을 못 차리겠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지.”
다들 여자가 묘사하는 장면을 상상하기에 바빴다. 그러나 쉽사리 웃는 얼굴의 수혁이 떠오르지 않는 듯 다들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수혁 같은 사람은 웃지 말아야 한다는 게 대부분의 생각이었다. 평소엔 늘 살벌하게 무표정하던 사람이 웃는다는 건 그들의 입장에선 천재지변이나 다름없었다. 그 기분이 언젠가 추락할 날을 상상하면 모두들 시베리아 벌판에 발가벗겨져 내몰린 사람처럼 부르르 몸을 떨었다.
“ 아, 그리고 그 얘기 들었어? 뜬금없이 댄스팀 봉급 팍 오른 거. 와 진짜, 250이 뭐냐, 250이? 사무실에서 퀴퀴한 냄새 맡으면서 골머리 썩는 우리랑, 지들이 좋아서 춤추는 걔네랑 같은 돈을 받는다는 게 말이 되?”
“ 아이고- 그 것 뿐이면 다행이다. 연습실까지 리모델링 들어갔데. 그것도 자비로. 이건 진짜… 사무직에 대한 배신이야, 배신.”
“ 진짜?? 평소엔 굴러가는지 마는지 관심도 없더니만? 나 참, 이해가 안 가- 하여튼.”
다들 목숨 걸고 수혁을 까댔지만 그들이 정작 궁금해 하는 것에 대해선 누구도 아는 이가 없었다. 도대체 ‘왜’ 인가하는 것이었다. 도대체 무엇이 그의 기분을 붕 띄워놨으며 도대체 왜 그가 갑자기 안무팀에 관심을 쏟느냐 하는 궁금증 말이다. 모두들 머리를 맞대고 앞 다투어 신빙성이라곤 없는 추측들을 내놓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흥분한 건 바로 비서실장 채미란이었다. 그녀는 그 모든 것이 ‘여자’ 때문이라고 열심히 제 의견을 어필했지만 다들 설마 하는 분위기였다. 특히 여직원들은 미란의 가설을 가장 믿기 ‘싫어’했다. 사장 같은 사람은 어느 누구의 소유도 되어선 안 된다나 뭐라나.
“ 아, 내 말이 맞… 에이, 뭐야?!”
그녀가 가슴을 퍽퍽 치며 울분을 토하려는 찰나 유리 테이블 위에 놓인 그녀의 핸드폰이 부르르 떨었다. 신경질적으로 액정을 들여다본 미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젠장. 아직 점심시간 다 안 끝났는데…. 수혁의 호출이었다.
“ 찾으셨습니까?”
“ 아, 잠깐 이리 가까이 좀 와 봐요.”
점심시간에 불러놓고도 미안한 기색이 전혀 없는 수혁이 손가락을 까딱이자 미란의 심장은 주책없이 널뛰기를 하기 시작했다. 오, 맙소사. 너에게도 이런 기적이 오긴 오는구나. 채미란, 정신 차려. 이럴 때 일수록 정신 바짝 차려야 해.
수혁이 저한테 그런 마음을 품을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눈앞의 훈훈한 몽타주에 미란의 얄팍한 이성은 이미 저 멀리로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수혁에게 가까워질수록 술에 취한 듯 몽롱해진 몸을 가누질 못했다. 그녀가 정말이지 간신히 수혁의 옆에 섰을 때였다.
“ 채비서 보기엔 어느 쪽이 더 나아 보입니까?”
“ …에, 네??”
“ 첫 번째 건 좀 지루할 것 같아 두 번째 시안으로 할까 하는데.”
수혁의 눈이 순수한 호기심을 담은 채 자신을 향하자 미란은 현기증이 몰려올 지경이었다. 도대체 내가 무슨 생각을 한 거지? 창백해졌던 미란의 얼굴은 이제 부끄러움으로 빨갛게 달아올랐다. 가까스로 평정을 되찾은 미란은 할 수만 있다면 제 뺨을 세게 때리고 싶은 심정을 억누르로 수혁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인테리어 도면 위로 시선을 던졌다. 헐. 그녀가 소리 없이 입을 뻐끔거렸다.
“ 어떻습니까?”
“ 아, 아…. 제가 보기에도 두 번째 도면이 더 나아 보이네요.”
더 나아 보이긴 개뿔. 내가 보기엔 그게 그 거잖아, 이 자식아! 그녀의 진심은 그렇게 소리치고 있었다. 그러나 남들보다 조금 더 예민한 상사의 옆에서 무려 6년을 버틴 비서계의 신화답게 미란은 겉으로는 예의바른 미소를 철저히 유지하고 있었다. 미란의 말에 수혁은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 그렇죠? 아, 나가면서 최종 시안 선택 했다고 업체 측에 연락 좀 넣어줘요.”
“ 네, 알겠습니다.”
미란이 그렇게 끝까지 웃는 얼굴로 사무실을 나가고 나자, 수혁의 시선이 시계를 향했다. 점심시간. 밥은 먹었을까? 자연히 시우가 떠올랐다. 정작 그 자신은 테이블 위를 가득 채운 시안 중에 하나를 고르느라 점심조차 걸렀던 것을 까맣게 잊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수혁에겐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다. 앞으로 시우가 숨 쉬고, 연습하고, 웃고, 떠들게 될 공간. 수혁은 회사의 어떤 곳 보다 댄스팀 연습실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디자인은 심플하면서도 질리지 않을 만한 것으로, 재질은 몸에 해롭지 않을 친환경 제품으로. 말하자면 그는 어렸을 때부터 부친의 교육을 통해 기른 심미안을 남들이 보기에 쓸모없다 할 만한 곳에 전부 쏟아 붓고 있는 중이다.
마음에 들어야 할 텐데.
고심 끝에 골라놓고도 그는 몇 번이나 이미 물린 도면을 다시 검토하고 검토했다. 아마 시우가 딱 집어 ‘이거.’ 라고 하지 않는 이상 공사가 끝나는 시점까지 그는 앞으로도 몇 번이나 이런 회의에 빠질 것이다. 그는 결국 방금 선택한 마지막 도면을 빼 놓고 나머지는 전부 돌돌 말아 휴지통에 넣어버렸다. 테이블 한 쪽 구석엔 그의 관심을 기다리는 서류들이 산더미를 이루고 있었다.
한결 마음의 짐을 덜고 난 수혁이 아래에서부터 올라온 기획안에 미친 듯이 몰두하기 시작했다. 일에 빠져들 땐 옆에서 누가 말을 걸어도 못 들을 만큼 집중하는 수혁은 어느새 어둑해진 실내를 깨닫고서야 퇴근 시간이 가까워졌음을 깨달았다.
늘 의미 없던 퇴근시간이 요새 기다려지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의 수혁에게 일어난 변화 중 하나였다. 퇴근 후 스케줄이란 피트니스 센터에 들려 한 시간 반가량 죽어라 운동을 하고 특별한 일이 없으면 집으로 들어가 다시 밀린 업무를 보는 것이 지금까지의 일상이었다. 특별한 일이래 봤자, 두희를 만난다든가 혹은 아는 녀석들과 술을 한잔 한다든가 하는 것이었다. 가끔은 파티 참석 같은, 업무의 연장선상에 있는 스케줄이 있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은 아니다. 수혁의 입매가 부드러워 진다 싶더니 어느새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다.
- 지금 하는 아르바이트 끝나면 8시야. 한 시간 반 정도밖에 시간 못 낼 텐데 그래도 괜찮으면 그 때 보자. 12/30 PM 16: 25 민시우
오늘 오후, 그가 힘들게 따낸 저녁 약속이었다. 수혁은 미소 짓다가도 어느새 우울한 표정이 되곤 했다. 도대체 그 놈의 아르바이트는 언제 그만 둘 생각이지. 한 말을 또 했다간 괜한 미움을 살 것 같아 그저 속으로 삭히고 말긴 하지만 수혁은 사실 사장으로서의 권력 남용, 뭐 그런 걸 발휘해서라도 당장 시우가 하는 아르바이트를 전부 그만두게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물론 생각에 그쳐야 하겠지만.
6시 정각. 수혁은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코트를 집어 들었다. 퇴근 시간을 밥 먹듯이 넘기던 수혁이 그 시각에 완벽한 퇴근 복장으로 사장실을 나오자 미란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그녀는 당황한 나머지 더듬거리며 수혁에게 주제넘은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 사, 사장님 벌써 퇴근…하십니까?”
“ 네. 채 비서도 어서 퇴근해요. 해 넘기기 전에 데이트 한 번 더 해야죠.”
제, 젠장. 능청스럽게 말하곤 이내 멀어져가는 수혁을 멍하니 바라보던 미란의 입에서 뒤늦게 욕이 터져 나왔다. 아무래도 들은 게 틀림없다. 얼마 전 비서실 옆에 붙어있는 주방에서 ‘ 해 넘기기 전에 데이트 한 번 더 해야 하는데-.’ 라고 혼자 중얼거리던 추한 몰골을 하늘같은 상사에게 들키고야 만 것이다.
오오, 맙소사. 주인 잃은 사장실 복도 앞엔 그렇게 서른 먹은 처녀 하나가 한참을 창피함에 제 몸을 배배 꼬고 있었다.
-
수혁은 멀리 편의점에서 뛰어나오는 시우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차에 기대 서 있었다. 남색 코트에 까만 목도리를 두른 시우가 달려오는 모습이 9년 전과 하나 다를 게 없어 혹시 꿈인가 싶다가 그녀가 코앞까지 가까워지고서야 수혁은 삐딱하게 기대 있던 허리를 반듯이 곧추세웠다. 시우가 하얀 얼굴 위에 조금 안쓰러운 표정을 띄운 채 먼저 말을 건넸다.
“ 미안, 나랑 교대할 애가 좀 늦는 바람에. 오래 기다렸어?”
“ 아니, 방금 왔어.”
거짓말이다. 퇴근 후 그는 곧장 이리로 와 시우가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물건의 바코드를 찍는 것이나, 진열하는 것부터 머리를 쓸어 올린다거나 가끔 어딘가 멍한 표정이 되어버리는 모습 까지. 남들이 한다면 조금도 신기할 것 없는 일인데, 시우를 거치고 나면 그게 무척이나 특별해 보였다. 그래서 그는 2시간 가까이 기다리는 동안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다. 수혁은 정말 기분 좋게 웃어보이고선 조수석의 문을 열고 시우를 쳐다보았다. 시우가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것이 귀엽게만 느껴진다.
“ 저기 내가 열어도 되는데….”
“ 내가 열어주는 게 당연한 거다. 앞으론 그렇게 생각해.”
“ 그래도….”
“ 너한테만 이러는 거 아냐. 원래가 이렇게 배웠으니까 몸이 저절로 움직이는 것뿐이지. 춥다. 안 탈거야?”
수혁이 그렇게 말하자 할 말이 없어진 시우가 이내 차에 올라탔다. 시우의 옷이 끼진 않을까 주의를 기울이며 부드럽게 문을 닫은 수혁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시우의 앞에서 어째 거짓말이 하나 둘 점점 늘어난다. 수혁은 자신이 이런 사소한 거짓말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사람이 아니라는 데 새삼 고마움을 느꼈다.
“ 혹시 가고 싶다거나, 먹고 싶은 거 있어?”
차를 한 바퀴 뺑 돌아 운전석에 앉은 수혁이 물었다. 시우는 미리 생각해 놓았던 듯 바로 대답을 꺼냈다.
“ 한식이면 돼. 난 양식 별로라.”
“ 한식. 좋네.”
수혁이 싱긋 웃곤 이내 차를 출발시켰다. 그런 수혁의 모습을 흘끗 본 시우가 안도했다. 시우의 대답 속에 나름 계산이 숨어있을 거란 생각을 못하는 모양이었다. 저번에 갔던 곳처럼 한 끼 먹기에 너무나 호화스러운 곳은 부담스러워 한 말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생각하는 한식집과 수혁이 생각하는 한식집 사이에 어마어마한 괴리가 존재한다는 걸, 시우는 수혁의 차가 멈추고서야 뒤늦게 깨달았다.
“ 시간이 좀 더 있었으면 교외에 더 괜찮은 곳에 데려가고 싶었는데. 다음엔 그리로 가자.”
“ 어, 그, 그래.”
어색하게 더듬거리는 시우는 안전벨트를 풀며 외관부터 고급 레스토랑 분위기를 자랑하는 한식집을 황당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시간상 다른 곳을 찾아가기도 무리라 체념한 시우가 차에서 내리자 그 문을 열어주려던 수혁의 손은 허탕을 치고 말았다. 수혁은 언젠간 시우가 제가 열어주는 문에 익숙해지길 바라며 언제나처럼 한 걸음 앞서 걸었다. 그러나 평소보다 조금 더딘 걸음이었다.
수혁이 들어서자 종업원은 그들을 가장 좋은 자리로 안내했다. 시우는 이곳이 정말 한식집이 맞기는 한 건지 의심스러웠다. 한 가운데에 놓인 피아노 위에선 젊은 여성 피아니스트가 재즈풍의 선율이 인상적인 곡을 연주하고 있었고 인테리어 역시 한식집이라고 하기엔 상당히 거리가 있어 보였다. 그러나 시우가 받아본 메뉴판엔 오로지 한식 메뉴들뿐이었다. 신기해하는 그녀를 눈치 챈 듯 수혁이 웃음기 띤 얼굴로 물었다.
“ 분위기가 좀 독특한가?”
“ 응. 많이. 영락없는 레스토랑이잖아.”
“ 레스토랑에서 먹는 한식도 썩 나쁘진 않아. 재미있잖아.”
수혁이 어깨를 으쓱 하곤 다시 메뉴로 시선을 돌렸다. 재미있다니. 엉뚱하네, 위수혁. 시우는 그렇게 생각하곤 잔잔히 미소 지었다. 그녀는 수혁과 눈이 마주치고 나서야 서둘러 메뉴로 시선을 돌렸다. 수혁의 추천에 따라 시우도 그와 마찬가지로 코스 요리를 주문했다. 그녀로선 접해보지도 못한 신기한 요리들이 줄을 이었다. 친숙하지 못한 외관과는 다르게 맛은 그녀의 기대를 훨씬 뛰어넘었다. 시우의 입가가 예쁘게 휘는 것을 보고 한층 긴장을 푼 수혁이 입술을 뗐다.
“ 그 외투, 학교 다닐 때도 입지 않았었나?”
입에 있는 음식물을 삼킨 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 응. 맞아. 어쩐지 버리기 아까워서…. 좀 후줄근하지?”
“ 아냐. 그 옷, 너한테 잘 어울린다. 예전에도 그렇게 생각했었어.”
“ 위수혁, 네가? 설마.”
시우가 눈을 키우며 그럴 리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는 마지못해 하는 칭찬이겠거니 하곤 옆 의자에 걸어놓은 오래된 남색 외투를 쳐다보았다. 세심한 면이 있구나,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니. 수혁에 대한 평가가 조금 달라졌다. 그러나 수혁은 그 것 만으로는 모자란 모양이었다.
“ 설마라니, 왜 그렇게 생각하지?”
“ 그야 너랑 나는….”
막힘없이 터져 나오던 대답이 끝까지 가지를 못했다. 굳이 분위기를 나쁘게 만들 필요는 없다는 의도에서였다.
“ 괜찮아. 너랑 내가, 그 뒤엔 뭔데?”
“ 아니야. 뭐 하러 다 지난 얘길….”
“ 내가 맞춰볼까.”
수혁은 어느새 젓가락까지 내려놓고 시우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 시선에 목에 뭔가 걸린 기분이었다.
“ 너랑 내가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으니까. 그 말을 하려던 거지.”
시우는 도무지 수혁이 이제와 이런 불편한 얘기를 꺼내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좋으나 싫으나 어쩌면 앞으로 몇 번이나 마주칠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데, 대체 왜.
“ 근데 그거 틀렸어.”
뭐? 시우가 금붕어처럼 뻐끔거리며 물었다. 수혁은 한없이 진지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 우리 사이는 정확히 말하면, 하나는 미워하고 또 하나는 미움 받는 사이었지.”
미워하고 미움 받는 사이라니? 누가, 누구를? 아니 그보다… ‘우리’라니? 시우는 수혁의 입에서 나온 ‘우리’라는 단어가 그렇게 낯설게 들릴 수가 없었다. 수혁과 자신을 ‘우리’라는 말로 묶어 설명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그녀였다. 시우는 우선 수수께끼 같은 수혁의 말을 풀기 위해 혼란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 미워하고 미움 받는 이라니…? 누가 누구의 미움을 받았다는 거야?”
“ 당연히 내가 너의 미움을 받았었지. 그리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진 것 같고.”
수혁은 서글픈 얘기를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듯 꺼내고 시우의 반응을 묵묵히 기다렸다. 둘 중 하나겠지. 말도 안 돼. 혹은, 알고 있었어?
“ … 말도 안 돼.”
수혁이 피식 웃었다. 역시 그 때의 넌,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구나.
“ 너도 날 싫어했잖아. 아니, 네가 먼저 날 싫어했잖아.”
시우는 억울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다시 되짚어 봐도 처음부터 수혁은 자신을 좋아하지 않았다. 오히려 눈엣 가시처럼 대했다. 조금 친해져보려 해도 늘 굳은 얼굴로 쌀쌀맞게 대했었다. 그런데 어째서 자신을 가해자로 몬단 말인가?
“ 내 태도가 널 오해하게 한 건 인정하지만, 아니었어. 네가 싫다 생각한 적 없었어.”
시우는 그저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수혁이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입가에 물었다.
“ 오히려 그 반대였다면 모를까.”
시우에겐 세계 7대 불가사의나 다름없던 ‘도대체 위수혁은 왜 나를 싫어했던 걸까.’ 에 관한 생각이 지금 마구 뒤엉키고 있었다. 수혁이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면, 자신이 착각했단 말인데… 그럴 리가 없다. 시우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 그거 나 기분 좋으라고 하는 소리지?”
“ 그렇게 들리나?”
“ 응. 근데 … 아, 정말 괜찮아. 네가 날 별로라고 생각했던 거 모르고 있던 것도 아니고. 지난 시간이 얼만데… 그 것 때문에 일할 때 지장 있진 않을 테니까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 네가 무슨 말 하는지는 알겠는데, 그런 거 아니다. 거짓말이 아니라 그냥 오해를 풀고 싶어서.”
수혁은 그녀의 기대에 못 미쳐 미안하다는 듯 열없게 한 번 웃고는 물을 들이켰다. 그 모습을 보자 왠지 모르게 긴장이 되었다.
“ 싫어한 적 없어, 라는 말로는 정확히 표현이 어렵고.”
“ … ….”
“ 너 당황할 거 생각 안 하고 그냥 솔직하게 말하자면. 좋아했었다, 민시우 너.”
쾅. 쾅. 쾅. 시우는 벼락을 맞은 듯한 얼굴로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한 채 수혁을 바라보았다. 수혁은 시우의 그런 반응을 미리 예상한 사람처럼 흔들림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표정이었다. 그의 담담한, 혹은 나른한 목소리가 마치 노래하는 듯 하다.
“ 어린 남자애들이 좋아하는 이성한테 표현은 못 하고 못살게 구는 거. 딱 그거였어, 이제 생각해보니.”
그가 잔잔하게 미소 지었다. 사실은 심장이 당장이라도 타들어 갈 듯 뜨거웠지만 눈치 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지금 누가 보더라도 한 번쯤 말을 걸어 보고픈 매력적인 남자의 모습이었다. 현실감이 없을 정도로.
“ 그, 그게….”
“ 날 싫어한 이유가, 내가 널 먼저 싫어했기 때문이라고 했었지.”
당황해 더듬거리는 시우의 말을 잘라낸 수혁이 흔들리는 시우의 눈을 자신의 올곧은 시선으로 옭아매었다. 빨려들 수밖에 없는, 끝이 안 보이는 검은 눈동자에 하릴없이 심장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 그 말, 내가 널 좋아하면 너도 날 좋아할 수도 있다는, 그런 뜻으로 생각해도 될까?”
“ 아….”
“ 난 우리가 전보다는 더 친근한 사이가 되었으면 하거든.”
우리. 수혁의 입술에서 또 한 번 시우를 어지럽게 하는 그 단어가 흘러나왔다. 도저히 익숙해질 것 같지 않은 부드러운 목소리에 시우는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머리가 펑하고 터질 것만 같았다. 이 긴장감이 결코 잔잔해지지 않을 것 같았다.
“ 이젠 나도 철없는 꼬마가 아니니까.”
수혁이 작게 덧붙였지만, 시우는 그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귓가엔 이미 두근거리는 제 심장소리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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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우는 두 손으로 제 앞에 내밀어지는 하얀 봉투를 조심히 받아들었다. 그녀가 무려 3년을 일해 왔던 호프집의 머리가 다 벗겨진 사장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아쉽다는 시선을 좀처럼 거두질 못했다.
“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 감사하긴 뭘… 민 양이 일을 잘 해줘서 내가 오히려 고마웠지.”
후덕한 인상과 어울리는 넓은 마음씀씀이를 가진 사장이었다. 시우는 어느새 눈 꼬리에 눈물을 매달고선 그녀의 예상보다 훨씬 두둑한 봉투를 두 손으로 꽉 쥐었다. 그저 알바생이었던 그녀에게 사장이 특별히 퇴직금이라며 선심을 쓴 탓이었다.
“ 진짜 더 좋은 직장 아니면 내가 우리 민 양 안 보내. 알지? 자주 놀러 오고. 혹시라도 다시 일자리 필요해지면 연락주고. 응?”
“ 네. 저 정말 와 볼 거예요, 사장님. 그러니까, 술 끊기로 하신 거 앞으로도 꼭 지키셔야 돼요. 혹시라도 저한테 들키시면 바로 사모님께 말씀드릴 거라는 거, 아시죠?”
사장은 마치 딸처럼 그의 건강을 염려해주는 시우의 어깨를 말없이 토닥이며 묵묵히 그녀의 앞날이 이제 그만 평온해지기를 바랐다. 힘든 일을 연달아 겪은 탓에 전보다 훨씬 말라버린 뒷모습을 한 시우가 마지막 까지 씩씩하게 웃으며 가게를 빠져나왔다.
술집이 즐비한 거리는 새벽 4시라는 시간이 무색할 만큼 활기를 띄고 있었다. 시우는 피곤한 눈을 비비며 네온사인이 어지러운 거리 위를 바삐 걸었다. 연말인 탓에 여기저기 술 취한 사람들이 구르는 개똥보다도 더 추한 몰골로 위험천만하게 널려있었다. 그녀는 외투를 파고드는 한기에 어깨를 잔뜩 추켜세우곤 열심히 발을 옮겼다. 오로지 빨리 집에 들어가 따뜻한 방에 누워 쉬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 … 어…?”
그런 시우의 발길을 잡아챈 건 길가 좌판대 위에 색깔별로 늘어선 색색의 목도리였다. 시우는 뭔가에 이끌리듯 그 가까이로 다가갔다. 그녀의 손이 멈칫하다가 이내 진한 회색의 털목도리 위에 머물렀다. 그녀의 손이 마치 갓 태어난 강아지를 쓰다듬듯 조심스럽기 그지없었다. 옆에서 작은 히터에 몸을 녹이던 좌판대 주인이 살갑게 말을 걸었다.
“ 언니가 하시게? 고거 여자가 하긴 좀 칙칙한데… 이 색 어때?”
“ 아, 아뇨, 제가 할 건 아닌데….”
“ 그럼, 남자친구?”
“ 아, 아니요!”
시우가 손사래를 치며 화들짝 놀라 목도리에서 손을 뗐다. 서른 초충반처럼 보이는 주인이 개구쟁이처럼 씨익 웃었다.
“ 남자가 할 거면 언니가 방금 본 색 좋아. 유행도 안타고. 만져보니 어때? 부드럽지? 이게 다른 것 보다 원가가 좀 센데 내가 언니한텐 싸게 줄게. 이만 원. 괜찮지?”
좌판 주인은 시우의 손에 목도리를 갖다 대며 능숙하게 그녀를 설득했다. 손등에 닿는 감촉이 좋아 금방이라도 도망갈 것 같던 시우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 사귄지 얼마 안 됐나봐?”
“ 네?”
“ 내가 길에서 장사를 오래 해봐서 아는데, 언니 표정에서 딱 사이즈 나와.”
아, 아닌데. 시우가 곤란한 듯 중얼거렸지만 벌써 목도리를 쇼핑백 안에 넣고 있는 주인의 목소리엔 들리지 않는 듯 했다. 시우는 결국 포기하고선 가방 손으로 손을 넣어 아까 받은 봉투를 꺼냈다. 우습긴 하지만 어쨌든 퇴직금을 받고서 처음 쓰는 돈이었다. 그녀는 흥정 없이 2만원을 고스란히 좌판 주인의 손에 건넸다. 그리곤 마치 금덩이라도 되는 양 목도리를 품에 쏙 껴안고 종종걸음으로 멀어졌다.
수혁은 언제나처럼 열 발자국 쯤 떨어져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얼굴까지 붉히며 고민 끝에 사는 저 목도리는 도대체 누구의 것일까. 시우 본인의 것이 아님은 확실했다. 십년이나 같은 코트를 입는 여자가 이미 제 목에 두른 목도리의 존재를 망각하고 헤프게 하나 더 샀을 리가 없다. 알면서도, 수혁은 저 목도리가 시우를 위한 것이었음 했다. 이미 목도리 따윈 필요 없게 되어버린 도원이 아니라.
그러나 눈앞에 선히 떠오르는 장면은, 애석하게도 도원의 유골함 옆에 진회색 목도리를 소중하게 내려놓는 시우의 모습이었다. 꽉 쥔 주먹 때문에 손톱이 파고든 손바닥이 무척이나 쓰라렸다. 화가 나서 돌아서고 싶다가도 어느새 놓칠 새라 시우의 뒷모습을 쫓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면 손바닥보다도 마음이 얼얼했다. 이렇게도 좋아하고 있구나. 나는 이렇게나 민시우를 좋아하고 있구나. 그 걸 또 새삼 깨닫곤 가슴이 벅차고 신기하고, 억울하고 화가 났다.
누군가에게 이토록 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그리고 이미 죽고 없어진 사람에게까지 질투를 해야 하는 이 현실이.
처음의 다짐이 흐트러지고, 조급해지는 마음을 다잡을 길이 없었다. 조금만 더 나를 봐주고, 조금만 더 나를 생각해주고. 내가 네 생각을 하는 만큼의 단 1퍼센트라도 네가 나를 생각해준다면. 그런 바람들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이 많아졌다. 시우의 방에 환하게 들어왔던 불이 꺼지고 나서도 그 앞을 지키는 시간이 늘어났다.
“ 잘 자, 민시우.”
언젠간 그녀의 귓가에 직접 이 인사를 속삭일 수 있는 날이 오길. 수혁은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저 목도리는 누구의 것일지@_@ 대충 짐작하고 계신거죠?!
비루한 글을 팸에서 읽으시고 인소닷에서 또 한번 읽어주신 싸랑스런 독자님들!
정말 너무 지루하실텐데, 저더러 다음편 빨리 가져오라는 뜻으로 알고 열심히 달려보겠습니다!
댓글과 추천으로 응원해주시는 독자님들, 정말 저의 빠충이에요!!
(빠떼뤼충전기를 이렇게 줄여 부른다고 하더라구요. 흐흐흐)
녹턴(Nocturne) http://cafe.daum.net/-fam-
묘아리 바니코코 필은 demisoda 기찻길동무 달콤한민트 유사성 모로미 샐리어 백민정 미스망고
업쪽은 '첫사랑'/ 업쪽문구만 있을 시 쪽지 안 가요.
첫댓글 첫사랑/이번편도 재밌게 봤어요~ 수혁이 성격이 부드러워진거 같아서 보기 좋아요!!ㅎㅎ추천하고 갑니당~
다음편도 기대할게요!
첫사랑 / 수혁이멋있어요 ㅠㅠㅠㅠ빨리다음편보고싶어욯ㅎㅎㅎㅎ
첫사랑 / 저목도리가 ㅋ 누구꺼지요~~~~~~~~~~~ㅋㅋ
첫사랑/ 저거저거..왠지...목도리.ㅎㅎㅎ 목도리 덕에 다음편이 더 기다려집니다!! 재미있게 읽고갑니다^^
재미있게 잘보구있네요 ㅋㅋ
첫사랑. 저 녹턴에서 망고님한테 친필편지받는아이에요. 닉넴은 좀 다르지만 ㅎㅎ
아 수혁이가 시우마음을 쾅 박는 고백을했네요! 두근두근 재미있어요♥
우왕 폭풍연재♥ 수혁이의 마음이 밝혀져서 좋아요 ^^
ㅠㅠ 너무재미있어용
ㅋㅋㅋ수혁이와 시우의 달달한 러브스토리 기대해도 될듯한데요...도원아 이해하지?ㅋㅋㅋ수혁인 그만한 매력이 있으니까!!ㅋㅋㅋ
우왕~~넘 재미써여~~
어머어머, 수혁이 마음도 이해는 가는구만. 그래두 시기와 타이밍은 있는거니까. 도원아, 어쩔 수 없는거야. 산사람은 살아야지ㅠ_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