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감리교회의 역사는 곧 한국 프로테스탄트계 교회의 시작이다. 한국 프로테스탄트계 교회의 시작은 한국의 본격적 개화운동과 근대적 민족운동의 시작과도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감리교회는 1884년 6월 23일 R.매클레이 박사를 통하여 한국에 처음 들어왔다. 그 무렵 그는 일본에서 미국 감리교회의 선교사업을 주관하고 있었는데, 고종(高宗)의 허락을 얻어 한국에서 감리교회 주관하에 교육과 의료사업을 개시하기로 하고, 그 실행을 미국 선교본부에 청원하였다.
한국에 선교사업을 시작하기 위해 맨 처음부터 주장한 볼티모어시(市) J.F.가우처 박사의 원조와 장려로 1885년 미국 감리회의 선교사들이 처음으로 한국에 파송되었다. 그들이 북감리회 소속 선교사들인 H.G.아펜젤러 목사 부부와 W.B.스크랜턴 의사 부부였으며, 스크랜턴의 어머니 M.F.스크랜턴 부인도 미국 감리회 여선교회 대표로 건너왔다. 아펜젤러 부부는 일본을 거쳐 그 해 4월 5일 장로회 선교사 H.G.언더우드 박사와 함께 인천에 상륙하였고, 스크랜턴 가족은 5월에 입국하였다.
그 해 6월에는 아펜젤러가 학생 6명을 데리고 배재학당(培材學堂)을 개교하였으며 같은 해 10월 처음으로 서울 정동(貞洞)에 있는 자신의 사택에서 한국인과 처음으로 예배를 가짐으로써 정동교회가 시작되었다. 스크랜턴은 정동에 병원을 열고, 그의 어머니 M.F. 스크랜턴 부인은 단 1명의 여학생으로써 1886년에 이화학당(梨花學堂)을 개설하였다. 1887년 1월 정동교회에 처음 한국에서 주일학교(主日學校)를 열었고, 12월에는 북감리회를 조직하였다. 한편 남감리회도 독자적으로 한국에 선교를 시작하였다.
중국 유학 중 교인이 된 윤치호(尹致昊)가 1885년 귀국하여 한국선교의 필요성을 남감리회 선교본부에 청원하였다. 이에 따라 E.R.헨드릭스 감독과 중국에서 선교하던 C.F.리드 박사를 따라 그 해 10월 한국에 와서 선교사업 개시를 결정하고 교회 부지를 샀다. 이듬해에는 리드가 가족을 데리고 남감리교회의 첫 선교사로 상하이[上海]에서 서울로 건너와 전도 및 교육사업에 착수하였다.
당시 주한 미국공사는 선교사 출신인 H.N.앨런(한국명 安連)이었다. 그의 주선으로 리드는 고종을 알현하고, 국왕으로부터 "한국에 좋은 교사를 파송하여 한국민의 문화발달에 공헌하여 달라"는 당부를 받았다. 그리하여 지금의 한국은행 자리에 선교본부를 마련하고, 중국 선교구역의 한 지역으로 전도를 시작하였다. 그 다음해 5월에 분리하여 따로 한국선교부를 설립하고 리드가 초대 감리사(監理師)가 되었다.
남북 감리회의 부흥과 합동
한말의 교회는 평신도들의 헌신적 전도로 급성장하였다. 한국 교회 사상 최초의 한국인 목사는 1901년(광무 5) 5월 14일 북감리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김창식(金昌植)·김기범(金基範)이다. 남감리교회에서는 1911년 1일 김홍순(金鴻淳)·정춘수(鄭春洙)·주한명에게 안수하였다.
1903∼1910년은 감리회의 부흥기였다. 이 기간에 조선기독교 연합공의회가 조직되고, 감리회와 장로회가 《합동찬송가》를 편찬하였다. 세브란스의학전문과 그 부속병원·연희전문학교·숭실학교·평양구세병원 등을 합동 경영하게 되었다. 특히 서울 정동에 세운 감리교병원은 복음을 대중에게 깊이 뿌리박게 하는 데 큰 구실을 하였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상동(尙洞)교회를 중심으로 전도사 전덕기(全德基)와 김구·이준·최재학 등 감리교 청년들이 을사보호조약 무효투쟁을 벌였다. 이러한 교회의 민족운동은 줄기차게 계속되어 1907년(융희 1)에는 이준의 헤이그특사사건이 일어나고, 신민회(新民會)가 조직되자 이필주(李弼柱)·최성모(崔聖模)·김진호(金鎭浩) 등이 민족운동을 전개하면서 복음을 전하였다. 나아가 1919년의 기미독립운동은 감리교회를 국민들에게 널리 알리는 기회가 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교회가 크게 성장·발전하였다. 3·1운동의 33인 민족대표로 서명한 감리교의 이필주·최성모·박희도(朴熙道)·오화영(吳華英)·신홍식(申洪植)·정춘수·박동완(朴東完)·김창준(金昌俊)·신석구(申錫九) 외에 현순(玄楯)·손정도(孫貞道) 목사 등도 가담하였다. 이 시기에는 민족운동이 선교에 좋은 기회가 되어 3 ·1운동 후 남감리교는 교인수가 거의 배로 늘어났다.
감리회의 부흥운동은 1909년부터 김종우(金鍾宇)·이용도(李龍道)·조신일(趙信一) 등 여러 목사를 중심으로 일어났는데, 1925년에는 남북감리교회가 합동하여 교역자 양성기관으로 협성신학교(協成神學校)를 창립하였다. 그리하여 한국에서 이 두 감리교회는 서로 유대를 가지고 여러 기관을 공동 경영하는 동시에, 각각 맡은 지방의 전도에 노력하였다. 1927년 두 교단의 각 연회(年會)가 총회에 교단통합을 요청함에 따라, 1930년 12월 2일 제1회 총회를 열고 '교리적 선언'과 '교리 장정규칙'을 제정함으로써 기독교 조선감리회를 조직하고 목사 양주삼(梁柱三)을 제1대 감독에 선출하였다.
미국에서 아직 남북감리회가 합동하기 이전에, 각기 따로 한국에 들어온 두 감리교회가 한국에서 먼저 합동하여 하나가 되었다는 것은 획기적인 일대사건이었다.
수난과 교권투쟁
일제의 한국인 황민화정책으로 교회 탄압이 점점 가혹하여 1940년 10월 2일 복음주의 신앙을 떠난, 교리에 위배된 결의사항을 강제로 총리원(總理院) 명의로 발표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 선교사는 모두 추방되었으며, 1943년 10월에는 '일본기독교 조선감리교단'이라는 조직으로 변하게 되었다. 1945년 7월 29일에는 일제가 각 교단 대표들을 불러 강제로 단일단체로 합동시켜 놓았으나, 곧 광복이 되자 각기 본래의 교파로 환원되었다.
그런데 감리교단은 이른바 재건파와 부흥파로 갈려 한동안 혼란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러다 1949년 4월 두 파의 대표들이 모여 합동을 결의하고 총회를 열어 교단 명칭을 기독교대한감리회로 개칭하고, 김유순(金裕淳) 목사를 감독으로 선임하였다. 그 후 1950년 6·25전쟁으로 김유순·양주삼 감독을 비롯하여 많은 교역자와 신자들이 순교 또는 납치당하였다.
다음해 부산에서 동·남·중부의 3부 연합연회와 총회가 모여 유형기(柳瀅基) 목사를 감독으로 선임하게 되었고, 1954년 4월 서울에서 모인 연합연회와 총회에서는 그 결의사항에 불만을 품은 일부 회원들이 탈퇴하여 '호헌(護憲)감리회'를 조직하였다. 1955년 이후 감리교는 분열의 악순환을 계속, 교권을 둘러싼 모임이 형성되고 모임 사이의 교권투쟁이 격화되었다. 또 1974년 10월 김창희(金昌熙) 목사가 감독이 되자 반대의견을 가진 회원들이 마경일(馬慶一) 목사를 총회장으로 선임하고, 이른바 '갱신파(更新派)'라고 일컫는 교단을 만들기도 하였다.
1980년 9월 감리교는 하나가 되어 기존 조직을 모두 해체하고, 행정구역에 따라 5개 연회로 개편하고 새로운 연회와 지방회를 구성, 연회별 감독제를 채택함으로써 통합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교세
2001년 현재 서울·서울남·중부·경기·동부·충북·남부·충청·삼남·미주선교 등 10개의 연회가 있고, 교회는 5,262개, 교인은 139만 4515명, 교역자는 7,298명이다. 교육기관은 대학교로 이화·목원·배재·협성 등 6개교와, 신학대학으로 감리교신학대학교 등이 있다. 이 밖에 신학원 6개, 중·고등학교 54개가 있고, 사회사업기관은 원로원 1개, 안식회관 1개, 기독교사회관 4개, 고아원 1개 등이 있다.
감리회의 선교·교육, 평신도사업의 각종 정책 수립과 행정을 관리하는 감리회 본부는 선교국·교육국·사회평신도국·사무국·홍보출판국·감독회의비서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산하에 유지재단·은급재단·사회사업재단 등이 있다. 본부는 서울특별시 중구 태평로 1가 64-8번지 감리회관 16층에 있다.
[출처] 기독교대한감리회 [基督敎大韓監理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