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전 이때쯤인가? 경비실에서 인터폰이 울립니다.
아래층 주방 천장에서 물이 고인다고 연락이 왔다고 하시며 누수 확인 차 방문하신다고 합니다.
이내 방문하신 경비아저씨는 싱크대 여기저기를 보신 후, 싱크대 바닥이
젖어 있는 걸 보시고 밸브가 열려 있는 것을 확인하셨습니다.
깜짝 놀라 경비아저씨와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갑니다.
여든이 훌쩍 넘으신 단아한 모습의 할머님.
그녀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어색했던 처음과 달리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이 지나면서..
우리는 조금씩 마음을 열고 서로에 대해 알아가게 됩니다.
때론 제법 속 깊은 얘기도 주고받습니다.
이화여대, 약사, 할아버지, 무남독녀,미국,영주권, 작별...
대학 졸업 후 약국을 운영하셨고 6남매의 둘째로 집안의 기둥역할을 하셨다던 할머니는...
공기 좋고 조용한 곳을 찾다 할아버지와 함께 십여 년 전 이곳으로 이사를 하셨다고 합니다.
몇 년 전 , 할아버지께서는 저녁 식사를 드시고, 과일 몇 조각을 맛있게 드신 후 샤워를 마치시고 먼저
잠자리게 들겠다고 하시며 침실로 들어가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대로 영면에 드셨습니다.
젊어서 부터 살뜰히 할머님을 챙기셨던 할아버지는 마지막까지도 할머니를 배려하셔서 그렇게 가셨다고
할아버지를 무척 그리워하셨습니다.
이후, 신장병 등 지병을 앓고 계시던 할머님은 유일한 혈육이 있는 미국의 딸에게 가고자 영주권을 신청하시고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하셨습니다.
미국으로 가시기 전 꼭 한 번 할아버지를 보고 가시고 싶어 하셨지만, 이웃에 사시는 남동생 할아버지
께서는 무리하면 절대 안 된다며 만류하셨고 성당 지인들에게는 폐 끼치기 싫어 말씀조차 못하고
있으시다는 걸 알고 두 달 전, 폐 끼치기 싫다던 할머니를 설득해 할아버지가 계신 파주 천주교 납골당에
다녀왔습니다.
성당 지하 납골당에 할머니께서 준비한 두 분의 모습이 담긴 작은 액자를 올려놓고
사진을 찍어 드렸습니다.
이제 여한이 없다며, 너무 고맙다던 할머님이 지난주 금요일 딸이 살고 있는 미국으로 떠나셨습니다.
전날 밤 큰 캐리어 2개, 작은 캐리어1개에 따님이 좋아한다고 하시며 미국에는 사기 힘들다시며
낙지젓갈,명이나물, 각종 밑반찬 등등 32kg의 캐리어 정량을 맞추려고 몇 번을 들었다 놨다~~
더 이상은 안된다며 할머님을 설득해 33kg 으로 겨우 합의?보고 짐 정리를 마쳤습니다.
덕분에 저는 아직까지 허리에 파스를 붙이고 있네요 ㅎㅎ
오전 6시 콜밴을 예약하셨는지라, 새벽 04시30분 기상하자 마자
할머님 댁 현관 키를 누르고 들어갔습니다.
밤새 유트브를 보시며 한숨도 못 주무셨다고 합니다.
그리곤 쑥스러우신 듯 봉투 하나를 내밉니다.
김선생! 잠이 안 와서 그냥 썼어~ 이따 나 가고 나서 열어봐~~
그녀에게 저는 김선생! 이라는 호칭으로 불립니다~~ㅎㅎ
할머니를 배웅해 드린 후, 열어본 봉투에는 잘 살라는, 할머니를 기억해 달라는 짧은 손편지와 함께
100달러 짜리 지폐 한 장이 들어있었습니다.
잘 살아가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하는 할머니를 기억해주기를....
할머니를 기억해주기를...
할머니를 기억해주기를...
많이 울컥했습니다.
그렇게 할머니는 떠나셨습니다.
할머니를 볼 때마다 3년 전 돌아가신 어머님이 생각났습니다.
암 진단을 받고, 항암 치료 6개월, 그리고 요양병원 3개월.
어쩌면 돌아가신 어머님 생각이 나서 할머님이 더 애틋했는지도 모릅니다.
요 며칠 출 퇴근시 계단을 오르내릴 때마다 할머님이 생각납니다.
김선생! 더도 말고 1년만 아니 2년만 딸,사위, 손주들과 지내다 딱 3일만 아프다 할아버지 곁으로
갔으면 좋겠어...
...
...
...
어제 낮에 페이스톡으로 할머니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아직 시차적응이 되지 않아 피곤하다고 하시지만 할머님의 목소리는 여전히 씩씩합니다.
표정도 밝아 보입니다.
김선생! 잘 도착했어. 고마워, 김선생 생각 많이 했어~ 김선생 행복하게 잘살아~~
늘 하시는 말씀, 고마워~ 고마워~ 행복하게 잘 살아~~
짧은 통화였지만 할머님의 목소리에서 행복해하시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어쨌든 할머님은 잘 지내시는 것 같았습니다.
내가 그리고 우리들이 잘 있는 것처럼~~
내가 그렇듯,
우리들 누군가라도 가끔,
우리들의 마음속에 있는 그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보이지 않은 안부를 전하는 것을 알기라도 하는 듯,
할머님은 잘 지내시는 것 같았습니다.
할머님과 통화 후
수많은 친구,인연들을 꼽아 보았습니다.
이름조차도 기억나지 않은 인연들일지라도...
이 하늘아래,
어느 땅에서 호흡을 할지라도,
짧았던 인연의 끝을 추억 속에서 가끔은 꺼내보구,
그들을 위해 짧은 안부의 쪽지를 하늘에 날려 보내는 것으로,
저는 또 안도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할머님이 그러하듯,
우리가 그러하듯,
앞으로도 우리들의 삶이 모쪼록 견딜 수 있을 만큼의 날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첫댓글 요렇고럼 글도 잘쓰시고~
맴도 따뜻하시고~
주변도 잘~챙기시는 보배같은 가야산님.
오래오래 같이걸어유~♡
친인척 사촌의 개념도 무너지는때인데
이웃사촌의 의미를 알게해주시는 글
생각이 많아져요~~
물흐르듯이 잘 읽혀지는 잔잔한 수필 한편을 읽었네요.
글이 좋은 것은 읽다보면 쓰신 분의 생각의 일부를 엿볼 수 있다는 것...
가야산님의 따뜻하고 타인에 대한 배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네요.
바로 옆에 이웃, 멀리 있는 분들의 안부와 기억을 한다는 것은 시간이나 삶이 넉넉해서가 아니라
그런 일들이 일상에서 우러나오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하죠.
낙화도 내 주위 분들, 멀리 떨어져 계신 분들의 안부를 묻고 생각하는 시간을 자주 가져야겠네요.
가야산님의 좋은 글 감사합니다.
누고보다도 맑고 따뜻한 눈빛을 가진 가야산님!
실생활도 다르지 않네요!
독거할머니를 향해 한발한발 가고있는
나의 이웃도 가야산님같은 맘을 가진
젊은이가 살았으면 좋겠어요.^^
가야산님의 성이 .'가'씨인줄 알았는데
저와 같은 '김'씨 가문의 자손이군요~ㅎㅎ
실화라고요? 좋은생각에 실려있는 글인줄~^^
어쩜...이리도 글을 감동있게 잘쓰시는지요~~
이케 글을 잘 쓰시는 분인지 몰랐습니다~~
오케에서의 배려와 희생의 아이콘이신 가야산님의 품성이 일상에서 몸에 밴 성품이었군요~~
감동적인 글 잘 읽었습니다
느끼는 바가 많네요..
여섯자매의 막내로 90이신 어머니도 잘 돌보지 못하는 저를 반성하는 시간이었어요 ㅠ ㅠ
김선생과 할머니
담백하게 써내려간
가슴 따뜻한 이야기
글도 잘쓰시는 분 이었군요^^
우리가 그러하듯
앞으로도 우리들의 삶이 모쪼록 견딜 수 있을 만큼의 날들이 되기를 ..
공감 하며
소망합니다 ~^
이웃 할머니 너무 위로되고 감사했겠네요. 아직까지 허리에 파스를 붙이고... 넘 공감되는 이야기... 나중에 해외 이주전에 가야산님 집근처로 이사가야겠어요 😂 책 쓰셔도 될 정도로 글을 참 잘쓰셨어요. You are such a 👍 good man. May God bless you~~~
한편의 에세이를 읽은듯...
우리가 그러하듯
앞으로도 우리들의 삶이
모쪼록 견딜수 있을 만큼의 날들의...
몇번 뵌적은 없지만 선하게 웃으시던 모습으로 기억되는 가야산님!
이정도면 수필가로 등단하셔도 될 듯 하네요^^
미사여구 없이 담백하게 써내려가신 글에 가야산님의 인성이 묻어나네요
마음이 따뜻해지는 글
잘~~읽고갑니다.
훌륭하세요 여러모로^^
한줄 한줄 탐독하다보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네요
오랜만에 집중하며 몇번을 읽었어요
가야산님의 따뜻한 마음을 보며
많은것을 생각하게 하네요
아무쪼록 할머니께서 사랑하는 따님과
건강하게 잘 지내시길요~~~^^
따듯한 삶의 이야기에 가슴이 뭉클해지네요..
그 선한 눈빛이 그냥 채워진게 아닐거라 짐작은 했어요~^^
음~ 나도 80즈음엔 아래층에 김선생이 사는 집으로 이사가고 싶네요,
아님 이선생이라도~^^
견딜수 있는 나날을 위하여 늘 기도 해 주실 분이 계시네요.든든하시겠습니다.비록 떨어져 있지만 두 분의 기억속에 좋은사람들로 오래 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