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녀, 기황후 貢女 奇皇后
“모진 비바람에 쓸리고 할퀴어 마모된 돌멩이가 더욱 야물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14
“그래, 별다른 낌새는 없었느냐.”
“특이한 점은 없사옵니다. 늘 눈여겨보고 있으니 염려 마십시오.”
“과히 박색은 아니더구나.”
“..그 아일 만나셨습니까?”
“황후궁에서 잠깐 마주쳤지. 그대로 찻시중이나 들게 하기에는 아깝더군.”
“...흐흠.”
“황제의 동태는 어떻더냐.”
“그것이- 아, 요 며칠 전 폐하께서 비어있는 후궁의 전각을 깨끗이 새 단장하라는 명을 내리셔서 누군가 황은을 입은 게 아닌가 하고 술렁이고들 있사옵니다.”
“흠. 그것은 두고 봐야 알게야. 황제의 잔꾀인지 어떤지는 지나봐야 알테니.”
“알겠사옵니다.”
“그래, 요사이 네 덕분에 일이 잘 풀려가고 있구나. 이렇게만 해 준다면 곧 큰 상이 내려질 것이야. 그리 알고 수고 하거라.”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럼 이만 가 보거라.”
“예, 그럼.”
“아, 헌데 네 이름이 뭐라 하였었지-”
...
“..‘소란’이라 하옵니다. 평부사 나으리.”
//貢女 奇皇后//
드물게, 그러나 종종 자신이 원할 때에 차를 마시곤 했던 황제의 명이 조금 전 효궁에 도착했다. 언제나 그랬듯 자연스레 그 명은 황제궁 소속이었던 은에게 전달되어야 했고, 때마침 자리를 비우고 없는 은을 성난 목소리로 찾고 있는 상궁에게 소란이 다가간다.
“마마, 은은 지금 황후궁에서 찾아계시어 불려갔습니다.”
“두 분도 참.. 시기한번 기가 막히게-”
“..예?”
“아니, 아니다. 그럼 별 수 없구나. 황제궁에는 내가 기별을 넣을 테니 서둘러 다기들을 준비하거라. 네가 대신하여 가는 것이다.”
소란은 당황한 척, 그러나 자못 진중한 태도로 대답하고는 뒤돌아서자마자 눈에 보이지 않는 미소를 지었다. 과연 쉬이 얻어지는 기회는 아니었다, 황제를 직접 대면할 수 있다는 것은. 분위기를 살펴 황제 본인과 측근들의 정황을 알 수 있을 수도 있고, 운이 좋다면 그 이상의 것을 얻을 수도 있을 터였다. 오늘과 같은 만일의 상황을 대비하여 늘 남몰래 연습을 해 두었던지라 다기 다루는 법, 찻물 우려내는 순서 따위의 것들은 아무런 문제도 아니었다. 걸음을 서두른 소란은 다기들을 깨끗이 정돈하고 찻잎을 골라 담으며 평부사의 말을 떠올렸다.
‘그 아이가 제 손으로 천재일우의 기회를 만든 셈이지. 궁 밖에서 들여온 찻잎은 분명 최상품의 것이더구나. 그 아이가 그만한 물건을 구할 수 있었다면 그건 분명 태감의 손을 빌었을 터, 이것을 빌미로 태감은 물론 황후마마께 걸림돌이 될 그 아이까지 한꺼번에 처단할 수 있을 것이다. ...찻잎에는 독초가 섞여 있으니 조금씩 복용케 한다면 눈에 띄지 않게 독에 중독되도록 만들 수가 있다. 그건 물론 태의들에게도 발견될 가능성이 전혀 없으니 걱정 말거라. 설령 발각 되더라도 그것은 태감에게서 보내진 찻잎이니 우리가 용의선상에 오를 일은 전혀 없겠지. 후후후, 제가 가장 믿어마지않던 측근에게 배신당한 비참한 황제의 얼굴이 궁금해지는 군. 물론 실망을 안기도 전에 온 몸에 퍼진 독으로 시퍼렇게 죽어나가겠지만.’
“준비는 다 되었느냐.”
“...아, 예..! 다 되었습니다.”
재촉하는 상궁의 목소리에 소란은 흠칫 놀라며 정신을 가다듬고서 다기들을 챙겨 나섰다. 괜찮다고 추슬러 봐도 역시 떨리지 않을 리 없는 마음에, 제게 이런저런 것들을 당부하는 상궁의 말까지 겹쳐 다분히 긴장해버리고 만다. 그러나 마른 침을 삼키면서도 표정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소란은 짐짓 미소까지 보이며 황제궁을 향해 갔다.
...
“이게 어찌 된게야. 효궁의 황제궁 소속 궁인은 네가 아니질 않느냐.”
황제궁의 집무실 앞에서 큰 한숨으로 마음을 다잡고 들어섰을 때 소란이 미처 생각지 못한 변수가 하나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황제의 수족과도 같은 고 환관이었다.
“그것이, 은은 지금 황후궁에 가 있는지라-”
“그렇다면 기별을 넣어서라도 응당 황제궁에-”
“아, 그만. 되었으니 그만들 하라.”
여유롭게 웃으며 말을 맺는 황제. 내심 은을 기다린 그의 얼굴에 조금 실망이 비쳤고 그것은 고 환관 역시 마찬가지였다. 소란만이 그걸 모른 채로 제 할 일을 해 나가기 시작했다. 황제는 곧 고 환관을 내보냈고, 그가 나가자마자 은을 찾아갈 것임은 당연한 일이었다. 썩 능숙한 솜씨로 찻물을 우려내는 소란의 행동들을 황제가 가만히 지켜보았다.
“경험이 없었을 터인데, 제법 능숙하구나.”
“과찬이시옵니다. 폐하.”
소란의 손이 눈에 띄지 않게 조금 느려졌다. 궁인 누구나가 한번이라도 만나고 싶어 혈안인 황제이지만, 이렇듯 평범하고 웃는 모습이 저렇게 선량한 분에게 독초로 우려낸 차를 권해야 하다니. 잠시 흔들린 마음을 채근하듯 황제가 묻는다.
“다 되었느냐.”
그의 앞에 화려한 다기잔이 놓인다. 그 안에 든 찻물은 고귀한 그것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그가 오랜만의 차향을 즐기며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다기잔을 입술에 대는 순간을, 소란은 저도 모르게 빤히 지켜보고 말았다. 꿀꺽. 목 넘김에 따라 그의 목젖이 힘차게 움직인 뒤, 눈이 마주친다.
“소, 송구하옵니다. 폐하..!”
“하하, 그리 놀랄 것 없다. 너도 마셔보겠느냐.”
“...예?”
“놀랄 것 없대두.”
가벼운 농이 즐거웠던지, 그는 흡족한 표정으로 차를 마셨다. 마지막까지 남김없이 마신 뒤, 두 번째 잔을 권하는 소란에게는 조금씩 그의 몸이 독으로 중독되어가는 것이 보이는 것 같아 안쓰러운 기분까지 일었다.
“보아하니, 너도 고려에서 온 모양이구나.”
“예, 그러하옵니다. 폐하.”
“은이라는 아이, 너도 알고 있느냐.”
“잘 알고 있사옵니다.”
“그래, 그렇겠지.”
마지막으로 그가 잔을 내려놓은 뒤, 소란은 조심스럽게 다기들을 정리했다. 그리고 조용히 문을 나서기 전, 그녀를 다시 불러 세운 황제가 이름을 물었던 순간에도 소란은 앞으로 제게 닥칠 일들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貢女 奇皇后//
같은 시간, 황후궁의 다기들을 챙겨 효궁으로 향하던 은은 저를 부르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걸음을 멈춰 세웠다.
“얘-”
“........?”
“니가 ‘은’이지.”
고려의 말이다. 이젠 원의 황성 안에서 그것을 들을 수 있다는 것에 크게 놀라지 않는다.
“네, 그렇습니다만.”
“난 ‘언주’라고 해. 효궁에선 날 잘 못봤을거야. 난 향유를 관리하는 궁인이거든.”
자신을 소개하면서도 영 다감하지 않은 어투는, 그녀가 제게 별로 호의적인 감정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해 주었다. 게다가 그것은 표정으로도 드러났다. 은 보다는 서너 살 쯤 위일까, 한껏 칩뜬 눈은 은을 기껍지 않게 쏘아보는 것 같기도 했다.
“난 별로 널 좋게 생각하지 않지만, 충고 하나 해 둘게.”
“.........”
“나도 고려에서 왔기 때문에 알지만, 그 머리장식 원에선 구할 수 없는 것일 텐데.”
“이건-”
“어디서 났는지를 묻는 게 아냐. 그렇게 눈에 띄는 물건을 하고 다니는 건 별로 좋지 않다고 말하려는 것뿐이야.”
은은 한 마디 덧붙이지도 못하고 언주의 말을 듣기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저를 좋게 여기지 않는다면서 이런저런 충고를 해 주는 이유도 모르겠거니와 또 그만큼 그동안 저를 남몰래 지켜보고 있었을 것을 생각하니 어안이 벙벙해서였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가만히 보니 너, ‘소란’이라는 아이와 친하게 지내는 것 같더라.”
“고려에서 오셨다면, 그 아이 역시 고려에서 온 공녀라는 걸 아실텐데요.”
“그럼, 잘 알지. 그 애보다 난 훨씬 더 먼저 궁에 있었기 때문에 아주 잘 알아. 여태껏 그 아인 한 번도 누군가와 그렇게 깊은 친분을 쌓고 지낸 적이 없어. 다들 무시했다기 보단 그 애 스스로 사람을 가까이 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그래서 그 애와 가까이 지내지 말라는-”
“궁에서 살기 위해선 눈치가 빨라야 해. 게다가 우리는 고려인이란 이유 하나 만으로 언제 어디서든 미움을 받는 존재들이니까.”
“.........”
“그 애, 좀 전엔 네 대신 다기를 챙겨들고 황제궁으로 갔어.”
잠시 말이 없는 은을, 언주는 오래도록 지켜보고 있었다. 은은 뭔가를 생각하는 것 같더니, 아주 찰나였지만 피식- 김빠지는 듯한 웃음을 내비쳤다.
“저만큼 ‘사람’에게 질려본 사람도 없겠지만,”
“.........”
“그렇게 되기 전까진 모르는 거잖아요. 설령 소란이 정말 무슨 목적을 가지고 제게 접근한 거여도 그 때가서 대응하면 되겠죠. 무엇보다 그 애가 제게서 얻어갈 만한 걸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아요, 난.”
“.........”
“그렇지만 충고는 고마워요. 기억해 둘게요, 언니.”
은은 손을 흔들며 경에게서 멀어진다. 멍한 상태로 잠시 서 있던 언주는 은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며 되뇌었다.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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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님★ 오랜만에 일등이신가요^^ 너무 아이처럼 기뻐하시네요ㅎㅎ 적인지 아군인지 알다가도 모른다는 말씀이 왜 이렇게 와닿는걸까요, 전ㅎㅎ 앞으로도 요런식의 전개가 조금 있을 전망입니다, 누가 적인지 누가 아군인지 잘 찾아주세요^^ 하하. 꼬릿말 감사해요^^
은에게 황제나 우겸 말고도 아무 이유 없어도 순수하게 제 편이 되어줄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ㅎㅎ 재밌게 읽었습니다. 다음 편두 화이팅 !
후안 님★ 음, 그런 사람이 있어준다면 참 좋겠죠. 그렇기 때문에 찾기 힘들지도요^^ 앞으로의 은의 모습도 지켜봐주세요. 꼬릿말 감사합니다^^
언주가 은이 편이될지도 ㅋㅋㅋ 소란이름 보고 충격이네요 ㅋㅋ
까불지마ㅋ 님★ 앞으로의 전개도 지켜봐주세요, 꼬릿말 감사합니다^^
처음 소란이가 등장했을 때 느꼈던 안 좋은 예감이, 바로 평부사와 손을 잡고 있었던 거군요. 이것 참.... 씁쓸하네요. 언주가 은에게 좋은 인연이 되었으면 좋겠어요ㅎㅎㅎ 다음편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유리별미곰 님★ 많은 등장인물 가운데 인연과 악연을 구분해야할 때인 것 같아요. 은이 잘 해나가길, 응원해주세요! 다음화에서 뵈요, 꼬릿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