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풍운(風雲)의 무림맹(1)
수계현을 절반쯤 감싸고 굽이치는 장강의 강변에 밤새 누가 뿌리고 지나간 듯
파릇파릇한 싹이 머리를 내밀던 날이었다. 벽운산장의 추료는 드디어 십 년 만에
처음으로 공동파의 제자들이 입는 도사복을 꺼내 들었다.
묵(墨) 빛이 은은하게 감도는 그 한 벌의 옷은 스승인 태허자가 청명검을 하사
할 때 함께 내렸던 옷이다. 추료는 이미 고인이 된 태허자를 생각하며 한쪽 팔씩
천천히 끼워 넣었다. 그리고 마침내 허리띠를 불끈 졸라매고 벽운산장의 안뜰로
내려섰다.
벽운산장의 안뜰 좌편으로 광료와 세 명의 사질이 서있었고, 그 맞은편에 추료
의 제자 두 사람이 서있었다. 추료는 두명의 제자를 향해 눈길을 주었다. 함께
가지 않아도 좋다고 했건만 황이구와 소복래는 따라 나서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추료가 사람들을 둘러보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모두 준비가 되었느냐?'
'저희는 이미 모든 준비를 마쳤습니다.'
사질과 제자들의 우렁찬 음성을 들으며 추료가 고개를 미미하게 끄덕였다. 추
료의 눈길이 광료에게 이르렀다가 다시 사질들에게 향했다.
'대견한 녀석들, 복마검법을 완성하다니 너희야말로 공동파의 동량(棟梁)들이
다.'
광료는 감격스런 눈길로 사형을 바라보았다. 추료의 전신에서는 은은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무려 십 년 만에 다시 대하게 된 사형의 위엄이었다. 사형이
다시 공동파의 옷을 입었으니 복마심검을 대성한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이제
공동파는 과거보다 더한 무명(武名)을 떨칠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장소협에게 들러 함께 떠나도록 하자.'
추료의 입에서 장소협이라는 말이 떨어지자 사람들은 환하게 웃으며 일제히 허
리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그들 모두에게 장염이라는 이름은 특이함과 신선함의 대명사였기에 자연히 웃
음이 가득할 수밖에 없었다. 벽운산장의 삼대 고수인 황이구와 소복래는 말할 것
도 없고, 광료와 세 명의 제자들에게까지 장염은 생각할수록 기분 좋은 사람이었
다. 무림의 절정 고수인 그에게는 어떤 권위도 또 어떤 인생의 권태로움도 찾아
볼 수 없다. 그는 마치 찐빵 하나에 생사(生死)를 건 사람처럼 열심히 만들어 팔
았던 것이다. 물론 근래에 들어서는 장사를 그만두어 무얼 먹고사는지 알 도리가
없었지만 한때 장염의 찐빵과 만두는 수계현에서 유명했다.
일곱 명은 각자 짐을 꾸려서 어깨에 매고 벽운산장을 출발했다.
추료와 육인의 일행이 동쪽 끝에 자리한 장염의 거처에 이른 것은 정오 무렵이
었다.
추료는 장염의 거처에 이르자 정중하게 입을 열었다.
'장소협 계시오?'
추료의 음성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방문이 덜컥 하고 열리더니 장염이 큰 걸음
으로 걸어 나왔다. 장염이 나옴과 거의 동시에 향이도 작은 봇짐을 어깨에 매고
방에서 걸어나왔다.
'미리 나와 있지 못했습니다.'
장염이 웃으며 허리를 숙이자 추료가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장소협께서 미리 나와 있을 이유는 또 뭐요, 우리가 모시고자 했으니 먼저 움
직여야지요.'
장염의 뒤에 향이가 조용히 섰다. 두 사람이 마당으로 내려오자 황이구와 소복
래는 얼굴을 붉히며 허리를 깊이 숙였다. 장염은 그들을 향해 마주 인사를 마친
뒤 다시 청운과 풍운, 일운을 향해 허리를 숙여야 했다. 청운과 풍운, 일운은 장
염이 허리를 숙이자 황송한 듯 더욱 깊이 허리를 조아렸다.
추료는 그런 사질들을 보며 유쾌한 듯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이 녀석들아, 너희는 어째 사백과 스승보다 장소협에게 더욱 공손한 게
냐? 누가 너희를 보면 장소협의 제자들 인줄 오해하겠구나.'
'하하하, 어찌 감히 저에게 저런 출중한 제자들이 있겠습니까? 그저 저분들의
품성이 지나치게 순후(淳厚) 하다 보니 제게 과례(過禮)를 하고 있는 게지요.'
두 사람이 가벼운 농담을 주거니 받거니 하자 청운과 풍운, 일운은 얼굴을 붉
히고 뒤로 물러났다. 확실히 이 세 사람이 장염에게 대하는 태도는 일반인의 생
각을 초월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추료나 광료는 세 사람을 별반 탓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들이 더욱 장염에게 공손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 세 사람이 장
차 공동파를 이끌어 나갈 때, 장염과의 친분은 아주 중요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간 수계현에서 지낸 날들을 돌이켜 보니 마치 길고 긴 꿈 같소이다. 꿈 저
편에서 나는 아주 작고 초라했는데, 깨어나 보니 그때가 오히려 더 행복했구려.'
장염이 추료의 말속에 담긴 그리움을 깨닫고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추료가 고개를 돌려 다시 돌아오지 못할 수계현을 둘러 본 후 장염에게 말했
다.
'가십시다.'
추료의 입에서 그 한마디 말이 떨어지자 아홉 명의 사람들은 천천히 북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장염이 추료의 뒤를 따라 몇 걸음 걷다가 돌아보았다. 지난 겨울을 잘 지내게
해준 폐가(廢家)가 배웅하듯 문짝을 덜렁이며 있었다. 문짝을 흔든 바람이 얼굴
로 불어 왔다. 이미 냉기(冷氣)가 사라진 삼월(三月)의 봄바람이었다.
'드디어 수계현을 떠나는 구나. 난주라...'
같은 시간 수계현의 중앙에 자리한 대륙전장에서는 혼인준비로 한창이었다. 오
늘은 바로 금소구가 그의 아들 금마장과 수계현 현감 나지상의 금지옥엽 나옥령
을 혼인시키기로 한 날이었기 때문이다. 대륙전장의 사람들은 모두가 들뜬 얼굴
로 수계현에 다시없을 이 성대한 혼인을 준비했다. 수계현의 인구 중 절반은 현
감의 집에 나머지 절반은 금소구의 집에 몰려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금소구는 금마장에게 신랑의 옷을 입히고 한 마리 말을 준비하여 시종들과 함께
현감의 사택으로 향하게 했다.
수계현 현감 나지상은 뜰 안에 거대한 연회를 준비하고 금소구 일행이 도착하
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정오에 도착할 예정이라던 금소구 일행은 해가 머리 위에
서 한 뼘이나 옆으로 기울어 졌는데도 도착하지 않았다.
나지상이 인상을 찌푸리며 안뜰에 가득한 손님들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 그러
나 그가 아무리 조바심을 가지고 사위를 기다려도 금소구를 실은 백마는 보이지
않았다.
'허어, 이 무슨 일이더냐? 대륙전장에서 이곳까지 겨우 이각(삼십분)이면 충분
한 거리인데, 어째 해가 이미 머리에서 비껴 가는 데도 사위가 오지 않는 건가?'
마침내 참지 못한 나지상(羅至上)이 동생 나지원(羅至援)을 대륙전장으로 보냈
다. 그러나 얼마간 시간이 지나 되돌아온 그가 전해준 말은 황당함 그 자체였다.
'형님, 이미 금소구가 아침나절에 종들을 이끌고 이곳으로 떠났다고 합니다.'
'금소구가 언제 이곳으로 왔다고 그따위 말을 하는 게냐? 대륙전장에서 우리
나가(羅家)를 안중에 두지 않고 있지 않은 다음에야 어찌 이 같은 수작을 부릴
수 있단 말인가!'
나지상이 언성을 높이자 손님들도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알고 슬슬 자
리를 떠나기 시작했다. 마침내 마지막 한 사람 마저 떠나가자 나지상은 관병들을
이끌고 직접 대륙전장으로 달려갔다. 수계현에서 나지상의 일은 바로 나랏일이었
으니 그의 집안에 일을 벌였다면 대역죄인이 되는 것이다.
나지상이 관병을 이끌고 대륙전장에 당도하자 금소구 역시 황당한 얼굴로 나지
상의 앞에 달려나왔다.
'대인, 어쩌자고 이런 일이 생겼는지 알다가도 모르겠소이다. 분명 아들과 종
복들이 아침상을 물리고 조금 쉬었다가 모두들 떠났는데, 아직 당도하지 않았다
니요?'
나지상이 금소구의 하얗게 질린 얼굴을 보니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금대인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필경 무슨 변고가 생긴게 아니오?'
나지상의 안색도 그제야 조금 어두워졌다. 지금까지는 앞뒤 생각 없이 달려 왔
는데 대륙전장에 이르러 금소구의 얼굴을 대하자 뭔가 일이 꼬였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나지상이 수계현에 부임한 이래로 아직까지 큰 사고가 없었는데, 하
필이면 자기 딸의 혼인날에 사위에게 사단이 일어난 것이다.
두 사람이 마주보며 큰 근심을 하고 있는데 멀리서 일단의 무리들이 터덜거리
며 걸어오고 있었다. 바로 금마장과 함께 현감의 집으로 가라고 보냈던 종들이었
다.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것이냐? 마장이는 어찌하고 너희들만 돌아온단 말이냐!'
금소구가 벼락같이 소리를 지르자 돌아온 다섯 명의 종들은 지고있던 선물꾸러
미를 땅에 내려놓고 머리를 조아렸다.
'아이고 주인님, 소장주님께서 시장통을 지나실 무렵 갑자기 말을 몰아 바람처
럼 달아나셨습니다. 저희들이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며 뒤따라갔지만 등에 진 짐
이 많아 그만 놓치고 말아습니다.'
'뭐라?'
금소구가 눈을 크게 뜨고 다섯 사람을 노려보자 종들은 이구동성(異口同聲)으
로 금마장이 뭐라고 소리치고 달아났다고 했다.
'소장주님께서는 저희들을 향해 '나는 반드시 더 배운 뒤에 돌아오겠다'고 말
씀하셨습니다.'
'반드시 더 배워 오겠다니 그 무슨 소리냐?'
금소구가 종들을 향해 더 캐물었지만 그들도 그 소리 외에는 들은 것이 없다고
했다. 금소구가 불현듯 집히는 바가 있어 벽운산장으로 하인들을 보냈으나 그들
은 돌아와 산장이 텅 비어 있었다고 했다.
나지상이 울그락 붉그락 해진 얼굴로 금소구를 향해 말했다.
'아니 자식하나 단속을 못해서 나까지 이런 수치를 당하게 한단 말이오? 이제
그대의 아들이 집을 나갔으니 옥령이는 어쩌란 말이오? 그대는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하실 생각이오?'
금소구는 나지상의 추궁을 듣고도 감히 반박하지 못하고 다만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 나옥령과의 혼인은 둘째치고 이제 삼대독자가 벽운산장의 사람들을 따
라 강호로 나갔으니 생사를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금소구가 자신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자 나지상은 크게 헛기침을 터뜨리고
는 횅하니 떠나가 버렸다. 아무래도 분위기를 보니 나씨 집안보다 금씨 집안이
더 위태로 왔던 것이다. 나씨야 수치스러울 뿐이지만 금씨는 후손이 단절되게 생
겼다.
'헛, 저렇게 사람들이 앞뒤 생각이 없어서야 원, 어디 제명대로 살겠는가!'
나지상의 마지막 한마디가 금소구의 가슴에 틀어박혔다. 정말 삼대독자가 제명
대로 살지 못한다면 금씨의 가업(家業)은 여기서 끝장이었다. 그동안 부처님과
조상님들 그리고 부뚜막신과 이름을 알 수 없는 중원의 온갖 신들에게 집안의 무
사안녕(無事安寧)을 기원했건만 오늘 그 모든 바램이 산산조각 나고 만 것이다.
금소구가 현기증을 느끼며 자리에서 쓰러지자 주변에서 사람들이 달려들어 그
를 부축했다. 금소구의 감은 눈에 아들 금마장의 훤한 얼굴이 보였다.
'마장아...'
금소구가 중얼거리며 정신을 잃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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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ㅈㄷㄳ..
감사합니다.
늘 감사합니다.
ㅎㅎ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즐감!
감사합니다
즐겁게 잘 보고 있습니다
즐감
즐독요
즐감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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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 있게 읽고 갑니다
항상 건강 하고 행복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