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13~17 / 종교개혁을 하신 예수님
(요 2:13)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요 2:14)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요 2:15)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요 2:16)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요 2:17)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마틴 루터는 종교개혁을 통하여 개신교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그 종교개혁의 뿌리를 보면 예수님에게로 거슬러 올라가고, 예수님의 종교개혁은 이사야와 예레미야의 종교개혁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예수님의 종교개혁을 통해서 기독교가 형성되었습니다.
이사야와 예레미야의 종교개혁을 통하여 진실한 유태교가 생겨났습니다.
이런 종교개혁은 지금도 지속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기득권과 싸워야 하는 목숨을 건 행위입니다. 개혁만이 살길이요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는 길입니다.
13~16절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고 첫 번째 유월절을 맞이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가셔서 아버지 집인 성전을 찾아갔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이요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성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소리가 들리고, 기도하는 소리가 쉬지 않고 찬양으로 가득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 성전에 갔을 때 성전에는 장사하는 소리, 돈 바꾸는 소리가 가득하였습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집이 아니라 장사꾼의 집이 되어 있었습니다.
성전의 주인은 돈이 되고,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장사치들은 제물을 팔아서 폭리를 취하고 있었고, 성전 세를 바치도록 환전하는 사람들도 높은 환율을 적용하여 폭리를 취하였습니다. 그들은 종교 지도자들에게 자릿세로 커미션을 주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은 성전을 ‘장사하는 집’을 만들었다고 말씀하시지만, 다른 복음서에 보면 ‘강도의 집’을 만들었다고 나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강도같이 성도들의 돈을 착취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제물을 팔아서 7~14배의 폭리를 취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채찍으로 양이나 소를 성전에서 쫓아내셨습니다. 돈 바꾸는 자들의 돈을 둘러엎으셨습니다.
비둘기파는 자들에게 비둘기를 가져가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개혁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개혁한 핵심은 무엇일까요? 성전의 주인이 사람이나 돈이 된 것을 쫓아내고 성전의 주인을 하나님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성전의 주인 된 장사치를 쫓아내고 하나님을 주인 되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장사치는 상인들보다는 이들을 통해서 이익을 얻는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거룩한 하나님의 종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시기에 그들은 장사치들입니다.
그들의 깊은 중심에 하나님이 없고 돈만 있었습니다.
지금의 성전은 우리의 몸이고 성도의 모임인 교회입니다. 그곳에 하나님이 주인 되어야 합니다. 사람이나 돈이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채찍을 드시고 둘러엎으십니다. 우리가 주인 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주인 되는 교회를 만들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말씀에 기초하여 개혁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붙잡으신 말씀은 이사야와 예레미야 말입니다. 개혁은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시편 말씀과 이사야 예레미야 말씀으로 개혁하셨습니다.
(사 56:7)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렘 7:11)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둑의 소굴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수님의 개혁은 이사야 예레미야 시대에 시작된 것입니다. 이사야와 예레미야 시대에도 성전이 타락해 있었습니다. 이사야는 성전을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모여서 하나님과 기도하며 교제하는 곳입니다. 예레미야는 그 성전이 도둑의 소굴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유다가 바벨론에 망하기 전에 성전 안에서 우상을 숭배하고 남창들이 성전 안에서 몸을 팔았습니다. 성전에서 살인하고 성전에서 종교 지도자들은 돈 버는 데 열심이었습니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성전도 망하고 예루살렘도 망하고 유다도 망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시대를 바벨론 포로에서 지키기 위해서 눈물로 그들의 죄를 책망하였습니다.
오늘날도 그와 비슷하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기독교가 그렇게 망해가고 있습니다. 교회는 춤추는 장소가 되고 이슬람교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 교회가 그 모습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망합니다.
(요 2:17)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온유하신 예수님이 왜 이렇게 분노하셨을까요?
첫째는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개혁을 보면서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나를 삼키리라는 시편 말씀을 기억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사랑하여 아버지 집에 들어온 장사치와 강도들을 쫓아내고자 하였습니다. 또한 이스라엘을 사랑하셨습니다. 성전이 타락하면 성전만 망하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과 이스라엘 전체가 망합니다. 이스라엘이 로마에 망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개혁하신 것입니다.
이 개혁은 목숨을 건 개혁입니다. 나를 삼킨다는 것은 불에 타서 죽는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개혁으로 결국 목숨을 잃게 된다는 말씀을 기억하며 죽음을 각오하고 죄와 싸우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야 이 말씀을 기억하고 예수님의 개혁의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개혁은 기득권층과 싸움입니다. 기득권층은 자신의 이익을 놓지 않고자 합니다. 자신의 이익을 빼앗아 가고자 개혁하는 사람들을 결국은 죽이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개혁을 하는 사람은 목숨을 거는 각오가 필요합니다.
개혁하다가 돌아가신 예수님의 죽음은 헛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통하여 기독교가 형성되고 세계의 수많은 사람이 회개하고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목숨을 걸고 개혁해야 하는 이유가 이 개혁이 살 갈이 때문입니다.
우리의 개혁이 나도 살고 나라를 살리고 세계를 살리는 길입니다.
유대인들은 이사야를 톱으로 켜서 죽이고 예레미야를 지하감옥에 가두고 애굽으로 잡아갔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성전은 불에 탔고 유다 사람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이사야와 예레미야의 희생은 헛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희생을 통해서 새로운 이스라엘이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구약성경 39권을 보존하여 물려주었습니다. 이들의 개혁을 이어받아 에스라 느헤미야가 개혁을 완성했습니다. 그
들은 믿음의 가정을 이루게 하고 안식일을 지키게 하고 십일조를 내게 하였습니다.
우리도 나 한 사람이 개혁해야 내가 살고 우리 가정이 개혁해야 우리 가정이 살며, 우리 교회가 더 나아가 한국 기독교가 개혁해야 교회가 살고 나라가 사는 길입니다.
우리 몸이 돈을 벌어야 하지만 돈 버는 도구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만이 우리 교회의 주인이요 그리스도가 되게 해야 합니다. 돈이나 사람이 주인이 되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내가 살고 교회가 살고 우리나라가 사는 길입니다. 세계 만민을 살리는 길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