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선하고 의로운 “○○” 형제(자매)님!
누가복음 23 : 50 – 56
종종 성경은 사람을 소개할 때
그 사람의 이름 앞에 형용사를 붙이곤 합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 간단한 형용사로 표현하곤 하는데요.
그 사람을 평가하는 성격을 띄고 있지요.
누가가 요셉을 소개하는 대목에도
그런 형용사가 붙어 있습니다.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누가복음 23 : 50)
여기서 “공회 의원”은
그의 사회적 위치를 말해 줍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국회의원 정도 되는
꽤 권력이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나오는 ‘형용사’가
우리의 시선을 끕니다.
‘선하고 의로운’이라는 대목 말입니다.
사실, 사람에 대한 성경의 평가는
대부분 그가 선했나, 아니면 악했나로 나뉩니다.
의로웠는가, 죄를 지었는가에 관심이 많지요.
그런데 이 요셉은 악하지 않았고, 죄를 짓지 않은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었다는 겁니다.
꽤 후하게 평가하고 있는데요.
그 이유를 누가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아니한 자라...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눅 23 : 51)
다른 공회 의원들은 모두
예수님을 죽이는데 찬성했지만,
그만은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자신의 유익을 쫓아서
예수님을 죽이려 했지만,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인
이 요셉만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판단해 반대했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모두가 “맞다.”라고 할 때,
홀로 신앙을 지키기 위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게 어디 쉽니요?
어렵습니다.
“○○씨, 또 이런다. 좀 쉽게 가자.
이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아?”
이러면서 타협을 요구할 때도,
홀로 아니라고, 좀 더 도덕적인 결정,
정의로운 결정을 해야 한다고 외치는 건
정말 어렵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런 사람을 향해,
‘선하고 의롭다’라고 평가한다는 겁니다.
“선하고 의로운 요셉!” 이렇게 말입니다.
이젠, 시선을 요셉에게서 내게로 돌려봅시다.
우리, 어젠가 주님을 만날 텐데요.
그때, 우리 주님, 우리 이름 앞에도 이 수식어,
“선하고 의로운”을 넣어서 불러 주실까요?
“선하고 의로운 ○○!”라고.
모쪼록 “선하고 위로운”이라는 이 형용사에
걸맞게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모두가 “맞다.”라고 우겨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홀로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와 담대함을 가지고 말입니다.
그때, “선하고 의로운”이라는 이 수식어가
우리 이름 앞에 멋지게 붙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까요?
“선하고 의로운 ○○ 형제(자매)님!”
- 박신웅 목사의 깊이있는 묵상 중에서
복있는 사람 2023.3.4월호
프리츠 폰 우드의 앰마오로 걸어가기(1891)
주님의 부활을 축하합니다. / 이미지 : 사춘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