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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꾼들 말로는 몸집이 크다. 짧은 귀에 짧은 꼬리. 털이 무성한 네 발. 발바닥 털은 꽤 짧다. 다리와 귀, 눈 주위가 검은색이고 나머지 부분은 흰색이다. 이 곰의 어린 개체를 그저께 손에 넣었고, 성체 곰의 잘린 가죽을 보았다. (....) 이 놀라운 곰의 성체를 잡으려 나는 20일 동안 10여 명의 사냥꾼을 고용했다.”
(왼쪽부터) 1869년 파리 자연사박물관 휘보(Nouvelles archives du Muséum d'histoire naturelle de Paris) 표지. 거기 실린 다비드의 다비드의 중국 탐사기. ‘자이언트 판다’(Ursus Melanoleucus)에 관해 기록한 다비드의 메모 내용. (이미지 출처 = Biodiversity Heritage library)
선교사의 발견, 우르수스 멜라노레우쿠스
1869년 3월, 라자리스트 선교사가 기록한 어느 낯선 동물의 모습이다. 우르수스 멜라노레우쿠스(Ursus Melanoleucus). 오늘날의 학명은 아이루로포다 멜라노레우카(Ailuropoda melanoleuca). 우리가 알고 있는 이름은 ‘자이언트 판다’다. 이 동물을 기록한 선교사 노트는 얼마 후에 파리로 보내졌고, 그해 자연사박물관 휘보에 실렸다. 중국 판다가 전 세계에 첫 선을 보인 순간이었다.
노트를 작성한 이는 아르망 다비드(Jean-Pierre-Armand David, 譚衛道, 1826-1900)였다. 1862년 물리(Joseph-Martial Mouly, 孟振生, 1807-68) 주교를 따라 파리에서 북경으로 온 이다. 동물학과 식물학에 깊은 관심을 보인 사제였다. 북경조약(1860) 이후 중국에서 프랑스의 활동 공간이 넓어지자 선교사들은 여러 활동을 기획했다. 북경에 프랑스식 학교를 세우는 것도 그중 하나였다. 프랑스 정부 역시 적극적으로 나섰다. 북경 주교 물리가 파리를 방문했을 때, 학교 설립 문제가 구체적으로 논의되었다. 라자리스트 총장 에티엔(M. Etienne, 1801-74)은 학교를 맡을 이를 물색했고 이내 다비드를 발탁했다.
프랑스 자연사박물관의 동물학자 밀느 에드와(Henri Milne-Edwards)가 다비드의 보고 내용을 토대로 그린 판다 그림.
(이미지 출처 = panda.fr)
선교를 위한 과학 교육
당시 다비드는 이탈리아에 있었다. 사보나의 신학교에서 자연과학을 가르쳤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자연을 관찰하는 데 흥미가 있었다. 의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이었다. 자연을 향한 관심은 신학교 시절 내내 이어졌다. 그의 소임이 자연과학 교사였던 건 우연이 아니었다. 그가 일찍이 해외 선교를 자원했음에도 말이다. 1853년 사제 서품을 받고 사보나에 있는 동안, 그는 지중해와 알프스 산기슭에서 여러 식물을 채집했다. 신학교 안에 식물 표본 전시 공간을 만들기도 했다. 자연과학 교사로서의 자질과 재능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에티엔이 그를 발탁한 이유였다.
물리와 에티엔이 염두에 두었던 건 예수회의 방법이었다. 17-18세기 예수회 선교사들은 과학으로 중국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두 사람은 19세기에도 그 방법이 유효하다고 믿었다. 신학교는 물론 북경 교회가 세운 일반 학교에서도 유럽 과학을 가르칠 필요가 있었다. 서양 과학 교육을 받은 중국 청년들은 선교 사업에 큰 자산이 될 것이었다. 프랑스 정부에도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프랑스의 과학 연구 범위를 중국으로 확대하는 동시에 지적 자산까지 강화할 수 있었다. 북경에 세워질 프랑스식 학교에 프랑스 정부가 적극적이었던 배경이다.
(왼쪽) 아르망 다비드(Jean-Pierre-Armand David). 1826년 9월 7일 프랑스 바스크 지방의 에스펠레트에서 태어났다. 프랑스와 스페인 국경에 있는 피레네 산맥의 대서양 쪽 지역으로 바욘 근처다. 독특한 문화와 역사를 간직한 도시로 오래된 교회와 궁전, 매혹적인 박물관과 갤러리로 가득하다. 다비드 가족은 이 지역에서 가장 성공한 가문 중 하나였다. 치안판사이자 의사였던 아버지 도미닉(Dominique David)은 세 아들을 자연에 대한 애정과 호기심이 가득하도록 키웠다. 아버지의 교육과 사랑은 다비드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오른쪽) 다비드가 1875년에 출판한 “청 제국에서의 세 번째 탐사 일지”(Journal de mon troisième voyage d’exploration dans l’Empire chinois). 이 책의 제31장은 중국 내 동물의 분포를 카테고리로 묶어 설명하고 있다. (이미지 출처 = Wikipédia, Biodiversity Heritage library)
예수회 선교사의 중국 동식물 연구
프랑스 정부의 중국 연구는 역사가 깊다. 1685년 루이 14세가 청(淸)에 파견한 ‘국왕의 수학자들’이 시초다. 물론 예수회의 중국 연구는 그 이전부터 있었다. 동식물 연구로는 보임(Michael Pierre Boym, 卜彌格, 1612-59)이 선구적이다. 명청 교체기에 해남도(海南島) 일대와 남명(南明) 조정에서 활동한 이다. 해남도 시절에 그는 다양한 자생 식물과 동물을 관찰하고 기록으로 남겼다. “중국식물지”(中國植物誌, Flora Sinensis, 1654)가 그 결실이다. 이후 그는 남명 조정의 서신을 품고 유럽에 갔고, 8년 후인 1658년에 중국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함께 파견된 이가 쿠플레(Philippe Couplet, 柏應理, 1624-92), 페르비스트(Ferdinand Verbiest, 南懷仁, 1623-88)였다.
중국으로 떠나기 전, 쿠플레는 34개 항목으로 구성된 목록을 받았다. 루이 14세의 재상이었던 루부아(Marquis de Louvois, 1641-91)가 맡긴 질문지였다. 청 제국에 관한 다양한 물음이 거기 담겨 있었다. 청의 정부 조직을 비롯해 풍속, 기술, 지리, 기후, 동식물 분야도 광범위했다. 프랑스 과학아카데미가 루부아의 의뢰로 작성한 것이었다. 중국에 이른 후, 선교사들은 과학아카데미의 질문에 하나둘 답해 나갔다. 시간이 지나자 단순히 질문지에 답하는 수준을 넘어섰다. 그들은 능동적으로 관찰했고 수집했다. 또한 다양한 식물 표본을 프랑스로 보냈다. 유럽에 미처 알려지지 않은 씨앗과 식물이었다.
그때가 1734년 즈음이었을 것이다. 식물에 관한 흥미로운 서신이 해안과 대륙을 넘었다. 북경과 파리, 런던,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오가는 서신이었다. 북경의 발신자는 주로 세 사람이었다. 파르냉(Dominique Parrenin, 巴多明, 1665-1741), 댕카르빌(Pierre Nicolas d'Incarville, 湯執中, 1706-57), 씨보(Pierre-Martial Cibot, 韓國英, 1727-80)다. 모두 북당(北堂)의 프랑스 예수회 선교사다. 라자리스트 선교사 조제프 가베(Joseph Gabet, 秦噶哗, 1808-53) 역시 박물학(博物學, Natural history)에 관심이 많았다. 이들 선배 프랑스 선교사의 계보를 이은 이가 바로 19세기 후반의 아르망 다비드였다.
보임(Michael Pierre Boym)의 “중국식물지”(中國植物誌, Flora Sinensis, 1654). 그가 중국 해남도(海南島) 일대에서 발견한 자생 식물과 동물을 관찰한 기록과 그림이다. 위 사진은 2023년 상해고적출판사(上海古籍出版社)에서 나온 것으로 상해 서가회 장서루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진귀 문헌을 고급 장정의 도록으로 다시 출판한 것이다. ©오현석
보임(Michael Pierre Boym)의 “중국식물지”(中國植物誌, Flora Sinensis, 1654) 일부. ©오현석
스타니슬라스 줄리앙과 만나다
중국행이 결정된 후, 다비드는 파리에서 스타니슬라스 줄리앙(Stanislas Julien, 1799-1873)을 만났다. 물리 주교가 주선한 만남이었다. 줄리앙은 저명한 중국학자로 프랑스 과학아카데미 회원이었다. 그는 다비드의 박물학 지식과 경험을 듣고는 두 학자를 소개해 주었다. 국립자연사박물관의 동물학자 밀느-에드와(Henri Milne-Edwards, 1800-85)와 식물학자 에밀 블랑샤르(Émile Blanchard, 1819-1900)였다. 다비드의 중국 자연 연구를 프랑스에 알릴 통로였다.
그들은 탐사에 필요한 물품 일체를 다비드에게 제공하기로 했다. 다비드 역시 자연사박물관에 중국 동식물 표본을 보내기로 약속했다. 다비드의 생각은 이랬다. 과학의 목표는 신성하다. 과학적 탐구는 창조주의 영광을 드러내는 과정이다. 과학적 사실을 알아가는 것은 하느님을 알아가는 것과 같다. 앞선 시대 예수회 선교사들의 생각과 일치했다. ‘세상 모든 것에서 하느님 발견하기’(Finding God in All Things). 예수회를 세운 이냐시오 영성의 핵심이었다.
(왼쪽) 프랑스의 중국학자 스타니슬라스 줄리앙(Stanislas Julien)의 초상화. 그의 이름을 딴 상이 바로 스타니슬라스 줄리앙 상(Prix Stanislas Julien)이다. 프랑스에서 해마다 가장 우수한 중국학 연구서에 수여하는 상으로 1872년에 만들어졌다. 프랑스 인문학회(Académie des Inscriptions et Belles-Lettres)가 수상작을 선정하며, 첫 번째 수상작은 1875년 제임스 레그(James Legge)의 "The Chinese Classics"이었다. 이후로도 쿠랑(Maurice Courant), 샤반느(Edouard Chavannes), 그라네(Marcel Granet), 마스페로(Henri Maspero), 니덤(Joseph Needham), 쉬페르(Kristofer Schipper) 등 유럽 최고의 중국학자들이 쓴 연구서가 선정되었다. (중간) 프랑스 국립자연사박물관의 동물학자 밀느-에드와(Henri Milne-Edwards). (오른쪽) 식물학자 에밀 블랑샤르(Émile Blanchard). (이미지 출처 = Paris musées collections, prabook.com, fineartamerica.com)
다비드, 북경을 탐사하다
1862년 2월, 다비드는 물리 주교와 함께 중국으로 가는 배에 올랐다. 그해 7월 5일, 그들은 북경에 도착했다. 다비드는 북당에 머물며 중국어를 공부했다. 주변 자연 환경도 세심히 관찰했다. 북경에 있던 2년 동안, 그는 이화원(頤和園) 서쪽인 향산(香山)과 서산(西山)을 돌아다니며 표본을 채집했다. 북경 라자리스트가 세운 학교의 자연사 강의를 위한 활동이었다. 동시에 희귀한 자생 식물의 표본을 프랑스 자연사박물관에 보냈다.
서만자 델피니움이 그 시절 그가 채집한 표본 가운데 가장 유명하다. 중국어 이름은 기북취작화(冀北翠雀花)다. 다비드는 서만자(西灣子) 일대도 탐사했는데, 숭례(崇禮) 주변 산에서 그가 발견한 꽃이었다. 중국 화북 지방에 서식하는 식물로 자연사박물관의 식물학자 블랑샤르가 그 꽃을 ‘서만자 델피니움’이라 명명했다. 다비드는 열하(熱河, 지금의 승덕承德)까지 범위를 넓히며 탐사를 이어 갔다. 거기서도 상당한 양의 동식물 표본을 수집했다. 모두 다채롭고 흥미로운 표본이었다.
서만자 델피니움(Delphinium siwanense) 표본과 사진. 왼쪽은 1862년 9월에 다비드가 숭례(崇禮) 서만자 인근 산에서 채집하여 프랑스 국립자연사박물관에 보낸 것이다. 서만자 델피니움이라는 이름은 식물학자 블랑샤르가 붙였다. (이미지 출처 = “崇礼博物散记”, 北京大学出版社, 2021)
다비드가 서만자에서 채집한 여러 식물과 표본. (이미지 출처 = “崇礼博物散记”, 北京大学出版社, 2021) ©오현석
다비드가 서만자에서 채집한 여러 식물과 표본. (이미지 출처 = “崇礼博物散记”, 北京大学出版社, 2021) ©오현석
탐사, 더 깊은 곳으로 가다
파리 자연사박물관 측은 다비드가 보내온 표본의 양과 질에 놀랐다. 그들은 중국이 자연사 연구의 보고임을 깨닫는다. 더 많은 탐사와 더 깊은 연구가 필요했다. 자연사박물관의 동물학자 밀느 에드와는 교육부 장관 뒤뤼이(Jean Victor Duruy, 1811-94)를 찾아가 부탁했다. 라자리스트 총장 에티엔에게 다비드 건을 건의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다비드가 중국의 더 깊은 지역을 탐사하려면 선교 활동의 소임에서 벗어나야 했다. 프랑스 정부의 요청이었기에 에티엔도 흔쾌히 동의했다.
1866년부터 1874년까지, 다비드는 세 차례의 탐사 여행을 떠났다. 첫 번째 탐사는 1866년 3월 12일부터 10월 26일까지였다. 그는 북경의 서북쪽 바깥으로 나아갔다. 장자커우(張家口), 후허하오터(呼和浩特), 바오터우(包頭) 일대였다. 삼다첸바(桑達欽巴)가 동행하며 길을 안내했다. 30년 전에 가베(Gabet)와 윅(Évariste Huc, 1813-60)을 티베트로 이끌었던 이였다. 이 탐사에서 다비드가 얻은 수확은 컸다. 조류와 포유류의 가죽 150종, 곤충 표본 260여 종, 식물 표본 124종을 수집했다. 그 모든 표본을 그는 비교하며 기록했다.
(왼쪽) 다비드가 탐사한 지역과 경로. 붉은색 실선이 1차 탐사 경로. 녹색 실선이 2차 탐사 경로. 노란색 실선이 3차 탐사 경로다. (오른쪽) 다비드의 1차 탐사를 안내한 삼다첸바(桑達欽巴) 초상화. 그는 30년 전에 가베(Gabet)와 윅(Huc)을 티베트로 안내한 경험이 있었다. (이미지 출처 = Wikipédia, Vincentian sources)
무핑의 원시림에서
두 번째 탐사는 1868년 5월 26일에 시작되었다. 천진(天津), 상해(上海), 강서(江西), 호북(湖北), 총칭(重慶), 청두(成都). 그가 조사를 위해 거친 지역이다. 이 탐사에서 그는 식물 676종, 조류 441종, 포유류 145종을 발견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머문 곳은 쓰촨성(四川省) 무핑(穆坪)이었다. 청두시(成都市) 중심에서 서쪽으로 124킬로미터 떨어진 곳이다. 지금의 야안시(雅安市) 북쪽 외곽이다. 1869년 초에 그는 그곳 성당(鄧池溝天主教堂)의 주임 신부로 임명되었다. 그 지역 원시림에 그는 단박에 매료되었다.
그 숲에서 그가 발견한 것이 자이언트 판다(大熊猫)다. 다비드는 서양인 최초로 그것을 본 이였다. 그는 사냥꾼이 죽인 판다를 표본으로 만들어 파리로 보냈고, 이내 전 세계에 알려졌다. 또한 무핑(穆坪)에 서식하는 쓰촨 황금 원숭이와 포유류 23종, 그 밖에 여러 새와 곤충을 서양에 소개했다. 쓰촨의 산지에서 나는 소귀나무(山桃) 등의 식물도 발견했다. 그가 수집한 진달래 중 적어도 52종 이상이 새로운 종이었다. 또한 그가 보고한 봄꽃 중 40여 종이 당시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꽃이었다.
다비드가 주임 신부로 일했던 등지구 성당(鄧池溝天主教堂) 모습. 쓰촨성(四川省) 무핑(穆坪) 인근으로 지금의 야안시(雅安市) 북쪽 외곽으로 지금의 바오싱현(寶興縣)에 속한다. 다비드는 1869년 초에 그곳 주임 신부로 임명되어 그해 11월까지 있었다.
(이미지 출처 = 宝兴县人民政府 홈페이지)
세 번째 탐사 그리고 백조당
다비드가 무핑에 머문 기간은 1년이 채 되지 못했다. 몸이 쇠약해진 탓이었다. 1869년 11월, 그는 프랑스로 돌아갔고 짧은 휴식기를 보냈다. 그리고는 세 번째 탐사를 시작했다. 출발점은 북경이었다. 1872년 10월 2일에 시작한 여정은 하북(河北), 산서(山西), 섬서(陝西)를 지났고, 한수(漢水)를 따라 남하하여 한커우(漢口)에 도착했다. 이후 강서(江西)를 돌았고 복건(福建)의 무이산(武夷山)까지 답사했다.
세 차례 탐사에서 얻은 결과물은 실로 방대했다. 진귀한 표본과 흥미로운 노트가 가득했다. 수집물을 보관하고 전시할 공간이 필요했다. 그는 북경 잠지구(蠶池口) 북당에 일찌감치 그런 공간을 설치해 두고 있었다. 백조당(百鳥堂)이다. 중국 최초의 근대적 자연사박물관이었다. 상해 서가회(徐家匯)의 위드(Pierre Heude, 韓伯祿, 1836-1902) 신부가 설립한 것이 1883년이었으니 그보다도 훨씬 빨랐다.
백조당은 북당의 명소였다. 거기엔 4천여 종의 크고 작은 희귀한 조류와 곤충, 기이한 동물, 갖가지 식물 표본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곳을 오간 이들은 일반 신자만이 아니었다. 북경의 수많은 고관대작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백조당을 찾았다. 서태후마저 변장하고 와서 관람했다는 말이 돌았다. 백조당의 전시는 그 정도로 참신하고 진기했다.
1887년 잠지구 북당이 시스쿠(西什庫)로 옮겨졌다. 그때 백조당의 전시물은 모두 청 조정으로 이관되었다. 북경 주교 파비에(Alphonse Favier, 樊國梁, 1837-1905)가 서태후에게 건네는 선물이었다. 북당 이전 협상을 촉진하려는 카드였다. 내무부 봉신원(奉宸苑)이 이관된 장소다. 황가의 화원이었다. 당시 봉신원으로 옮겨진 물품은 14개의 전시대에 있던 총 2474점의 표본이었다.
다비드가 동물학자 우스탈레(Émile Oustalet, 1844-1905)와 함께 편찬한 “중국 조류 도감”(“Les oiseaux de la China”, 1877). 제1권에는 다비드가 중국에서 발견한 조류 124종이 등장한다. 1권에 등장하는 새의 도판 일부. (이미지 출처 = chineancienne.fr)
다비드, 19세기 중국의 프랑스 박물학자
프랑스 국립자연사박물관은 다비드가 보낸 자료를 정리하고 검토했다. 다비드의 이름을 딴 식물도 여럿이었다. 그의 씨앗 몇 종을 파리 식물원에 심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중국에서 채집한 식물 표본 대부분은 전문 연구자의 조사 없이 10년 넘게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었다. 분위기가 바뀐 건 1880년부터였다. 자연사박물관장 에두아르 뷰로(Louis Édouard Bureau, 1830-1918)는 식물학자 르네 프랑셰(Adrien René Franchet, 1834-1900)를 박물관에 초빙했다. 일본 식물학 분야에 정통한 학자였다. 그는 다비드의 표본을 체계적으로 식별하고 정리했다.
몇 년 후, 프랑셰는 두 권짜리 식물도감을 내놓았다. “다비드가 청 제국에서 발견한 식물”(Plantae Davidianae ex Sinarum Imperio)이다. 제1권은 “몽골과 중국 북부 및 중부의 식물”이다. 여기엔 식물 1175종이 수록되어 있고, 부록에는 식물 표본 도판 27장이 있다. 제2권이 “티베트 동부(무핑)의 식물”(Plantes du Tibet Oriental(Province de Moupine))이다. 무핑(穆坪)의 식물 402종과 표본 도판 20장이 수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163종의 식물이 새롭게 발견된 것이다.
동물학 분야에서도 그는 발군의 실력을 보였다. 사실 그의 전문 분야는 동물학이었다. 그는 1875년에 출판한 “청 제국에서의 세 번째 탐사 일지”(Journal de mon troisième voyage d’exploration dans l’Empire chinois) 제31장은 중국 내 동물의 분포를 카테고리로 묶어 설명하고 있다. 화석 수집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그가 자연사박물관에 보낸 화석에는 코끼리와 몽골 사슴 등 여러 종이 있었다.
또한 동물학자 우스탈레(Émile Oustalet, 1844-1905)와 함께 “중국 조류 도감”(Les oiseaux de la China, 1877)을 편찬했다. 제1권에는 다비드가 중국에서 발견한 조류 124종이 등장한다. 다비드 시대 이전에 중국에는 조류에 관한 저작이 거의 없었다. 이시진(李時珍, 1518-93)의 “본초강목”(本草綱目) 정도가 유일한데, 그 역시 77종만 수록했다. 다비드는 중국에서 조류 표본 640종을 수집했다. 그중 504종이 중국 자생 조류였다. 그의 탐사가 얼마나 방대하고 정밀했는지를 보여 주는 대목이다.
이처럼 박물학의 전 분야에서 다비드는 놀라운 성과를 남겼다. 그가 중국에서 발견한 200여 종의 동물 가운데 63종은 학계에 보고된 적이 없었다. 그의 조류 807종 가운데 65종이 처음 소개되는 새였다. 그 밖에 파충류, 양서류, 어류, 곤충에서도 수많은 새로운 종을 소개했다. 그는 3100개 이상의 식물 표본을 수집했는데, 대부분이 당시 식물학계에 알려지지 않은 것이었다. 다비드에게 자연은 하느님이었다. 하느님을 알고자 그는 자연을 탐구했다. 세상 모든 것에서 하느님 발견하기! 옛 예수회 선교사들의 탐구 정신은 19세기에도 그렇게 이어지고 있었다.
오현석
가톨릭대학에서 종교학과 프랑스문학을 공부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 다니던 중 우연히 마주한 북경의 풍경에 이끌려 훌쩍 서해를 건넜다. 북경대학 일어일문학과에서 19세기 동아시아의 프랑스 예수회 자료를 뒤적이다 박사논문을 냈다. 북경에 있는 화북전력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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