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과 한국 중에서 어느 나라의 안보가 더 큰 위험 요소를 안고 있는지 판단하는 것은 전문가의 몫일 것이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이스라엘이 근본적으로 더 불안하다. 이스라엘은 국가의 성립 자체가 제국주의 시대의 불의한 유산이어서 그 역사적 부채를 늘 안고 지내야 하고, 아랍 세계 안에 섬처럼 고립되어 사는 운명을 피할 수 없다.
2000년 가까이 그 땅에 붙박여 살아온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도덕적 우위는 결코 무력으로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곤경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에서 국가기관이 안보를 이유로 자국 국민의 자유를 제한하고 선거에 개입하고 야당과 노조를 탄압한다는 말을 나는 들어보지 못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유대인은 역사적으로 끝없는 유랑과 가혹한 박해에 시달려 왔다. 오늘의 집시들처럼 그들은 수십 수백 년 동안 정들이고 살던 땅에서 강제로 추방되는 일이 다반사였다.
‘선라이즈 선셋’의 애절한 선율로 유명한 작품 <지붕 위의 바이올린>에 그려져 있듯이 20세기 초 제정 러시아에서도 수많은 유대인들은 하루아침에 그동안의 삶의 보금자리를 떠나야 했다.
초대 다비드 벤구리온부터 제7대 이츠하크 샤미르까지 일곱 사람의 총리 중 여섯 사람이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폴란드 등 옛 소련 지역 출신 이민자라는 사실은 왜 그들이 국가의 운명을 언제나 풍전등화처럼 느꼈는지, 또 신베트가 왜 그처럼 무자비한 조직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 납득하게 만든다.
그런 점에서 <게이트키퍼>는 철저히 이스라엘의 입장을 대변하는 작품이다. 신베트 책임자들은 테러 공격의 예방을 위해 강압적 수사가 불가피했음을 주장하고, 때로는 용의자에 대한 역테러의 감행도 어쩔 수 없었다고 강변한다.
잘못된 정보나 기술적 오류로 인해 무고한 민간인을 폭격했을 때도 그들은 이를 ‘부수적 피해’라는 기만적 용어로 덮고 넘어간다.
하지만 이 모든 범죄적 행태에도 불구하고 <게이트키퍼>에 따르면 신베트는 국가 안보 이외의 다른 정치적 또는 정파적 이해에 휘둘리지 않는 조직임이 분명하다.
그뿐만 아니라 테러와 살육으로 점철된 수십 년 분쟁의 세월을 보낸 끝에 신베트 책임자들은 한결같이 팔레스타인과의 공존만이 이스라엘의 미래를 보장할 수 있다는 확신에 도달한다.
그들 중 한 사람은 말한다.
“설사 무례하게 나오더라도 적들과 대화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다른 대안은 없습니다.”
이렇게 말한 그는 곧이어 다음과 같이 탄식한다.
“우리는 점점 더 잔인해져 갑니다. 같은 동족에게도 그렇지만, 주로 점령 지역 사람들에게 잔인해져 갑니다.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핑계를 대면서 말이죠.”
첫댓글 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