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1일(성 비오 10세 교황 기념일) 인생 최상위 법, 하느님 사랑
오늘 첫째 독서 에제키엘 예언서 내용은 참 인상적이다. 넓은 계곡 한가운데에 바짝 마른 뼈들이 잔뜩 쌓여있는데, 하느님은 에제키엘을 시켜 그 뼈들이 되살아나 사람이 되게 하신다. 바빌론 제국에 침략당해 노예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 처지가 바로 그 마른 뼈들이다. 살아도 사는 게 아닌 삶이다. 그런 마른 뼈 같은 삶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는 분이 하느님이다. 그를 시켜 이렇게 말씀하신다.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너희 무덤을 열겠다. 그리고 내 백성아, 너희를 그 무덤에서 끌어내어 이스라엘 땅으로 데려가겠다. 내 백성아, 내가 이렇게 너희 무덤을 열고, 그 무덤에서 너희를 끌어 올리면, 그제야 너희는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에제 37,12)
‘나는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 엊그제 화요일 화답송 후렴이다. 이는 하느님 말씀이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우리 신앙 고백이다. 고통과 죽음은 하느님이 내리시는 벌이나 심판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죄의 결과다. 죄가 빚어낸 현실이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침략과 바빌론 유배와 노예 생활이라는 치욕을 당하면서 자신들의 과거를 성찰한 내용이고 그 고백이다. 그들이 그렇게 된 건 하느님 말씀을 듣지 않고, 예언자들을 통해 하신 경고도 무시한 결과인데, 그걸 그렇게 표현한 거다. 죄로 죽은 이들을 하느님은 다시 살려내신다.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인생 가장 큰 계명이고 최고의 법이다.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법이 아니라 그들을 통해서 모든 피조물에게 하시는 하느님 말씀이다. 하느님을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이 이웃과 피조물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지 않을 리 없다. 이웃에게 상처만 주는 사람이 자신은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말을 믿을 사람은 없을 거다. 사랑은 한마디로 타인을 위한 삶이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자아라는 감옥에서 탈출하고 이기심이라는 노예 생활에서 해방된다. 예수님이 그 최고 모범이다. 섬기러 그리고 당신 생명을 우리에게 내어주시러 하느님은 사람이 되셨다. 남을 위한 존재가 될 때 사람은 해방되고 완성된다. 하느님 말씀인 성경은 도덕 교과서도, 과학이나 사회 교과서가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가리키고 인류의 운명을 알려주는 책이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모두 중요한 계명이지만 그 둘은 같지 않다. 하느님 사랑은 모든 것에 앞서는, 내 목숨보다, 부모보다, 자식보다 소중한 계명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선포한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이웃을 사랑하는 건 당연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이들이 아니면 누가 하느님처럼 될 수 있겠나. 이걸 모르는 사람들이 부활은 없다고, 하느님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이 세상에서 잘 사는 게 인생 최고의 선이라고 믿는다. 그러니까 일곱 남편과 함께 살았던 여인이 부활하면 그에게 진짜 남편은 누구냐는 아주 유치하고 천박한 질문을 하게 되는 거다. 하느님처럼 되고, 하늘나라 시민이 되는 게 무엇인지 아무리 똑똑해도 온전하게 설명하지는 못할 거다. 그게 가능했다면 예수님이 벌써 다 가르쳐주셨을 거다.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며 영원한 세상에 대한 거룩한 욕망을 더 키워 간다.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코헬렛이 말한 거처럼 세상 모든 게 다 허무다. “태양 아래에서 애쓰는 모든 노고가 사람에게 무슨 보람이 있으랴?”(코헬 1,3)
예수님, 강생구속의 신비를 더 믿게 해 주시고 조금 더 이해하게 도와주십시오. 안셀모 성인의 고백처럼 믿지 않으면 지푸라기 하나만큼도, 아무것도 알아들을 수 없을 겁니다. 주님의 피 한 방울이면 온 세상을 구원하고도 남았을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저 같은 죄인이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더 깊은 믿음의 길로 인도해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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