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일본 축구하면 떠오르는 인물하면 아마 열에 아홉은 나카타를 꼽을 것이다. 2002월드컵 공동개최국, 영원한 라이벌인 일본을 나카타를 통해서 간단히나마 정리해보자하는 마음에서 그을 써본다.
나카타가 일본축구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하는 때는 1993년 일본에서 열린 17세이하 청소년 대회였다. 당시 야마니시 고등학교 2학년생이던 나카타는 일본의 8강진출에 한몫하며 가능성을 보이기 시작한다.(일본의 성적은 가나에 1대0 패배, 이탈리아에 0대0, 멕시코를 2대1로 승리하여 8강에 진출했으나 나이지리아에 패배한다.) 꾸준히 성장을 거듭한 나카타는 95년 카타르에서 벌어진 20세이하에 주전으로 4경기를 뛰며 2골을 기록 17세이하와 마찬가지로 8강진출을 일궈낸다.(칠레에2대2 무승부,스페인에 1대2패배,브룬디에 2대0 승리, 8강전 브라질에게 1대2패배) 93,95년 그 당시 일본 성인국대가 세계축구계에서 차지하던 위치를 고려해서 보면 주목할만한 사건이 아닐수 없다. 기존의 성인 대표와 달리 나카타 세대는 세계축구에 그들의 가능성을 보였고 이 경험은 세계축구에 대한 "자신감"으로 나타난다.
나카타가 한국 축구팬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때는 97년에 벌어진 98프랑스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일 것이다. 당시 일본이 속한 B조는 한국,UAE,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으로 적어도 2위는 상황에 따라서는 1위도 가능할 것으로 보였으나 도쿄대첩 이후 최악의 상황에 빠지고 만다. 그러나 잠실에서 벌어진 한국과의 어려운 경기에서 승리를 거두고 구사일생으로 조2위로 이란과 플레이오프를 치르게 된다. 최종예선 기간동안 좋은 플레이를 보이던 나카타는 이 경기에서 2개의 어시스트와 오카노의 결승골을 간접적으로 도움으로서 일본의 희망에서 영웅으로 떠오르게 된다.
그리고 이듬해 벌어진 98 프랑스 월드컵 성적은 3패(아르헨티나 0대1 패배, 크로아티아 0대1 패배, 자메이카 1대2패배)로 최하위권을 기록했으나 일본은 이란과 함께 아시아 팀중 눈에 띄는 플레이를 펼쳤으며 그 중심에는 나카타가 있었다. 바티스투타, 오르테가, 수케르와 같은 세계적인 스타들 앞에서도 자신감있게 플레이를 할수 있었던 것은 유소년 시절부터 쌓은 세계에 대한 자신감의 덕택이었다. 프랑스 월드컵에서의 일본팀의 선전은 4년뒤에는 충분히 해볼만 하다는 자신감을 일본 축구계에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고 이 자신감은 자라나는 다음 세대에게도 전해졌을 것이다. 97년부터 98월드컵까지의 일본 대표팀을 보면 모든 볼배급은 프랑스의 지단처럼 나카타가 전담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며 나머지 선수들은 그의 지휘봉에 조종을 당하고 있을 뿐이었다. 문자 그대로 "나카타의 나카타를 위한 나카타에 의한 팀" 이었던 것인 것이다. 이런 나카타의 절대적 지위에 도전을 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풍운아" 트루시에다.
트루시에는 나카타 개인의 힘으로 일본이 움직여서는 세계강호가 될수없다고 판단 기존의 나카타 1인 제국 체제를 부수기 시작하는데 그 노력의 일환이 바로 "오토매티즘"이다. 패스를 받은 선수는 다른 선수에게 1~2초내에 다른 선수에게 패스를 하고 빈공간으로 찾아 들어가 다음 패스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전술인데 쉴새없이 돌아가는 기계처럼 패스가 끓기지 않도록 계속 돌리면서 기회를 만들어 가는 전술이다. 이 전술의 목적은 최대한 1대1 상황을 피하고 1(아군수)대2(상대편수), 1대3의 상황을 만드는 것인데 유럽,남미에 비해 떨어지는 개인 능력을 전체의 능력으로 커버하려는 전술이었다. 볼을 상당 시간 소유하다가 동료들의 움직임에 맞춰 볼을 주는 스타일의 나카타의 위치는 변할수밖에 없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전술뿐 아니라 나카타의 지위에 결정타를 날리는 사건이 있으니 바로 세계청소년 대회 준우승 세대의 등장이다.
사실 트루시에가 오토매티즘을 주장하며 일본 대표팀 개조에 나섰으나 여전히 일본 대표팀은 나카타 의존도가 높았다. 대표적인 예가 99코파 아메리카로 나카타가 빠진 일본(초청국 자격으로 참가)은 그나마 브라질 출신 귀화 선수 로페스와 프리킥 골을 성공시킨 미우라 아쯔요시를 제외하고는 힘없는 경기력을 보여주었고 나카타 대신 볼배급을 맡은 나나미는 역부족을 드러내고 만다. 결국 일본은 1무2패(페루에 2대3패배, 파라과이에게 0대4 패배, 볼리비아와 1대1 무승부)의 초라한 성적을 거두고 돌아온다. 성인 국대에서 나카타의 존재는 아직도 컸던 것이다. 하지만 세계 청소년 대회 준우승 세대(거기에 나카무라,야나기사와등 또 다른 유망주들 포함)가 국대에 선발되기 시작한 2000년이 되자 얘기는 틀려진다. 이들은 나카타 못지않는 세계축구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고 일본내에서 세계정상에 가장 가깝게 간 세대이기도 했다. 이들을 주축으로 나간 2000 아시아 컵은 나카타가 없는 상태에서도 압도적인 전력을 선보이며 우승을 차지 일본은 나카타 1인 체제라는 틀을 거의 벗어버리게 된다.
몇몇 사람들은 예전 혼자서 나카타가 혼자서 수비수들을 상대로 볼을 킾 하다가 동료들의 움직임을 한눈에 보고 패스 한방으로 경기의 흐름을 바꾸는 화려함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2002 월드컵에서 그의 플레이를 보며 "한물 갔다","성장이 멈췄다"라고까지 평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오토매티즘 전술, 유망주들의 대거 등장등 이러한 요소를 고려해보면 나카타가 한물 갔다기 보다는 나카타가 화려해질 필요가 없다는 게 정답일 것이다. 나카타는 2002월드컵 당시 혼자서 볼을 킾 하면서 볼배급을 하는 나카타 중심의 전술하에서 뛰는게 아니었으며 오노, 이나모토등 다른 선수들이 그의 짐을 덜어줄수 있을 만큼 성장했기 떄문이다. 오히려 일본내에서는 "나카타와 이나모토가 새로운 일본 축구 역사를 열었다." "나카타의 존재감은 역시 대단했다'라며 그의 플레이에 좋은 평을 내고있다.
현재 일본 대표팀 감독을 맡은 지코는 트루시에와는 정반대로 공격 지향적이고 개인의 창조성을 중시하는 감독이다. 향후 많은 변화가 예상되며 나카타도 이러한 흐름에 맞춰 변해갈 것이다.
미우라 세대가 세계의 벽에서 좌절한 세대라면 나카타 세대는 세계축구로 뻣어 나가려는 일본의 희망을 업은 세대이며 이미 일본축구 역사상 세계와 가장 가까운 세대이기도 하다. 과연 이들은 어느 정도의 성공을 거둘 것인가 지금 일본은 그들의 행보에 발을 기울이고 있다.
첫댓글 흐음....이건 칼럼게시판에 있는 글이군요....제가 필진으로 있는 www.ybnormal-football.com 자료입니다 ^^ 제가 와이비 노말 필진으로 있으니 노말 자료는 제가 다 퍼옵니다~ 물론 허가받고요 ^^
아 그렇군요. 레알카페에 칼럼게시판에서 봤는데 글이 상당히 좋아서 허락없이 올렸답니다.
-ㄴ-일본은 희망이안보여,,눈에띄는 플레이어가 없잔아!!! 안정환이나 이영표 박지성 홍명보등,,과같이 화려한플레이를 보여주는선수가 단1명이라도있으면,,,-ㅁ-일본축구인정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