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그 밝은 달을 바라보며
가을에
- 정한모
맑은 햇빛으로 반짝반짝 물들으며
가볍게 가을을 날으고 있는
나뭇잎,
그렇게 주고 받는
우리들의 반짝이는 미소로도
이 커다란 세계를
넉넉히 떠받쳐 나갈 수 있다는 것은
믿게 해 주십시오.
흔들리는 종소리의 동그라미 속에서
엄마의 치마 곁에 무릎을 꿇고
모아 쥔 아가의
작은 손아귀 안에
당신을 찾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살아가는
우리의 어제 오늘이
마침내 전설 속에 묻혀 버리는
해저(海底) 같은 그 날은 있을 수 없습니다.
달에는 은도끼로 찍어 낼
계수나무가 박혀 있다는
할머니의 말씀이
영원히 아름다운 진리임을
오늘도 믿으며 살고 싶습니다.
시인 고 정한모 선생님은 평화에 대한 추구, 인간애에 대한 염원, 휴머니즘에 대한 신뢰를
기조로 하고 있는 시인이셨습니다. 이 시에 그의 바람이 무엇인지가 잘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평화를 깨뜨리는 것처럼 보이는 현실 안에서도 평화를 갈망하며, 인간이 지닌 본래의 순수성에 대한
신뢰를 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한 실현은 궁극적으로는 절대자,
하느님에게 간절한 염원으로 기도해야 하리라는 깨달음을 밑바탕에 깔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가볍게 가을을 날으고 있는 /나뭇잎”이라는 시구에서 어떤 느낌이 느껴집니까?
‘가을을 난다.’고 읊조리면 우리도 새처럼, 아니 나뭇잎처럼 가을을 날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시인은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거리며 날고 있는 이미지를 통해 평화롭고 순수한 세계를 상징하고
있다고 합니다.
미소. 어제 밤 밝고 둥글게 뜬 달을 오래 바라보며 저는 가만히 미소 지었습니다.
남북이 서로 화해의 손을 맞잡은 것처럼 우리도 손을 잡아야 합니다.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감사하고,
다시 돌아온 것이 더욱 감사했습니다.
미소는 소리 내지 않고 다만 입술이 가만히 살짝 움직이는 웃음이지만 소리 내어 웃는 웃음보다
더 깊은 감사를 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처럼 달을 보며 혼자 조용히 미소 지을 수도 있지만
그 미소도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 주고받을 때 감사의 느낌이 배가되겠지요.
“그렇게 주고받는 우리들의 반짝이는 미소”라는 구절은 가을의 나뭇잎처럼 평화롭고
순수한 삶으로 휴머니티의 바탕이 되는 '사랑과 신뢰'를 상징하고 있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미소'는 평화, 순수, 신뢰, 사랑 등을 상징합니다
인간의 소박하고 따뜻한 정, 서로가 나누는 인간애, 인간다운 삶을 뜻한다고 합니다.
저에게는 다만‘감사’로 느껴집니다.
시인은 그 미소, 서로가 나누는 인간적인 정, 사랑, 신뢰가 이 커다란 세계,
우리 인간 삶을 넉넉히 떠받쳐 나갈 수 있다는 그 사실을 우리가 믿을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비록 이 세상이 너무 각박해 보이고 너무 물질 만능으로 흐르고, 때로 폭력이 난무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세상, 그것이 너무 감당하기 크게 느껴지는, 점점 인간성이 상실되어 가는 것처럼 보이는,
그래서 시인이‘거대한'이라고 표현한 오늘날의 이 세상일지라도 우리가 미소를 잃지 않을 수 있다면
우리는 결코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으리라는 희망을 지니고 있습니다.
“흔들리는 종소리의 동그라미 속에서"라는 구절을 들으며 어떤 이미지를 떠올리게 됩니까?
종소리는 귀로 들을 수 있는 소리인데, 동그라미라는 이미지를 통해 그 종소리가 제 가슴 깊은 곳까지
마치 물결이 퍼지듯 잔잔히 퍼집니다. 저는 이 표현을 통한 시인의 기도하는 마음을 가늠해봅니다.
성당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한, 우리가 절대자, 그분께 신뢰를 두고 두 손을 모으는 한,
우리는 결코 절망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순수는 절대자, 그분께 대한 신뢰입니다.
시인은 우리 인간이 절대자, 하느님 앞에 어떤 자세를 지녀야 하는지를
“엄마의 치마 곁에 무릎을 꿇고 /모아 쥔 아기의/ 작은 손아귀”라고 표현합니다.
다시 우리가 아가의 순수로 돌아가야 하리라는 느낌, 순수를 잃어가고 있는 이 세상이
다시 순수를 찾고 그분 앞에 가만히 부복해야 하리라고 믿습니다.
시인의 순수한 인간성에 대한 간절한 소망과 기원이 느껴지며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우리의 어제 오늘이/ 마침내 전설 속에 묻혀 버리는/ 해저(海底) 같은
그 날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엄마 치마 품에 안긴 아기처럼 순수를 지향하는 우리들의 삶이 허무로
전락할 수는 없습니다. 그 아름다운 꿈이 희미한 옛 이야기일 수는 없습니다.
그 아름다움이 해저처럼 시커먼 바다 속에 묻힐 수는 없습니다.
다시 말해, 순수한 인간성을 잃어버리고 모든 것이 물질화, 기계화, 전산화, 획일화 되는
그런 어두움으로 빠져들 수는 없습니다. 다시 순수한 동심의 세계,
달에는 은도끼로 찍어 낼/ 계수나무가 박혀 있다는/ 할머니의 말씀이/ 영원히 아름다운 진리임을/
오늘도 믿으며 살아야 합니다.
추석입니다. 우리는 그 옛날 비록 물질적으로는 가난하여 풍성한 음식을 먹을 수 없었지만
할머니의 무릎에 앉아 밝은 달을 바라보며 거기 토끼가 방아를 찧고, 은도끼로 계수나무를 찍는
아름다운 동화를 들으면서 마음이 얼마나 포근했었는지요?
어제 밤 오래 달을 바라보았습니다. 오늘은 추석, 달이 더 밝겠지요.
그 밝은 달을 바라보며 우리는 다시 순수로 돌아가야 하리라 믿습니다.
이제 불같이 끓던 병석에서 일어나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의사가 뇌세포가 죽어서 영원히 쓸 수 없다던 제 오른손이 조금씩 돌아오고 있습니다.
이제 서로가 지니고 있는 미움과 갈등은 접고 우리들의 이 소중한 꿈,
반짝이는 미소와 아가의 모아 쥔 손으로 표현된 기도를 통해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간절한 마음을 들어올려야 하리라 믿습니다.
그분께서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굽어보시고
우리 삶에 진정한 평화와 참 인간다움을 되돌려 주시리라 믿습니다.
우리 민족에게 참 평화를 주시리라 믿습니다.
모두 주님의 축복이 가득한 추석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류해욱 신부님/예수회영성지도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