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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축복3
창 49:13-21
13 스불론은 해변에 거주하리니 그 곳은 배 매는 해변이라 그의 경계가 시돈까지리로다
14 잇사갈은 양의 우리 사이에 꿇어앉은 건장한 나귀로다
15 그는 쉴 곳을 보고 좋게 여기며 토지를 보고 아름답게 여기고 어깨를 내려 짐을 메고 압제 아래에서 섬기리로다
16 단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 같이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로다
17 단은 길섶의 뱀이요 샛길의 독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를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
18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
19 갓은 군대의 추격을 받으나 도리어 그 뒤를 추격하리로다
20 아셀에게서 나는 먹을 것은 기름진 것이라 그가 왕의 수라상을 차리리로다
21 납달리는 놓인 암사슴이라 아름다운 소리를 발하는도다
창 49:13-21 / 스불론아, 너는 바닷가에서 살게 되리라. 그 바닷가는 배를 매어 놓는 항구. 시돈까지 퍼져 가 살게 되리라. 14) 잇사갈아, 너는 뼈만 앙상하게 드러나 있는 나귀라. 양우리에서 두 다리 쭉 뻗고 그저 누워만 있으니, 15) 그저 쉬기만 좋아하고 `정말 좋네, 이 땅이 이리도 좋네' 입만 벌리고 있고 어깨에 무거운 짐을 메고 있으니, 종처럼 고된 일만, 힘든 일만 억지로 하는구나. 하는 수 없이 하는구나. 16) 단아, 너는 이스라엘의 다른 지파처럼 그의 백성을 다스리리라. 17) 단은 길가에 숨어 있는 뱀이라. 길섶에 숨어 있는 독사라. 말뒷굽을 물어 타고 있던 사람마다 고꾸라뜨리는구나. 18) 여호와여, 주께서 베푸실 해방을 고대합니다. 기다립니다. 19) 갓아, 너는 강도 떼의 침입을 받을 것이나 그 뒤를 쫓아 추격하리라. 20) 아셀아, 네가 차지한 땅은 기름진 땅이라. 그 땅에서 풍성한 곡식을 거두리라. 왕의 밥상에 오를 음식을 장만하리라. 21) 납달리야, 너는 이리저리 내달리는 사슴과 같아 사랑스런 새끼 사슴 데리고 있구나.
스불론, 잇사갈, 단, 갓, 아셀, 납달리에 대한 축복과 예언입니다.
스불론, 잇사갈, 단 지파에 대한 예언(13-18) 스불론은 해변에서 번성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역사적으로 스불론 지파는 이스라엘 북부 지역, 갈릴리 서쪽과 지중해 사이에 위치했습니다. “시돈까지 이르리로다”라는 말은 무역과 교류를 통해 경제적으로 번성할 것을 의미합니다. 잇사갈은 건장한 나귀라고 합니다. 이는 힘이 강하고 노동을 잘 감당하는 성품을 나타냅니다. 이들은 토지의 풍요로움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농경으로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어깨를 내려 짐을 메고 압제 아래에서 섬기리로다”라는 예언처럼 타 민족이나 권력자들에게 지배받을 수도 있습니다. 세 번째로 등장하는 단은 ‘심판하다, 재판하다’라는 뜻의 이름입니다. 이는 정의를 세우는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삼손이 대표적인 단 지파 출신입니다. 이후 단 지파는 강하지만 뱀에 비유함으로써 교활한 방식으로 상대방을 무너뜨리게 됩니다. 그러나 단에게 주는 예언이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라는 말로 끝납니다. 이는 인간의 힘과 지혜로는 완전한 정의를 실현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갓, 아셀, 납달리 지파에 대한 예언(19-21) 갓은 야곱과 레아의 하녀 실바 사이에서 태어난 후손입니다. 행운, 복을 의미합니다. 갓은 계속해서 외부의 공격을 받을 것입니다. 이는 훗날 갓 지파가 위치할 지역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갓 지파는 요단강 동쪽을 차지했는데 이 지역은 암몬, 모압 등 이방 민족의 침략을 자주 받는 곳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갓 지파는 전투적이고 용맹한 지파로 세워질 것입니다. 아셀도 행복,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아셀의 후손들은 훗날 갈멜 산에서 두로와 시돈까지 이르는 해변 지역을 차지합니다. 이 지역은 농업과 무역이 발달한 비옥한 땅이었습니다. 아셀 지파는 왕족과 귀족들이 즐길 정도로 질 좋은 농산물을 생산하게 될 정도였습니다. 납달리는 라헬의 시녀 빌하와의 관계에서 태어났습니다. 나의 투쟁, 나의 싸움이라는 뜻을 지녔습니다. 이는 납달리의 후손들이 경쟁과 싸움을 통해 발전하게 될 것을 암시합니다. 마치 암사슴처럼 날렵하게, 민첩하게, 자유롭게 살아가는 지파가 될 것입니다. 게다가 아름다운 소리를 발하는 말을 잘하고 시적인 재능도 있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적용: 모든 지파에게 주어진 사명이 다릅니다. 당신에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인지 말하고 어떻게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지 나누어 봅시다.
습관을 좇아 기도한다는 것은 시간을 정해 놓고 하나님과 약속된 시간에 기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건강한 육체로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하여 쉬지 않고 숨을 쉬는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로서 강건한 삶을 영위하려면 습관을 좇아 영의 호흡을 해야 합니다. 따라서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 설 교 >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
창 49:13-21, 27-33절 / 꾸준함의 능력
1. 열두 명의 자식
야곱에게는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열두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열두 명의 아들이 다 같을 수 없습니다. 잘난 아들, 못난 아들, 그저 그런 아들, 속 썩이는 아들, 아버지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주는 아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유다와 요셉지파에게서 부모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아들들을 만납니다. 이들은 기대가 되는 아들들이었습니다. 유다는 원래 기대가 되는 아들이 아니었는데 점차적으로 두각을 나타내더니 종래에는 가장 기대할 만한 아들이 되었습니다. 요셉은 아버지가 너무 총애했던 아들이었지만 한 동안 죽은 것처럼 야곱의 가슴에만 살아있던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요셉이 샘 곁에 심은 나무가 되어 담장 너머로 뻗은 나무가 된 것을 알고 그 아들을 얼마나 진심으로 축복했습니다. 야곱은 그 아들에게 자신의 하나님이 요셉의 하나님이 되기를 축복했습니다.
반면 르우벤은 장자이고 참으로 기대되는 출중한 아들이었지만 종래 그 충동적인 성품을 고치지 못하고 물의 끓음 같은 인생을 살고 말았습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둘 다 잔해하는 기계라는 오명을 덮어썼습니다. 아버지로서 이 아들들에게는 상처가 있습니다. 고약한 아들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지판 중에서 흩어지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레위는 그 흩어짐을 축복으로 바꾸었습니다. 제사장으로 흩어져 각 지파의 예배를 담당하는 사람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아들들을 축복해 가다가 갑자기 야곱은 18절에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그럽니다. 이 구절은 문맥에 맞지 않는 갑작스러운 말입니다. 그래서 못되게 보는 학자들은 후에 첨가된 구절로 보려고 합니다. 또 어떤 학자들은 이 구절이 자신의 죽음이 임박한 것을 자각한 야곱이 축복을 마칠 때까지 기력을 유지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한 것으로 이해하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녀들에게 축복하다가 갑자기 자신에 대해서 기도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문맥에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 부분의 학자들은 이미 예언한 두 지파의 타락으로부터 그의 후손들을 보호해 달라는 기도로 이해합니다. 구원이라고 번역된 예슈아라는 히브리어는 하나님에게서 비롯되는 구원을 지칭하는 말로 자주 쓰이는 말입니다. 따라서 저는 이 말이 열 두 아들들에 대해서 축복하다가 보니까 자연스럽게 “하나님! 이 아들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해 주옵소서.”라고 기도한 내용으로 봅니다. 그 아들들이 직면하게 될 어려움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구원해 주시기를 바라는 간구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버지 야곱의 마음을 봅니다. 이 땅의 모든 아버지의 마음이 같은 것일 것입니다. 열두 자녀들을 생각하면서 축복하다보니까 이런 자식 저런 자식들이 있는데 다 축복되고 다 잘되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렇지 못한 아들들도 있더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저들을 구원해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기도를 바라보면서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나는 하나님 아버지께 또 육신의 부모님들께 어떤 존재인가 하는 생각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보시고 근심하면서 안타까워하실까 두려웠습니다. 우리 부모님들이 나를 생각하면 근심이 되어 잠이 오지 않는 아들일까 두려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여기 성도님들이 목회자가 생각할 때 “주여 저들을 구원해 주소서”하며 근심어린 기도를 할 수밖에 없는 성도라면 그는 아무리 스스로 올바르게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근심을 끼치는 성도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기쁜 마음으로 축복했던 유다와 요셉과 같은 아들입니까? 아니면 뒤에 살피게 될 단 지파와 같은 혹은 스불론이나 르우벤 가튼 자녀들은 아닙니까?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마음껏 축복할 수 있는 아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깨어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생각으로 삶을 채워가야 합니다.
2. 속 썩이는 아들들
아마 요셉과 유다를 제외한 다른 아들들 가운데 특별히 시므온과 레위, 르우벤의 뒤를 이어 아름답지 못했던 지파를 꼽으라면 단 지파를 꼽아야 할 것입니다. 단 지파는 원래 다른 백성을 심판하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심판이란 사람들의 잘잘못을 가려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상담자 역할도 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이스라엘의 한 지파 같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다른 속 썩이는 아들들처럼 단지파도 그랬다는 말입니다.
이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17절입니다. “단은 길의 뱀이요 샛길의 독사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로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원래 상담자의 역할을 하고 귀하게 쓰임 받던 단 지파가 맹독을 가진 독사처럼 해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맹독을 가진 독사에게 물려서 말이 깜짝 놀라 그 탄 사람을 떨어트리는 장면을 생각해 보십시오.
사실 단 지파는 여호수아에게 분배받은 땅을 정복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정복하지 않았다고 말해야 옳을 것입니다. 그래서 단 자손은 아모리 사람들에게 쫓겨서 골짜기에서 내려오기를 용납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사기 18장에 가면 단 지파가 거할 기업이 없어서 땅을 구하는 중이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괜히 잘 살고 있는 라이스 거민들을 치고 미가의 집에 있는 사설 제사장을 고용했습니다. 그랬다가 자기 자손들을 제사장으로 삼는 기가 막힌 행동을 합니다.
또 삼손이 사사로 있을 때에는 블레셋과 싸우기 위해 삼손을 사사로 세웠는데 삼손을 돕기는커녕 오히려 결박해서 원수에게 넘기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길의 독사와 샛길의 맹독을 가진 독사라는 표현이 적합하다고 말할 밖에요. 결국 이들은 계시록 7장의 십사만 사천 명의 명단을 언급할 때 다른 지파의 이름은 다 있지만 단 지파의 이름이 빠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는 단 지파에게서 시작은 화려하게 했지만 비극으로 끝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처음이 어떠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죽을 때 어떻게 죽었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평생 하나님과 변함없이 동행하는 것이 중요하고 좋은 방향으로 변화되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단 지파는 그렇게 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독사와 같은 존재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야곱의 탄식어린 기도가 바로 단 지파 이야기를 하고 나서 기록된 것도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야곱은 이들을 생각할 때 이들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단 지파의 결말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줍니까? 처음보다 과정이 중요하고 과정보다 결말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끝까지 잘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영웅들의 삶이 나이가 들수록 더 아름다워졌던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단 지파의 결말은 가룟 유다를 생각나게 합니다. 시작은 아름다웠지만 샛길로 가버린 사람들 말입니다. 우리는 이들의 결말을 보면서 우리 삶이 이렇게 되지 않아야 한다는 성령의 음성을 듣습니다. 이런 속 썩이는 아들들 때문에 야곱은 이들을 구원해 달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3. 그 외의 아들들
우리는 평범한 것을 하찮은 것으로 여기지만 사실은 평범한 것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는 열 두 아들 가운데 평범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에서도 보화를 찾아내야 합니다.
스불론에 대한 언급은 추상적이고 간단합니다. 해변에 거주하게 될 것이고 그곳은 배 매는 항구라고 말합니다. 그의 경계가 시돈까지라고 하는데 실제로 스불론 지파는 해변을 차지하지 않았습니다. 수19:10-16절에는 냐룍 지역에 거주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신33:19절은 스불론과 잇사갈 두 지파가 항해 활동에서 이익을 얻었음을 함축하면서 바다의 풍요를 누리게 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스불론은 아마 무역을 통해서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잇사갈은 건장한 나귀로 묘사되었습니다. 문자적으로는 '뼈의 나귀' 곧 골격이 좋은 나귀란 뜻입니다. 이것은 잇사갈 지파가 튼튼하고 힘이 센 지파로서(삿5:15) 우직하고 단순하게 살면서 힘든 노동일과 농사일에 전념하게 될 것이라는 비유적묘사입니다. 15절은 쉴 곳을 보고 좋게 여기며 토지를 보고 아름답게 여기며 어깨에 짐을 메고 섬길 것이라고 합니다. 우직한 일꾼이 바로 잇사갈 지파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런 잇사갈 지파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들의 우직함과 평범이 르우벤이나 시므온, 단 지파보다 훨씬 좋다고 생각합니다. 잇사갈 지파는 특별한 공로도 없지만 특별한 범죄도 없습니다. 유다나 요셉처럼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을지는 몰라도 에브라임처럼 말썽을 피우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대부분은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지탱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뛰어난 지도자도 평범하게 일하고 그들의 배경이 되어주는 국민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잇사갈의 우직함을 가벼이 취급하지 말아야 합니다. 약삭빨라 쉽게 살려는 단 지파보다야 훨씬 나은 삶이 아닙니까?
아셀 지파는 식물을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고 예언합니다. 왕의 진수를 공궤한다고 했습니다. 모든 지파는 다 자급자족하게 되어 있는데 특히 아셀 지파는 더욱 기름진 것을 얻어서 왕의 수라상을 차리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왕의 진수가 실제적으로 왕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쉽게 말하기 어렵지만 이들은 풍부한 물질로 섬기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참으로 귀한 지파입니다.
납달리는 놓인 암사슴이라고 합니다.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지파라고 말씀합니다. 그 아름다운 목소리로 찬양하고 아마도 대변하는 역할을 했는지 모릅니다. 납달리 지파가 마치 사슴처럼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자기를 방어하는 데 매우 민첩하고 능숙한 자들이 될 것임을 예언한 말입니다. 아름다운 소리를 발하는 납달리 지파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베냐민은 호전적인 지파라고 했습니다. 물어뜯는 이리랍니다. 아침에는 빼앗은 것을 먹고 저녁에는 움킨 것을 나누게 도리 것이라고 했습니다. 베냐민 지파에 왼손잡이가 많았고 용사가 많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사사기의 마지막 레위인의 첩 행음 사건 때 발견하게 됩니다. 이들은 야곱의 예언처럼 호전적이어서 다른 열두 지파로부터 공격을 당하고 아주 작은 지파로 전락하고 맙니다.
우리는 이런 각 지파들을 보면서 다양한 재능과 역할이 맡겨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재능과 역할을 점점 더 아름다운 신앙으로 잘 감당한 지파가 있는가 하면 중도에 엉뚱한 길로 빠져서 흔적조차 없어진 지파들도 있었습니다.
평범하지만 끝까지 믿음으로 잘 살아낸 지파들이 있는가 하면 잘못된 길로 빠져서 끝까지 헤어 나오지 못한 지파들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작보다 과정이 중요하고 과정보다 죽을 때까지 변함없는 모습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실 야곱의 이 예언은 숙명론적인 것이 아니라 과정의 선택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는 여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이들을 축복하다가 참을 수 없는 심정으로 이들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야곱이 이들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할 때 끝까지 변함이 없는 하나님의 백성들로 점점 더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했다고 믿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호하셔서 권해 주시기를 구했다고 믿고 싶습니다.
저는 창세기의 족장사를 변화의 책이라고 부르고 싶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들 지파들 이야기는 그 변화가 끝까지 이어져야 한다고 도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각기 다른 신앙과 그에 따른 축복
창세기 49장 13~21, 27~28절 / 콜롬버스한인장로교회
[들어가는 말]
‘십인십색’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열 사람이면 열 사람이 모두 특성이 다른 시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전에는 물건을 만들어 파는 회사들이 자기 식대로 상품을 만들어놓고 ‘우리 것이 이렇게 좋으니 사세요.’라는 식이었는데, 요즘에는 소비자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잘 살펴서 각자 원하는 취향대로 선택할 수 있도록 다양하게 만듭니다. 그것도 소비자 전체가 아니라 연령별, 성별, 지역별로 따져서 어디서 어떤 사람들이 어떤 것을 많이 사는지를 연구합니다. 그래서 모양도 다양해지고 같은 물건이라도 색깔이 다양해졌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인가 나이키(NIKE) 신발이 한국에 처음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그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는데, 제 기억에 그때는 종류가 딱 두 가지였습니다. 가죽 운동화였던 것이 특이했는데, 종류는 딱 두 가지가 나왔습니다. 지금은 세월이 많이 흘러서 운동화를 사려고 가보면 너무 많아서 뭘 사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름도 왜 이렇게 복잡하게 지었는지 모르겠고, 굉장히 종류가 다양해서 색깔도 다양하고 모양도 다양합니다.
신앙적으로도 그런 것 같습니다. 사람마다 다 믿는 모습이 다르고 다양합니다. 옛날에는 “자, 이겁니다. 이렇게 믿으세요. 이리로 따라오세요.” 라고 하면 대부분 “아멘!” 하면서 그런 식으로 했고 한 방향으로 믿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세월이 지나면서 사람마다 신앙의 색깔이 다르고 모습이 다릅니다. 너무 다양해졌습니다.
사람마다 원하는 것도 다 다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분이 교회에 오셔서 심방을 가서 한 번 찾아뵙겠다고 하면, 어떤 분은 그렇게 여쭤보기도 전에 “저의 집에 와주십시오.”라고 하는 분도 계시고, 어떤 분은 “제가 한 번 찾아뵙겠습니다.”라고 하면 “안 오셔도 됩니다.” 하는 분도 계셔서 목사도 어떻게 해야 되는지 잘 모를 때가 많습니다. 가야 하는 건지 안 가도 되는 건지 헷갈립니다.
아픈 경우 보통 병원에 입원하시면 꼭 찾아가지만, 그냥 집에 있으면서 아프시다고 하면 어떤 분들은 “와서 기도해 주세요.” 하는 분도 계시고 어떤 분들은 “그냥 안 오셔도 되고 멀리서 기도해 주시면 됩니다.”라고 하는 분도 계십니다. 그런데 제가 바이러스를 옮을까 봐 걱정해 주셔서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사람마다 너무 다양하고 생각이 다르니까, 각 사람이 어떤 것을 원하는지 알아보는 게 필요합니다. 특히 지금 사업하시는 분들은 그렇게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직장생활 하시는 분들도 다른 사람들을 상대할 때 그렇지만, 특히 사업하시는 분들은 손님이 뭘 좋아하고 어떤 걸 원하는지를 잘 파악해야 그 사업도 잘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야곱의 열두 아들들 역시 참 다양하고, 각기 다른 신앙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지난주 아버지 야곱이 죽기 전에 유언처럼 축복하면서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에 대한 야곱의 축복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요셉을 제외한 일곱 명의 아들에 대한 축복을 살펴보려 합니다. 요셉은 다음 번에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대하면서, 이들이 여러 가지 신앙의 모습을 보여주는 가운데 나의 믿음은 이들 중에 어느 지파의 모습과 가장 비슷한지를 생각해 보시고,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내가 주님 안에서 제대로 된 신앙생활을 해나갈 수 있을 것인지, 그것을 스스로 찾아보며 고민해 보는 시간이 되시면 좋겠습니다.
1.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복 – 스불론, 잇사갈, 아셀, 납달리
1) 스불론
먼저 다른 이들을 섬기게 되는 축복을 받는 지파들이 있고, 그중 첫 번째가 스불론입니다.
“스불론은 해변에 거주하리니 그곳은 배 매는 해변이라 그의 경계가 시돈까지리로다” (13절)
이스라엘에서 가장 경계선에 위치한 지파가 스불론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 때의 지도를 보면 해변 지역 땅을 차지한 지파는 스불론이 아니라 아셀입니다. 북쪽의 시돈(지금의 레바논 지역)과 국경을 마주하는 지파도 역시 아셀이지, 스불론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여기서 야곱은 스불론이 해변을 차지하며 시돈과 접경을 이루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까? 그러니까 이것은 지리적인 면을 말하는 게 아니라 신앙적인 면에서 그런 역할을 한다는 뜻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과 외국 사이에서 창구 같은 역할을 담당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오래전 한국에서 대학에 다닐 때 한국기독학생회(IVF)에 속해서 활동했는데, 이민 왔을 때는 그 단체(InverVarsity Christian Fellowship)가 없어서 계속 활동하지는 못했습니다. 지금은 거기도 있고, 이곳 OSU에도 있습니다. 그 단체는 기독교 세계관을 열심히 공부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때 기독교 세계관에 관한 책들 중에서 프랜시스 쉐이퍼(Francis Schaeffer) 박사가 쓴 책들을 많이 읽었습니다.
쉐이퍼 박사는 1955년에 스위스로 가서 라브리 공동체를 세우고 1984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거기서 사역했습니다. 라브리(L'Abri)라는 말이 프랑스어로 ‘shelter’(피난처)라는 뜻으로, 현대 문명에 지치고 회의에 빠진 사람들이 찾아올 때 함께 모아 생활하는 공동체였습니다.
한국에도 라브리 지부가 있고 함께 활동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곳에 오면 기독교가 무엇인지, 왜 옳은지를 설명해 주고, 삶의 문제들에 대한 성경적 답변을 제시해 주는 일을 하는 곳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창구 같은 역할이 아니겠습니까? 믿지 않는 사람들이 와서 복음을 들을 수 있는 역할이 바로 창구 역할입니다. 우리로 하면 바로 이런 것이 목장입니다. 목장이 바로 이런 역할을 감당하는 겁니다.
가서 안 믿는 분들에게 물어보십시오.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분들은 가장 가기 싫은 데가 교회입니다. 그리고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목사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통 안 믿는 분들에게 전도할 때 뭐라고 합니까? 많은 교회들이 실제로 그렇게 합니다. “우리 교회가 얼마나 좋은데 그래? 한 번 와 봐. 우리 목사님이 또 얼마나 좋은데? 와서 우리 목사님을 한 번 만나 봐.” 그러니까 가장 가기 싫은 데 가서 제일 만나기 싫은 사람을 만나라고 하는데 누가 오겠습니까?
시대가 많이 바뀌어서 요즘에는 그렇게 무조건 오라고 하면 사람들이 잘 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목장은 부담 없이 방문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거기서 같이 밥을 먹고 얘기하면서 그런 창구 같은 역할을 지금까지 많이 감당한 것을 우리는 이미 너무나 많이 경험했습니다.
이전에는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고 하며 많이 전도했습니다. 길거리에 나가서 피켓을 들거나 띠를 두르거나 전도지를 나눠주면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고 메가폰에 대고 말하면서 전도했는데, 그때 사람들이 실제로 그것을 듣고 교회로 찾아온 경우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점점 시대가 바뀌면서 사람들이 거기에 거부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하면 안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지금도 분명히 역사가 일어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전에 비해서 굉장히 효과적이지 못하고, 오히려 반감을 사고 있다는 겁니다. 이전 사람들은 그것에 귀를 기울였는지 모르겠는데 요즘 사람들은 그렇게 전하면 ‘당신은 나를 알지도 못하면서 왜 무조건 그렇게 외치느냐?’라고 따집니다. 자기에 대해서 좀 알고 자기의 상황을 좀 알면서 거기에 맞게 접근해주기를 원하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은 지금 마음이 허전합니다. 공허합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성공해도 허무함이 주기적으로 찾아옵니다. 바로 그 허전한 마음을 채워주고 그 공간을 주님의 사랑으로 채워줄 수 있는 그런 사역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 목장이 그저 우리끼리 모여서 즐겁게 지내거나, 교회도 우리끼리 와서 예배드리고 우리끼리 교제하고 그다음 주에 또 우리끼리 모이는 식이 되어서는 주님을 모르는 분들을 인도하는 창구 역할을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사랑으로 그들에게 다가가 그들을 섬기고 우리 주님께로 인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2) 잇사갈
두 번째로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복을 받은 지파가 잇사갈입니다. 잇사갈을 보면, 약간 모자라면서도 우직한 느낌이 듭니다.
“14 잇사갈은 양의 우리 사이에 꿇어앉은 건장한 나귀로다 15 그는 쉴 곳을 보고 좋게 여기며 토지를 보고 아름답게 여기고 어깨를 내려 짐을 메고 압제 아래에서 섬기리로다” (14~15절)
양의 우리 사이에 꿇어앉은 건장한 나귀를 상상해 보십시오. 양의 우리가 있고 거기 양들이 많은데 그 가운데 건장한 나귀가 꿇어앉아 있는 모습은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보통 나귀라면 양들 사이에 들어가라고 해도 들어가지 않고 말들을 따라다닙니다. 그런데 이 나귀는 약간 모자란 것인지, 자기에게 잘해주기만 하면 아무 데나 들어가서 잘 어울린다는 겁니다. 쉴 곳만 있으면 하루 종일이라도 들어가서 머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잇사갈은 다른 사람의 짐을 얼마든지 져 줄 수 있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약간 모자란 듯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을 잘 대해주는 것이 잇사갈의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잇사갈 같은 사람은 우직할 정도로 손해까지 감수하면서, 남들이 놀려도 신경 쓰지 않는 그런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이 옆에서 아무리 성질을 부려도 큰 눈을 껌뻑거리다가 한숨 푹 자고 나면 다 잊어버리는 사람과 비슷합니다.
바로 이런 사람이 남을 세워주는 사람입니다. 교회에 필요한 사람도 바로 이렇게 무던하고 우직한 잇사갈 같은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바보가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은 바보가 아닙니다. 사실은 굉장히 똑똑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기질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스스로 모자란 편을 택하며 남을 위해 참아줄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얻습니다.
제가 오래전에 신학교를 다닐 때 한국에 교환학생으로 1년을 나가서 공부했는데, 그때 섬겼던 교회가 있습니다. 한국에서 초대형 교회 중 하나입니다. 그 교회의 영어권에 가서 섬기고 있었는데, 거기 어떤 집사님 한 분이 와서 열심히 섬기셨습니다. 영어권 사역부의 임원도 하시면서 굉장히 열심히 영어권 사역을 섬기셨습니다.
그때 회중 가운데 외국인들도 많았고, 담당하시던 목사님도 미국인 선교사로서 사실은 평양에서 태어나신 분인데 집안 대대로 한국 선교사 집안이라 한국말을 너무 잘하셨습니다. 나중에 제가 그 선교사님을 어느 동사무소에서 뵀는데, 거기서 한국 사람에게 뭔가를 열심히 설명해 주시고 계시는 것을 봤습니다. 그 정도로 한국말을 잘하는 분이셨습니다.
그때 그 영어권에서 섬기시던 그 집사님을 봤을 때 그냥 보기에 외모도 그저 그랬고 부티가 줄줄 흐르는 사람과는 거리가 좀 멀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냥 그런가 보다 하며, ‘아주 열심히 하시는구나. 참 귀한 분이다.’라는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이분이 사회에서 엄청나게 높은 위치에 있는 분이라는 것을 알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저렇게 높으신 분이 여기 와서 이렇게 섬기신다는 것에 제가 충격을 받았습니다.
제가 그렇게 높은 분은 별로 만나본 적이 없었는데, 실제로 그런 분을 만난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겸손하게 섬기시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냥 보면 그분이 그 정도 되는 분인 줄 전혀 모릅니다. 바로 그겁니다. 바로 이런 사람이 잇사갈과 같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자기 자존심을 다 세우며 기분 나쁜 티를 다 내서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자존심을 버리고 넉넉한 마음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톡톡 쏘거나, 빈틈을 주지 않거나, ‘나는 뒤 끝이 있는 사람이다. 한 성격 하는 사람이다.’라고 하며 성질내고 그러면 어떻게 다른 사람을 얻겠습니까? 우리 모두 보기만 해도 넉넉하고 푸근하고 그런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3) 아셀
또 다른 지파는 음식을 공급하는 아셀입니다.
“아셀에게서 나는 먹을 것은 기름진 것이라 그가 왕의 수라상을 차리리로다” (20절)
모든 지파가 농사를 짓거나 목축을 통해 스스로 살아가게 되어 있는데, 야곱은 하나님이 아셀 지파에게 더욱 기름진 것을 주셔서 왕의 수라상을 공급하게 하신다고 축복합니다. 번역을 재미있게 ‘수라상’이라고 했습니다. 사극에서 왕의 수라상을 보셨습니까? 아주 엄청납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그냥 보면 물질적으로 굉장히 풍성하게 해 주신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물론 그것도 포함되겠지만, 흔하지 않은 은혜를 아셀에게 주신다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사실 다 좋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버릴 게 어디 있고 나쁜 게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는 항상 우리와 함께하지만 특별히 더 크게 다가오는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어떤 때는 작고 어떤 때는 큰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는 똑같은데 내 마음이 어떤 때는 그것을 크게 느끼고 받아들이지만 어떤 때는 별로 그렇게 느끼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동일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느끼지 못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특별히 크게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다 좋지만, 같은 주일예배에서 비슷한 설교라도 특별히 오늘 더 마음에 와닿은 때가 있지 않습니까? 평소에 말씀을 읽으면서 좋다고 느끼지만, 특별히 다윗이 시편에서 고백하는 것처럼 말씀이 꿀보다 더 달다고 느껴지는 때가 있습니다. 성경을 공부하면서 말씀의 은혜를 느끼며 이대로 살아야겠다고 결심하지만, 특별히 더 마음에 와닿는 때가 있습니다. 또 수련회나 부흥회 같은 때를 통해 평소보다 더 기름진 말씀을 먹기도 합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특별한 은혜입니다.
아셀 지파는 사실 그렇게 큰 지파는 아니었지만, 왕의 수라상을 차린다고 할 정도로 특별한 은혜를 받은 지파입니다. 이런 사람이 있으면 공동체가 더 힘을 얻습니다. 이런 분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같은 예배를 드려도 다른 사람은 무표정인데 감격에 넘쳐서 드리는 사람, 말씀을 들어도 아주 집중해서 정신 차리고 듣는 사람, 기도를 해도 간절한 눈물로 주님께 나아가는 사람, 또 봉사해도 찌뿌둥한 얼굴이 아니라 아주 아름답게 환한 미소로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있을 때 그곳이 빛이 납니다. 바로 이런 분들이 계시기에 우리 교회도 빛이 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볼 때 목사도 힘이 나지 않겠습니까? 실제로 그런 분들이 계십니다. 그런데 그 반대도 있습니다. 어떤 일을 맡기만 하면 무덤이 되는 사람입니다. 잘되는 사역인데 이 사람이 맡으면 요즘 하는 말로 말아먹는(?) 경우, 다른 사람들이 열심히 하는데 그 사람이 와서 힘이 빠지게 하는 경우, 밝은 분위기로 하다가도 그 사람만 나타나면 어두워지는 경우, 그래서 사람들이 피합니다.
반면 완전히 망하던 것을 맡아서 열심히 섬기니까 살아나는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 주위에는 사람들이 모입니다. 함께하기를 즐거워합니다. 만나고 싶어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 자체가 특별한 사람은 아닙니다. 하지만 어떤 일을 해도 재미있게 하고 밝게 하고 활기차게 합니다.
그런 사람이 한 명만 있어도, 함께 봉사하는 그 자리에 힘이 넘치게 됩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함께 사역할 때 바로 이런 분이 있으면 그 사역이 굉장히 힘이 나고 즐겁고 활기가 넘치게 됩니다. 우리 모두 다 이런 사람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4) 납달리
“납달리는 놓인 암사슴이라 아름다운 소리를 발하는도다” (21절)
이것은 납달리가 이스라엘 안에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지파로 택함을 받았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각자 나름대로 소식을 전하는 방식이 있지만, 납달리는 특히 좋은 소식이 있으면 만사를 제쳐놓고라도 전해주어야 직성이 풀리는 은사를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소리를 발하는” 사람으로서 암사슴처럼 기쁜 소식을 빨리 가서 전하고 싶어 하는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것이 납달리가 받은 복입니다.
인간은 대개 다른 사람에 대해 안 좋은 일은 굉장히 빨리 전하고 싶어 합니다. 입이 근질근질해서 참지 못합니다. 그러나 좋은 일은 말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시기하고 질투하기 때문입니다.
저 사람이 잘 안 되면 ‘저 사람이 이렇게 됐다.’라고 엄청나게 빨리 전하는데, 잘되면 ‘나는 잘 안 되는데 저 사람은 잘되네.’라고 하며 기분이 나쁘니까 별로 전하지 않습니다. 평소에 별로 곱게 안 보던 사람이 좋은 일을 했다고 하면 ‘그 사람이 그럴 리가 없어’라고 하며 주저하지만, 뭔가 안 좋은 일이 있으면 ‘그 사람이 그러면 그렇지.’ 하며 곧바로 전합니다.
그러나 납달리와 같은 사람은 그 반대라는 겁니다. 다른 사람에게 안 좋은 일이 있으면 ‘그 사람이 그럴 리가 있겠나’라고 하며 더 신중하게 알아보고, 또 좋은 일이 있으면 누구보다 기뻐하면서 빨리 전해주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모두가 바로 이런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2. 처음에는 약했으나 나중에 번성하는 복 – 갓, 베냐민
다음으로, 처음에는 보잘것없지만, 나중에 크게 번성하는 지파들입니다. 그들은 갓과 베냐민입니다.
1) 갓
“갓은 군대의 추격을 받으나 도리어 그 뒤를 추격하리로다” (19절)
이 말만 보아서는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지를 잘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처음에는 힘이 없어서 군대의 공격을 받게 된다는 점입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아주 강해져서 오히려 적군의 뒤를 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처음에는 너무나 미약해 보입니다. 보잘것없어 보입니다. 예수님도 그것을 마가복음 4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30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길까? 또는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31 겨자씨와 같으니, 그것은 땅에 심을 때에는 세상에 있는 어떤 씨보다도 더 작다. 32 그러나 심고 나면 자라서, 어떤 풀보다 더 큰 가지들을 뻗어,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마가복음 4:30-32, 새번역)
하나님 나라는 겨자씨처럼 처음에는 아주 미약해 보입니다. 겨자씨는 정말로 작은 씨입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보면 엄청나게 자라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입니다.
지금은 잘 안 보이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전도하려고 해도, 별로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 목장에 오세요.”라고 아무리 초대해도 별 변화가 없습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 목장에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한 번 교회에도 오시면 어때요?”라고 하는데 전혀 꿈쩍하지 않습니다. 그런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교회에 나왔는데 “이제 <생명의 삶>을 한 번 들어보시겠어요?”라고 해도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 분들은 그나마 조금씩 변화가 있지만, 아무리 오라고 해도, 아무리 만나려고 해도, 꿈쩍하지 않는 경우, 변화가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애쓰며 사랑으로 섬겨보려 하지만, 거절도 당하고, 무시도 당하고, 아주 차가운 말로 마음을 아프게 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내가 돈 받고 하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하며 실망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 절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전도는 무엇입니까? 삶 공부 때 배우는 것처럼, 벽돌 한 장을 쌓는 것입니다. 벽돌이 쌓이고 쌓이고 쌓이다가 벽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한 번에 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사랑의 섬김을 한 가지 한 것이 벽돌 한 장을 놓은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마음을 조금 연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전도하다가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전도했는데 전혀 움직이지 않고 전혀 올 마음이 없다고 해도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못 보는 사이에 엄청난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보는 여기서 아무 일이 안 일어나더라도, 또 이곳을 그냥 떠나서 실망이 되더라도, 떠나서 간 그곳에서 열매가 맺힐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두 주 전에 제가 주일 사역이 끝나고 집에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북미가정교회사역원 원장이시고 우리 교회에도 오셨었던 올랜도 김인기 목사님이 전화를 주셨습니다. 김 목사님은 몇 년 전 은퇴하시고 지금은 전 미주를 돌아다니시면서 원장으로서 가정교회 사역을 열심히 하고 계십니다.
그분이 그날 갑자기 전화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랜만에 전화하셨기에 “웬일이십니까?”라고 했더니 제 생각이 나서 하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속으로 ‘이분이 왜 이러시나?’ 그러는데 “목사님 생각이 나서 전화했어.”라고 그러시는데, 조금 후 “내가 지금 산호세 시온영락장로교회에 와 있어.”라고 하셨습니다. 그 교회에서 평신도를 위한 가정교회 세미나를 처음으로 주최했기에 강사로 가신 겁니다.
그런데 그 세미나를 준비하고 운영하는 준비위원장이 바로 우리 교회에서 간 형제라고 하셨습니다. 평신도 세미나 때 목자 목녀 간증이 있는데, 그 형제님이 맡아서 간증하며 우리 교회 얘기를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 생각이 나셔서 전화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교회 입장에서는 그때 어땠습니까? 원래 그 형제님은 교회에 안 나오던 분입니다. 그 부부가 유학 와서 다른 교회를 다니다가 큰 상처를 입고 교회를 안 나가던 사람들이었는데, 우리와 어떻게 연결이 되어서 목장에 나오다가 그다음에 교회로도 나오더니 <생명의 삶>을 듣고는 믿겠다고 해서 세례를 받고 교인이 된 분입니다.
원래 교회도 안 나오던 분들이 와서 믿었고, 그래서 이제 여기서 목자가 되려나 했더니 저 멀리 산호세로 떠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완전히 교회의 핵심 일꾼이 되었습니다. 그분들이 우리보다 더 앞서 있을지 모릅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라고 하신 말씀이 정말 그분에게 딱 어울리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십시오. ‘우리 교회에서 섬겨야 하는데, 왜 저 교회에 가서 저러나?’라고 할 게 아닙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다 주님의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예수님을 확실히 믿었으니까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리고 가서 저렇게 엄청나게 훌륭한 일꾼이 되어 섬기고 있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입니다.
2) 베냐민
처음보다 나중에 더 좋아진 또 다른 지파는 베냐민입니다.
“베냐민은 물어뜯는 이리라 아침에는 빼앗은 것을 먹고 저녁에는 움킨 것을 나누리로다” (27절)
베냐민을 ‘물어뜯는 이리’라고 표현한 것은, 그가 처음에는 자기밖에 몰랐기 때문입니다. 이리는 남을 배려하지 않고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합니다. 베냐민은 약하지도 않고 부족한 것도 없지만, 자기밖에 모르고 어떻게든 남의 것으로 자기 배를 채우려고 했습니다. 굉장히 얌체 같은 모습입니다.
이런 사람은 남에게 도움은 받으면서도, 자기는 절대로 남을 돕거나 희생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희생하지 않는 것이 자기에게 이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은 다른 사람을 위해 시간 내는 것을 당연히 싫어합니다. 교회에서도 함께 협력해서 하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 자기가 편한 때만 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좋으면 하고, 싫으면 안 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인격적으로 어리고 미성숙한 사람입니다.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 하는 것이 바로 어린아이의 특징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아침에 물어뜯고 빼앗은 것을 먹던 베냐민이 저녁에는 어떻게 합니까? 놀랍게도, 움킨 것을 나눕니다. 움킨 것을 남들에게 나누어준다는 겁니다. 그렇게 자기밖에 모르고 사납게 굴며 남에게 상처를 주던 사람이 나중에 영적으로 철이 들어서 자기가 붙들고 있던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줌으로 주변을 놀라게 합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볼 때 ‘저 사람은 너무 얌체야. 저 사람은 정말 자기밖에 몰라. 저 사람은 협력도 안 하고 아무것도 안 해. 영적인 어린아이야.’라고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비록 그런 모습이 보일지라도 웃어주며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지금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 지금 펄펄 뛰는 사람, 이리저리 부딪치며 상처를 주는 사람,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라고 해서 미워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돌봐주어야 합니다. ‘믿음이 강한 우리가 믿음이 더 연약한 사람들을 돌봐주어야 한다.’라고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도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까?
아직 영적으로, 인격적으로 어려서 그런 것이기 때문에, 조금만 참고 기다려주면 신앙에 철이 들어서 아주 신실한 일꾼으로 변화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성격이 까칠하고 자기밖에 모르고 신경질적으로 굴면서 조그만 일도 그냥 넘기지 못하고 불평하던 사람이었는데, 조금 철이 드니까 모아 놓은 것을 나누어주기 시작하는 멋진 신앙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혹시 자기가 이렇게 물어뜯는 이리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되십니까? 나누어 주기를 시작할 때 변화될 수 있습니다. 자기 것을 움켜쥐고만 있어서는 평생 어린아이 짓밖에 하지 못합니다. 자기가 좋을 때는 하고 안 좋을 때는 안 하며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이 자기에게 좋을 것 같아도, 그렇게 살면 평생 영적 어린아이로 머물고 성장하지 못합니다. 남들을 위해 시간을 내지 않고, 남들을 위해 돈을 쓰는 적이 없고, 오직 자기만을 위해 시간과 에너지와 돈을 사용하는 것이 좋을 것 같지만, 그것은 사실 자기 파멸의 길입니다.
그런 마음이 들 때는 영화 <The Lord of the Rings>(반지의 제왕)를 기억하십시오. 아마 대부분 보셨을 겁니다. 안 보신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는데, 꼭 보십시오. 물론 지금 다니엘 금식 기도 기간에는 보지 마시고, 다 끝난 다음에 보십시오.
그 영화에 나오는 아주 특이한 캐릭터가 있는데 골룸(Gollum)입니다. 골룸이 하는 대표적인 대사가 바로 "My precious"입니다. 그렇게 외치며 포기하지 않다가 결국 불 못에 빠져 죽습니다. 지금 불에 들어가고 있는데도 끝까지 반지를 움켜쥐고서 “My precious, my precioud!” 하다가 그냥 타 죽었습니다.
그것은 결국 망하는 길입니다. 나누어줄 줄 아는 삶을 사는 것이 진정한 복입니다. 예수님도 “내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라고 하셨습니다. 심지어 생명까지 내어주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시간이든, 재능이든, 물질이든, 자기의 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위해 사용하며 그것을 나누는 것이 참으로 복된 인생을 사는 길입니다.
3. 처음에는 좋았으나 나중에 비참해진 경우 – 단 (16~18절)
그와 반대로, 처음에는 아주 괜찮았는데 나중에 비참하게 타락한 지파도 있습니다.
“16 단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 같이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로다 17 단은 길섶의 뱀이요 샛길의 독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를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 (16~17절)
여기서 “이스라엘의 한 지파같이”라고 표현했는데, ‘지파로서’라는 뜻도 됩니다. 그렇게 쓰면 되는데 왜 ‘지파같이’라고 번역했겠습니까? 이것이 단 지파의 비극입니다. 단은 분명히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있었고 다른 백성을 심판할 정도로 유능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유능하던 그들이 나중에는 길섶의 뱀이 되었고 샛길의 독사가 됩니다.
길에서 독사를 만난다는 것은 뜻밖의 재앙입니다. ‘샛길’은 지름길을 말하는데, 가장 빠른 길이라고 생각하여 들어선 길에서 생각지도 않게 독사를 만난다면, 그것은 아주 무섭고도 불행한 일입니다. 단 지파가 그렇게 무서운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단 지파에 대해서 축복한 다음에 크게 탄식합니다.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 (18절)
단 지파가 얼마나 안타깝게 될 것인지를 미리 내다보고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것입니다. 단은 자기를 믿었던 사람들이 말에서 떨어지게 할 정도로(17), 샛길인 줄 알고 들어온 사람들이 독사에 물려 죽게 되는 일에 비유될 정도로,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영적으로 아주 악한 영향력을 미치게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단 지파가 원래 배정받은 곳은 남쪽의 블레셋 국경 지역입니다. 그런데 사사기를 읽어보면, 단 지파는 블레셋과 싸워서 땅을 차지하는 대신, 북쪽의 라이스라는 곳을 점령해서 그곳 이름을 ‘단’이라고 짓고 거기서 살게 됩니다. 그래서 단 지파의 땅은 북쪽이 되었습니다.
단은 힘든 전쟁을 치르기 싫어서 쉽게 살 수 있는 길을 택한 것입니다. 그래서 전혀 위협의 대상이 되지 않고 평화롭게 살던 라이스 주민들을 전멸시킨 후 거기서 편하게 살려고 했습니다. 그 결과 단 지파 자체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사라지고 맙니다.
요한계시록 7장에 보면 이스라엘의 각 지파에서 나온 구원받은 사람 14만 4천 명이 나옵니다. 이단들은 그 구절을 보며 구원받은 사람들이 꼭 14만 4천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성경을 반만 제대로 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각 지파에서 나온 사람’이 14만 4천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사람들을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사실 그것은 상징적인 의미로 구원받은 사람들이 그렇게 많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완전수 12에 12를 곱한 후 거기에 많다는 뜻의 1000을 곱해서 144,000이 나오는 것이지, 그게 이단들에서 자기들이 14만 4천 명이라고 하는 뜻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 7장의 14만 4천 명은 이스라엘의 각 지파에서 나온 사람들이라고 되어 있는데, 열두 지파 중 다른 지파들은 다 나오지만 놀랍게도 단 지파는 나오지 않습니다. 므낫세도 나오고 에브라함 대신 ‘요셉’이라고도 나오는데, 거기 단 지파는 없습니다.
이들은 아시리아 군대가 북이스라엘을 침공했을 때 가장 먼저 무너졌고, 결국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렇게 지혜롭고 유능했던 단 지파가 왜 그렇게 되고 맙니까? 진정으로 거듭나는 일이 없이 하나님의 백성 안에 들어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그렇게 훌륭했던 사람이 한순간에 신앙을 떠나 타락의 길로 들어간 경우를 보셨습니까? 그렇게 믿음이 좋고 봉사도 많이 하던 사람이 사회에만 나가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같이 행동하는 경우를 보셨습니까? 그렇게 신앙이 좋던 자매가 결혼하자마자 남편 집안의 우상을 따라가는 경우를 보셨습니까? 그런 경우들이 있습니다.
오래전 저와 함께 고등부나 대학부에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던 친구와 선후배 중에 지금은 교회에 안 나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런 사람들의 공통점은, 교회의 마당은 밟았지만,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하나님의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 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말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자기의 구주와 주님으로 모셔 들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그런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런 신앙의 특징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신앙생활을 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저리로 밀어 놓은 채 자기 혼자 교회 가고 봉사하고 성경 읽고 기도합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합니까? 가능합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몰라도, 심지어 하나님이 없는 신앙생활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바로 그런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자기가 생각하는 하나님을 만들어 놓고는 그 하나님을 믿는 겁니다. 그게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그러다가 상황이 바뀌면 신앙이 무너집니다. 왜? 하나님이 거기 안 계시기 때문입니다. 홀로 서는 신앙이란, 어느 상황에서든 하나님과 동행하며 나아가는 신앙을 말하는데, 하나님이 없이 혼자 서려고 하니 무너지게 마련입니다.
혹시 그런 식으로 지금 교회에 다니는 분이 계십니까? 교회에는 매주 나오는데, 예배에는 참석하는데, 정작 하나님 없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아닙니까? 함께 모일 때 “기도 좀 해 주세요.”라고 하면 “어, 저는 기도를 못 해요.”라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왜 기도를 못합니까? 혹시 가족들과 대화하는 것을 못 하는 분이 계십니까? 가족과 대화할 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자신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유능하고 아무리 잘하는 것처럼 보여도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습니다. 기도가 무슨 대단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과 대화하는 겁니다. 그냥 내 마음을 하나님께 알려드리고, 하나님은 뭘 원하시는지 여쭤보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거듭났는가, 이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하는 신앙생활이 되어야 하지, 하나님을 저기 멀리 두고서 혼자 생각으로 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나가는 말]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일곱 지파는 각기 다른 모습으로 살았고 각기 다른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모두 놀랍게도 자기 분량대로 받은 것입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라 이와 같이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였으니 곧 그들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 (28절)
오늘 본문에 나오는 지파들의 모습 가운데 내 신앙은 어떤 지파와 비슷합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삶을 변화시키고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까? 혹시라도 단 지파처럼, 내가 하기는 하는데 예수님을 진짜 인격적으로 모셔 들인 것이 아니라는 의심이 든다면, 주님 앞에 진실한 마음으로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와 주인으로 모셔 들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하든지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겸손과 신실함과 인내입니다. 언제 어디서든지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성실하게 맡겨진 일을 감당할 때 우리는 성숙한 신앙인으로 자라갈 수 있습니다.
오래전 평안북도 정주에 아주 똑똑한 청년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비록 집안이 가난하여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고 있었지만, 자기 처지를 비관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더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가 하루를 시작한 것은 주인의 요강을 깨끗하게 닦는 일이었습니다.
모든 일을 성실하게 감당하는 그 머슴의 자세를 본 주인은 이 청년이 그저 머슴살이하기에는 너무 아까운 인재라는 생각이 들어서 학자금을 대주며 평양에 있는 숭실학교에 보내 공부를 시켰습니다. 마침내 이 청년은 열심히 공부해서 숭실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고, 고향으로 내려가 오산학교의 선생님이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민족주의자요 독립운동가로 유명한 조만식 선생입니다. 그는 항상 제자들이 인생의 성공 비결을 물을 때마다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사회에 나가거든 남의 요강을 닦는 사람이 되십시오.” 무슨 말입니까? 작은 일, 아니 너무 형편없고 비천해 보이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자기에게 맡겨졌으면 그 일에 최선을 다하며 충성하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지극히 작은 일에 충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충실하고, 지극히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일에도 불의하다.” (누가복음 16:10, 새번역)
우리가 훌륭한 신앙인이 되고 주님의 신실한 제자가 되는 것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지금 내가 어떤 형편에 있든지, 지금 어떤 위치에 있든지,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거기에서 충성하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해 신실하게 감당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내 가정에서, 내 일터에서, 그리고 내 교회에서 내가 맡은 일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 그 일에 최선을 다해서 하고 계십니까? 사람이 보지 않는다고 소홀히 하는 적은 없습니까? 누가 보든지 안 보든지 하나님은 나를 보고 계시기 때문에, 비록 작아 보이는 일이거나 아무도 알아 주지 않는 일이라도 신실하고 정직하게 감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사람을 반드시 들어 쓰시고 중요한 일에 사용하십니다.
우리 모두 작은 일부터 충성하는 사람이 되어, 우리에게 어떤 일을 맡기시든 상관없이 준비된 일꾼으로 우뚝 서서, 주님의 복을 전달해 주는 복의 근원으로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각인의 분량대로 축복하다
창 49:13-21, 27-28 / 백의흠목사
야곱에게는 열두 명의 아들이 있습니다.
이 아들이 나중에 이스라엘의 12지파를 형성합니다.
이 열두 아들은 야곱이 네명의 부인을 통해서 얻은 아들들입니다.
원래 야곱의 아내는 레아와 라헬인데 이들이 아들 낳기 경쟁을 벌여 그의 여종인 실바와 빌하까지도 야곱에게 첩으로 주어 이 네 명을 통해 열 두명의 아들을 낳습니다.
그 아들들의 이름을 기억하십니까?
순서대로 말할 수 있겠습니까?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단, 납달리, 갓, 아셀, 잇사갈, 스불론, 요셉(지파는 요셉의 아들 므
낫세, 에브라임), 베냐민입니다.
이 사람들은 팔레스틴 땅의 여러 지역에 흩어져 부족으로써 미국의 주 처럼 독립된 하나의 세력을 확장하다가 사울이 이스라엘의 초대왕으로 세워지면서 이스라엘 왕국을 건설합니다.
오늘 본문은 야곱이 그의 열두 아들들에게 축복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어느 축복도 똑같은 것이 없이 아주 다양하게 축복합니다.
왜 모든 아들들에게 야곱이 자기가 아버지 이삭으로 부터 받은 것과 같은 축복을 주시지 않았습니까?
왜 모두에게 요셉과 같이 되라고 축복하지 않았을까요?
모두가 다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이고 그 후손들인데 모두가 똑같이 풍성한 축복을 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데 똑같이 축복하지 않습니다.
어떤 축복은 축복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저주에 가까운 축복도 있습니다.
야곱의 축복과 예언 하나하나에는 그 자식들의 성품과 특성과 삶의 모습이 나타나 있습니다.
야곱이 자기 아들들의 기질과 분량에 알맞은 축복을 한 것입니다.
이 축복을 자신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28절, “이들은 이스라엘의 십 이 지파라 이와같이 그 아비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 였으되 곧 그들 각인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
저는 심방을 많이 했습니다.
한국에서 10년동안 거의 하루에도 안 빠지고 하루에 2, 3가정에서 많게는 10가정씩 심방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가정에 심방을 가서 하나님 말씀을 읽고 설교를 할 때나 기도할 때 그 가정에서 풍겨나는 이미지를 따라 합니다.
그 가정에 맞는 찬송을 부르면서 그 가정에 어떤 말씀이 적당할까를 생각 하면서 그 가정의 환경과 형편에 맞는 성경 귀절이 떠오르면 자연스럽게 그 말씀을 가지고 설교를 합니다.
이것은 순전히 그 사람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그것에 맞게 하는 것입니다.
심은대로 거둔다는 하나님의 말씀처럼 자신의 축복은 자신이 선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복을 편파적으로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각인의 분량대로 축복하였습니다.
열 두 아들들이 받은 복은 각자에게 합당한 대로 내려진 것입니다.
야곱은 자기 뜻대로 축복하지 않고 그들 각 사람이 마땅히 받을 만한 분량대로 축복했습니다.
우리가 살아 가면서 받는 모든 화나 복은 나 자신이 마땅히 받을 만하니까 받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때는 설명도 되지 않고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내려지는 모든 종류의 화와 복은 원칙적으로 ‘각인의 분량대로’되어 지는 것입니다.
악한 일을 행한 사람은 악한 죄 때문에 저주를 받고 선한 삶을 살면 그 선한 보상을 받습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반드시 공의롭게 모든 인생을 심판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복을 받을 그릇의 크기대로 주십니다.
사람마다 복을 받을 그릇이 다릅니다.
각자 믿음의 분량대로 복을 받게 됩니다.
큰 믿음의 그릇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축복의 그릇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을 하나도 잃어 버리지 않고 누리시기 바랍니다.
심은대로 거두고 믿음의 분량대로 복을 받습니다.
오늘 야곱이 열 두 아들에게 축복하는 내용을 살펴 보면서 이 속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교훈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성경에 기록된 축복들이 나의 축복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야곱의 열 두 아들은 다 축복 받았습니다.
야곱의 열 두 아들은 한 이스라엘을 형성하고 있지만 단일한 지배를 받는 것이아니라 각자 그 나름대로 정치적인 특성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야곱과 에서는 같은 어머니의 배에서 같이 태어났지만 같은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어미의 태에서부터 민족이 둘로 나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 때문에 민족 자체가 달라진 것입니다.
야곱과 에서는 도저히 함께 지낼 수가 없습니다.
하나가 집에 있으면 다른 하나가 나가야 합니다.
하나가 복을 받으면 다른 하나는 저주를 받아야 합니다.
야곱과 에서 사이에는 축복이 단 하나 밖에 없습니다.
야곱이 축복을 받으면 에서는 종이 되어야 합니다.
그들은 같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신앙 자체가 다릅니다.
진정한 구원은 하나밖에 없으며 진정한 믿음도 하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믿음은 여러 개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가 믿음이면 다른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러나 야곱의 열 두 아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야곱의 열 두 아들은 단 한명도 내쫓지 않고 모두 축복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같은 신앙 고백을 하고 있고 한 교회 안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야곱의 열 두 아들은 교회도 하나고 신앙도 하나지만 그 다스리는 형태나 조직은 다양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몸은 하나지만 몸 안에는 많은 지체가 있습니다.
마치 오늘날의 교회의 모습과 똑같습니다.
교회는 하나이지만 그 안에 많은 지체, 성도가 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서 교회를 향해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엡 4:4,5)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4:16) ”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안에 있는 이 열두 지파는 영적인 통치라는 점에거 거의 독립적입니다.
각 지파 안에 장로나 재판관들이 있어서 자신들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고 판단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똑같은 율법과 똑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는 이들 지파마다 각기 독립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신앙 안에 있기만 하면 하나님의 축복은 주어집니다.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여러 가지 형태의 모습으로 나누어 집니다.
그래서 교파가 있습니다.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등 교파가 다 다릅니다.
그러나 교파가 다른 것은 문제가 없습니다.
다 같이 성경을 믿고 그리스도에 대한 동일한 신앙 고백을 가지고 있으면 다 구원은 얻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서 실망하고, 목회자나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고 아예 교회 제도 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나름대로 조직이 없는 교회를 만드려고 합니다.
그래서 목회자가 없는 이상한 교회도 생겨나고 무교회 주의자들이 생겨 났습니다.
그런 교회는 얼마가지 않아 제도적인 교회가 되든지 아니면 없어지든지 이단에 빠집니다.
교회 정치는 다르지만 교회 안에 있어야 축복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 있어야 축복을 받습니다.
교회에서 상처를 당한다고 교회가 불안전하고 모순이 있다고 교회를 뛰쳐 나가면 구원도 못 받고 축복도 못 받습니다.
가나안 교인은 위험합니다.
대부분은 영원히 교회를 떠나고 신앙을 잃어 버립니다.
이스라엘의 열 두 아들이 다 축복을 받은 것 처럼 우리가 영적인 이스라엘로 남아 있는 한 우리는 다 축복을 받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축복받는 인생의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주님 안에서 있으시기 바랍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교회 밖을 벗어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 안에서 있는 사람들에게는 다 축복이 있습니다.
이 축복을 다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지파마다 다양한 축복을 받았습니다.
야곱은 각 지파마다 다양한 축복을 주는데 어떤 지파는 처음에는 보잘 것 없지만 나중에는 상당히 번성합니다.
갓 지파와 베냐민 지파 같은 지파입니다.
그런데 어떤 지파는 처음에는 대단히 훌륭한데 나중에는 비참합니다.
단 지파가 바로 그렇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이 지파들의 축복의 모습을 간단하게 살펴 보겠습니다.
먼저는 스불론의 지파입니다.
13절, “스불론은 해변에 거하리니 그곳은 배매는 해변이라 그 지경이 시돈까지리로다”
야곱이 아들들을 축복 기도하는데 스불론이 잇사갈보다 먼저 나옵니다.
스불론은 레아가 여섯번째로 나은 아들이고 잇사갈은 다섯번째로 나은 아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잇사갈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러나 스불론으 더 귀하게 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스불론 지파에게 맡기시는 중요한 사명이 있습니다.
스불론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경계선 쪽의 해변에 흩어져서 거하는 지파입니다.
그들은 사방에 퍼져서 전 세계를 향해서 진출하는 웅지를 꿈꾸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생애의 가장 많은 시간을 갈릴리에서 보내셨습니다.
이 갈릴리가 바로 스불론 지파의 활동 무대입니다.(마 4:12-16)
이것은 복음의 위대한 태양이 가장 아름답게 비취지며 나타난 곳이 스불론 지역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구세주로서의 놀라운 사역이 시작된 장소가 바로 스불론 지역입니다.
이 스불론 지파는 언제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복음이 시작되는 곳, 참 복음이 퍼지는 곳인 선교의 요람입니다.
야곱은 스불론을 향해서 어떤 아름다운 해변가를 강조한 것이 아니라 “배가 매여 있는 곳”을 강조했습니다.
이것은 진출하기 위해 출동을 기다리고 있는 배를 가리킵니다.
고동을 울리면서 이 복음을 가지고 세계를 향하여 흩어져 나가야 할 수많은 배들이 출전 준비를 기다리고 있는 해변이 있는 곳이 스불론의 축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모든 교회, 모든 성도에게 복음 전파의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국내에서 그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도 필요하고 먼 곳, 해외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선교사가 없었더라면 우리가 어떻게 예수를 믿었을 수가 있겠습니까?
수많은 선교사들이 그들이 부귀와 안락한 행복 삶을 포기하고 미개한 땅 조선에 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어떤 분은 한국 땅에 도착하자 마자 27살의 꽃다운 나이에 목 베임을 당해 죽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한국에 와서 사랑하는 가족들을 잃었습니다.
동에 양하진에 가면 외국인 묘소가 있습니다.
여기에 한국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돌아가신 선교사들과 그의 가족들 수백명이 묻혀 있습니다.
그런데 1/3이 어린아이들입니다. 문명의 세계에서 왔던 어린이들이 미개한 한국의 풍토병을 이기지 못하고 어린 나이에 죽었습니다.
선교사들은 자기의 사랑하는 어린 자녀들을 이 한국 땅에 묻으면서 복음을 전해 우리가 구원을 얻었습니다.
선교는 중요합니다.
우리의 시선은 교회 안도 향해야 하지만 세계를 바라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식은 내 보내면 축복이 들어 옵니다.
형편이 좋아서 선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없는 가운데서도 계속 선교를 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선교할 형편이 되느냐? 안 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선교를 향한 이상과 선교의 사명을 얼마나 우리가 중요시 여기고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빛을 발해야 합니다.
교회는 선교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교회의 마지막 사명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이 스불론의 축복이 우리 교회와 우리 삶에 있기를 바랍니다.
두번째는 잇사갈에 대한 축복입니다.
14, 15절, “잇사갈은 양의 우리 사이에 꿇어 앉은 건장한 나귀로다, 그는 쉴 곳을 보고 좋게 여 기며 토지를 보고 아름답게 여기고 어깨를 내려 짐을 메고 압제 아래서 섬기리로다”
잇사갈은 안장을 등에 얹고 짐을 싣고 가는 건장한 나귀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양의 우리 사이에 꿇어 앉았다. 어깨를 내려서 짐을 메고 압제 아래서 섬긴다”
자기 자리를 고수하면서 섬기고 일하는 형태의 모습입니다.
원래 ‘잇사갈’이라는 이름의 뜻이 ‘대가를 지불하고 무엇을 얻었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그냥 얻을 수는 없습니다.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땀을 흘려야 합니다. 노력이 요청됩니다.
그런데 그는 쉴 곳 즉 토지와 집을 보면 만족하게 여겼습니다.
어떤 사람이 쉴 수 있습니까?
매일 노는 사람에게는 쉼이라는 표현이 그다지 의미가 없지만 정말 노동을 값지게 알고 애쓰는 사람에게는 모처럼의 휴식이 아름다운 선물입니다.
주님은 노동의 땀을 흘리는 사람을 축복해 주십니다.
구원은 우리의 노력과는 상관없이 은혜로 값없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에 받는 상급은 하나님을 위해서 일한 결과로서 보상을 받습니다.
‘믿음으로 구원 받아 주님을 위해서 어떤일을 행했는냐?’에 따라서 나의 보상이 결정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영광스러운 보상을 원하십니까?
그리고 하나님 앞에 자라스럽게 서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땀을 흘리세요.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 주신 자리에서 수고와 충성의 노력을 다하세요.
멍에를 메고서 주님을 위해서 땀을 흘리세요.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는 이러한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제자리를 지켜 가며 꾸준하고 열심히 땀을 흘려 일하고 있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는 스불론 같은 사람도 필요하고 잇사갈 같은 사람도 필요합니다.
나가서 일하는 사람도 필요하고, 안에서 일하는 사람도 필요합니다.
모두의 은사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서로가 다르다는 것 때문에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당신을 필요로 하고 당신은 나를 필요로 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의 맡은 자리에서 충성을 다하는 잇사갈의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소원합니다.
세번째로, 단의 축복입니다.
16-18절, “단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 같이 그 백성을 심판하리로다, 단은 길의 뱀이요 첩경의
독사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로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
단 지파는 처음에는 훌륭했지만 나중에는 비참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한 지파같이”라고 말합니다.
단이 이스라엘의 한 지파이지, 왜 한 지파 같이 입니까?
단 지파는 처음에는 분명히 이스라엘의 한 지파 같이 그 백성들 가운데 있었고 다른 백성을 심판하는 위치에 있을 정도로 유능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길의 뱀이 되었고 첩경의 독사가 되었습니다.
숲속에 있는 독사를 만나는 것은 숲 속에 들어 간 사람의 잘못이지만 길에서 독사를 만나는 것은 너무 뜻밖의 재앙입니다.
‘첩경’은 ‘빠른 지름길’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가장 바른 길이라고 생각해서 들어 선 길에서 생각지도 않게 독사를 만나면 어떻게 됩니까?
더 늦어지고 어려움을 당합니다.
단 지파는 블레셋과 싸워서 그들의 땅을 차지해야 하는데 영적이 전쟁이 싫어서 쉽게 살 수 있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래서 평화롭게 사는 라이스 사람들을 전멸시킨 후에 거기서 편하게 살려고 했습니다.
그 결과 단 지파는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사라지게 됩니다.
요한 계시록 7장에 구원받은 144,000명이 나온데 거기에 단 지파가 없습니다.
18절에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
이것은 깊은 탄식입니다.
단 지파가 얼마나 무섭게 타락할 것인가를 미리 내다보고 하나님의 긍휼을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믿었던 사람들이 말에서 떨어 뜨립니다.
빠른 지름길인줄 알고 길에 들어 선 사람들이 독사에 물려 죽는 일에 비교할 정도로 영적으로 굉장히 나쁜 영향력을 이스라엘 지파 가운데 끼치게 될 것을 말합니다.
단지파 가운데 유명한 사람이 있습니다.
삼손입니다.
삼손은 인간적인 그릇된 판단에 의해 인생을 그르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많은 축복을 주셨지만 그 놀라운 힘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한 순간의 판단이 그를 무서운 비극에 빠지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전혀 희망이 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삼손은 마지막에 하나님 앞에 다시 자신을 구원해 달라고 외칩니다.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
이 말씀이 삼손의 생애를 운명적으로 요약해 주고 있습니다.
왜 지혜로웠던 단 지파가 이렇게 되었습니까?
진정으로 거듭나는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도 열심히 믿던 것 같은 사람들이 신앙의 길을 버리고 타락의 길로 가는 것은 진정으로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그렇게 좋던 청년들이 군대만 가면 타락해 버립니다.
그렇게 신앙 좋던 자매들이 결혼하자마자 그 집안의 우상을 따라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진정으로 거듭난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앞마당만 밟았고 기독교라는 명칭만 뒤집어 섰지,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피로 죄용서함 받지 못하고 구원받지도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구원을 확실히 받아야 합니다.
거듭남의 놀라운 비밀을 깨달아야 합니다.
교회를 얼마나 오래 다니는냐? 얼마나 열심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해야 합니다.
단은 라헬이 자기 언니 레아와 아이 낳는 경쟁을 위해 자기 시녀 빌하를 자기 남편에게 첩으로 줌으로 태어났습니다.
단이 태어나고 라헬은 기뻐서 “하나님이 나의 억울함을 푸셨다” 즉 “하나님이 나를 판단하셨다”라는 뜻의 단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올바른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적인 계략입니다. 인간적인 계획과 육신적인 뜻이 성공합니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야곱의 가정은 불화와 다툼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인간적인 방법과 계획으로 무엇을 성공한다고 해도 그것은 성공이 아니라 결국은 패배입니다.
우리가 선한 목적과 선한 목표를 세웠으면 끝까지 좋은 수단을 사용해야 합니다.
올바른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네번째는 갓 입니다.
19절, “갓은 군대의 박격을 받으나 도리어 그 뒤를 추격하리로다”
갓은 처음에는 보잘 것 없지만 나중에는 강성해졌습니다.
갓 지파는 처음에는 군대의 추격을 받습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아주 강성해 져서 도리어 그 뒤를 추격합니다.
갓의 출생은 레아와 라헬의 아들 낳기 경쟁에서 시작됩니다.
레아는 라헬이 시녀 빌하를 통해 아들을 낳는 것을 보고 이미 네 아들을 두었지만 자기 시녀 실바를 통해 아들을 얻습니다.
이 아들이 태어났을 때 ‘복되도다’라고 외치면서 ‘갓’이라고 지었습니다.
갓이라는 단어의 문자 그대로의 해석은 ‘군대’라는 뜻입니다.
이 말을 ‘뒤를 따른다. 추격한다’라는 뜻입니다.
무엇을 따라 갑니까? 아들 낳기 경쟁에서 ‘라헬을 따라간다. 추격하여 이긴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 갓지파를 군대처럼 왕성한 지파로 삼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갓 지파는 많은 전투를 합니다.
그리고 전투를 통해 언제나 승자로 나타납니다.
이기려는 경쟁의 기질을 가지고 태어난 아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전투적인 기질을 가진 지파를 계속해서 축복해 주셨습니다.
신앙은 전투입니다.
마귀와의 영적인 전투를 벌여 자기 영역을 넓혀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우리의 영적인 영토를 넓히려면 기독교가 국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한국도 기독교가 국교인 기독교 국가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미국은 기독교 정신에 입각에서 나라를 건설했지만 기독교가 국교가 아닙니다.
기독교가 국교가 아님을 통해 반기독교인들이 국가나 사회에서 기독교 자취를 몰아 내려고 무척이나 애를 씁니다.
그러나 국교가 되지 않음이 축복입니다.
기독교가 국교가 되면 그 기독교는 평온한 중에 잠자는 교회가 되고 결국에는 사탄에게 자신을 내어 주어 무너집니다.
오늘날 유럽의 교회들이 생명력을 잃어 버리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가 국교화 제도를 채택하고 그 길을 걸어 갔기 때문입니다.
국교가 되지 말고 국가가 복음화 되어야 합니다.
기독교가 국교화 되면 자동적으로 모든 사람이 다 기독교인이 됩니다.
회개와 믿음과 중생이 없이 모두가 기독교인이 됩니다.
교회는 나라의 정부 기관이 되고 목사는 공무원이 되어 나라에서 봉급을 받습니다.
독일은 국교가 기독교입니다.
독일에서 목사는 가장 존경 받고 높은 위치에 있는 직업입니다.
봉급도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는 직업입니다.
그런데 독일의 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오늘의 독일 목회자는 다 죽었습니다. 독일 교회의 목회자들은 자기의 교회에 많은 사람들이 나오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 이유는 월급을 나라에서 받기 때문에 교인들이 적어도 급료를 받는 데 지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교인들이 교회에 많이 나오게 되면 목회자들의 일이 더 생기게 됩니다”
교인들이 많다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귀찮은 일입니다.
이것이 국교의 비극입니다.
기독교가 국교가 되지 말고 오히려 민족을 복음화 시켜야 합니다.
영국 국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생명력을 잃어 버리고 사양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명색만이 그리스도인이며 생명력도 없고 진리를 향한 열정도 없이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뜨거움도 없고 하나님을 향한 자신을 드리고자는 헌신도 없었습니다.
이것을 보고 한 사람이 울면서 “나는 월급을 안 받아도 좋다. 나라의 보호가 없어도 좋다. 목숨이 위태로와도 좋다”라고 외치면서 국교에서 나와서 생명력 있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시시하게 예수를 믿는 것이 싫어서 자기들의 모임의 이름을 “우리는 세상을 구원하는 군대”라는 뜻의 ‘구세군’으로 불렸습니다.
그들이 부르는 찬송가는 ‘군가’였습니다.
전도는 마귀에게 포로가 된 영혼들과 싸워서 그들을 그리스도 앞으로 이끌어 내는 신령한 영적인 전투라고 불렀습니다.
이들은 강하게 마귀와 싸우는 하나님 나라의 군대로서 영역을 복음을 전하며 세상을 변혁 시키며 확장해 나갔습니다.
사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의 전투입니다.
그런데, 전투적인 기질을 가지고 신앙과 인생의 싸움에서 승리하기를 원하는 군병들이 어디에 있습니까?
어떤 사람이 오늘날의 미국 교회의 교인들을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미국 교회에 출입하는 교인들 중 96%는 교회에 나와서 의자만 따뜻하게 해 주는 사람에 지나니 않는다”
신앙의 열정도 없이 불꽃도 없이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의지도 없고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열정도 없이 이 세상을 변화 시키기를 원하는 뜨거운 꿈과 이상을 가진 사람들이 없습니다.
우리는 전투하는 군인의 자세로 돌아가서 신앙 생활을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갓지파처럼 영적인 전투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싸움이 아니고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 대한 싸움입니다.
이 싸움은 승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은 추격을 일시적으로 받기도 하고 일시적으로 질 수도 있지만 또한 일시적으로 좌절과 패배가 있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승리는 우리의 것임을 믿고 최후의 승리를 거두어 내고야 맙니다.
전투하는 병사와 같은 열정을 가지고 복음의 전선에 뛰어들어 복음을 전하고 마귀와의 사움에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섯번째로 아셀입니다.
20절, “아셀에게서 나는 식물은 기름진 것이라 그가 왕의 진수를 공궤하리로다”
아셀은 실바가 낳은 아들이지만 레아를 대신하여 낳은 아들입니다.
그래서 레아는 기뻐하며 그 이름을 ‘기쁨’ ‘축복’이라는 ‘아셀’이라고 집니다.
모든 지파는 농사를 짓든지 목축을 해서 자급자족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아셀 지파에게 더욱 기름진 것을 주셔서 왕의 진수를 공급하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아셀지파에게 물질적으로 풍성하게 해 주신다는 것 뿐만 아니라 특별한 은혜를 주신다는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무엇이든지 다 좋지만 특별히 더 좋은 것이 있습니다.
예배 때 설교도 다 좋지만 특별히 더 좋은 은혜받는 설교가 있지 않습니까?
아셀 지파는 그렇게 큰 지파는 아니었지만 왕의 진수를 공궤한다고 표현할 정도로 특별한 은혜를 가지고 있습니다.
봉사를 해도 특별하고 아름답게 하는 사람이 있고 설교를 들어도 아주 맛있게 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는 교회는 재미 있고 힘이 납니다.
신명기 33장에도 모세가 죽기 직전에 이스라엘 12지파에게 축복을 합니다.
이 때 아셀 지파에게 한 축복을 보면 너무너 큽니다.
"아셀은 다자한 복을 받으며 그 형제에게 기쁨이 되며 그 발이 기름에 잠길지어다"라고 하면서 결론적으로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라고 말을 합니다.
얼마나 부럽습니까?
우리 모두 아셀과 같은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여섯번째로 납달리 입니다.
21절, “납달리는 놓인 암사슴이라 아름다운 소리를 발하는도다”
라헬이 빌하을 통해 두번째 아들을 낳고 ‘형과 경쟁하여 이기었다’라고 그 이름을 ‘납달리’라고 지었습니다.
납달리는 좋은 환경과 여건속에 태어난 아들은 아닙니다.
아들을 낳기 위한 경쟁에서 라헬은 부당한 방법으로 자신의 계획을 관철했습니다.
예수를 잘 믿어 보겠다는 경쟁은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을 인간적인 방법으로 이루어 보겠다는 경쟁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아들도 하나님이 축복해 주셨습니다.
납다리를 암사슴으로 비유합니다.
사슴은 아름다움을 상징합니다.
사슴중에 암사슴입니다.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산등성이를 아주 날쌔게 달리는 사슴은 자유로운 모습을 보여 줍니다.
암사슴의 이미지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적인 자유를 상징할 때 쓰여지고 있습니다.
암사슴은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서야 할 길에 서서 마땅히 달려 나가야 할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를 향해서 거추장스러운 것이 없이 달려가는 자유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 납달리가 아름다운 소식을 발합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려는 아름다운 마음 이것이 바로 그들이 받은 축복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복음을 가장 잘 받아 들인 지역은 납달리 지역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지역에서 가장 위대한 기적을 많이 행하셨습니다.
팔복을 설교한 것도 이 곳이고 오병 이어의 기적을 행한 곳도 이 지역입니다.
출신 지역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그 복음 앞에 내가 어떻게 응답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말씀을 들을 때마다 기대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응답하기 위해 말씀을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들은 잘못된 출생을 배경으로 해서 태어난 사람이라 할찌라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잘 받아 들임을 통해 하나님의 축복을 더 받았습니다.
일곱번째로, 베냐민 지파입니다.
27절, “베냐민은 물어 뜯는 이리라 아침에는 빼앗은 것을 먹고 저녁에는 움킨 것을 나누리로다”
베냐민 지파는 처음보다 나중이 더 좋아진 지파입니다.
베냐민을 ‘물어뜯는 이리’라고 한 것은 그가 자기 밖에 몰랐다는 뜻입니다.
이리는 결코 남을 생각하지 않고 모든 것을 자기 중심적으로만 생각합니다.
베냐민은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고 부족하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밖에 모르고 어떻게 해서든지 남의 것으로 자기 것을 채우려고 했습니다.
남의 도움은 받으면서도 자기는 절대로 남을 돕거나 희생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나는 물어 뜯는 이리는 아닙니까?
자기 중심적인 사람이 되면 물어 뜯는 이리가 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경쟁적으로 하고, 자기 중심적으로 합니다.
교회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공격적으로 해서 남의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다 물어 뜯는 이리입니다.
예수는 오래 믿었다고 하는데 아직 영적으로 철이 안들고 어리기 때문입니다.
자기 중심으로만 생각하고 자기 주장이 관철되어야 하고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금방 삐치고 다른 사람을 괴롭힙니다.
교회가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이 되어야지 어떻게 자기 중심이 되어야 합니까?
그런데 이런 사람이 영적으로 철이 들면 그 때는 자기가 붙들고 있는 것을 남에게 나누어 줍니다.
베냐민이 저녁에는 어떻게 한다고 합니까?
‘움킨 것을 나누리로다’
자기가 움킨 것을 남에게 주어서 그를 부요케 합니다.
이제 우리도 자기 중심적인 삶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 다른 사람 중심적인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야곱이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를 골고루 축복하였습니다.
각인의 분량대로 축복하였습니다.
열 두 아들들이 받은 복은 각자에게 합당한 대로 내려진 것입니다.
야곱은 자기 뜻대로 축복하지 않고 그들 각 사람이 마땅히 받을 만한 분량대로 축복했습니다.
우리가 살아 가면서 받는 모든 종류의 화와 복은 나 자신이 마땅히 받을 만하니까 받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때는 설명도 되지 않고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내려지는 모든 종류의 화와 복은 원칙적으로 ‘각인의 분량대로’되어 지는 것입니다.
악한 일을 행한 사람은 악한 그 죄 때문에 저주를 받고 선한 삶을 살면 그 선한 보상을 받습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반드시 공의롭게 모든 인생을 심판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아들에게는 더 많은 축복을 어떤 아들에게는 징계같은 축복을 주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모든 은사들이 골고루 있어야 함을 말합니다.
은사는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성도 각자가 가진 은사가 활용될 때 교회는 아름답게 하나님의 일을 감당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은사는 은사 가진 사람의 믿음을 보장해 주지 못합니다.
은사와 믿음이 일치하면 좋습니만 많은 경우에 그렇지 못합니다.
그래서 은사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 버림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으로 이끌고 정작 자기는 버림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찬양으로 많은 사람들의 눈에서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 나오게 한 사람이 정작 자신은 지옥에서 비명을 지르게 될 수 있습니다.
은사는 신앙을 대변하지 못합니다.
은사는 나의 만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남을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은사는 자신의 믿음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격려하고 돕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축복을 잘 활용하고 이 축복이 축복이 되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사도 잘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이 은사를 축복으로 잘 활용하여 남도 살리고 나도 주님 앞에서 인정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호크마 주석
===49:13절
스불론은 해변에 거하리니... - 후에 스불론 지파가 직접적으로 해변에 거주하지는않았지만 그들은 지중해와 갈릴리 바다 사이에 거주함으로써 이 예언을 이루었다(수19:10-16). 특히 이 귀절에 언급되어 있는 '배' 및 '시돈'이라는 도시는 무역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것들로서, 이들은 스불론 지파가 상업을 중시할 것에 대한 암시를준다. 한편 시돈은 두로와 베이루트 중간에 위치한 중요 항구 도시이다(사 23:2).
====49:14절
건장한 나귀 - 문자적으로는 '뼈의나귀' 곧 골격이 좋은 나귀란 뜻이다. 이것은잇사갈 지파가 튼튼하고 힘이 센 종족(삿 5:15) 이지만 우직하고 단순하여 다른 면에서는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힘든 노동 일과 농사 일에 전념하게 될 것이라는 비유적묘사이다.
====49:15절
압제 아래서 섬기리로다 - 직역하면 '노예 족속이 될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역사상 잇사갈 지파가 상부 지배 계층을 형성하지 못하고 지배받는 계층이 되어 육체적인 고역 및 납세의 의무에 시달리게 될 상태(왕상 9:21;대하 8:8)를 묘사한 예언이다.
====49:16절
단은...심판하리로다 - 단과 납달리는 라헬의 시녀 빌하의 소생이고(30:4-8) 갓과아셀은 레아의 시녀 실바의 소생이다(30:9-13). 따라서 일반적인 관습에 따른다면 이들은 서자(庶子)격인 셈이나 고대 근동에서는 본부인의 의사에 따라 남편에게 시녀를주어서 얻은 아들은 법적으로 적자들과 동등한 지위를 가질수도 있었다. 여하튼 야곱의 열 두 아들 중에 이 4명의 첩의 소생들도 동등한 자격으로 훗날 이스라엘 12지파를형성하였다. 한편 본절은 이 가운데에서도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단 지파가 차지하게 될 역할을 간략한 말로 언급하고 있다. 특히 단은 그 이름이 '재판관'이란 의미를가졌듯이 앞으로 차지할 역할도 주로 재판권에 관한 것이었다(30:6). 이 예언은 단의후손인 삼손에 의하여 성취되었다고 볼 수 있다. 즉 삼손은 20여 년 동안 이스라엘의사사로 지내면서 백성들을 재판하며 또한 블레셋을 격퇴시켜 벡성들의 안전을 지켰던것이다.
====49:17절
단은...독사리로다 - 여기서 '독사'(adder)에 해당하는 '쉐피폰'(* )은맹독을 지니고 있는 '뿔달린 살무사'를 가리키는데 말과 같은 짐승도 한번 물리면 즉사할 정도로 독성이 강하다. 따라서 이는 단 지파가 비록 적은 무리이지만 그들에게많은 압박을 가하는 강대국과 싸워 승리할 사실을 의미하는 것 같다. 실제로 그들은강한 적과 싸워 라이스 성읍을 점령한 일이 있고(삿 18장) 삼손 당시에도 블레셋족을거듭 격멸시킨 일이 있다(삿 15장). 그런데 일부 고대 교부들(Augustine, Iranaeus)은 (1)단 지파가 우상 숭배의 근원지였다는 점(삿18 : 18)과 (2)구원의 반열에서 단지파가 빠져있는 점(계 7 : 5-8)을 들어 이를 단 지파에서 적그리스도가 나오게 될것을 예언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49:18절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 - 혹자는 이 귀절을 자신의 죽음이 임박한 것을 자각한 야곱이 축복을 마칠 때까지 기력을 유지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한 것으로이해한다(Tuch).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이미 예언한 두 지파의 타락으로부터 그의후손들을 보호해 달라는 기도로 이해 한다(Calvin, Keil, Murphy). 그런데 본절을 17절에 대한 고대 교부들의 해석과 연관시키면 이는 악한 세력으로 부터 괴로움을 당하는 성도들의 구원을 간구하는 탄원으로 보아야 한다. 즉 본절을 메시야의 구원 사역에 대한 야곱의 무의식적인 염원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49:19절
갓은...군대의...뒤를 추격하리로다 - 갓 지파의 용감성에 대한 예언이다. 그들은요단강 동편에 살면서 여러 차례 동방 족속으로 부터 침략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침략자들을 성공적으로 격퇴시킴으로써 이 예언을 성취시 켰다(신 33:20; 대상 5:18;12:8-15).
====49:20절
아셀...공궤하리로다 - 아셀 지파는 후에 갈멜산에서 베니게에 이르는 지역을 차지하였다(수 19:24-31). 지중해 해변에 있는 이곳은 땅이 기름지고 소산이 풍부하였다.후에 솔로몬 왕은 여기서 생산되는 곡식으로 두로 왕 히람에게 양식을 공급한 적도 있다(왕상 5:11).
====49:21절
납달리는 놓인 암사슴이라 - 납달리 지파가 마치 사슴처럼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자기를 방어하는 데 매우 민첩하고 능숙한 자들이 될 것임을 예언한 말이다(삼하 22:34;시 18:33;합 3:19). 이러한 실례는 가나안 왕 야빈의 군대가 이스라엘을 침략하였을때 납달리 지파가 이를 성공적으로 격퇴한 사실(삿 4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아름다운 소리를 발하는도다 - 혹자는 납달리 지파 중에서 능변의 연설자나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시인 또는 노래하는 자가 배출될 것을 뜻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Pulpit). 이러한 해석은 납달리 지파 중 ‘바락’이라는 노래하는 자가 배출된 점(삿5:1)에 의해 일견 뒷받침되는 듯하나 앞뒤 문맥과는 그다지 잘 부합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혹자는 원문 자체를 ‘아름다운 새끼를 낳도다’는 말인 것으로 보기도 하나 이러한 해석 역시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