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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첫사랑 하는 남자
수혁은 평소보다 훨씬 일찍 잠에서 깼다. 해가 뜨기도 전에 눈을 뜬 수혁은 일어나자마자 날짜부터 확인했다. 1월 2일. 오늘이다. 수혁의 입매가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오늘처럼 출근 시간이 멀게 느껴진 적이 있었던가? 아무리 되짚어 봐도 없다. 수혁은 집에서 하릴없이 신문을 뒤적거리다가 결국 8시도 안 되어 회사에 출근하고야 말았다. 어제 회사에서 밤을 샜거나 일찍 나온, 그 시각에 회사에 있던 몇몇 직원들이 수혁을 보고 놀라 뒤로 나자빠지는 웃지못할 사태가 발생했다. 수혁은 자신이 너무 부지런을 떨면 밑에 있는 사람들이 피곤하단 태혁의 충고를 따라 그 동안 칼같이 9시 정각에 출근 도장을 찍는 상사였기 때문이다.
그 날, 일찍 출근한 직원들 사이에선 ‘사장이 또 이상하다.’ 라는 소문이 흉흉하게 나돌았지만 정작 당사자는 다른 일에 온 신경을 쏟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제 일을 모두 아랫사람에게 떠넘기고 팔자 좋게 놀기만 하는 사람처럼 회전의자를 돌리며 거의 1분에 한 번꼴로 시간을 확인하고 있었다. 8시 40분 쯤, 채비서가 출근했다. 그리고 조금 지난 8시 49분, 드디어 시우가 나타났다.
- 사장님, 민시우 씨 오셨습니다.
맹세코 채비서의 목소리가 그토록 반갑게 느껴졌던 적이 없었다. 수십 번 확인한 제 모습을 다시 한 번 점검한 수혁은 문이 열리자 마치 일에 몰두하고 있었던 사람처럼 괜히 서류를 한 번 뒤적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 어, 왔어? 앉아.”
그는 자신의 가증스러움에 정말이지 치를 떨었다. 어쩌면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마치 잊고 있던 것처럼, ‘어, 왔어?’ 그 추임새는 뭐란 말인가. 자신의 모습에 속고 있을 시우가 불쌍할 지경이었다.
“ 많이 바쁜가봐….”
“ 그래 보여? 다행이네.”
“ 다행?”
수혁은 아차 싶어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 … 바쁘면 좋지. 할 일 없어서 빈둥대는 것 보단 낫다, 뭐 그런 뜻이야.”
“ 아- 그건 그렇지.”
어째서 이렇게 바보 같은 짓만 하는지 모르겠다. 수혁은 당장이라도 혀를 깨물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니, 시우만 앞에 없었다면 정말 그랬을지도 모른다.
“ 다른 일은 다 그만 둔거지?”
정확히 말하면, 이제 그 입으나마나한 짧은 치마를 입고 길거리에서 춤 출 일은 없는 거지?
“ 아, 응. 해고사유잖아.”
수혁이 물어볼 줄 알았다는 듯, 옅게 웃은 시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 말에 안도했던 심장이 시우의 미소에 다시 바닥으로 쿵 하고 떨어져 버리는 기분이다. 수혁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려는 듯 인터폰을 집어 들었다.
- 네, 사장님.
“ 양 팀장 출근하는 대로 내 방으로 오라고 해줘요.
- 네, 알겠습니다.
목소리가 떨려 나오지는 않을까 하는 괜한 걱정마저 들었다. 수혁은 어색한 듯 손톱을 매만지는 시우를 쳐다보곤 예의 그 느릿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아무래도, 내가 직접 소개하는 건 너한테 별로일 것 같아서. 괜히 낙하산이라느니 그런 소리 나돌면 억울하잖아. 서원예고에서 가장 잘나가던 발레리나 체면이 있지.”
“ 푸훗. 아-, 기분은 좋은데, ‘가장 잘나가던’은 아니었어. 솔직히.”
“ 기분 좋으라고 하는 말 아니야. 적어도 내가 보기엔 네가 연기하는 지젤이 제일 예뻤으니까.”
“ 지젤?”
시우가 말간 눈을 키워 물었다. 수혁은 아무것도 모르겠단 얼굴로 물어오는 시우에 대한 야속함을 접어둔 채 건조한 목소리로 둘러댔다.
“ 연습하는 거 한 번 본 적 있었어. ”
“ 아… 그랬었구나.”
“ 아, 그랬었구나- 가 아니지.”
“ 응?”
“ 내가 널 훔쳐봤었다니까? 반응이 너무 썰렁하다, 민시우.”
수혁은 그만 입을 다물어버리는 시우를 보고 제가 뭔가 실수를 한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조금 붉게 달아오른 그녀의 뺨을 눈치 채지 못했다. 그렇게 기다렸으면서도 막상 보게 되니 버거울 정도라 수혁은 제가 두서없는 말을 떠들지는 않을지 걱정하는 것으로 머리가 다 하얗게 샐 것만 같았다. 그렇게 방황하던 그의 눈동자가 한참 그의 속을 썩였던 그 것을 발견하곤 곧 딱딱하게 굳었다.
“ … 그거.”
“ 응?”
“ 목도리.”
수혁의 주먹 쥔 손등 위엔 파랗게 힘줄이 돋아났다. 수혁의 말에 시우는 내내 옆에 두었던 쇼핑백을 제 무릎 위로 올렸다. 무슨 생각으로 그걸 여기…. 돌아버릴 것 같았다. 시우에게 화를 내지 않기 위해 수혁은 이를 악 물었다.
“ 아, 이거… 보잘 것 없지만 선물이야.”
선물? 수혁은 제게 내밀어지는 쇼핑백에 그대로 돌이 되어버렸다.
“ 네가 준 핸드폰이랑 또 … 여기서 일할 수 있게 해준 것에 비하면 말도 안 되게 약소하긴 하지만. 이렇게라도 해야 맘이 좀 편할 것 같아서.”
“ … ….”
“ 맘에 안 들면 안 써도 되니까….”
“ 아, 아니.”
수혁이 겨우 정신을 차리고 점점 작아지는 시우의 말을 끊어냈다. 그의 손이 조심스럽게 목도리를 받아들었다. 긴장한 빛이 역력한 시우가 건네는 그 목도리는 소름끼치게 부드러워서 하마터면 수혁은 그 걸 바닥에 떨어뜨릴 뻔 했다.
“ 이 게… 내거라고.”
“ 아, 응.”
“ … 미치겠다, 정말.”
시우가 뜻하지 않은 반응에 동그랗게 눈을 키웠다. 역시, 마음에 안 드나. 우울한 빛이 떠오르던 시우의 얼굴이 얼마 안가 이번엔 당황스럽게 변했다. 하하하. 수혁이 그렇게 웃고 있었다. 도저히 참지 못하겠다는 듯. 그리고 그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목도리를 둘렀다.
“ 고맙다. 잘 쓸게.”
“ 아냐, 근데… 괜찮아?”
“ 뭐가?”
“ 혹시 살이 따끔거린다든가, 간지럽다든가….”
시우가 유난히 예민한 수혁을 염려해 물었다. 그러나 그는 두툼한 목도리를 끌어올려 코까지 덮어버리곤 또 다시 활짝 웃었다.
“ 아니, 전혀. 완벽해.”
도대체 그가 말하는 완벽하다는 게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왜냐하면 시우는 ‘위수혁도 이렇게 웃을 줄 아는구나.’ 라는 생각으로 멍해져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의 혼을 완전히 홀려놓으려 작정했는지, 수혁은 정말 헤프다 싶을 정도로 웃어재꼈다. 하하. 하하하하. 그의 눈이 멋지게 휘어졌다.
아무렇지 않을 줄이야. 시우가 사기 전에 누구의 손에 닿았을지 모를 이 목도리가 이렇게 부드러울 줄이야.
그는 그렇게 이 사실이 신기해서 웃고, 빨갛게 달아오른 시우의 얼굴이 귀여워서 웃고, 혼자 멋대로 착각해 질투한 자신이 우스워서 웃었다. 그리고 … 시우가 선물한 2만 원짜리 목도리가 명품매장에서 120만원을 주고 산 목도리보다 따뜻하다는 사실에 놀라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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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우는 자신에게로 꽂히는 날선 눈동자들을 견디느라 이마에서 식은땀이 날 지경이었다. 그들은 마치 오늘 도살한 고기에 등급을 매기려는 축산업자들처럼 살벌한 눈으로 시우의 몸 구석구석을 뜯어보았다. 몸에 군살은 없는지, 근육은 고루 잘 발달되어 있는지부터 시작해서 성형한 곳은 없는 지까지.
그도 그럴 것이 댄스팀 Gioia의 단원들은 이 말도 안 되는 특채에 다들 뾰족하게 날이 선 상태였다. 물론 그들이 GIO뮤직에 소속되어 있는 팀이긴 하지만 단원을 들이고 말고의 문제는 오로지 단장과 단원들끼리 결정할 문제였다. 단원 몇 명이 부족하긴 해서 조만간 오디션을 열 생각이었는데 그런 절차는 깡그리 무시하고 굴러들어온 시우가 순전히 반갑지만은 않은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다들 한 마디도 못하고 그저 노려보고만 있는 건, 이번에 소속사로부터 받는 연봉이 팍 올랐다는 데에 있었다. 조이아의 단장 성재윤은 골치 아프다는 듯 구석 온풍기에 기대 앉아 관자놀이를 누르고 있었다. 자신들에 대한 대우가 나아진 건 앞으로 이런 식의 쓸데없는 참견이 많아질 것에 대한 경고였던가. 아아, 이를 어쩐다.
어쨌든 재윤은 단장으로서 이 험악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릴 필요가 있었다. 재윤이 으쌰-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을 일으키자 시우를 포위하듯 둘러싸고 있던 단원들은 마치 홍해가 갈라지듯 옆으로 비켜서 그에게 길을 내주었다. 재윤은 사자에게 빙 둘러싸인 쥐 꼴을 하고 있는 시우를 마주보았다. 나쁘지 않네. 재윤은 그렇게 생각했다. 툭 치면 쓰러질 것처럼 생기긴 했어도 눈빛이나 분위기가 묘하게 시선을 잡아끄는 면이 있었다.
“ 난 gioia 단장 성재윤이다. 이름이?”
“ 민시우라고 합니다.”
재윤이 손을 내밀자 시우는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입에 걸고 부드럽게 그 손을 맞잡았다. 그 순간에도 재윤은 시우의 작은 동작 하나하나를 면밀히 관찰하며 과연 댄서에 적합한 사람인가를 평가했다. 물론 춤을 추는 걸 보기 전까진 속단해선 안 되는 일이긴 하지만.
“ 춤 좀 보자.”
재윤은 시원시원한 목소리로 바로 본론을 꺼내들었다. 순서가 뒤바뀌어도 한참 뒤바뀌었다 싶지만 어쨌든 윗선에서 일을 저질러 주셨으니 대체 얼마나 대단한 놈인가 보자는 심산이었다. 영 뭐하면 잔심부름꾼으로 쓸 생각도 미리 해 놓았다. 재윤은 시우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음악을 틀라는 손짓을 했다. 누군가 잽싸게 알아듣고 커다란 오디오 쪽으로 달려갔다. 곧 느리고 둔탁한 리듬감의 곡이 흘러나왔다. 재윤을 제외한 나머지 단원들이 모두 고까운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있는 가운데, 시우는 심호흡을 깊게 하고선 천천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모두들 숨을 죽이고 있었다. 손끝과 발끝의 작은 움직임에 따라 지켜보는 사람의 호흡도 멎었다. 부드러움 속에 긴장이 있고 천진한 미소 뒤에 매혹적인 눈길이 있었다. 조금만 틈을 보이면 아주 제 발로 떨어져 나갈 마음이 들도록 혼쭐을 내주겠다, 작정한 이들의 표정이 낭패감으로 어둡게 변해갔다. 결국 곡이 다 끝나고 나서는 도무지 박수를 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분위기가 되어 있었다. 그 사이에서 재윤 역시 후한 미소와 함께 두 손바닥을 바쁘게 마주쳤다.
“ 그래도 꽤 쓸 만은 하겠어.”
모두들 수긍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적개심은 사라지고 벌써 신입에 대한 호기심으로 눈을 빛내는 이들이 여럿 있을 정도였다.
“ 발레를 했었나?”
놀란 것이 분명한 연갈색의 눈동자를 보고, 재윤은 제 예감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여성미가 돋보이는 몸의 굴곡 하며 우아하고 섬세한 몸짓이 남자들의 환상을 자극하기엔 그만이었다. 재윤은 의기소침한 단원들을 쭉 훑어보고는 씨익 웃었다.
“ 축하한다, 신입. 합격이다.”
재윤의 말에 토를 다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누가 보아도 시우의 실력은 당장 무대에 올려 보내도 될 만큼 흠 잡을 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그날 아침, 모두의 반발을 샀던 ‘특채 사건’이 그럭저럭 별 탈 없이 잘 마무리 되는가 싶었다.
“ 다음 주에 Girly 컴백 무대에 올려 보내기엔 시간이 좀 촉박하지?”
“ 네. 그래도 우선 안무는 가르쳐 놓죠, 뭐. 언제 인원 빌지 모르니까.”
“ 그래야지. 아, 그리고 권소호 누가 담당할 건지 너희끼리 합의 보라고 한 거. 얘기 끝났어?”
모두 빙 둘러앉아 회의를 하는 가운데, 재윤이 번뜩 생각난 듯 여자 댄서 몇을 턱 끝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그러자 재윤이 지목한 댄서 셋이 모조리 동시에 손을 들었다. 여차하면 이건 머리채라도 잡고 싸울 분위기였다. 다들 끌끌 혀를 찼고 그 가운데 시우만 무슨 일인지 몰라 멀뚱히 이 사태를 구경하고 있었다.
“ 단장님, 저요! 제가 진짜 제일 낫다니까요?”
“ 웃기시네. 너처럼 뻣뻣한 애가 그 안무가 가당키나 하냐?”
“ 아, 정말 여자들이란.”
전구를 깨고도 남을 듯한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이어지자 재윤의 옆에 있던 대성이 한심하다는 듯 그들을 쳐다보았다. 재윤은 심각한 얼굴로 고민에 빠졌다. 누구를 시켜도 잘 하긴 할 것이다. 문제는 권소호, 녀석의 그 잘난 마성의 페로몬이 문제라면 문제랄까. 여자 단원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던 재윤의 시선이 마지막에 시우에게 닿았다.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 너, 신입.”
“ 네?”
“ 네가 한 번 해봐라.”
“ 단장님!!!!!”
재윤의 말에 여자 셋이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잠깐 귀를 틀어막던 그가 찌릿한 눈빛을 쏘자 웅성거림은 금새 사그라졌다. 시우는 아까보다 더 뾰족해진 시선을 깨닫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재윤을 쳐다보았다. 옆에 앉은 대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재윤은 제 결심을 바꿀 생각이 없어 보였다.
“ 권소호라고, 알지? 이제 막 스물여섯 된 새파랗게 어린놈. 녀석이 두 달 있다 콘서트를 해. 19금으로.”
“ 19금이요?”
그런 게 있는지도 몰랐다. 시우가 놀란 듯 되묻자 재윤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 그렇게 겁먹을 건 없어. 안무나 퍼포먼스가 좀 야한 것도 있지만 뭣보다 곡 자체에 19금 붙은 게 많아서니까. 어쨌든, 그 중에 ‘choke' 란 곡이 있는데… 혹시 들어 봤어?”
“ 아, 아니요….”
“ 이따 들어보면 알 거야. 대체 이 여자들이 왜 이렇게 그걸 못 해서 안달인지.”
재윤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 미소가 어찌 보면 사악하기까지 해서 시우는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아무래도 방금 재윤의 결정 탓에 제 처지가 완전히 미운오리새끼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 확실했다. 여기저기서 콕콕 박히는 시선이 따갑기 그지없었다.
“ 자자, 그럼 회의 끝! 연습하자!!”
그는 여기저기서 불만이 터지기 전에 이 분위기를 무마해보려는 생각인지 활기찬 목소리로 단원들을 일으켜 세웠다. 모두들 찜찜한 표정을 하고 있는 가운데 재윤만이 홀가분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
- 똑똑.
“ 들어와요.”
미란은 심호흡을 한 번 크게 하고선 조심스레 사장실의 문을 밀었다. 언제나 수혁 앞에 설 때는 긴장이 되었다. 그녀에겐 일에 있어서만큼은 칼 같은 상사에게 빈틈을 보여선 안 된다는 일종의 강박관념이 있었다. 미란은 수혁의 스케줄이 적힌 다이어리와 그에게 건네야할 결재 서류를 안아들고 조심스레 문을 닫았다. 그리곤 언제나처럼 일에 몰두하고 있는 수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 저, 저게 왠….’
미란은 못 볼 걸 본 사람처럼 콧잔등을 찌푸린 채 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저게 무슨 조화란 말인가. 그녀는 헛것을 보았나 싶어 고개를 도리도리 저어보고 눈을 깜빡여도 보았다. 그러나 밤색의 수트를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수혁의 목을 칭칭 감고 있는 회색의 털목도리는 좀체 사라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수혁과는 심히 어울리지 않는 목도리였다. 옷걸이에 버젓이 걸려있는 캐시미어 100%의 명품 목도리를 놔두고 털실로 얼기설기 짠 목도리를 두르고 있는 이유가 도대체 무얼까? 미란이 머뭇대고 있는 사이, 소속 아티스트들에 관한 기사를 읽고 있던 수혁이 고개를 들어 미란을 쳐다보았다.
“ 거기서 뭐합니까?”
“ 아, 예, 아… 죄송합니다.”
미란은 서둘러 수혁의 널따란 사무용 테이블로 다가섰다. 이상한 일이지, 벌써 한 소리 나오고도 남았을 타이밍인데 저렇게 잠잠하다니. 미란은 오늘 수혁의 기분이 최고조인 것을 깨닫고 내심 안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그녀가 내려놓아야 할 종이뭉치들 가운데 분명 수혁의 기분을 거스르고도 남을만한 소식이 끼어있기 때문이었다.
“ 사장님, 이 것 먼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 … ….”
“ 다행히 기사는 홍보팀 쪽에서 미리 막아서 새어나가진 않았습니다만, 사진까지 버젓이 찍힌 마당에 얼마나 갈지는….”
그녀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를 최대한 침착하게 이끌어냈다. 보기에도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목도리를 꽁꽁 두른 수혁이 미란의 손에 들린 종이를 낚아챘다. 수혁의 가지런한 미간이 이내 일그러졌다.
“ 후….”
후? 그게 다야? 미란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수혁의 표정을 세심하게 뜯어보았다. 벌써 팀장급 전체 호출에 들어가도 모자랄 판국에? 이게 끝은 아니겠지. 미란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기대를 깡그리 배반한 채 수혁은 크게 노기가 묻어나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 이 사진 찍은 기자한테 연락 넣어서 약속 잡아놔요. 소호랑 김 실장은 내일 입국 하자마자 들르라고 하고.”
“ 아… 네, 사장님.”
“ 나가봐요.”
정말 이게 끝이야? 미란은 미심쩍은 마음을 거둘 수가 없었다. GIO뮤직을 대표하는 간판스타 자리를 몇 년 째 꿋꿋이 지키고 있는 권소호의 스캔들이었다. 그것도 정확히는 스물세 번째. 수혁은 분명 한 번 더는 없다고 했었다. 그 죽일 놈의 여성편력 때문에 더는 기자들에게 생돈을 떠안기는 일은 없을 거라고 그는 불과 몇 달 전 그렇게 경고했었다. 당장 소호를 불러다 멍석말이를 시켜도 분이 풀리지 않아야 하는 게 정상인데…. 미란은 급기야 쓸데없는 의심까지 하기 시작했다. 기분이 좋은 게 아니라 드디어 미쳐버린 건가? 하고.
“ 계속 거기 있을 겁니까?”
“ 아, 하하… 아, 아닙니다.”
미란이 어색하게 웃으며 뒷걸음질 쳤다. 그녀가 문고리를 잡고 그대로 사장실을 나서려는 참이었다. 서류를 훑어보던 수혁이 ‘아!’ 하는 추임새와 함께 미란을 불러 세웠다.
“ 사무실 온도 좀 낮춰요.”
“ … 네에?”
“ 난방. 끄라구요.”
“ 아, 아아. 네.”
미란은 바보처럼 더듬거리고 말았다. 이 인간이 갑자기 에너지 절약에 없던 관심이 생겼나. 실내에서 목도리 두르고 도대체 뭐하자는 거야. 미란은 자꾸만 당황하는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아 화살을 모조리 수혁에게로 돌렸다. 그러다 수혁과 눈이 마주치곤 배시시- 순한 양처럼 웃어보였다.
“ 모, 목도리가 참 잘 어울리세요, 사장님.”
미쳤어!! 분명 빈말인 줄 알걸? 채미란, 너도 드디어 청년실업자의 길로 들어서는구나.
“ 그래요? 다행이네요. 털목도린 처음 해봐서 어색할까 싶었는데.”
“ 아, 아니에요. 자, 잘 어울리세요. 처음 해보셨다니… 꽤 마음에 드시나 봐요. 실내에서도 하고 계신 걸 보면. 아, 그러니까 제 말은….”
쓸데없이 말이 많아지고 있었다. 뭔가 도무지 말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상태였다. 실직의 두려움에 패닉상태가 된 미란은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마구 떠들었다. 그러나 오늘의 수혁은 마치 부처가 현신한 것과도 같았다. 온 몸으로 ‘나는 관대하다.’를 외치고 있는 것 같았다고나 할까.
“ 너무 따뜻해서 도무지, 풀고 싶지가 않네요.”
그것이 수혁의 마지막 말이었다. 미란은 멍한 얼굴로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아무래도 뭔가 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게 틀림없어. 미란은 그렇게 생각했다. 늘 다른 곳 보다 더 춥게 느껴졌던 수혁의 사무실에 출처를 알 수 없는 훈풍이 불어 들어오고 있었다.
빙하가 녹고 있다.
왜 하필 며칠 전 신문에서 본 작은 기사의 표제 하나가 생각나는지 모를 일이었다.
드디어 두자리 수 찍었네요. 여기까지 따라와주신 독자님들 수고 많으십니다-
댓글과 추천으로 응원해주시는 모든 독자님들, 완전 애정한답니다.
녹턴(Nocturne) http://cafe.daum.net/-fam-
묘아리 바니코코 필은 demisoda 기찻길동무 달콤한민트 유사성 모로미 샐리어 백민정 미스망고
업쪽은 '첫사랑'/ 업쪽 문구만 있을 시 쪽지 안 가요.
첫댓글 첫사랑 ♡/ 수혁이ㅋ 목도리가 자신의것인지 모르고 시기한 겸댕이~ ㅋㅋ
앞으로 전개가 궁금하네요 ㅎㅎ 권소호와 삼각괸계가 생기는건가요?ㅋㅋ 아궁그메
첫사랑. 아 수혁이 넘 귀여워요~ 바빠오여서 다행이라니... 너무 시우한테 빠졌는데요? 발레리나...시우가 참 멋있어요 사람들한테 인정도받고... 과연 19금을 수혁이가 참아줄지..어떤반응을보일지 궁금해요! 둘이 어서 잘되길...♥
이번에도 재미있어용 다음편도 기대할게요♥
첫사랑/수혁이 넘 귀여운거 같아요.ㅎㅎㅎ 다음편도 기대되요!ㅎㅎ
아 살랑살랑 바람이 불어와요 ㅎㅎㅎ 수혁이 댄스팀 보내놓고 19금 안무해서 질투하고 후회하고 그러겟죠? ㅋㅋㅋㅋ 소호 이름 독특하네요~ 소호는 수혁이의 질투로 온몸이 고슴도치로 변해버릴거에요 작가님이 보호해주세요~~
첫사랑! 수혁이 점점 귀요미로 변해가네요.ㅎㅎ 그게 너무 싫지않은 1人.ㅎㅎ. 수혁이가 변하는것처럼 시우도 상처 받았던 마음이 수혁이로 인해 녹아갔으면 좋겠어요.ㅎㅎ
아악!!!!!!!!! 수혁이가 점점 사랑스럽게 바뀌는걸요? 채비서는 당황스럽겠지만. 그. 그래도 좋습니당+_+ 나, 나중에 채비서가 눈치채려나(쿨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