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망한 新公無渡河歌
빗물이 모여 개울물이 되고 개울물은 강물이 되고 강과 강이 어울려 바다로 흘려가 바닷물이 된다. 바닷물 수증기가 되어 빗물이 되어 순환한다. 지난해 보았던 민들레는 다음 해 거기에 몇은 노란 꽃잎을 피워올리고 가을이 오면 홀씨가 바람에 몸을 맡긴다. 제각기 안착한 홀씨는 봄을 기다린다. 자연은 순환을 거듭한다. 자연이 그러하듯 인간도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이 또 자식을 낳아서 인간의 역사를 이어 가고 있다.
반복과 순환을 거듭하는 자연의 이치를 아는 존재인 인간은 역사의 흐름을 인정하면서도 일생을 살면서 더 많은 부와 행복을 위해 노력한다. 그 와중에 수시로 지나온 삶에 대해 반추하고 인생의 허무에 대해 장미의 가시만큼이나 많이 고뇌한다, 인간은 길어야 겨우 100년이다. 우주라는 존재에 비하면 찰나도 되지 않는 삶에 불과하다.
수백억의 부를 가진 사람이나 王侯將相도 이 세상에서 사라져도 아무도 기억하지 촌부도 죽으면 입에 엽전 하나 물고 간다. 어떤 이는 금수저로 태어나서 일생은 부귀영화를 누리고 살았거나 흙수저로 태어나 사는 것이 죽는 것만도 못하다는 푸념으로 평생을 살았더라도 죽음 앞에서는 다를 것이 없다, 인간은 이런 것을 알면서도 아옹다옹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神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가끔은 꿈을 꾼다. 눈을 뜨면 무슨 꿈인지 기억도 나지 않은 것이 대부분이다. 기억나는 꿈이라는 것도 현실감이 없는 것들이다. 뚜렷하지 않은 사람의 형상, 어디인지도 모를 장소,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장소 등 현실과는 다른 것들이다. 인생을 살면서 꿈을 이라는 것을 통해 새로운 삶을 경험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의 삶 속에서 꿈을 통해 짧은 새로운 삶을 경험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꿈을 해몽하는 사람은 꿈이 현실을 반영, 예지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 꿈을 해몽한 것과 현실이 전혀 관련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꿈이 인생을 살면서 꿈이라는 것은 삶 속에 다른 짧은 다른 삶을 사는 것은 아닐까.
밤에 늘 이용하던 지하도를 나왔을 때 낯선 장소라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가야 하는 방향조차 찾지 못하고 한참이나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려 갈 길을 가기도 한다. 이런 느낌을 불빛에 홀린 것이라고도 한다. 이런 현상은 현실을 지워버리려고 하는 무의식의 발로는 아닐까.
인생에 대해 말을 하고 꿈에 대해 말을 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인 욕망도 그 한계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부귀영화도 죽으면 원하지 않아도 내려놓아야 하고 권력도 때가 되면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붙들고 애원한다고 영원히 내 것이 되지 않는다.
그것이 운명이다. 죽어 요단강을 건너려는 망자를 향해서 ‘님하, 그 강을 건너지 마소서’라고 애타게 소리쳐도 임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한다. 죽음이라는 운명을 슬픈 외침이 되돌릴 수는 없다. ‘슬픈 여인이여, 운명의 여신은 그대의 외침을 거친 강바람으로 알려니’...
슬픈 여인을 닮은 사람들이여, 내려놓을 것은 내려놓고 떠날 때 떠날 줄 아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아소서. 가슴이 아쉬움에 불타더라도 이제는 내 것이 아닌 것을 어찌하리오. 정선아리랑 한 구절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네주게, 싸리골 올동박(생강꽃)이 다 떨어진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를 부르면서 욕망과 아쉬움 가득한 파란의 강을 건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