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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레시오수도회 한국관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 인천교구 갑곶순교성지
구약의 율법의 규정을 보면(레위 13,45-46 참조),
나병에 걸린 사람은 옷을 찢고 머리를 풀고서, 스스로 부정하다고 외쳐야 했습니다.
공공장소나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에 나타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과는 접촉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혹시 누군가가 저기에게 접근해 오면 ‘자신이 불결한 자’라고 외치면서 접근하지 못하도록 경고해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어이된 일인지, 오늘 <복음>에서는 나병환자가 예수님을 피해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가와서 무릎을 꿇고 애원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구약의 법과’ 예수님의 ‘복음’의 차이를 극렬하게 엿볼 수 있습니다.
곧 구약의 율법은 나병환자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는 규정을 제시할 뿐 그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율법의 한계라 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나병환자이기 때문에,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예수님께 와서 치유를 받습니다.
이처럼, <복음>은 우리가 죄인이고 불결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느님께 나아갈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예수님께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병들었고 죄인이기에, 감싸주시고 치료해주십니다.
예컨대,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간음한 여인 이야기에서도 이를 잘 볼 수 있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간음한 여인이 죄인이기 때문에 율법에 따라 돌로 쳐 죽여야 한다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죄인이기 때문에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용서받아야 할 대상이라고 하십니다.
<복음>은 이처럼, 규정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호의를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나병환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 1,40)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라고 하시는 것은
자신의 바람이 아니라, 스승님의 바람이 이루어지소서! 라는 의탁입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바람에 하느님께서 응답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바람에 우리 자신이 응답하는 것을 말합니다.
곧 예수님께서 겟세마니에서 하신 것처럼,
“내 뜻이 아니라 당신 뜻대로 하소서”라는 주인께 속한 이로서의 자세입니다.
이는 당신의 치유의 능력, 곧 권능을 믿는다는 뜻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능력의 행사는 우리 자신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스승님께 달려있기에
오로지 스승님의 처분에 온전히 의탁한다는 뜻인 것입니다.
곧 스승님을 믿고 신뢰하고 의탁하며, 스승님의 원의에 순명하겠다는 뜻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기도는 어떠한가?
나의 바람을 하느님께 바라고 있는가, 아니면 하느님의 바람이 나에게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가?
오늘 우리는 우리의 바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바람이 우리에게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할 일입니다.
곧 우리의 기도에 하느님께서 응답하도록 하기보다,
하느님의 기도에 우리가 응답해야 할 일입니다.
주님!
저의 바람이 아니라 당신의 바람이 제게서 이루어지소서!
아멘.
<주님 앞에 무릎을 꿇어라>
편찮으신 분이 많습니다.
질병으로 다가온 고통을 이긴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주님께 믿음을 고백해도 아픔은 여전하기 때문에 진정 그분이 함께하시는 것인지 의문이 생길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기도합니다.
주님, 하고자 하시면 모든 것을 이루실수 있으시니 고통을 거두어 주시고,
당신이 몸소 함께 하고 계심을 느끼게 해 주십시오.
고통이 계속된다면 믿음이 흔들리지 않게 지켜주시고,
오히려 그 아픔을 통해 당신의 수난 고통을 체험하는 시간으로 인도해 주십시오.
유다인들에게 나병은 하늘에서 내린 형벌로 저주 받은 모습이요(레위13,34), 죽음으로 향하는 상태(욥기18,13)였습니다.
나병에 걸린 사람은 공공장소나 사람들의 모임에 나타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과 접촉할 수 없었습니다.
혹시라도 누군가가 다가오면 자신이 ‘불결한 사람’ 이라고 외치면서 접근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법으로 규정하였습니다(레위13,45-46).
법은 접근을 막을 뿐 나병을 치유하기 위하여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율법의 한계입니다.
문제는 알지만 해결 방법을 모색하지 않는 것은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는 예수님께 와서 무릎을 꿇고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1,40)하며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더 이상 다른 길이 없어서 마지막으로, 마치 물에 빠진 이가 지푸라기라도 잡고 매달리는 간절한 심정으로 하소연하는 것입니다.
나병환자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이상의 것이라도 할 마음의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사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항복의 자세입니다.
‘저의 목숨은 당신께 달렸으니 저를 살리든지 죽이든지 알아서 하십시오.
그저 저는 당신의 처분만을 기다립니다.
저로서는 더 이상 할 것이 없습니다.’
라고 애원하는 자세요,
‘한 말씀만 하십시오.
당신은 저의 주인이고 저를 고쳐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고 저의 희망이십니다.’
하는 순종의 자세이기도 합니다.
결국 무릎을 꿇은 것은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이러한 간절함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나병이 가시고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죄인이고 불결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느님께 나아갈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기 때문에 더욱 다가와야 하고 또 그 어떤 것도 장애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사랑과 자비로 감싸주시고 치유해 주시는 분입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지금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일’은 살리는 일입니다.
인간됨의 회복에 있습니다.
차별과 소외로 공동체에서 갈려나간 이들이 다시 공동체 안에 함께할 수 있는 길을 치유를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사실 우리는 육체적 질병뿐 아니라 정신적, 영적인 나병을 앓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릎을 꿇고 간절하게 애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릎을 꿇는 자세는 우리가 주님께 나올 때 취할 가장 기본적인 자세임에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우리가 앓고 있는 병에서 치유되려면 먼저 무릎을 꿇는 자세부터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내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주님의 뜻이 가장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 바오로회 유광수 신부님은 무릎 꿇지 못하는 원인을 다섯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1) 자신이 믿는 주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2) 지금 자신이 어떤 병이 들었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3)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주고자 하는 선물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4) 교만함 때문이다.
교만한 자세란 목덜미가 뻣뻣한 자세이다.
몸이 굳어 있는 사람이고, 마음이 완고한 사람이다.
5) 하느님으로부터 자신이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주님 앞에 무릎 꿇는 기쁨의 날 되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부원장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회개와 겸손 - 주님과 신망애(信望愛)의 관계가 답이다>
겸손이 답입니다.
회개할 것이 있으면 주님께 겸손히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아는 것이 진정 겸손이자 지혜입니다.
무지(無知)의 병에 대한 유일한 답은 겸손 하나뿐입니다.
어제 읽은 불가의 글귀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중생의 병은 무지에서 오고,
보살의 병은 ’대비심(大悲心);크게 가엾이 여기는 마음’에서 온다.
중생이 아프니 그도 아프지 않을 수 없다.’
중생은 바로 무지의 사람을, 보살은 오늘 복음의 예수님으로 바꿔 이해해도 잘 어울립니다.
중생인 우리가 아프니 예수님도 아픈 것입니다.
바로 나병환자가 상징하는 바 무지의 우리 사람들입니다.
깊이 들여다 보면 우리의 모든 병은 무지에서 기인함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을 모르고 나를 모르는 무지가 ‘만병의 근원’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마음은 사랑입니다.
측은히 여기는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 가엾이 여기는 마음,
바로 이런 연민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이를 일컬어 예수님의 대비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여 회개하는 겸손한 자가 주님께 바칠 유일한 기도는 자비송 하나뿐입니다.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겸손이 답입니다.
기도가 답입니다.
겸손한 자가 기도합니다.
무지의 병에 대한 치유의 길은 겸손히 기도하는 일뿐입니다.
참으로 대자대비(大慈大悲)하신 주님을 만날 때
무지의 병과 더불어 영육의 치유도 뒤따릅니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께 겸손히 무릎을 꿇었던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는 지혜로웠습니다.
자녀들에게 우선 가르칠 것은 주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경건한 기도의 자세일 것입니다.
마침 수도원에 피정을 신청한 개신교 신학대학생들의 지도교수가 청한 특강 제목 ‘공동체와 경건(敬虔)’이란 말마디가 생각납니다.
오랜만에 듣는 경건이란 말마디가 신선했습니다.
주님 향한 존경과 사랑의 태도를 의미합니다.
거룩한 삶, 거룩한 예배, 건강한 영성을 총칭하는 말마디로 개신교 영성에서 귀하게 쓰이는 말마디가 경건입니다.
하느님을 닮아갈 때 경건한 삶입니다.
경건훈련원이란 곳도 있는데 영성훈련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경건훈련은 바로 영성훈련과 직결됩니다.
여기서 각별히 유념할 바, '사랑이 빠진' 바리사이의 '위선적 경건'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바로 주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겸손한 기도 자세가 경건의 핵심입니다.
나병환자는 참으로 경건했고 주님을 만났습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무지의 병을 치유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우리 모두 안에 내재해 있습니다.
바로 치유를 원하는 주님을 향한 무한한 갈망입니다.
주님을 향한 무한한 신망애의 갈망이 이 한마디 안에 녹아있습니다.
나병환자의 순수하고 겸손한 신뢰심 가득한 고백에 감동하신 대자대비하신 예수님의 즉각적 반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주님의 구원의 말씀입니다.
미사에 참석한 무지의 영적 나병환자들인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입니다.
이 한 말씀으로 영육의 치유는 물론 무지의 병까지 치유받은 나병환자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이 삼박자 구원 요소입니다.
‘1.예수님의 가엾이 여기는 마음,
2.사랑의 스킨쉽,
3.능력의 말씀’
이 셋이 하나되어 나병환자의 온전한 전인적 치유였다는 것입니다.
주님과 신망애의 관계가 깊어져 주님과 하나될 때 우리 사랑의 행위도 이렇게 치유의 기적을 발생할 것입니다.
우리의 가엾이 여기는 마음에서 나오는 능력의 치유 행위는 그대로 우리를 통한 주님의 사랑의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했다.’
치유받은 나병환자는 복음 선포자로 돌변합니다.
바로 전인적 치유, 육신의 나병은 물론 무지의 병으로부터 완전 치유받았음을 입증합니다.
무지의 병의 결정적 치유를 입증하는 것이 이런 복음 선포의 삶입니다.
참으로 대자대비하신 주님을 만나 치유 받는 것이 우선이요,
이에 전제되는 바 주님 앞에 무릎을 꿇는 회개와 겸손의 경건한 자세입니다.
그 무엇도 이런 주님 향한 진심의 자세를 대신하지 못합니다.
세상 그 무엇도 구원의 보장이 되지 못합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필리스티아인들에 대패한 이유도 여기 있음을 봅니다.
대패의 원인을 제공한자는 엘리요 그의 두 아들의 죄입니다.
“이리하여 대살육이 벌어졌는데, 이스라엘군은 보병이 삼만이나 쓰러졌으며,
하느님의 궤도 빼앗기고 엘리의 두 아들 호프니와 피느하스도 죽었다.”
사필귀정입니다.
참혹한 패배입니다.
하느님 탓이 아닌 엘리와 그의 아들들의 업보 때문입니다.
이런 근원적 이유 때문에 하느님의 마음이 떠난 ‘주님의 궤’는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되고 말았습니다.
회개와 겸손이 없는, 보이는 그 무슨 거룩한 성물도 구원의 보장이 되지 못함을 통절히 배웁니다.
바로 ‘회개와 겸손의 삶’없이 성물(聖物)에 의존하는 것,
바로 이것이 미신행위인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선할 것이 주님과 관계의 회복입니다.
끊임없는 주님과 만남을 통해 신망애(信望愛)의 관계를 깊이하는 것이 유일한 처방입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주님에 대한 묘사,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셨다.’라는 대목이 의미심장합니다.
치유이적으로 군중들의 화제와 호기심의 대상이 된 유혹의 순간 즉시 그자리를 떠나 외딴곳에 머무르시는 예수님의 분별의 지혜에서
노자의 ‘공성이(功成以不居);공을 이루되 그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라는 교훈을 배웁니다.
마치 오늘 복음 장면이 이 거룩한 미사장면을 상징하는 듯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당신을 만나 당신께 경건히 무릎꿇는 우리 모두의 ‘영육의 병’과 더불어 ‘무지의 병’을 치유해 주시어
복음선포자로 각자 삶의 자리로 파견하십니다.
우리가 바칠 마지막 유일한 기도를 화답송 후렴이 요약합니다.
“주님, 당신 자애로 저희를 구원하소서.”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생명의 불꽃이 피는 자리>
오늘 제1독서에서 이스라엘은 필리스티아인들에 맞서 싸웠으나 사천 명 가량이나 살상 당하고 패배합니다.
그러자 이스라엘은 실로에서 주님의 계약의 궤를 모셔와 다시 필스스티아와 싸웁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보병이 삼만이나 쓰러지고 하느님의 궤마저 빼앗기고 맙니다.
결국 필리스티아인들은 하느님의 궤 때문에 벌을 받고 보상제물과 함께 다시 이스라엘로 반환됩니다(5-6장).
이 사건은 거룩하신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에게 거룩함을 요구하시는 분임을 보여줍니다.
하느님의 요청에 올바로 응답하지 않으면 제아무리 성소에 피한다 해도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의 나환자는 하느님 앞에서 올바른 태도를 취함으로써 생명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게 한 사람입니다.
나환자는 살았으나 죽은 시체로 간주되었습니다(민수 12,12).
그 결과 그는 일상생활과 종교행위, 대인관계 등 모든 부분에서 소외되고 멸시를 당했지요.
그런데 놀랍게도 나환자는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깨끗이 치유 받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무엇보다도 나병환자는 예수님을 생명의 주님으로 알아보았습니다.
알아보았을 뿐만 아니라 생명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여 믿었지요.
알아보고 믿었기에 그는 예수님께 와서 무릎을 꿇고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1,40)하며 도움을 청합니다.
생명의 불꽃은 생명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피워주십니다.
따라서 그분을 믿고 모든 것을 맡길 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주도권을 알아보지도 인정하지도 않는다면,
생명의 불꽃은 꺼지고 죽음의 그늘이 덮치고 말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뿌리깊은 교만입니다.
나병환자는 자신 안에 생명의 모닥불을 지피려고 생명 앞에 겸손하게 무릎을 꿇었습니다.
무릎을 꿇은 나환자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신앙과 겸손의 태도만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아픔과 처지를 올바로 알아차리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드러냈기에 무릎을 꿇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올바른 자기 이해와 자기 수용은 자기 사랑의 기본입니다.
이는 생명의 주님을 만나고 사랑하기 위한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지요.
상처를 받으며 살아가는 우리는 상처를 그대로 안고 상처 입은 치유자께 나아가야겠습니다.
또한 나환자는 생명과 자유를 갈망하고 열망했습니다.
그에게는 낫고자 하는 간절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몸이 성한 사람 가까이에 가지 말아야 하는 정결법을 어기면서까지 예수님께 다가가 치유를 청한 것입니다.
그의 간절함을 알아보신 예수께서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1,41) 하시자 곧바로 그의 병이 치유됩니다.
나 자신도, 우리 사회와 교회도 상처 입고 병든 나환자와 같은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오늘 한국교회는 굵직한 사건들이 지속적으로 언론에 보도되며 치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언자적 증거는 커녕 악표양의 암세포를 퍼뜨리는 듯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생명의 불꽃이 다시 타오를 수 있도록 생명과 자비의 주님께 나아가야겠습니다.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아픈 상처와 치부를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 드러내며,
회복과 재생의 불씨를 간절히 청해야 할 때입니다.
- 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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