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2일(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통치 원리인 섬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삶의 최고 모범이고 최상위 법이다. 선택과 결정을 고민할 때 많이 힘들면 가끔 ‘예수님이라면 이럴 때 어떻게 하실까?’ 하고 생각하기도 한다. 예수님이 우리 삶의 최고 법이라는 증거다. 그런데 그렇게 고민할 때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하시면 과연 그대로 따를 수 있을지, 그건 잘 모르겠다.
삼종 기도 중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에 계시나이다.’라고 기도하며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말 그대로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에 계시니까 그분에게 인사드린다. 하느님은 저 높은 하늘이나 저 깊은 산 속이 아니라 바로 우리 가운데, 사람들 사는 지금 여기에 계신다. 톱질 도끼질 심지어 마당을 쓸 때도 적절하고 적합한 방법이 있는 거처럼 세상만사에는 다 도(道)가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 생활도 그런데, 그것은 하느님 뜻에 합당한 길이다. 유다인들 율법이 점점 세분된 건 모든 생활을 규정하려다 보니 그리됐을 거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건 불가능하다. 21세기 현대는 더 그렇다. 모든 생활에 적용될 성문화된 하느님 법전은 만들 수 없다. 그 대신 가장 적합한 원리가 있다면 그건 ‘나의 말과 행동이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겠다는’ 순수한 지향이 될 수 있을 거다.
살면서 사회법을 잘 지킨다. 그것은 내가 속한 사회 공동체가 정한 일종의 약속이고 계약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끔 그것과 하느님 법이 충돌할 때가 있다. 그때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양심이 혼란스러워지고 고민하기 시작한다. 하느님 법전이 있는 거는 아니지만, 그 대신 교황과 교황청 그리고 지역 교구장의 가르침이 있다. 그 중 ‘사회 교리’라고 부르는 것들은 우리 실제 사회생활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신앙이 깊은 교우도 교회 가르침과 실정법과 관습법이 충돌할 때는 갈등하고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고민 중 열의 아홉은 하느님 법을 따름으로 입게 되는 손해다. 그것은 금전적, 육체적, 정서적인 것들이다. 가장 쉬운 예를 들면 환경 보호 실천인데, 돈도 더 많이 들고, 번거롭고, 주변 사람들이 하는 불평도 불편하고 그렇다. 그래도 우리 공동의 집인 지구를 회복시키려면 귀찮고 번거로운 그런 작은 것들을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 하지 않으면 우리 후손들은 사는 게 지금보다 훨씬 더 힘들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아니까 갈등하는 거다.
예수님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가르치는 건 다 지키지만, 그들 행동은 따라 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들은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행동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도 보시는 하느님만 내 선행을 기억해 주시기를 바란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를 정도로, 아침에 양치질을 언제 했는지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선행과 의로운 생활은 일상이 돼야 한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신데 피조물인 사람들을 섬기셨다. 아이가 ‘엄마 밥 줘.’ 하고 명령하면 엄마는 아이에게 밥을 바친다. 아이를 여기저기로 모셔드린다. 부모는 자식의 종이다. 그래서 부모는 자식의 마음을 차지하고 그에게 영원한 임금이 된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셔서 사람에게 그렇게 하셨고, 오늘도 그러신다, 미사 성찬례 안에서. 거룩함은 성당 감실 뿐만 아니라 이웃과 피조물을 섬기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서도 나온다. 우리는 섬김으로 다스리는 이 법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예수님, 주님만이 저희 유일한 스승이고 최고의 법입니다. 일상에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주시고 그렇게 실천할 수 있는 은총도 주십시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예수님을 잉태하시자마자 곧바로 엘리사벳을 섬기러 가셨으니, 아드님의 형제요 친구인 저희에게 이웃을 잘 섬기는 법을 가르쳐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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