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베르댕 전투(1916년)
공격적인 지휘관들이 주도권을 잡다
페탱에 불만을 표시한 대표적 인물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해당 전선 지휘관으로 임명한 조프르였다. 지금까지의 전과가 나쁜 것은 아니었지만 조프르가 원한 것은 침탈된 지역을 즉각 탈환하는 것이었다. 즉 수비보다 공격을 원한데다, 이른바 ‘물레방아(Noria)’로 불린 페탱의 병력 교대 시스템으로 인해 휴식 병력이 생겨 전선 전체로 볼 때 가용 자원이 부족해졌다고 생각하였다.
페탱의 후임으로 베르됭 전투를 지휘한 로베르 니벨. 상당히 공격적인 성향이 컸던 인물로 엄청난 소모전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후 조프르의 후임으로 프랑스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결국 그는 5월 1일에 페탱을 중부집단군 사령관으로 승진시켜 후방으로 빼버리고 공격 제일주의를 신봉하는 니벨(Robert Nivelle)이 제2군을 지휘하도록 조치하였다. 이처럼 두 달 만에 양측 모두 공세 지향적인 지휘관들에게 전선을 맡기게 되었는데, 이는 지금껏 겪은 피해보다 더 엄청나고 잔인한 희생을 부른 시발점이 되었다. 이제 베르됭은 크노벨스도르프와 니벨이 앞장서서 쏟아 붓는 피의 블랙홀로 바뀌었다.
프랑스의 반격은 5월 말부터 시작되었다. 니벨은 제5사단에 조속히 두오몽 요새를 탈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병사들의 희생을 아까워하지 않아 도살자라는 별명으로 불린 사단장 망갱(Charles Mangin)이 아무런 준비도 갖추지 않고 무조건 요새 앞으로 돌격하여 불과 이틀 만에 자신의 병사들을 모두 하늘로 날려 보냈다. 하지만 반격에 나선 독일군도 얼마 전진하지 못하고 프랑스군의 포화에 쓰러져갔다.
워낙 많은 주검 때문에 사람들의 감정이 무감각해질 정도였다. 병사들은 지옥이 베르됭보다 덜 잔인할 것이라 생각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죽음의 경쟁은 어느덧 일상으로 바뀌어갔다. 엄청난 총과 대포는 물론 화염방사기와 독가스에 이르기까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모든 수단이 남김없이 동원되면서 대지는 피로 물들어갔다. 당시 참전한 프랑스군 장교는 전사하기 직전 남긴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내가 보고 느낀 것을 표현할 만한 적당한 단어를 도저히 찾을 수 없다. 지옥도 이처럼 지독하고 잔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모두가 미쳤다.”
6월 초, 독일군이 시체 고지(Mort Homme Hill)와 보 요새를 점령하면서 기세를 올렸지만 잠시뿐이었다. 어느덧 목적을 상실한 싸움이 되어 버린 베르됭에서 요충지를 차지했다고 출혈이 멎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빼앗긴 곳을 되찾기 위해 더욱 악착같고 잔인한 전투가 이어졌다. 베르됭 전투의 축소판이라 불린 우브라주 드 티오몽(Ouvrage de Thiaumont)의 경우는 10월까지 무려 14번이나 주인이 바뀔 정도였다.
포격으로 파묻힌 프랑스 병사 위에서 경계를 펼치는 독일군 병사. 이처럼 전사한 시신을 모두 수습할 수 없어 일대를 그냥 파묻고 집단묘지화해 버린 곳이 많았다. <출처: IWM>
만일 독일의 피해만 적었다면 지금의 모습은 분명히 팔켄하인이 의도했던 것이었다. 프랑스의 병력과 물자가 베르됭으로 끊임없이 몰려들어 소모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일의 피해 또한 예상보다 크자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먼저 싸움을 시작했고 여전히 공세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으므로 만일 독일이 물러난다면 베르됭 일대에 연출된 지옥은 그쯤에서 중단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쏟아 부은 것이 아까워서라도 먼저 그만두기 머쓱한 입장이었다. 팔켄하인은 그래도 프랑스의 피해가 훨씬 크기에 계속 싸움을 유지하면 결국 이길 수 있을 것이란 판단을 내렸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정보로 인한 크나큰 오판이었다. 5월까지 20만 명의 손실을 본 팔켄하인은 프랑스의 피해가 그 두 배인 4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는 정보부의 보고를 그대로 믿었던 것이다. 실제로 프랑스의 피해는 25만 명 정도였다.
백골이 된 독일군 시신 더미 위에서 휴식을 취하는 프랑스 병사의 모습. 베르됭 전투의 참상을 대변하는 유명한 사진이다.
엄밀히 말해 석 달간 독일의 전사상자가 20만 명이라는 것 또한 최초의 계획을 완전히 벗어난 엄청난 손실이었지만 프랑스군의 피해가 더 크다는 착각에 빠진 팔켄하인은 이를 충분히 감내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만일 그가 실상을 제대로 파악했다면 베르됭 전투는 이때쯤 종결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소모전을 조금만 더 참아내면 이길 수 있다는 오판으로 인해 더욱 많은 피가 베르됭에 뿌려져야 했다.
설령 그곳이 베르됭이 아니더라도 오로지 공격만 외치는 크노벨스도르프와 니벨이 양쪽 부대를 선두에서 지휘하는 이상 피바다는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너무나 많은 피를 흘렸기에 이제 베르됭은 먼저 수건을 던질 수도 없는 자존심 싸움의 장으로 바뀌어 버렸다. 6월 말이 되자 독일은 전투 개시 이후 가장 멀리 진출할 수 있었지만 더 이상의 예비대가 없어 제풀에 주저앉아야 했다.
독일은 6월에 이르러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더 이상 피해를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에 이른 것이었다.
7월 1일 솜(Somme)에서 영국군의 대대적인 공세가 개시되었다. 프랑스 쪽으로 축 처진 서부전선의 북쪽을 밖으로 밀어냄과 동시에 베르됭에 가해지는 독일군의 압박을 분산시키기 위한 선제공격이었다. 게다가 그동안 잠잠하던 러시아가 동부전선에서 이른바 브루실로프 공세(Brusilov Offensive)를 펼치며 오스트리아-헝가리를 궤멸 직전까지 밀어붙였다. 이제 독일은 더 이상 베르됭에만 매달릴 수 없었다.
전세는 완전히 역전되었다. 팔켄하인은 제5군에게 방어 태세로의 전환을 지시했다. 8월이 되자 주도권을 확보한 프랑스는 반격을 재개하기 시작했고 이제부터 독일은 수세적인 입장에서 싸워야 했다. 하지만 반전을 인정하지 못한 크노벨스도르프는 계속 공세를 외쳤고 이런 안하무인의 태도에 반발한 빌헬름 황태자의 건의를 카이저가 받아들여 8월 23일 동부전선으로 전보되었다.
전선을 순시하는 도중 위생병과 환담하는 제5군 사령관 빌헬름 황태자. 그는 바지사장 같은 존재였지만 결국 엄청난 희생을 유발한 베르됭 전투를 중단시키는 데 일조했다. <출처: IWM>
결국 작전 실패의 책임을 물어 팔켄하임이 해임되고 그 후임으로 동부전선을 성공적으로 지휘해 온 힌덴부르크(Paul von Hindenburg)가 신임 독일군 참모총장에 올랐다. 그는 9월 초 베르됭 일대를 시찰한 후 지금까지 고수한 현지 사수 전략을 폐기하고 상황에 따라 후퇴도 용인하는 탄력적 방어 전략을 채택하였다. 독일이 더 이상의 희생을 감내하기 힘든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동안 너무나 많은 피해를 본 프랑스는 적어도 자존심을 회복할 수 있는 수준까지 실지를 탈환해야 했다. 10월 24일, 니벨은 대대적인 반격을 지시했고 바로 그날 베르됭 전투의 상징과도 같았던 두오몽 요새를 탈환하였다. 12월에 이르러 프랑스는 시체 고지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을 회복했고 어느덧 전선은 열 달 전 독일이 공세를 개시하기 이전의 수준으로 되돌아가면서 지옥의 전투는 프랑스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하천을 건너 진격하는 프랑스 기병대. 결국 프랑스가 이겼지만 이 전투의 승패를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10개월 간 계속된 전투의 참혹함은 엄청난 희생자 숫자로 모든 것이 설명된다. 자료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독일이 14만여 명의 전사자를 포함하여 43만여 명, 프랑스는 15만여 명의 전사자를 포함하여 55만여 명이 피해를 입었다. 그것도 사방으로 10여 킬로미터 정도밖에 안 되는 작은 지역에서 벌어진 참상이었다. 당연히 1916년의 베르됭은 현실 세계에 등장한 지옥이었다. 사실 이 정도면 승패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베르됭 전투를 기점으로 전쟁을 대하는 각국의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환호성을 지르며 전선으로 달려 나가는 분위기였지만 이제는 전쟁의 종식을 요구하는 소리가 곳곳에서 튀어나왔다. 전쟁 발발 직후 거국내각(Union Sacree)을 구성했던 프랑스 정계는 전쟁의 지속 여부를 놓고 극심하게 분열되었고, 독일도 혼란한 정국을 틈타 루덴도르프(Erich Ludendorff)가 권력을 휘어잡으며 군부 독재 체제를 구축하는 발판을 놓게 되었다.
100년 전 현실세계에 등장한 지옥이었던 베르됭은 이제 인간의 잔인함을 영원히 알리는 추모의 장소가 되었다. <출처: (cc) Jean-Marie PERRAUX at Wikimedia.org>
지구상에 있었던 그 어떤 전쟁이나 전투도 지옥이 아니었던 적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1916년 좁디좁은 베르됭에서 있었던 학살극은 인류사에 등장한 최악의 참상 중 하나였다. 포성이 멎은 지 100여 년 가까이 된 지금도 격전지 부근에는 포탄의 자리가 남아 있고 발견되지 못한 불발탄 때문에 일부 지역은 출입이 통제되고 있다. 그만큼 베르됭은 지옥이 현실세계에도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준 확실한 증거였다.
남도현 | 군사 저술가[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