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마음은 근육과 비슷해서 쓰면 쓸수록 더 커지고 강해진다. 마음을 더 크고 튼튼하게 가질 수 있는 비결은 오직 한 가지, 상대를 이해하는 데 마음을 쓰는 것뿐이다. 게다가 몸을 꾸려 가는 마음이 욕심부리는 걸 그만두지 않으면 영혼의 마음으로 가는 문은 절대 열리지 않는다. 욕심을 부리지 않아야 비로소 이해라는 것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더 많이 이해하려고 노력하면 영혼의 마음도 더 커진다.
포라스터 카터_'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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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사랑을 가진 자는 경멸함으로써 창조하려 한다. 사랑하는 것을 경멸한 경험이 없는 자가 자기 사랑에 관해 무엇을 알겠는가?
Paganini - Sei sonate M.S.27 (op.3) from Paganini for two
Violin - Gil Shaham Guitar - Goran Sollscher
파가니니 Niccol Paganini (1782-1840)
이탈리아의 바이올리니스트·작곡가. 제노바 출생. 어려서 제노바의 오페라극장 지휘자 세르베토와 산로렌초성당의 악장 G.코스타 등에게 사사하고 9세 때 첫 바이올린 연주회를 개최하였다. 13세 때 다시 A.롤라에게 바이올린을, 기레티에게 작곡을 배우면서 그는 그 무렵부터 연주여행과 초인적인 기교를 발휘하기 위한 난곡(難曲)을 작곡하기 시작하였다. 1799년 루카에서 연주회를 열어 대성공을 거둔 후 북부 이탈리아 각지를 돌며 화려한 연주생활에 들어갔으나 1801∼04년 어느 귀부인과의 동거생활로 연주활동에서 떠나 어렸을 때 배운 기타에 열중하였다가 1805년 연주활동을 재개, 루카에서 대성공을 거두고 그 곳 궁정오페라극장의 지휘자로 임명되었다.
13년에는 밀라노에서 한 시즌에 36회나 연주회를 열고, 15년에는 베네치아로 옮겨 그 곳의 여가수 안토니아 비안키를 만나 두 사람 사이에 남자 아이가 태어났으나 그들은 2년 후에 헤어졌다.
이 무렵부터 건강이 나빠졌으나 그의 명예욕과 활동력은 건강과는 반비례적으로 불타올라, 23년에는 빈을 방문하여 이른바 파가니니선풍을 일으켰다. 이 선풍은 다시 프라하·드레스덴·베를린을 휩쓸고 31년에는 파리, 이어서 런던을 비롯한 영국 각지에까지 미쳤다.
이 여행에서 파가니니는 거만의 부(富)와 연주사상 공전의 명성을 얻은 후 32년 제노바로 돌아왔다. 그러나 33년 파리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한 후부터 급격히 건강이 악화되어 마침내 인후암(咽喉癌)으로 죽었다.
그는 자기의 연주법을 비밀에 붙이고 제자도 단 한 사람 시보리뿐이었으며(시볼리에게도 연주법의 전모를 밝히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많은 명바이올린 연주자들처럼 유파(流派)를 형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주법은 현재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전해지지 못하고 그 자신의 일대로 소멸하였다.
그의 음량은 그다지 풍부하지 않았지만 음색은 매우 아름다웠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4옥타브에 걸치는 넓은 음역, 각종의 중음(重音), 플라지올레토, 스타카토, 스피카토, 살타토 등의 기교를 극도로 구사하여 화려한 곡예적인 연주법를 창조하였다.
그것은 당시 급격히 무르익어 가고 있던 낭만주의음악의 일대 특징인 명인적(名人的)인 연주의 선구를 이루는 것으로, 그의 주법은 직접 후세에 전달되지는 못했으나 낭만주의음악에 준 영향은 매우 크다.
그가 잘 사용한 기법은 플라졸레토, 왼손의 피치카토와 스코르다투라 등이며, 그 밖에 스타카토와 레가토의 극단적인 분리 사용 등 화려하고 곡예적인 연주를 창조하였다. 그 기술적 확충에 따른 소산을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24개의 카프리치오》를 비롯한 다수의 소품 및 협주곡에서 볼 수 있다.
작품은 바이올린곡뿐이며, 모두 어려운 기교와 즉흥적인 화려함에 특색이 있다. 강렬한 표현성은 낭만주의 음악에 큰 영향을 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