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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자와 직업
사람은 누구든지 어떤 목적을 위해 계속 움직인다. 그것은 직업수도 있고, 취미일수도 있다. 좋아하는 것을 하기위해 비용과 노력을 지불한다면 그것은 취미이나, 싫던 좋던 대가를 위해 움직인다면 이것은 직업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대가를 받는다면 정말 좋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 직업이 아니라면, 그 직업을 좋아하면 될게 아닌가? 그러나 그게 그렇게 간단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가진 사람을 부러워한다. 나도 자신의 직업을 좋아해야 한다고 배웠건만, 그렇지 못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잘되지 않더니, 그 직업에서 마저 은퇴해야할 때쯤 되어서야 나의 직업을 좋아하게 되었다.
나이가 들면서 부터 불합리하고 잘 안 되는 일이 생기면 팔자로 치부하는 버릇이 생겼다. 그러면 마음이 편하니까. 나는 나의 직업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뿌리치려고 많이 노력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의 직업(전기기술자)은 팔자려니 하고 생각하면서 마음이 편하게 되었다.
나의 직업이 팔자려니 하고 생각하는 이유를 이야기를 하려면 내가 6살이었던 1955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해는 우리나라가 한국전쟁이 끝나고 해가 겨우 두 번 바뀌었는데, 숨돌릴 틈도 없이 이번엔 대단한 홍수가 한반도를 덮쳤다.
여느 집처럼 농사를 짓던 우리 집도 직격탄을 맞은 것이다. 우리 집 주 수입원인 논과 밭이 몽땅 수몰이 된 것이다. 현북면에서 가장 큰 경작지, 광정들판의 모든 논에 물을 공급하는 이름도 없는 작은 하천이 범람한 것이다.
당시 우리 집은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19세와 16세 된 두 분 고모가 계셨고,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나와 3살짜리 여동생 이렇게 8식구의 대가족이 살고 있었다. 한국전쟁을 피해 피란을 갔다가, 피란지에서 돌아와 부서진 집을 수리하며, 폐허가 된 논밭에서 피곤한 몸을 추스르며 힘겹게 살고 있었던 중에 홍수마저 닥치고 보니 살길이 막막하였다.
우리가족은 머리를 맞대고 여러 가지 궁리 끝에 가족을 분리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아버지와 어머니, 나와 동생, 이렇게 네 식구가 분가하여 무작정 속초로 이사하였다. 우선 다급해진 우리 핵가족은 속초의 어느 군부대 앞에 조그만 구멍가게를 차려놓고 어머니는 재봉틀로 군복을 수선하면서 간단한 먹 거리를 팔아 생계를 꾸려 나갔다.
그리고 몇 달 후 아버지가 속초읍사무소(현재시청)에 임시직으로 자리를 얻자, 가게를 치우고 읍사무소사택으로 이사를 하고, 어머니는 근처 바느질가게에서 일감을 얻어다가 집에서 일을 하셨다.
아버지는 얼마 안 되지 만 꼬박꼬박 월급을 받아 오시고, 어머니는 바느질 솜씨가 주위에 알려지면서 수입도 점점 늘어나고 집은 내 집은 아니었지만 읍사무소사택이어서 마음 놓고 살 수 있었으므로 생활은 제법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우리가 살던 집은 사택이라고 해도 작은 방 두개가 터져있어 조금 큰 방 한 개와 앞마당 쪽으로는 미닫이를 열면 툇마루가 있으며 방에서 부엌으로 통하는 작은 쪽문을 열면 솥이 두 개 걸린 시멘트 부뚜막에 사람이 겨우 지날 수 있는 넓이에 장작을 땔 수 있는 아궁이하나가 전부인 손바닥만 부엌이 딸린 작은 함석집이었다.
당시에는 피난민들이 지은 판자집들이 즐비하던 시절이어서 우리가 사는 작은 함석집은 모두가 부러워하는 훌륭한 가옥이었다. 그날도 어머니는 하루 종일 재봉틀에 매달려 사시다가 저녁때가 되어 아버지 퇴근시간이 가까워 오자 재봉틀을 멈추고 쌀을 씻어서 두 개의 바가지로 잇대어 급하게 물과 쌀을 흔들어 쏟아 부으며 쌀을 일고 있었다.
오늘도 일이 많아 하던 것을 마져 끝내려다 보니 여느 때 보다 좀 늦었다. 아버지가 오시기전에 저녁식사준비를 마쳐야 하기에 더욱 바쁘신 것이다. 날씨가 흐린 탓인지 해가지면서 밖은 이내 어둑어둑해졌다. 하루 종일 혼자 놀다가 이때쯤에야 어머니 곁에 올수 있는데, 나에게 눈길하나 주지 않고 밥 짓기에 여념이 없으신 어머니가 혼자말로 중얼 거리신다.
“이때쯤이면 전기가 들어와야 하는데... 어째 오늘은 이렇게 늦지?”배가 고프지만 바쁘신 어머니를 보니 말도 못하고 어머니 옆에 말참견이라도 하려고 옆에 서있던 내가 벽을 쳐다보았다. 널판대기 속에 숨어 천정속에서부터 벽을 타고 두 줄로 쭉 내려오던 전기 줄이 부뚜막 근처에서 딱 끊어져 있는 게 아닌가?
어린 생각에도 번쩍 머리를 스치는 게 있었다. “엄마, 엄마 전기 줄이 끊어져 있어서 그런가봐, 내가 이어 줄까?”마침 마땅한 대화 거리도 없던 참에 칭찬이라도 들을 양으로 어머니에게 말을 붙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쌀을 이는 데만 정신이 팔려 나를 처다 보지도 않은 채로 내가 묻는 말에 건성으로 대답하셨다. “그러려무나.“ 나는 다시 한번 확인했다. ”정말 내가 선을 잇는다!“ ”그러렴.“ 어머니가 다시 확인해주셨다. 눈앞에는 마치 돼지털같이 뻣뻣한 가는 전선을 여러 가닥 꼬아 만든 붉은 색이나는 구리전선이 있다.
나는 한참 망설이다가 자신이 생각해도 기특하다는 듯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콘센트가 떼어져나가 그대로 노출되어있는 각각의 두선을 뱅뱅 틀어 이어버렸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한참 지났다. 마침 아버지가 오시기 전에 밥도 다되어 어머니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촛불을 밝히고 동그란 나무밥상에 열무김치와 콩나물이 들어간 두부찌개가 전부인 밥상을 들고 들어오셨다.
잠시 후 아버지가 들어오시며 말씀하신다. ”저밑에 있는 동네는 전기가 들어왔는데 왜 우리 집은 아직 전기가 안들어왔지?“ 하시면서 촛불로 밝힌 밥상에 앉으시는 순간 번쩍하면서 천정에 달린 전등이 점등되는가 하더니 전선피복에 불이 붙어 타올라가며 씰링(천정에 붙은 동그란 전선돌출기구) 근처에 반짝반짝 전선을 따라 불이 타들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잽싸게 일어서며 늘어져있는 전등을 손으로 잡아당기니 씰링이 떨어져 나가며 생긴 구멍으로 천정위의 석가래 쪽에 불이 붙어 타들어가는 게 보인다. 아버지는 얼른 부엌으로 나가서 부엌 쪽으로 터져있는 천정으로 올라가려고 시도하였지만, 사다리가 없어 어째볼 도리가 없어 발만 동동 구르다가 밖으로 나가셔서 ”불이야“ 하고 외쳤지만, 때가 해질녘이라 어두선하여 누구하나 와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행운의 여신은 우리 편이었다. 갑자기 정전이 되면서 시내가 암흑처럼 어두어지더니 다음날까지 전기 들어오지 않았다. 요즘 같으면 난리가 났겟지만 당시에는 착한시민들은 그저 그러려니하고 불끄고 일찌감치 자리에 들었던 때다.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다음날 아침에 부엌에 나가니 내가 고사리 손으로 연결하였던 콘센트 떼어낸 자리부터 합선이 되어 당시 사용하던 면절연전선이 타올라 갔었다고 한다. 만일 집에 불이라도 났다치면 아버지는 방화죄에 해당되어 어렵게 얻은 직장을 잃는 것은 물론이고, 징역을 갈판이니 우리 집은 풍비박산이 나는 절대 위기 앞에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6살 꼬마였던 나는 야단맞을까봐 아버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숨어 다니고 있었으나 이런 상황을 알고 계시는 아버지의 심경은 어떠했을까? 그러나 워낙 큰 사건이라서 그랬던지 이제나 저제나 처벌만 기다리던 나에게 무서운 아버지는 한마디도 안하셨다. 세월이 지나서 전기기술자가 된 뒤에야 나는 생각했다. 당시에는 두꺼비집(안전장치)도 없었으니, 정전이 된 것은 우리집합선 때문일까? 아니면 우연의 일치일까?
그리고 내가 전기 기술자가 된것이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또 하나있다. 나는 본래 의사가 되려고 했다. 어머니가 항상 편찮으셔서 내가 카서 어머니를 건강하게 해드리려고 마음 먹고 있던 참었는데 한국전쟁이 끝난뒤로 소식을 모르던 이모님이 내가 중학교 삼학년 여름방학이 되었을때 삼척공전이야기를 갖이고 나타 나셨다.
당시 나라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이 국가를 재건하려고 중화학공업을 기치로 내세우던 때이었다. 나는 당시 제일 좋아하는 수학선생님께 상당을 했다. 그랬더니 하시는 말씀이 우리나라에서는 4년제 대학을 안나오면 힘을 못쓴 단다. 만일 네가 기술자가 되려거든 고등학교를 좋업하고 4년제대학을 가도 늦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도 그말씀이 옳다고 생각하고 그 학교가는 것을 적극 반대 하였다. 부모님을 설득 못하자 어린나는 단식투쟁을 벌였다. 이틀쯤 굶고 누워 있는데 어머님이 들어오셨다. 그리고는 나의 귀에대고 속삭이셨다. ”이비겁한 놈아 나는 네속을 다안다. 삼척공전 입학시험 때문이지?“ 나는 뜨끔하였다. 사실 그때 내 실력으로 그 학교에 간다는 것은 좀 힘든일이었다.
그렇다고 그 시험 때문 만은 아니였다. 나는 황급히 아니라고 햇다. 그러자 어머님은 또 한마디 하셨다. ”그럼 시험합격한뒤에 안가면 그만이 아니냐?“ 그래서 어머니가 갖어오신 죽그릇을 넘겨받고 어머니한테 보여주기위해서 밤을 새며 꼬박 3개월을 공부했다.
삼척공전입학할 때만 해도 나는 토목과를 가고 싶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권유로 전기과를 일차 지망을 했지만, 객관식 한 두개만 더 틀렸어도 나는 내가 희망했던 토목기술자가 되어있을 것인데, 그때는 내 실력보다 벅찬 점수를 받아 전기기술자가 되었으니, 운명이란 정말로 있는 것일까?
나중에 안 일이지만 당시 속초는 수복지구라서 500kw 디젤발전기 한 대가 속초읍 전체를 담당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해가 져야만 디젤 발전기를 가동하여 전등을 켤수 있게 하더니 나중에는 발전기 한 대를 추가 하며, 특선 이라하며 24시간 공급되는 별도의 전력망이 등장하였다.
그러나 계량기가 없어서 특선이나 일반선이나 전등이 몇 개냐 콘센트를 몇 개를 쓰는가 하는 것이 전기요금을 부과 하는 기준이 되었다. 그래서 전기요금을 수금하는 사람들이 가끔씩 나타나서 일일이 전등수와 콘센트를 헤아렸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나타날 때 쯤되면 어떤 사람 들은 전등이나 콘센트를 벽에 걸린 옷으로 숨기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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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저둥 어렸을 적에 전선 가지고 콘센트에다 꼽고 이 튀어서 무자게 놀란적이 있답니다.
어떻게 되나 실험해 보다가 불
저는 그 이후론 전기가 무자게 무서워요
이게 팔자인가 봐요! 팔자란게 있지요?
@오경석 모르겠어요. 장담은 못하겠지만실한 것같아요
팔자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지는 건
@스칼릿 이건 정말로 재미없지요? 그래도 팔자는 있는것 같아요.
@오경석
재미뿐만이 아니라 글이 아주 좋아요.
더 궁금해지고 기대됩니다.
걱정 마시고 천천이 좋은 글 소개해 주세요.
언제나 환영할게요
@스칼릿 감사 합니다. 그럼 또 기대해 주세요.
필력이 대단하시네요 좋은 글 계속 부탁드려요
감사합니다.과분하게 칭찬해 주시니...
써놓은게 많이 있어요.
좋아 하신다면 질리도록 올릴테니
재미있게 읽어만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