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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쉬어가는 역사 이야기 2
권영심
예의 본보기, 임금
조선 임금의 평균 수명은, 약 42세로 보고 있습니다. 일반 서민에 비해서도 그리 오래 살았다고는 볼 수 없으니, 호의 호식이 수명장수를 만드는 것은 아닌가 봅니다. 임금이 되면 온갖 것을 마음대로 다 할수있고 주지육림에 둘러쌓여 지낼 것 같으나 천만의 만만의 콩떡이올시다.
연산과 광해의 폐위의 가장 큰 원인은 불효하고 사치한 때문이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임금의 생활은, 세자로 책봉된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서민은 상상할 수 없는 고행의 길로 입장 합니다. 추우나 더우나 새벽에 일어나 죽 한 그릇 먹고, 궁중의 어른들에게 문안 인사를 올리러 길을 나서야 합니다.
조선의 궁궐은 전각 한 채에 주인이 한 명을 원칙으로 했습니다.
전각은 궁궐의 건물 중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 있는 곳을 말하는데 '전'이 더 높습니다. 임금을 호칭하는 '전하'는 그 전 아래 부복해야 만날 수 있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전각의 길은 멀고도 멀어서 대비전, 왕대비전, 대왕 대비전...세자나 임금은 가마에 몸을 싣고 문안을 올리러 갑니다. 흔히 시위 무사나 궁인을 배종하고, 걸어서 다니는 임금의 모습을 드라마에서 자주 보는데 절대 아닙니다. 만약 임금이 그렇게 걸어서 다녔다면 아마 왕의 수명은 몇 십 년은 더 늘어났을 겁니다.
임금은 오로지 앉아 있는 존재. 꼿꼿이 앉아 끝없이 계속되는 상소와의 전쟁을 치르고, 호통을 치고, 밥 먹고, 가마에 앉아서 흔들리고... 기진맥진 문안 인사를 마치고나면, 수라를 젓순 후, 시강을 하고 정전에 나아가 정사를 보고, 주강, 석강을 거쳐 다시 정사를 보고, 수라를 젓순 후 또 다시 밤 문안인사. 이 모든 것을 마치는 시간이 밤 11시 정도입니다.
요즘 이렇게 매일 살라고 하면 살 수 있을까요? 연산과 광해의 폐위는 이런 임금의 도리를 하지않은 것도 이유가 있습니다. 연산과 광해를 정신병자 비스므리하게 만들어 드라마를 만들기도 하는데, 두 임금의 처신은 중국이나 서양의 돌아이 황제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왕의 길을, 임금이 해야 할 도리를 지키지 않았던 것이 폐위의 가장 큰 원인이었습니다. 조선은 충과 효가 같은 무게를 지니는 나라였고, 인의지예신, 또한 임금이 가장 실천하고 받들어 몸소 보여 주어야 하는 나라였습니다. 임금 자신이 모든 예의 살아있는 본보기였지요.
암튼 조선 27 명의 임금 가운데 왕세자의 책봉을 받고 위에 오른 왕은 놀랍게도 일곱 명 뿐입니다. 적장자로 책봉례 를 치르고 왕위에 오른 임금은 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순종입니다. 이 일곱 임금 중, 숙종외엔 다른 여섯 왕은 다 나름 엄청 불행한 군주였습니다.
문종은 단명한데다가 유일한 아드님인 단종이 그렇게 처참한 죽음을 당했고, 연산군은 폐위되어 서인으로 비참하게 죽었습니 다. 12대 인종은 중종의 장남으로 태어나자마자 어머니인 장경왕후를 잃었고, 그 유명한 계모 문정황후에게 엄청난 학대를 받았으나 효를 다하지 않은 때가 없는,그야말로 조선이 요구하 는 임금의 재목이었지요.
겨우 목숨을 부지하여 왕위에 오르기는 했으나 불과 9개월만에 승하하여 문정 대비와 난정이란 여인천하 시대를 열어 줍니다.
독살설이 있는 임금 중의 한 명이기도 합니다. 조선의 가장 큰 불행은, 예의 본보기가 되는 임금들은 단명한다는 것이지요.
현종은 효종의 아드님으로, 두 가지 타이틀로 이름을 남긴 왕입 니다. 조선의 임금 중 유일하게 외국에서 태어났고, 18대 임금 으로 재위기간 중 경신대기근이란, 유명한 기근과 유례 없는 전염병 창궐로 고통받은 왕이었습니다.
굶주림으로 정신을 잃어, 짐승을 잡아 삶아 먹고 나니 자식이었 다는, 끔찍한 이야기들이 부지기수로 있는 경신대기근은, 그 참혹함을 필설로 형용하기 어려운 재앙이었습니다. 아버지인 효종이 봉림대군이었던 시절 심양에서 태어 났으므로 유일무이 한 외국 탄생의 임금입니다.
순종은 말할 것도 없이 이씨조선의 마지막 왕이니 그 비통한 생애야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오로지 숙종만이 적장자로 태어나 왕위 계승 코스를 제대로 밟아, 위에 올라서도 개인사나 치적이 그리 나쁘지 않으니 일곱 왕 중 유일하게 무탈한 왕이라고 봐도 무리가 없겠습니다.
조선은 건국 신화에 나타나듯이 장자가 잘 되지않는 나라임에 틀림없습니다. 조선 임금들이 할 일이 참 많았겠지만 꼭 해야 할, 그야 말로 온 생을 다 바쳐 이루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무엇이었을까요?
부국강병? 민생안정? 그런 일들은 이 일을 해놓은 다음에야 생각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면류관을 쓴 다음부터 목숨걸고 해야만 하는 일은 바로 사직의 보존. 즉 대통을 이을 왕자를 생산하는 일이었습니다.
적통의 적장자로 왕위를 잇는 일이야말로 임금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명 이었습니다. 아들을 낳지 못하는 왕비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이었고 사극에서 보다시피 폐위도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지요. 그러나 실제 아들을 낳지못해 폐위되어 출궁을 당한 왕비는 한 명입니다.
뒷전에 물러앉아 그림같이 있을 망정 아들을 낳아줄 여인들은 궁중에 넘치도록 있으니까요. 궁녀란 오로지 왕을 위해 준비된 여자. 왕의 아이를 낳기만 하면 그 신분은 땅에서 벗어나 하늘을 비상하게 되니, 어찌 아들 낳는 일에 신명을 바치지 않겠습니까?
조선의 신분은 어머니의 신분에 따라 결정되지만 왕의 자식은 달랐습니다. 왕은 무치이므로 용종을 생산한 여인의 신분이 아무리 비천해도 태어난 아이는 군이나 옹주가 됩니다. 덩달아 어미의 신분도 환골탈태하게 되지요.
역시 임금은 대빵인 모양입니다 ㅎㅎ.
비련의 왕후 인현 왕후도 무자식이어서 결국 장희빈에게 쫒겨난 것이나 다름 없지요. 정치 싸움에서 패한 결과이기는 하지만 자식이 있었다면 그 지경까지는 가지 않았을 겁니다.
그럼 가장 자녀를 많이 둔 임금은? 3대 태종입니다.
기록된 부인만 12명, 왕자12명에 공주가 17명이니 다산왕이 라고 할만하지요. 9대 성종도 부인이 12명이었으나 자녀는 훨씬 적었습니다. 성군인 세종도 부인 6명에 22명의 자녀를 두었으니 참 여러가지로 다재다능한 왕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자손을 전혀 두지못한 임금도 있겠지요.
6대 단종, 12대 인종, 20대 경종, 27대 순종 등, 네 명입니다. 단종은 소년으로 승하했고, 인종은 자식을 두지 못한 이유가 참으로 눈물겹습니다. 계모인 문정 왕후가 계속 공주만 생산 하자 왕세자였던 인종은 혼인을 했음에도 부인과 합방을 하지 않았습니다.
계모가 왕자를 낳기 전까지 자식을 만들지 않겠다는 갸륵한(?) 결심을 하고 부부 생활을 거부했다지요. 계모가 동생을 낳은 후에는 더 지독해진 학대로 몸이 병약해져서 결국 일 점 혈 육도 생산하지 못하고 승하한 것입니다.
경종은 장희빈의 자식으로, 그녀가 사약을 받을 때 옆에서 어머니의 용서를 빌다가 악에 받힌 희빈이 아들의 고환을 흩어 고자로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장희빈이 악독한 성품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 임금 순종은 일본이 계획적으로 임금의 수라에 지속적으로 불임약을 넣어 자식을 갖지 못하게 했다는, 믿거나 말거나의 이야기가 줄기차게 회자됩니다. 아마도 그랬을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생각합니다 .
정궁 중에 의외로 회임하지 못한 왕후가 많으나 그 누구도 폐위 되어 쫒겨 나가지 않았습니다. 유일하게 인현왕후 뿐이지요. 다시 복위되었으니 불임으로 폐위된 왕후는 사실상 없다고 봐야 할까요?
그 외 폐위된 왕비는 세 명 있는데, 연산군의 어머니 윤비와 부인인 거창군부인 신씨입니다. 그리고 15대 광해군의 비였던 문성군부인 유씨가 있지요. 남편인 왕이 폐위되어 궁을 나갔으니 당연히 정궁의 호칭를 가지지 못합니다.
사가에서도 회임하지 못하면 시집에서 쫒겨 나가는 경우가 있었으나 궁중은 불임의 왕후를 용납했습니다. 생산할 여인들은 수없이 많았고, 왕자 탄생의 기대는 왕의 호색을 묵인하고 인정했습니다.
그 대신 불임의 왕비는 뒷방 신세나 다름없었고 이름만의 정궁으로 덕과 자애의 화신이 되어야 했습니다. 후궁들이 낳은 아이들은 명목상으로는 왕후의 자식이었습니다. 그러니 사극에서 보는, 궁중 여인들의 암투는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