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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 기황후 貢女 奇皇后
“모진 비바람에 쓸리고 할퀴어 마모된 돌멩이가 더욱 야물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16
점점 싸늘해지는 밤공기는 이제 차가운 겨울이 다가왔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것을 반증하듯 달은 점점 가까워져 한밤에도 낮처럼 밝은 달이 곳곳을 비춰주었다. 사각사각. 모두가 잠든 밤길을 밟는 은의 발소리가 유난히 급하고 컸다.
“하아, 폐하께선 아직 안 오셨니?”
호젓한 정자 아래, 여느 때 같았으면 먼저 나와 저를 기다렸을 그는 없고 흰 고양이만 야옹야옹- 은을 반겼다. 늘 그랬듯 주머니에 넣어가지고 온 고양이의 간식거리를 꺼내 주고, 그 앞에 쪼그려 앉아 조그만 입으로 그것들을 먹는 모습을 지켜보던 와중에 어느새 제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폐하.”
“오래 기다렸느냐.”
“아뇨, 저도 방금-”
“많이 추워졌구나.”
그가 은의 양손을 끌어다 제 손 안에 가두고 따뜻한 입김을 불어 손을 녹여 주었다. 하늘을 다스리는 이라 하여 ‘천제’라 불리는 일국의 황제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은의 앞에서는, 은의 앞이기 때문에 가능한 사소한 것들. 오늘만큼은 그의 다정함이 은에게 더욱 안타까이 여겨진다. 분명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제가 보고 들은 이야기들을 다 전해주려 마음먹고 그리 급하게 서둘러 온 것인데, 막상 이렇게 마주하고 있으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이 사람에게 해가 되는 일은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제가 전하게 될 말들마저 이 사람의 마음을 할퀴게 될까 겁이 난다.
“서운했느냐.”
“무엇 말입니까.”
“황제궁과 멀어지게 된 것 말이다.”
“네, 조금 서운했습니다.”
말과는 다르게, 은은 웃으며 답했다.
“한 가지, 네게 서운할 말을 더 해야 하는데.”
“........?”
“앞으로는 당분간, 정자에서 만나는 일은 삼가도록 하자꾸나.”
“어째서, 갑자기, 무슨 일이라도-”
“아니, 그런 것이 아니다. 생각이 있어 그리 하자는 것이니 내 말을 따라 주련.”
그의 표정과 어투는 여느 때와 다름이 없는데, 은에게는 모든 것이 쓸쓸하게 느껴졌다. 서운하게 생각지 않으리라 마음먹은 것도 잠시, 마치 어린아이 보채듯 은은 그를 마주하고 서서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폐하, 실은 드릴 말씀이 있어요.”
“은아.”
“아주 중요한 얘기예요. 폐하께서 꼭 아셔야만-”
쉿, 하는 입모양으로 그가 기다란 검지를 은의 입술에 가져다 댄다. 무슨 이야기든 저는 다 알고 있으니 말 할 필요 없다고 타이르듯 말하며 확인의 눈빛을 보낸다. 은은 꾹 다물린 입으로 아무 말도 못하고 그를 따라 고개를 끄덕였다.
“그보다 먼저, 네가 들어주었으면 하는 말이 있는데.”
끄덕끄덕.
“생각했던 것보다 말이다,”
“........”
“내가 너를 아주 많이, 아끼게 된 것 같구나.”
낭만적인 말이라곤 해 본 적이 없었을 이 남자의 서투른 고백에 은은 슬며시 떠오르는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만면에 미소를 띄웠다. 이것이야말로 최고의 약속이자 선물. 한 아름의 금은보화보다도 값진, 그의 마음. 이제는 고 환관의 확신을 조금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은의 환한 미소는 조금의 거짓도 없는 것이었지만, 마음속으로는 한 가지 사실을 분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지금의 기쁨이 물론 이 사람으로 인한 것이지만, 그를 향한 감정은 연모의 마음이 아니라 인간적인 모습에 대한 애정과 연민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런 생각들이, 저에게 모든 마음을 내보이기 시작하려는 그에게는 조금 가혹한 일일까. 저의 온 마음은 이미 오래 전부터 다른 이에게 닿아 있었으니.
//貢女 奇皇后//
“흐흠! 이 대도는 하도 오랜만에 돌아와서인지 낯설기까지 하구만! 하하!”
며칠 사이 그즈음, 황성이 바라다 보이는 대도의 어느 저잣거리에선 황제가 부럽지 않다 할 만큼 휘황찬란한 마차 한 대가 고 환관의 저택으로 향하고 있었다. 마차 안에는 고집스러워 보이는 은회색 수염을 제법 품위 있게 기른 노(老) 대감이 신선 같은 웃음소리를 흘리며 앉아 있었다. 곧 마차가 고 환관의 저택 앞에 당도하자, 마당을 가로지르던 집사가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한달음에 달려 나와 깊이 허리를 숙였다.
“아, 아니 ‘진 대인’ 아니십니까..! 기별도 주지 않으시고 어찌 예까지...!”
“나만 보면 그리 과장하여 놀라던 자네는 여전하구만, 하하하!”
“소, 송구합니다. 어서 안으로 듭시지요!”
“태감은 여전히 안녕하신가!”
“여부가 있겠습니까. 곧 황성으로 전갈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서두를 것 없네. 나야 남아도는 것이 시간인 사람이니 볼 일 다 본 후에 천천히 오라 하시게.”
현재 저택의 별채는 모두 우겸의 공간이 되었을 뿐더러, 진 대인 같은 귀하디귀한 손님에게는 당연한 것이었기에 집사는 그를 곧바로 고 환관이 사용하는 독채로 안내했다. 고풍스럽게 꾸며진 방 한켠의 탁자에 편히 자리를 잡은 진 대인이 한숨을 돌리며 냉수를 청했다. 지체 없이 대령한 냉수를 단숨에 비운 진 대인을 향해 집사가 조심스레 물었다.
“요양은 편안하셨습니까.”
“요양이야 핑곗거리에 불과하고, 실은 휴양이었지. 하하. 정사에 진절머리가 난 늙은이의 꾀를 군말 없이 받아주신 폐하 덕분에 세상 부러울 것 없는 유람을 하고 왔다네.”
겉보기와 다르게 집사의 등줄기는 식은땀으로 흥건했다. 상대방이 그만큼 대하기 쉬운 이가 아니라는 반증이리라. 이 나라 권력의 두 축이 황제와 연제라면, 그 삼파전에는 진 대인이 포함되었다. 수 년 전, 현 황제가 정권을 잡은 뒤 실세가 거의 연제에게로 기울자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작스레 요양을 핑계로 홀연히 대도를 떠났던 진 대인이 오늘 이렇게 아무런 소식도 없이 나타난 것이다.
...
저택으로부터의 전갈을 받은 덕분에 고 환관은 집사보다는 좀 더 차분한 모양으로 진 대인을 맞이할 수 있었다. 퇴청하여 돌아오는 길, 고 환관은 능구렁이보다 더하면 더 했지 결코 덜하지 않은 진 대인의 타고난 수완과 특유의 넉살에 절대 휘둘리지 않으리란 다짐을 하고 또 했다. 그러나 오랜 시간 세월의 풍파에 닳고 닳아 어지간한 일엔 동요조차 없는 그 늙은이를 제가 받아낼 수 있을런지, 다소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게 얼마만인가! 그 사이 얼굴이 핀 것을 보니 태감께서 늦둥이라도 보신 게로군 그래!”
“하하, 역시 제게 그런 농을 하실 수 있는 분은 진 대인 뿐이십니다.”
“그 말은 칭찬으로 듣겠네. 영 쑥스럽구만!”
전에 비해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는 진 대인의 태도에 고 환관은 어느 정도 마음을 놓았다. 찔러도 반응이 없이 속내를 내보이지 않는 연제에 비하면 진 대인은 말이 통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늘 직설적이었고 교활하지 않았다. 뒤에서 남모르게 간교를 꾸며대는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티는 내지 않고 있지만, 어째서 갑자기 첩첩산중에서 내려왔는지 궁금해 하는 속이 뻔히 보이는 구만.”
“그렇다면 어서 말씀을 해주시지요.”
“자네가 재미있는 일을 꾸미고 있는 것 같아 한달음에 달려왔다네.”
“그러셨습니까.”
“늙은이가 이것저것 남의 일에 참견하길 좋아하는 법은 어쩔 수가 없지, 하하!”
두 사람의 가운데에는 먹음직스런 산해진미가 가득했다. 잠시 대화가 멎고, 가볍게 술잔을 기울인 두 사람이 계속 말을 이어간다. 진 대인은 거두절미하고 제 속에 있는 질문부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공녀로 데려온 그 아일, 황후 자리에 앉힐 셈인가?”
“그것을 어찌 제게 물으십니까, 대인. 그 답이라면 폐하께 여쭙는 것이 더 빠를 텐데요.”
“이 쯤이면 자네가 폐하의 맘을 쥐락펴락하고 있을 줄 알았더니, 아닌 모양이로군.”
“저를 과대평가 하셨습니다.”
“노력을 하시게. 난 그저 이 일의 마무리가 어찌 될지 구경삼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겠네.”
“듣던 중 고마운 말씀입니다.”
“사람 참. 뜬금없이 뭐가 고맙단 말인가.”
“그 말씀은, 제 편에 서 주시겠다는 뜻이 아니었는지요.”
“자네 이제 독심술(讀心術)을 부리는 구만! 하하하!”
뜻하지 않은 호기일까. 물론 제 편에 서 준다는 것이 온전한 말뜻만은 아니라는 것을 고 환관은 잘 알고 있었다. 눈엣가시 같은 연제를 처단하는 일이라는 점에 한하여 제게 이리 호의적으로 구는 것이라는 것을. 어찌됐든 진 대인의 존재만으로도 커다란 아군을 얻은 것임에는 틀림이 없었기에 고 환관은 잔을 높이 들어 올렸다.
나이 지긋한 두 사내가 저들만의 화제로 얼큰하게 술이 오르는 동안 시간은 화살촉이 내달리듯 빠르게 지나갔고, 진 대인이 자신의 저택으로 돌아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을 땐 이미 깊은 밤중이었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진 대인의 마차로 향하던 두 사람은 그 시각까지 늦도록 별채에서 검을 단련하고 있던 우겸과 마주치게 되었고, 고 환관은 유학중인 먼 친지의 조카쯤 되는 것으로 우겸을 소개시켰다.
“이우겸이라 합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대인.”
진 대인은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마치 손자라도 보듯 우겸을 가만히 훑어보았다. 이목구비와 딱 벌어진 어깨, 날랜 손 모양 등을 유심히 살피더니 의미심장하게 웃는다.
“젊은이, 보통 내기가 아니겠구만.”
그리고는 어리둥절해 있는 우겸의 상완을 툭툭 두드려주고 시원스레 웃으며 ‘또 보세!’라는 말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의미는 저도 모르겠다는 듯, 우겸과 눈을 마주친 고 환관이 어깨를 으쓱해보이고는 진 대인의 뒤를 따른다.
...
그 사이 황성에서는 온 대도가 발칵 뒤집어질 만한 커다란 소식 하나가 이미 많은 이들을 경악케 만들어 놓고 있었다.
“정말? ‘그 아이’가 폐하의 새로운 후궁이란 말이야?!”
“그렇다나봐..!”
“세상에 어쩜...!”
동화 속의 여주인공이 된 한 여인은 앞으로 새로운 권력의 축이 될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웃고 있었고, 혹여 그 자리가 자신의 것이 아닐까 꿈꾸어 오던 많은 여인들은 고배의 지독한 맛에 하나같이 한숨들을 내려놓고 있었다.
첫댓글 음냐;; 황제님은 은이가 말하려는걸 알고 말하지 말라는 것인지;; 진대인이란 새로운 인물이 등장했네요 ㅎㅎ 보는 입장에서는 능구렁이의 등장이 재미를 한층 높여주죠 ㅋㅋ 담편 기대할께요~ㅎㅎ
헤르티아 님★ 아, 그럼 능구렁이 캐릭터 한 둘쯤 더 늘려야겠네요ㅎㅎ 진 대인은 또 어떤 인물일지, 다음화도 지켜봐주세요. 꼬릿말 감사해요^^
그 아이가 분명 은이겠지요? 헤헤.. 진대인이라는 새로운 인물의 등장 ! 앞으로 더 흥미진진해지겠군요
후안 님★ 은의 생활이 앞으로는 좀 편해지려나요, 다음화도 꼭 확인해주세요. 꼬릿말 감사합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별이 님★ 지금도 몇 있지만, 진 대인 역시 속을 잘 드러내지 않는 인물 중에 한 사람이 될 예졍이예요. 계속 지켜봐주세요. 꼬릿말 감사합니다^^
설마 당연히 은이라고 생각하지만 반전에반전을 거듭해서 은이가 아니면..?ㅋㅋ 설마 아니겠죠??? 진대인이란 사람 성격은 좋아보이네요 ㅋㅋ
까불지마ㅋ 님★ 당연히 은이어야겠죠ㅎㅎ 반전이 있을런지, 다음화에서 확인해주세요. 꼬릿말 감사합니다^^
제생각에는 그 여인은 은이가 아니라....왠지 소란이 같은 느낌? 이힛ㅜ
햇살따뜻한마루 님★ 반전이군요! 그 답은 다음화가 되겠군요, 꼬릿말 감사합니다.
진대인의 등장!!! 진대인이 소설에 어떤 역할을 할지 기대하겠습니다ㅎㅎㅎ
유리별미곰 님★ 아마도 다분히 무거운 역할이 될 수 있을거예요. 황제와 연제, 그리고 진 대인. 앞으로의 상황도 지켜봐주세요. 꼬릿말 감사합니다^^
흠.. 역시 점점 흥미가더해지는군용 요새또많이추워요 몸조심하세요!! 은이가 황후가 대는 그날까지 쭉 함께하겟습니다!!ㅋㅋㅋ
ㄴㅏ는찡ㅋㅋ 님★ 은이가 황후가 되고 나서두요!!ㅎㅎ 전 몹시 추위를 타서 늘 유자차를 옆에 끼고 산답니다, 찡이님도 몸조심하시는거 잊지 마세요, 꼬릿말 감사해요^^
이거 픽션인가요?
dkzkdkzpal 님★ 픽션과 팩션은 좀 차이가 있죠^^ 이 글은 존재했던 사실에 창작한 허구를 보탠거니까 팩션(fact+fiction)에 더 가깝습니다. 꼬릿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