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쟁(擊錚)
조선 시대에, 원통한 일을 당한 사람이 임금이 거둥하는 길에서 징이나 꽹과리를 쳐서 억울한 사연을 임금에게 호소하는 일.
내용
격쟁은 상언(上言)과 함께 소원(訴冤) 제도의 하나로써 신문고(申聞鼓)가 폐지된 후 그 역할을 대신하였다. 자손이 조상을 위해, 처가 남편을 위해, 동생이 형을 위해, 종이 주인을 위해 격쟁을 하되, 형(刑)이 자기의 신상에 미칠 경우, 부자간 또는 형제간의 분간(分揀), 적처와 첩 간의 분간, 양인과 천인 간의 분간 등 네 가지 일에 한하여 격쟁할 수 있도록 제한이 있었으나 이 네 가지 경우 외에도 민간의 폐단에 관한 일이면 격쟁할 수 있었다. 격쟁은 임금의 어가 앞에서 억울함을 호소하여 직접 임금의 귀에 들어가기 때문에 해결이 신속하였고 더구나 글 작성이 필요 없었기 때문에 글을 모르는 자들이나 나이 제한, 신분에 관계없이 각계각층에서 이용하였다.
후기에 갈수록 격쟁은 정식적인 소송 절차를 대신하게 되었는데 숙종 14년, 소송 판결 횟수 규정인 삼도득신(三度得伸)에 상언, 격쟁에 대한 왕의 결정을 포함시킴으로써 상언, 격쟁은 소송의 한 방편으로서 기능하게 되었다. 노주(奴主) 소송에서 패소한 노비가 왕에게 격쟁하거나 토지나 묘지 등의 소송에서 패소한 자들이 격쟁을 통해 재심을 요구하였고 형을 감면받기도 했다. 격쟁, 상언이 일반화 되자 이를 업으로 삼고 뒤에서 조정하며 이익을 좇는 사람들도 생겨나게 되었는데 이들을 국가에서는 ‘경거사리지도(京居射利之徒)’라고 파악하였다,
격쟁은 임금의 판결을 바로 기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소송의 지연, 판결의 불공정함 등을 해결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용되면서 많은 문제를 낳게 되었다. 따라서 산송(山訟)에서 패소한 후 격쟁하는 자는 ‘사불이실률(詐不以實律)’로 논하도록 하는 등 사건사(四件事) 이외의 일로 하는 격쟁은 금지하는 등, 격쟁의 남발에 대한 조처가 없지 않았으나 격쟁을 통해 은전(恩典)을 베품으로써 격쟁은 국왕의 관형(寬刑)주의, 흠휼(欽恤)주의를 표방하는 예치적 통치의 한 방편으로 이용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