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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벨미스라임
창 50:1-14
1 요셉이 그의 아버지 얼굴에 구푸려 울며 입맞추고
2 그 수종 드는 의원에게 명하여 아버지의 몸을 향으로 처리하게 하매 의원이 이스라엘에게 그대로 하되
3 사십 일이 걸렸으니 향으로 처리하는 데는 이 날수가 걸림이며 애굽 사람들은 칠십 일 동안 그를 위하여 곡하였더라
4 곡하는 기한이 지나매 요셉이 바로의 궁에 말하여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은혜를 입었으면 원하건대 바로의 귀에 아뢰기를
5 우리 아버지가 나로 맹세하게 하여 이르되 내가 죽거든 가나안 땅에 내가 파 놓은 묘실에 나를 장사하라 하였나니 나로 올라가서 아버지를 장사하게 하소서 내가 다시 오리이다 하라 하였더니
6 바로가 이르되 그가 네게 시킨 맹세대로 올라가서 네 아버지를 장사하라
7 요셉이 자기 아버지를 장사하러 올라가니 바로의 모든 신하와 바로 궁의 원로들과 애굽 땅의 모든 원로와
8 요셉의 온 집과 그의 형제들과 그의 아버지의 집이 그와 함께 올라가고 그들의 어린 아이들과 양 떼와 소 떼만 고센 땅에 남겼으며
9 병거와 기병이 요셉을 따라 올라가니 그 떼가 심히 컸더라
10 그들이 요단 강 건너편 아닷 타작 마당에 이르러 거기서 크게 울고 애통하며 요셉이 아버지를 위하여 칠 일 동안 애곡하였더니
11 그 땅 거민 가나안 백성들이 아닷 마당의 애통을 보고 이르되 이는 애굽 사람의 큰 애통이라 하였으므로 그 땅 이름을 아벨미스라임이라 하였으니 곧 요단 강 건너편이더라
12 야곱의 아들들이 아버지가 그들에게 명령한 대로 그를 위해 따라 행하여
13 그를 가나안 땅으로 메어다가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헷 족속 에브론에게 밭과 함께 사서 매장지를 삼은 곳이더라
14 요셉이 아버지를 장사한 후에 자기 형제와 호상꾼과 함께 애굽으로 돌아왔더라
창 50:1-14 / [야곱을 장사하다] 요셉은 몸을 구부려 아버지의 얼굴에 입을 맞추며 통곡하였다. 2) 요셉은 자신의 주치의에게 명령하여 아버지의 시신에 향료와 향유를 넣어 미이라를 만들게 하였다. 요셉의 주치의들은 요셉의 명령대로 야곱의 시신에 향료와 향유를 넣어 미이라로 만들었다. 3) 그렇게 하는 데만도 무려 40일이나 걸렸다. 애굽 사람들은 70일 동안 야곱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4) 애도하는 기간이 지나자 요셉은 궁중대신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5) `우리 부친께서 운명을 달리하시면서 가나안 땅에 묻어 달라고 내게 부탁하셨소. 꼭 그렇게 하겠다고 내게 맹세토록 하셨다오. 가나안 땅에는 우리 조상들이 묻혀있는 묘실이 있는데 선친께서는 그곳에 묻히기를 바라셨소. 그러니 바로께 나아가 내가 가나안 땅으로 올라가 우리 아버님을 꼭 그곳에 모시고 오게 해말라고 말씀 좀 드려 주시오. 아버님을 그곳에 모시고나서 다시 돌아오리다.' 6) 그러자 바로가 `그래, 그대 부친이 그대에게 맹세시킨 대로 가나안 땅에 올라가서 부친을 잘 모시고 오도록 하여라'하고 분부하였다. 7) 요셉은 아버지의 시신을 가나안 땅에 모시려고 길을 떠났다. 바로를 섬기는 고위 관리들과 왕실 관료들 또 애굽 각지의 지도급 인사들이 요셉을 따라 가나안 땅으로 함께 올라갔다. 8) 물론 요셉의 집 식구들과 형제들, 그리고 그의 온 집안 식구들도 함께 가나안 땅으로 올라갔다. 다만 집안의 어린아이들과 양떼, 소떼 등 가축만이 고센 땅에 머물러 있었다. 9) 상여 앞뒤에는 병거를 타고 가는 사람들 또 말을 타고 따라가는 조문객들이 엄청나게 많아서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10) 이들은 요단강 동쪽에 있는 아닷 타작마당에 이르러 한동안 큰소리로 통곡하였다. 거기서 요셉은 이레 동안 장례식을 치렀다. 11) 가나안 사람들은 이들이 아닷에서 오랫동안 통곡하는 것을 보고는 `애굽 사람들이 엄청난 장례식을 치르고 있구먼' 하였다. 그래서 그곳을 `애굽사람의 통곡'이라는 뜻으로 아벨미스라임이라 불렀다. 그곳은 요단강 동쪽에 있었다. 12) 야곱의 아들들은 아버지가 당부한 대로 하였다. 13) 그들은 아버지의 시신을 모시고 가나안 땅으로 가서 마므레 동쪽에 있는 막벨라굴에 안장하였다. 막벨라굴은 아브라함이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가족 묘실로 쓰려고 산 밭 가운데에 있었다. 14) 요셉은 아버지를 그곳에 모시고 나서 형제들과 같이 간 조문객들과 함께 애굽으로 돌아왔다.
요셉은 야곱의 시신을 처리하게 하고 애굽 사람들은 70일을 곡합니다. 곡하는 기간이 끝나자 요셉은 아버지를 장사하기 위해 가나안으로 올라갑니다.
요셉의 애도(1-3) 야곱의 죽음은 족장 이야기의 마무리이자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본 단락은 야곱의 아들들 중에서도 특별히 요셉이 슬퍼하는 장면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입을 맞추는 것은 신의 보호와 축복을 비는 행위인데 죽은 자에게 입 맞추는 장면은 이곳에 유일하게 나타납니다. 요셉은 아버지의 시신을 애굽의 관습에 따라 미라로 만들도록 명령합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장례를 애굽의 왕족과 같은 절차로 진행합니다. 애굽에서는 미라 제작에 40일이 걸렸으며, 왕족의 경우 70일 동안 애도하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이는 요셉이 애굽에서 가진 지위를 보여주며, 동시에 야곱을 존귀하게 대우하려는 그의 태도를 드러냅니다. 한편 야곱이 가나안 땅에 묻히기를 원했고, 요셉이 이를 성실히 수행한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고 신앙의 유산을 지키려는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약속의 땅으로(4-14) 요셉은 상중이었기에 바로에게 직접 나아가지 않고 간접적으로 아버지 야곱의 유언을 전하며, 가나안에서 장사할 수 있도록 허락을 구합니다. 그는 “내가 다시 오리이다”라는 말로 바로를 안심시킵니다. 이는 출애굽 당시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을 쉽게 보내지 않으려 했던 장면과 연결됩니다. 야곱의 장례 행렬은 단순한 장례식을 넘어, 이스라엘 백성이 미래에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야 할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바로의 신하들과 병거, 기병이 동행한 것은 출애굽 사건에서 애굽 군대가 이스라엘을 추적했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행렬은 요단 건너편 아닷 타작마당에서 7일간 애곡하였고, 이를 본 가나안 사람들은 그곳을 아벨미스라임이라 불렀습니다(10-11). 야곱의 시신은 막벨라 굴에 장사되었습니다. 이곳은 아브라함의 매장지였습니다. 장례 행렬은 최단거리가 아닌 요단을 거쳐 가나안으로 들어갔는데, 이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을 건너 약속의 땅으로 들어간 여정과 유사합니다. 이는 야곱의 장례가 출애굽의 예표임을 시사합니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요셉은 형제들과 함께 애굽으로 돌아갔으며, 이제 야곱이 없는 상황에서 형제들 사이의 관계가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질문이 남겨집니다.
적용: 하나님의 언약과 신앙의 유산을 기억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충실히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한동안 사용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쓸 일이 없을 것 같은 물건들을 한데 모으자. 당신에게 별 효용이 없는 이 물건들을 자선단체에 기증하라. 그것들이 다른 사람들의 인생에 가치를 더해줄 수도 있다. 풍요가 막힘없이 흐르도록 통로를 열어놓기 위해, 당신에게 남아도는 것들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라. 데이비드 사이먼 <나를 위한 행복한 구속, 다짐> 중에서
< 설 교 >
야곱의 장례식 - 환경을 극복하라
이상호목사 / 창세기 50:1-14
감사의 계절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감사할 조건들이 뭐가 있는지 주위 환경을 돌아보니까 환경을 보고 감사를 만약에 해야 된다고 하면 감사할 조건들이 많지 않습니다. 환경이 호전되기를 기다렸다가 환경이 협조하면 감사하고 환경이 협조하지 않으면 감사하지 않는 그런 식으로 우리가 산다고 하면 언제 환경이 호전되겠어요.
먼저 환경에 대한 우리 태도를 바꾸는 것이 더 빠르고 그게 아마 더 성경적인 방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환경은 우리의 컨트롤 밖에 있죠. 그래서 환경이 호전되기를 기다리고 환경이 나에게 맞춰주기를 기다렸다가 감사하겠다 하면 평생에 감사할 일이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씀하신 그 말씀 속에는 환경이 호전되기를 기다리기 보다는 범사에 환경을 초월해서 감사하라는 말씀입니다.
애굽에서 살고 있는 요셉의 가족들에게 지금 어려운 일이 생겼습니다. 요셉의 아버지 야곱이 드디어 험악한 인생을 마치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때 요셉이 그 어려운 환경에 반응하는 것을 보면 요셉은 환경에 의해 좌우되는 사람이 아니었고 오히려 환경을 자기의 가진 믿음을 가지고 그 환경속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그것을 찾았고 실천했던 사람으로 보여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어려운 환경 지금 남의 나라 와가지고 자기 형제들을 먹여 살리면서 또 애굽의 총리로 이렇게 지금 살고 있는 그런 상황속에서 상을 당해서 그 사랑하는 아버지를 잃고 장례식을 치루는 모습에서 요셉의 믿음이 어떠한가를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요셉은 환경을 존중했습니다.
부친이 돌아가셨을 때 요셉이 장례식을 어떻게 했냐 하면 애굽식으로 장례식을 했습니다. 애굽장을 한 거예요. 애굽장은 애굽의 고위 관리들이 죽으면 몸에다가 향료를 넣어가지고 40일 동안 몸을 보존하는 그런 애굽장, 쉽게 말하면 미라를 만드는거죠. 2절에 보면 의사에게 명해서 향 재료로 아비의 몸에 넣게 하고 40일이 걸렸습니다. 히브리인 요셉이 애굽식으로 애굽장을 했어요. 히브리식 장례식을 할 수도 있는데 고집하지 않고 애굽장으로 했습니다. 환경을 존중하는 모습입니다. 환경과 싸우지 않고 환경을 존중합니다. 이점이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환경이 좋다고 해서 존중하는 것이 아니고 그 환경 그대로를 존중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 환경도 어떤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는 것으로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그랬죠. 그러면 그 세상은 모든 것을 포함하는 거예요. 내 환경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내 환경을 존중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보는 그 눈을 존중한다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환경조차도 하나님의 사랑의 한 부분에 속하기 때문에 아무리 내 개인적으로는 힘들고 어려워도 내 환경을 존중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이 세상도 환경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요셉이 세속화됐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히브리인이면 히브리인답게 자기가 믿는 대로 장례식을 해야지 왜 애굽인들이 하는 애굽식의 장례를 했을까요? 요셉이 믿음의 사람인데 말입니다. 요셉이 세상과 타협했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이 세상과 타협했다는 말씀을 여기에 전혀 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요셉이 자기의 주어진 환경을 존중하는 그 모습을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컨트롤할 수 없는 환경이 많이 만납니다. 내 힘으로 어떻게 바꿔볼 수 없는 환경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여러분 이런 생각해보세요. 내 힘으로 컨트롤 할 수 없는 환경이라면 환경이 나보다 힘이 센거죠. 내 힘으로 바꿀 수 없는 환경이니까 그렇다면 나보다 힘이 세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대부분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이 힘이 셉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보다 힘이 세다면 우리는 그 환경을 존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힘이 센 환경하고 싸우거나 짜증을 내고 화를 내고 또 그 환경을 거부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자녀로서 믿는 사람으로서 바람직한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는 가정이나 교회나 여러분들이 일하고 있는 직장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속에서 살아갑니다. 주어진 남편, 주어진 부모, 주어진 아내, 주어진 직장, 주어진 목사 다 주어졌잖아요. 여러분 힘으로 안되잖아요. 내 힘으로 할 수 있는게 별로 없어요. 다 주어진 환경이예요. 그렇다면 그 환경을 존중해야 되요. 그냥 그 환경에 순응하는 정도를 넘어서 존중해야 합니다. 어쩔 수 없어 그냥 거기에 맞게 따라가야지 이런 자세를 말하는게 아니고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그러면 그 사랑은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그러면 그 세상속에서 주어진 모든 환경도 역시 하나님의 사랑 속에 포함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존중해야 합니다. 오히려 환경을 존중하는 사람이 환경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습니다. 환경과 싸우는 사람은 환경에 매이게 됩니다. 우리가 경험으로 봐도 그렇지 않습니까? 환경에 맞서서 짜증을 내고 신경질을 내고 분을 내고 그 환경을 거부하는 사람은 오히려 그 환경에 노예가 되지만 그 환경을 존중하는 사람은 신기하게도 그 환경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이 말씀을 나의 어떤 이 마음속에서 내가 세상을 대하는 태도로 삼는다면 우리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환경을 존중해야 됩니다. 구지 여기서 억지를 부려서 히브리식 대로 장례를 치룰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문제가 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애굽식대로 했습니다.
두번째로 환경에 요청했습니다(4절).
무슨 말입니까? 요셉은 애굽장을 끝내고 기한이 차자마자 아버지의 시신을 가나안 땅으로 이장을 시켰습니다. 여기 4절에 보니까 곡하는 기한, 즉 애굽인들이 하는 장례식대로 기한을 딱 채우고 난 다음에 요셉이 바로에게 요청을 합니다. 아버지의 원대로 우리 히브리인 식대로 우리가 믿는 여호와 하나님식대로 이제 우리 아버지 시신을 가나안땅에 묻게 해 달라고 공손하게 요청을 합니다. 그때 바로는 그 요청을 들어줍니다. 그러니까 환경을 존중하는 사람은 그 환경에 떳떳하게 자기가 원하는 것을 요청할 수 있습니다. 애굽인들에게 예의를 표시하고 자기들이 애굽에 살고 있다는 것을 존중하고 애굽인들의 방식대로 다 한 다음에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히브리식대로 자기가 믿는대로 다시 이장시켜서 아버지의 원대로 가나안 땅으로 모셨습니다. 이렇게 환경에 요청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환경을 존중한다고 해서 환경과 타협하면 안됩니다. 우리의 믿는 것은 분명하게 지켜야 되고 또 우리가 믿는 바에 대해서 분명하게 의사를 표시하고, 내가 뭘 믿는지 또 내가 어떤 원리와 원칙 속에서 사는지 분명하게 의사 표시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필요 이상으로 환경에 너무 많은 시간 얽매일 필요는 없습니다. 환경을 존중하되 반드시 환경에 내가 가지고 있는 믿음, 내가 가지고 있는 소원을 요구할 수 있는 믿음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다니엘과 그 세 친구는 바벨론의 문화를 존중했지만 히브리인으로서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분명하게 표시했습니다. 물론 그래서 핍박을 받았죠. 우리가 환경을 존중하되 그 환경이 우리를 핍박할 수 있습니다. 그건 할 수 없습니다. 믿는 사람으로 핍박 받아야 할 때는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환경에 요청했을 때 바로가 그 요청을 들어줬어요. 환경이 우리에게 협조하는지 안 하는지 그건 알 수 없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의 경우에는 협조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핍박 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요셉의 경우에는 협조를 했습니다. 알 수 없어요. 어떻게 반응이 올지 모르지만 우리의 믿는 바를 분명하게 표시하고 우리의 믿음을 고백하고 또 우리가 어떤 원칙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의사 표시 할 책임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부부사이에서도 남편들은 아내에게 분명하게 자기가 원하는 것이 뭔지 공손하게 그것을 말할 책임이 있어요. 또 아내들도 남편에게 그것을 요청할 책임이 있습니다. 문제가 작았을 때 서로가 기대하는 것이 뭔지 상대방에게 요청할 책임이 있습니다. 문제가 나중에 커지면 참고참고 살다가 참는게 덕목이지만 나중에 다시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 까지 가서 그때 문제가 커지면 더 심각해집니다. 그래서 작은 일에서부터 공손하게 자기 의사 표시를 하는게 필요합니다. 우리가 받은 교육의 환경이 그렇지 못했습니다. 지금 요즘의 신세대들은 자기의 의사표시를 잘해요. 요즘 TV에서 봐도 말도 잘하는데 우리 때만 해도 40대, 50대 교육환경이 의사표시를 하면서 교육받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참는게 덕이였어요. 그러나 공손하게 자기의 원하는 것을 요청하는 그런 마음, 자세 그것이 우리가 환경을 이기는데 반드시 필요합니다.
요셉이 바로에게 공손하게 요청했어요. 공손하게 자기의 믿음과 아버지의 믿음 조상의 믿음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해 공손하게 얘기했을 때 바로가 그것을 들어줬습니다. 환경에 분명하게 요청하시기 바랍니다. 작은 일에서부터 서로에게 요청하고 예든 아니든 그건 내 소관이 아닙낟. 환경은 내 컨트롤 밖이니까 요청하는 거예요. 공손하게 환경에 요청했을 때 존중을 받았습니다.
세번째로 환경을 사용했습니다(7절).
말하자면 애굽의 모든 것을 동원해서 히브리식 장례를 치뤘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동원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물론 이세상의 모든 것이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죄는 나빠요. 그리고 죄 짓는 것 나쁜 것이죠. 그렇지만 하나님이 지으신 것은 좋은게 많아요.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세상의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보기 때문에 세상은 벌써 40년 앞서가는데 우리 믿는 사람들은 그 자리에 그냥 있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전도하고 선교합니까? 세상은 앞서가는데 그것은 마귀 것이고 세속적인 것이니까 못쓴다고 생각하면 현대인들에게 전도하기 어렵습니다.
아무래도 요셉은 어릴 때 애굽에서 자란 1.5세내지 2세입니다. 그러니까 문화관이 다릅니다. 신앙은 보수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지으신 이 모든 것들을 동원해서 그 다음에 히브리식으로 창조시킨 거예요. 여기 보세요. 애굽 사람들을 다 동원해서 히브리 장례를 치룹니다. 7절에 보니까 요셉이 자기 아비를 장사하러 올라가니 바로의 모든 신하와 바로궁의 장로들과 애굽땅의 모든 장로와 요셉의 온 집과 형제들과 아비의 집이 그와 함께 올라갔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바로만 빼고 바로 밑의 모든 신하와 군사를 모두 동원해서 가나안땅에 올라가서 멋있게 히브리 장례식을 한 것입니다. 야곱이 족장들 중에서 제일 성대한 장례식을 치뤘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보다 더 크게 장례식을 치뤗습니다.
우리는 환경을 사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셨는데 그것을 가지고 우리는 전도해야 되고 선교해야 되고 우리는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바꾸는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오겠지만 완전한 하나님 나라가 올 때 까지는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하는 그런 사역을 감당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세상을 사용해야 됩니다. 환경에 존중했을 뿐만 아니라 더 한걸음 나가서 환경을 사용했어요. 어떤 환경에도 아무리 나쁜 환경에도 100% 다 쓰레기는 아닙니다. 보기 나름이죠. 교회도 그렇고 가정도 그렇고 여러분들 일하는 직장도 그렇고 그 안에는 반드시 쓸모 있는 좋은 것이 있습니다. 그걸 찾아내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쓰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자꾸 피해의식을 갖게 됩니다. 자기를 피해자로 보고 또 모든 환경을 가해자로 보게 됩니다. 여기에 큰 문제가 있습니다.
여러분, 상처와 함께 사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통해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피해자처럼 행동하거나 필요 이상의 기도와 생각을 하면서 낭비하지 마세요. 피해를 입었다는 감정은 병을 덧나게 할 뿐입니다. 기도가 한풀이 기도가 되고 일종의 그 기도를 통해서 카타르시스를 얻기도 해야 합니다. 문제는 기도할 때 보따리 다 풀었으면 갈 때 다시 보따리 싸서 짊어지고 나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상처를 통해서 더 성숙하고 그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계속 가지고 있는 것은 자기를 피해자로 보고 모든 세상을 가해자로 보고 그래서 부모 때문에, 교육 시스템 때문에, 환경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됐다고 합니다. 평생 이렇게 갈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애굽의 모든 좋은 것들을 가지고 히브리식 장례를 치뤘습니다. 보수적인 사람은 히브리식 장례는 히브리 것만 가지고 해야 된다고 말하죠. 저는 신앙적인 보수와 문화적인 보수는 분명히 다르다고 구별을 해야 된다고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그렇게 극단적인 상황에 빠지지는 않지만 우리가 그런 마음에 빠질 때가 있어요. 우리가 무인도에 떨어져서 희망이 없고 절망적일 때 그럴 때 일수록 뭔가를 찾을 수 있어야 됩니다. 선한 것을 찾아야 됩니다.
바로 요셉은 애굽의 모든 것들을 동원해서 히브리 장례식을 치뤘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들을 가지고 환경을 극복하고 환경에 감사하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네번째로 환경을 책임졌습니다(14절).
요셉은 가나안 땅에 올라가서 히브리식으로 장례를 하고 그 다음에 내려올 때 형들을 다 데리고 내려왔습니다. 저는 여기서 요셉이 자기 환경에 책임지는 모습을 봅니다. 형들이 어떤 사람들이예요. 형들은 배다른 형제예요. 엄마가 다르잖아요. 그리고 자기를 죽이려고 했어요. 자기를 미워하고 시기하고 아버지 사랑 받는 것이 꼴보기 싫어서 자기를 죽이려고 했고 결국은 팔아 넘겼습니다. 자기에게 못된 짓은 다 했어요. 요셉이 인간적으로 상처를 얼마나 많이 입고 자랐겠어요. 요셉이 받은 상처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 성경에 자세히 안나와서 그렇지 그 어린나이에 형들에게 죽임을 당할 뻔했고 팔려서 노예 생활을 했고 감옥에 들어가서 배신을 당했고 요셉의 환경에서 탓하기 시작한다면 저와 여러분들이 지금 놓여있는 이런 환경하고는 급이 다른 환경입니다. 요셉이 형들을 책임져야 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는 아버지 책임 때문에 형들을 돌봤지만 이제 아버지도 안 계시니까 사실 가나안 땅으로 올라가서 형들을 거기에 놔두고 와도 무방한 그런 상황입니다. 거기에서 관계를 정리해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그 형들을 끝까지 데리고 왔어요. 나중에 보면 요셉이 내가 당신들과 자식들을 다 책임진다고 했습니다. 19절에 보면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헤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들을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환경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환경을 거듭나게 하려는 그런 복음적인 마인드를 우리가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환경을 책임지는 그런 단계에까지 우리가 가야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끝까지 최선을 다해서 내가 책임지고자 하는 그런 마음가짐을 가진 사람은 절대로 환경을 탓하고 비관하고 그 환경에게 잘못을 돌리지 않습니다. 남편에게 잘못된 탓을 돌리지 않고 아내에게 잘못 돌리지 않고 교육 시스템에 잘못 돌리지 않고 그 모든 환경속에서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그 환경을 거듭나게 할 수 있을까 이걸 가지고 고민하고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힐 때도 저들에게 책임을 돌리지 않고 다 떠 맡으셨습니다. 이처럼 환경을 책임지는 단계까지 가시기 바랍니다.
환경을 책임져야 합니다. 정말 내가 성숙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요셉처럼 환경을 책임지십시오. 요셉이 형들에게 하고 싶은 얘기를 다 풀어놓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을 겁니다. 그러나 아무 말도 안합니다. 당신들이 나를 헤하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다는 딱 한마디만 합니다. 환경을 책임지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범사에 감사하는 신앙입니다.
여러분 환경은 절대 우리에게 호의적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앞으로도 지금보다 환경이 더 좋아지리라고 기대하지 마세요. 어차피 이 땅은 아담과 하와의 원죄로 인해서 저주 받았고 그 저주받은 땅은 가시 덩굴과 엉겅퀴를 내서 우리를 피곤하게 만들고 우리를 어렵게 만들고 우리 이마에 땀을 흘려야 우리가 먹고 살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창세기는 말하고 있습니다. 어차피 환경이 호전되기를 기다리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어떻게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까? 열악한 환경에 내가 믿음으로 반응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로 알고 거기서 하나님의 일을 찾는 복음의 기회로 삼는 여러분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받을 만한 효도
창 50장 1~9절 / 박한응목사
할렐루야!!
오늘 저녁에도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와, 사랑과, 축복이, 이 시간 예배드리는 성도 여러분들에게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오늘은 어버이 주일입니다. 그래서 낮 시간에는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며, 축복을 받는 근본이 된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이 시간에는 부모님께 효도를 잘하여 비록 열한 번째 아들로 태어났지만 장자의 명분과 갑절의 축복을 받은 요셉을 통하여 요셉이 어떤 축복을 어떻게 받았는가를 생각하면서 함께 은혜의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로부터 효도는 백행의 근본(百行之根本)이라고 하였습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효도를 인륜지 근본(人倫之根本)으로 여겨 왔습니다. 더욱이 성경에서는 일찍이 하나님이 계명을 통하여 말씀하시기를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는 네가 땅에서 잘 되고 장수하리라” 고 말씀 하셨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는 계명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는 계명보다 앞서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어떤 종교나 사회의 윤리보다도 효도를 강조하는 효도의 종교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영국의 극작가인 제롬(Jerome)은 말하기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는 계명은 대인관계에 있어서 가장 초석이 되며 원인이 되는 증표와 같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부모를 잘 공경하는 사람이라면 어떤 경우에라도 절대로 죄를 범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치는 효도의 진리와 다른 이교도들이 가르치는 효도에는 분명한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은
첫째, 부모를 하나님보다 앞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부모를 인간 중에서 최고로 모시는 것은 좋으나 하나님처럼 생각하거나 하나님보다 앞세우면 하나님 앞에 죄가 되고 우상 숭배의 죄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아 계실 때 극진히 공경하고 잘 모시는 것은 좋으나 돌아가신 다음에는 절을 하거나 제사를 지내거나 음식을 차려놓고 복을 달라고 하는 것은 큰 죄악을 범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둘째, 목숨을 버리거나 몸을 팔아서 효도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전래되어 오는 이야기 중에 효녀 심청 이는 공양미 300석에 제 목숨을 팔아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것은 지극한 효성에 대하여 배울 바는 있으나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버리면서 효도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리고 술집이나 사창가에 몸을 팔아 창녀 노릇을 하면서 부모를 공양한다든지 동생들 공부를 시킨다는 것도 올바른 효도가 아닙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 사람의 죄를 무죄로 여기시거나 가볍게 보시지 않으십니다.
셋째, 죄짓는 방법으로 효도를 해서는 안 됩니다.
엡6:1절 말씀에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고 하였습니다. “주안에서 순종하라” 고 하였지 “하나님 명령처럼 무조건 복종하라” 고 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훌륭해도 하나님의 위치에 올라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 주일을 범하면서까지 성묘를 한다든지 부모님의 시체나 무덤 앞에서 절을 하라고 한다든지 우상 앞에 절을 하라고 한다면 거기에 순종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십계명 중에 제1계명과 제2계명을 범하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어떠하였습니까? 오히려 주일날 조상묘 금초 하느라고 주일도 범하지 않았습니까? 회개하여야 합니다.
<예>신라 시대에 전해오는 이야기 중에 효불효교(孝不孝橋)라는 다리(橋)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말은 7남매를 둔 어느 과부가 밤마다 자녀들이 잠이 들면 냇물을 건너 정부를 만나러 가는 것을 큰아들이 눈치를 채고 그 아들들은 밤마다 찬 냇물을 건너가는 어머니가 병이 날까봐 어머니 모르게 냇가로 가서 다리를 놓아주었다고 해서 붙여진 다리 이름이라고 합니다. 언 듯 생각하면 지극한 효성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기독교적인 효도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그러면 기독교적인 효도는 어떤 것입니까? 성경에서 가르치는 효도를 요셉이 어떻게 부모님을 공경하고 효도를 하였는가를 찾아보면서 함께 은혜 받기를 바랍니다.
1. 요셉은 부모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였습니다.
야곱은 열두 명의 아들들 중에 요셉을 가장 기뻐하고 사랑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색동옷을 지어 입혔습니다. 아버지의 이만한 사랑을 받는 다는 것은 그만큼 부모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였다는 증거가 됩니다. 효도는 뭐니 뭐니 해도 부모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해 드려야 합니다. 호의호식 해드리는 것보다 마음을 편하고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어버이 날이라고 해서 자식들이 외식을 시켜 준다고 해서 함께 외식을 하러 갔답니다. 그런데 간 곳이 전혀 부모님을 위한 장소가 아니고 부모님을 공경한다는 명목으로 자신들이 잘 먹기 위해서 간 곳입니다. 그래서 자식들과 손자들이 맛있게 먹는 갈비 한 대 뜯지 못하고 밥만 맨밥 먹듯이 한 그릇 먹고 왔다고 하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예>서울 청와대 근처에 가면 효자동이라는 동네가 있습니다. 그 곳이 효자동이라고 불린 유래가 있습니다. 어느 집에서 시아버지의 실수로 인하여 이불 밑에 갓난아기가 깔려 죽었습니다. 그런 사실을 시아버지가 아시면 얼마나 마음 아파하실 까 해서 아이 어미가 얼른 죽은 아기를 업고 남편한테로 달려갔습니다. 남편에게 자초지종 이야기를 하니까 남편이 ‘할아버지의 마음을 상하게 한 불효자식’ 이라고 하며 죽은 아이의 뺨을 한 대 때리니까 죽었던 아이가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이 소문이 퍼져서 그 동네를 효자동이라고 불려 왔다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부모님의 마음을 섭섭하게 하거나 아프게 하지는 않습니까? 요셉과 같이 부모님을 기쁘시게 하고 편하게 해 드리기를 부탁합니다.
2. 요셉은 부모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을 하였습니다.
요셉은 부모님께는 사랑을 받았지만 형들에게 미움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형들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라는 아버지의 명령을 받고 형들을 찾아갔습니다. 그런 요셉을 형들은 애굽으로 가는 장사꾼들에게 종으로 팔아버렸습니다.
또 아버지 야곱이 죽은 후에도 아버지가 유언하기를 “내가 죽거든 애굽 땅에 장사 지내지 말고 고향 가나안 땅 막벌라 굴에 장사를 지내 달라” 는 유언대로 애굽 땅에서 머나먼 곳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굴에 유해를 안치하여 장사를 지냈습니다. 이와 같이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요셉은 애굽 제국의 총리가 되어서 기근으로 죽어 가는 백성들과 가족들을 살리는 대 역사를 하였습니다.
엡6:1절 말씀에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고 말씀하였는데 요즘 아이들은 부모의 말에 ‘안돼요, 아무 것도 모르면 가만이나 있어요’ 라고 퉁명스러운 말로 오히려 부모를 나무랍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부모님의 말씀이 죄가 되지 않는다면 무슨 말씀이라도 순종을 하여야 합니다.
부모는 자식들의 모든 실수와 잘못도 덮어주면서 키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님들이 무슨 실수를 하더라도 순종하고 공경하는 것이 자식의 도리가 되는 것입니다.
3. 요셉은 물질로 봉양을 잘하였습니다.
요셉은 총리가 되어서 아버지가 생존해 계시다는 것을 알고 그 아버지를 모셔다가 극진히 봉양을 하였습니다. 또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요셉은 아버지 야곱이 돌아가신 후 70일장을 지냈습니다. 우리가 겪는 것처럼 3일장이나 5일장이 아닙니다. 시신이 부패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의사들이 향 재료를 넣는데 만 40일이 걸렸습니다. 이것 한 가지만 보아도 요셉이 부모를 위해서 물질로 봉양을 잘 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창47:11-12) “요셉이 바로의 명령대로 그의 아버지와 그의 형들에게 거주할 곳을 주되 애굽의 좋은 땅 라암셋을 그들에게 주어 소유로 삼게 하고 또 그의 아버지와 그의 형들과 그의 아버지의 온 집에 그 식구를 따라 먹을 것을 주어 봉양하였더라” 고 한 것을 보면 부모님과 형제들을 위해서 물질로 봉양을 잘 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식들은 부모에게 거리낌 없이 용돈을 달라고 하지만 늙으신 부모님들은 자식들에게 용돈 달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부모님을 위해 용돈 한가지만이라도 넉넉히 드려 물질로 봉양을 하여 부모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바랍니다.
4. 요셉은 부친이 돌아가신 후에도 형제들을 사랑으로 돌보았습니다.
아버지 야곱의 장례식이 끝나자 형들이 전전긍긍합니다. 전에 요셉을 미워하여 장사꾼에게 종으로 팔아버린 요셉이 이와 같이 출세를 하여 이제는 자신들의 목숨이 요셉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형들은 혹시 요셉이 이제라도 복수를 하지 않을까 염려를 하여 떨면서 요셉에게 말하기를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이르기를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라고 말하자 요셉이 그 말을 듣고 울었다고 했습니다.
요셉은 이미 오래 전에 형들의 죄를 용서하고 지금 형제들을 잘 먹이고 잘 입히고 사랑으로 돌보고 있는데 그와 같이 자신을 두려워하는 것을 보고 기가 막혀 울었던 것입니다. 그 형들이 요셉 앞에 엎드려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 라고 할 때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라고 간곡한 말로 형제들을 위로하였습니다.
진정한 효도는 부모님이 낳으신 형제와 자매를 사랑으로 돌보아 주는 것이며, 형제간에 우애하며 지내는 것입니다. 아무리 부모님께 좋은 것을 대접하고 잘 해 드려도 형제간에 불화 불목 하면 효도가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형제간에 화목하고 있습니까? 형제간에 사랑하고 있습니까? 만약에 형제간에 화목하지 못하고 우애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시간 회개하여 주님 말씀 하신대로 먼저 화목한 다음에 하나님께 예배와 제물을 드려야 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마5:23-24)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고 말씀하셨고
(막9:50)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 하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결 론 : 오늘의 말씀을 마칩니다.
효도는 하나님의 명령인 것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세상적인 효도 사상은 단순한 사람의 사상이요 윤리이지만 성경에서 가르치는 효도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부모님이 날 낳으시고 기르셨기에 그 보답으로 하는 효도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부모가 부모로서의 자격이 없어 보여도, 남들만큼 잘 입혀 주지도 못하였을지라도, 또 남들처럼 공부도 잘 시켜 주지도 못하였을지라도, 부모님은 나에게 있어서 하나님께서 세운 권위자로써 믿고 순종하고 공경할 때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아 멘!>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부모에게 말하기를 “나에게 해 준 것이 무엇이 있느냐?” 고 항변을 합니다. 그러면 부모들은 할 말을 잃고 가슴에 한을 품은 채 전전긍긍 하다가 결국 암과 같은 불치의 병을 얻어 죽게 되는 것입니다.
대단하게 큰일만이 효도가 아닙니다. 부모님들은 결코 큰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 내 형편에서, 내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진정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실 된 효도를 하여야 합니다.
오늘「어버이 주일」을 맞이하여 우리 창정교회 성도 여러분들은 진심으로 요셉과 같이 효도하는 성도가 되어서 하나님의 약속하신 축복을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요셉의 부모 공경
창 50장 1~14절, 엡 6:1-3 / 강석찬목사(성산교회)
셀 실바스타의 아름다운 동화 “나무와 소년”이란 글에 있는 내용입니다. 한 그루의 사과나무가 있었습니다. 이 나무에 매일 찾아오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소년은 나무를 매우 좋아 했고 나무도 소년을 매우 사랑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소년이 자라서 돈이 필요한 때가 되었을 때 소년이 나무에게 찾아와서 돈이 필요하다 말하며 의논을 합니다. 그러자 나무는 소년에게 “나의 가지에 열려 있는 사과를 따 팔아서 돈을 만들면 되지”라고 말합니다. 소년은 기쁨으로 사과를 팔아서 돈을 마련하였습니다. 그래서 소년은 기뻤으며 나무도 그 모습을 보고 행복해 하였습니다.
몇 년이 지났습니다. 소년은 거처할 집이 필요하였습니다. 나무에게 와서 근심스레 말했습니다. 그러자 나무는 “나의 몸인 가지를 잘라서 집을 지으면 되지”라고 말합니다. 소년은 나뭇가지를 잘라 거처할 집을 마련했습니다. 그래서 소년은 기뻤으며 너무도 행복해하였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러 소년은 청년이 되고 나무는 이제 더욱 고목이 되었습니다. 청년이 먼 곳을 항해 하고 싶으나 배가 없었습니다. 또 나무에게 와서 조심스럽게 의논하였습니다. 그러자 나무는 말합니다. “내 몸을 잘라서 배를 만들면 되지” 청년은 나무의 뿌리만 남기고 밴 나무로 배를 만들었습니다. 청년은 참으로 기뻤고 나무 역시 행복해하였습니다. 청년은 오랫동안 바다에서 풍랑과 싸우며 항해를 하다가 드디어 노인이 되어 고향으로 되돌아옵니다. 동네 밖 입구에 베어진 그 옛날의 고목 등걸을 봅니다. 그때까지 그대로 나무는 있었습니다. 피곤한 노인은 나무 등걸에 걸터앉아 참으로 오랜만에 기쁨의 쉼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나무는 행복하였습니다. 여기서 나무는 바로 어머니의 마음을 가리킵니다. 모든 것을 주고, 그리고 몸을 잘라주고도 그리하여 결국 뿌리만 남은 고목이 되어도 소년이 기쁘다면, 즉 자식이 기쁘다면 그저 행복해 지는 것이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물론 잘릴 때 그 아픔은 어떠했겠으며, 그 청청하던 가지와 잎 그리고 열매가 없어질 때 얼마나 쓸쓸했겠으며, 앙상한 등걸만으로 남은 때의 부끄러움은 얼마이었겠습니까? 그러나 자식이 기쁘다면 행복해지는 것이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우리들의 영원한 고향이자 안식이며 품입니다. 노인이 되어 죽음이 와도 어머니의 품을 그리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마음은 우리들의 영원한 안식처요, 뿌리입니다.
오늘 어버이 주일을 맞아 두 본문을 중심으로 “요셉의 부모 공경”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며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1. 요셉은 부모에게 기쁨을 드리는 공경을 했습니다.
아버지 야곱은 어려서부터 요셉을 특별히 사랑했습니다. 다른 형제들이 시기할 정도로 아버지의 사랑을 받은 요셉은 그만큼 부모의 마음을 즐겁게 해 드렸고 마음에 들게 행동했기 때문입니다. 흔히 미움도 자기에게서 나오고, 사랑도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말합니다. 미움 받을 행동을 하게 되면 부모의 기쁨이 되기보다 근심이 됩니다. 잠10:1에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를 기쁘게 하거니와 미련한 아들은 어미의 근심이니라.”했고, 잠17:25에 “미련한 아들은 그 아비의 근심이 되고 그 어미의 고통이 되느니라.”했습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부모의 기쁨이 될까요? 자녀들이 바르게 살아가는 것이 부모의 기쁨입니다. 옳게 사는 삶을 말합니다. 사람에게는 사람답게 사는 길이 있습니다. 아무리 세상이 요지경 속이라 할지라도 사람이 걸어가야 할 길이 있습니다. 만약에 자녀들이 방황하면서 사람답게 살지 않으면 이 세상의 어떤 부모가 기뻐하겠습니까? 부모에게 가장 귀한 것은 자녀 그 자체입니다. 그러므로 그 인격이 바르게 성장해 가는 것, 바르게 살아가는 삶, 누가 보아도 칭찬할 만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공부하는 학생이면 학생답게 사는 것이 부모의 기쁨입니다. 결혼하여 한 가정을 이루었으면 서로 사랑하며 행복하게 사는 것이 부모의 기쁨입니다. 신앙의 부모는 무엇보다 자녀들이 신실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을 볼 때 큰 기쁨이 됩니다. 어느 부모는 이단에 빠진 자녀 때문에 마음고생 많이 하고 어떻게 잘 못된 길에서 돌이키게 할까 고민하고 근심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신실한 신앙을 가지고 주님의 사랑으로 교회를 섬기며 성도들과 어려운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며 사는 모습이 부모에 큰 기쁨이 됩니다.
본문의 요셉이 그랬습니다. 그가 비록 팔려가서 종의 몸이 되었을지라도 형들이나 다른 사람을 원망하지 않고 연단의 기회로 삼아 자신의 삶을 바르게 살았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으로 아름답게 가꾸어 갔습니다. 후에 아버지 야곱 앞에 나타났을 때에 훌륭한 모습으로 섰습니다. 야곱은 훌륭한 신앙인의 모습으로 훌륭한 지도자의 모습으로 온 나라를 흉년의 도탄에서 건져낸 대견스런 아들의 모습을 보며 기뻐하셨습니다.
그리고 부모의 기쁨은 자녀들이 건강하게 사는 것입니다. 아무리 바르게 산다고 할지라도 자녀가 병이 들어 연약함에 쌓여 있으면 이는 부모 마음에 고통입니다. 우리 몸이 나이 들면 연약해 지기 마련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몸 관리를 잘 못하여 건강을 해쳤을 때에 이는 부모님께 큰 걱정과 근심을 끼쳐드린 것이요, 분명 불효입니다. 병든 자녀가 많은 용돈과 선물을 드린들 어떤 부모가 기뻐하겠습니까?
또한 형제들과 우애하는 삶이 효도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부모가 다투는 자녀들로 인하여 기뻐하겠습니까? 아무리 재산이 많고 호화로운 삶을 산다고 할지라도 자녀들이 서로 원수처럼 살고 있으면 부모의 마음은 가시방석에 앉은 것과 같을 것입니다. 본문의 요셉은 자신을 장사꾼에게 팔아버린 형님들은 용서하였습니다. 형들의 자녀들까지 물질로 섬겼습니다. 그러한 모습들이 아버지 야곱에게 큰 기쁨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요셉 같은 모습으로 부모의 즐거움과 기쁨이 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 요셉은 늘 부모의 안부를 걱정하고 보살펴 드리는 공경을 했습니다.
요셉이 애급의 총리로 있을 때 형제들이 흉년으로 양식이 떨어지자 양식을 구하러 애급으로 왔습니다. 요셉은 23년 만에 형제들을 만났습니다. 요셉은 한 눈에 형제들을 알아보았지만 첫 번째 만남에는 전혀 내색을 하지 않고 도와주었습니다. 다시 두 번째로 양식을 사러온 형제들에게 요셉은 제일 먼저 아버지의 안부를 물었습니다.(창 43:27) 요셉에게 가장 궁금한 것은 아버지의 생존, 아버지의 안녕이었습니다. 이역만리 타국에 팔려온 신세라 고향소식을 전해들을 수도 없고 고국에 가볼 수도 없었지만 늘 궁금하였습니다. 하루도 잊을 수 없었습니다. 요셉은 마침내 자신이 요셉이라는 것을 형제들에게 말한 뒤에도 제일 먼저 아버지의 안부를 다시 물었습니다. “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대답하지 못하더라.”(창 45:3).
총리 요셉이 부모 형제를 찾았다는 소식을 들은 바로 왕과 신하들은 기뻐했습니다. 바로는 요셉에게 아버지와 가족을 이끌고 오라고 하였고, 열한 형제의 가족들과 아버지를 모셔올 수레를 내주기까지 했습니다.
아버지 야곱은 지금까지 죽은 줄만 알고 있던 요셉이 살아있다는 소식, 게다가 대 애급 나라의 총리가 되었다는 말을 들은 야곱은 어리둥절하여 믿기지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들 요셉이 자기를 태우려고 보낸 수레를 보고서야 기운이 소생하였습니다. 야곱의 권속 70명이 애급에 이르러 애급 왕의 환대를 받고 양을 치기에 좋은 고센에 머물러 요셉의 보살핌 가운데 평안히 살 수 있었습니다.
신약 본문 엡6:2-3에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했습니다. 기독교는 불효를 책망하는 종교요, 효를 강조하는 종교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세상 법의 모법이라 할 수 있는 십계명을 통해 부모 공경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경 곳곳에서 불효를 질타하고 부모 공경을 강조하며 부모를 공경하는 자의 복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모 공경은 예수님의 효성을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고난을 당하시는 그 순간에도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 마리아의 여생을 부탁하시는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나라는 동방예의지국으로 불리며 효를 잘 실천한 민족이었지만 지금 그 말이 무색 할 정도로 부모와 노인이 무시를 당하고 학대를 받기도 하는 도덕과 윤리가 무너져 가는 안타까운 사회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 성도들이 주님을 본받아 부모와 노인 공경에 앞장서야 하겠습니다. 부모 공경의 모습은 시대를 초월하여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나폴레옹이 폴란드를 침략해 들어간 때였습니다. 폴란드 농촌에 있던 한 영주가 침략해 온 나폴레옹 황제에게 좀 잘 보이기 위해서 그를 자기 집의 저녁 만찬에 초대했습니다. 패전국의 영주가 승전국의 황제를 초대한 것입니다. 전쟁터에 나와 있던 나폴레옹과 그 신하들은 이 영주의 초대를 받아 그 집에 갔습니다. 식탁이 마련되었습니다. 그런데 영주는 좌석을 배치할 때 나폴레옹을 제일 상석에 모시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에도 모시지 않았으며 겨우 세 번째 좌석에 나폴레옹 황제를 앉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좌석들에 신하들을 앉게 한 후, 그 다음 좌석에 가족들을 앉게 하였습니다. 나폴레옹은 화가 났지만 체면상 말을 안 하고 있을 때에 옆에 있던 신하가 화를 내며 그 주인에게 항의를 했습니다.
“우리 대제국의 황제를 이렇게 대우할 수 있는가?” 그러자 주인이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자리는 내 아버지와 어머니가 앉으실 자리입니다. 나라에서는 임금인 황제가 최고로 높지만 우리 집안에서는 내 아버지와 어머니가 제일 높습니다.” 이 말을 들은 나폴레옹은 그 영주의 효성에 감탄하고 칭찬해 주었다고 합니다.
우리도 요셉처럼 늘 부모의 안부를 걱정하고 보살피는 성도가 됩시다.
3. 요셉은 부모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공경을 했습니다.
아버지 야곱은 아들 요셉 덕분에 애급에 와서 평안하게 17년을 사시고 그의 나이 147세가 되던 어느 날 임종을 맞으면서 요셉에게 자신이 죽거든 애급에 장사하지 말고 자신을 메어다가 조상의 묘지에 장사해 달라고 부탁을 하였습니다. 교통이 발달 되지 못한 당시 현실적으로 실천하기 힘들고 어려운 일이지만 요셉은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야곱이 자기가 죽은 후 고향땅에 묻히고 싶은 것은 그의 후손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리라는 하나님의 언약(12:1-3, 26:2-3, 28:13)을 보다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서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비록 노년에 출세한 아들 요셉의 부름을 따라 애굽에 내려와 살았지만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이 애급이 아니라 가나안임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요셉은 아버지의 장례를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40일이나 걸려 미라를 만들고 70일 동안 곡했다고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 창50:7-9절에 나타나 있는 야곱의 장례 규모를 살펴보니 장례 의식에는 애급의 중요 인물들이 대거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군대까지 동원된 것을 보면 마치 국장과 같이 치러졌습니다.
효도란 부모의 소원을 이루어드리고, 부모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것이 효도이다. 살아계실 때만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돌아가신 후에도 부모의 뜻을 잘 받들어 드리는 것이 효도입니다.
부모는 지식으로 공경 받는 것이 아닙니다. 가진 재산으로 공경 받는 것도 아닙니다. 이미 줄만큼 다 주신 부모님입니다. 지금까지 보살펴 주시고, 베풀어주신 그 사 랑만으로도 공경 받아야 마땅한 분입니다.
6.25동란 때의 일입니다. 성탄절 전날 저녁에 만삭이 된 가난한 피난민 어머니가 아기를 낳을 방 하나가 없어서 선교사 집으로 가다가 그만 다 가지도 못해서 다리 밑에서 아기를 낳게 되었습니다. 그날은 유난히도 추웠는데, 막 태어난 핏덩어리 갓난아기는 그칠 줄 모르고 울어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어머니에게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가진 것이라고는 달랑 자기가 입고 있는 옷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어머니는 자기가 입고 있던 옷을 하나씩 하나씩 벗어서 막 태어난 핏덩어리 아기를 감싸 안고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그만 얼어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죽은 어머니의 품에 안겨있는 아기는 계속 울고 있었고, 그 때 선교사가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다리 밑에서 들려오는 어린 아기의 울음소리를 들었습니다. 내려가 보니 이제 막 태어난 아기가 어머니의 품에서 울고 있는 데, 어머니는 이미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선교사는 그 아기를 데려와 키우기 시작했고 그 어머니의 묘지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아이가 12살이 되었을 때 아이에게 "네 어머니는 너를 위해 옷으로 감싸주고 자신은 세상을 떠났다"는 지난 이 야기를 처음으로 들려주었습니다. 이 아이는 추운 성탄절 전날 어머니의 산소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는 부들부들 떨면서 어머니의 묘지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리고 난 후 자기가 입고 있던 옷을 하나씩 벗어서 어머니의 무덤 위에 덮어드리 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어머니, 저를 낳으실 때 얼마나 추우셨습니까? 그 추운 다리 밑에서 저를 낳아주시느라고 얼마나 고생하셨습니까? 제가 얼어 죽을까 봐 어머니는 옷을 다 벗어서 저를 감싸주시고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셨다면서요? 어머니, 얼마나 추우셨습니까? 이제 제가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 어머니의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어머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부모님이 다 늙으시고 앙상하게 뼈만 남고 병에 찌든 육신만 가지고 계시더라도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목숨을 다해서 공경해야 하는 분이 부모요, 자식 된 도리인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뒤늦게 후회하지 맙시다. 부모만큼 소중한 분은 세상에 없습니다. 부모 공경에는 하나님의 약속하신 복이 따르게 됩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저는 오늘 두 본문을 중심으로 “요셉의 부모 공경”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요셉은 부모에게 기쁨을 드리는 공경을 했고, ♡.늘 부모의 안부를 걱정하고 보살펴 드리는 공경을 했으며, ♡.부모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공경을 했습니다. 우리도 요셉의 신앙과 부모 공경의 모습을 본받아 살므로 약속하신 복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야곱의 장례
창 50장 1~13절 / 피영민목사
서론
창세기 1장과 50장을 비교해보면 1장은 시작이고, 50장은 마무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은 ‘하늘과 땅의 창조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되고 있고, 창세기 50장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상징하는 가나안 땅으로 야곱이 죽음을 거쳐 들어가는 것’으로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은 ‘창조’를 의미하고, 창세기 50장은 ‘새 창조’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과 50장 사이에는 사람이 태어나서 죽고, 천국에 들어가는 모든 일련의 과정이 구원의 스토리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어떻게 타락하게 되었는지, 인간은 어떻게 구원을 받는지, 믿음은 무엇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과 과정들이 모두 ‘씨앗’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귀는 창세기를 집중적으로 공격합니다. 창세기는 역사가 아니라 신화에 불과하고, 전설과 같은 것이라고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씨앗으로부터 잘라버리려는 마귀의 시도임을 알아야 합니다. 창세기는 우리의 구원에 관한 모든 진리가 씨앗 형태로 존재하는 대단히 중요한 책입니다.
특별히 창세기 50장 1~13절은 야곱의 장례에 관한 내용입니다. 야곱의 장례식은 다른 어떤 사람의 장례식보다도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곱의 장례식 자체가 대단히 중요한 진리를 예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본문을 통해서 아버지 야곱의 장례를 대하는 요셉의 태도가 어떠했는지, 요셉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는 이 일을 어떻게 지혜롭게 해결했는지, 야곱의 장례식이 예표하고 있는 진리는 무엇인지에 대해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Ⅰ. 야곱의 장례를 대하는 요셉의 태도
야곱이 기운이 진하여 열조에게로 돌아간 이후 요셉이 두 가지 일을 하였습니다. 첫째는 창세기 46장 4절에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정녕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고 하신 말씀을 따른 것이었습니다. 요셉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눈을 감기었습니다.
창세기 50장 1절에 “요셉이 아비 얼굴에 구푸려 울며 입맞추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셉은 돌아가신 아버지 시신의 얼굴에 울며 입을 맞추었습니다. 이것은 돌아가신 아버지를 향한 마지막 사랑의 행동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마지막까지 아버지에 대해서 자식이 존경과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큰 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 부자지간에 이렇지 못한 가정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지금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최선의 경의와 존경과 사랑을 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슬퍼하기는 했지만 절망적으로 몸부림을 치거나 처절하게 통곡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처럼 성도의 장례식에 슬픔이 없을 수는 없으나 처절하게 울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3절에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죽음의 순간에도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에게 죽음이란 영광으로 가는 관문에 불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빈자리가 슬프기는 하지만 너무 슬퍼할 필요는 없다고 사도 바울이 말한 것입니다.
요셉이 그렇게 처절하게 슬퍼하지 않은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아버지 야곱의 영혼이 천국으로 갔음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죽어 그 영혼이 천국으로 간 것이 확실하다고 믿어질 때, 후손들은 큰 위로를 받게 됩니다. 누가복음 16장 22절에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영혼이 천사들의 인도를 받아 천국에 갔음을 확신하였습니다. 죽음이란 영혼이 육신에서 분리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죽으면 그 때에 육신은 흙으로 가지만 영혼은 천국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천국을 가보셨습니까? 천국에 가는 길을 아십니까? 천국을 가려면 위로 가야 합니까? 아래로 가야 합니까?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천사들이 와서 우리 성도의 영혼을 받들어 천국으로 길을 인도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천사가 하는 일 가운데 중요한 일은 성도가 죽었을 때 그 영혼을 받들어 천국으로 인도하는 일입니다.
천국은 어떤 곳입니까? 요한계시록 21장 4절에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곱의 영혼은 슬퍼할 일도 없고, 애곡할 일도 없고, 아픈 것도 없고, 절망할 것도 없고, 죽는 것도 없는 복된 곳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요셉이 슬프기는 하지만 처절하게 몸부림을 치지 않았던 것입니다.
둘째는 요셉이 아버지 야곱을 애굽으로 모셔온 이후 17년 동안 그를 극진히 섬겼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야곱이 죽기 17년 전부터 요셉으로 인해 매우 호강하였습니다. 남들은 다 굶어죽는 위기였지만 그는 아들 덕에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아버지 야곱도 죽을 때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생을 마감했고, 요셉도 아버지를 섬기는 일에 있어서만큼은 조금도 후회 없는 상태에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어린 시절 학교 다닐 때 배운 시조가운데 정철의 시조가 있습니다. “어버이 살아실 제 섬기기를 다 하여라 지나간 후이면 애닯다 어찌하리 평생의 고쳐 못할 일이 이뿐인가 하노라” 요셉은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최선을 다해서 섬겼기 때문에 아버지가 돌아가셔도 그렇게 큰 후회나 유감이 별로 없었던 것입니다.
요셉은 아버지의 시신을 위해서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40일 동안 향 재료를 넣게 하였습니다. 시신에 향 재료를 넣은 이유는 오랫동안 부패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요셉은 아버지의 시신에 대해서도 최선의 존경심을 보인 것입니다. 향 재료를 넣은 후 삼베로 싸면 그것이 미라가 되는 것입니다. 미라가 되면 5,000년 전에 죽은 사람도 그 윤곽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썩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신에 대한 존경심을 의미합니다.
당시 애굽 사람들은 시신이 이런 어려운 절차를 거치고 나면 후에 다시 살아난다는 부활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시신에 향 재료를 넣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이 아버지의 시신에 향 재료를 넣은 것은 종교적인 이유가 아니라 일단 시신이 오랫동안 부패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애굽 사람들로 하여금 70일 동안 애곡하게 하였습니다. 아버지의 장례를 국장으로 치르게 하였던 것입니다.
애굽의 왕 바로가 죽으면 72일을 애곡하게 되어 있었는데, 요셉의 아버지가 죽자 70일을 애곡하였습니다. 이것은 왕의 죽음을 애곡하는 기간보다 이틀이 모자란 애곡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얼마나 명예스러운 장례식을 치른 것입니까? 야곱은 자식 하나 잘 둬서 애굽 백성들이 70일을 애곡하며 장례를 치러주고, 왕의 장례에 버금가는 국장으로 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엄청난 호강을 하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는 요셉의 태도는 존경과 사랑과 최선을 다하는 애정의 태도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부모님의 장례를 대할 때에 아버지의 장례를 대했던 요셉의 태도를 배워야 할 줄로 믿습니다. 부모님의 장례를 치르는데 자식들이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 것은 부모에 대한 예절이 아닙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장례에 대해서 최선의 태도를 가지고 최고의 존경을 보여주었습니다.
Ⅱ. 야곱의 장례를 치르는 요셉의 지혜
우리는 아버지 야곱의 장례를 치르는 요셉의 태도를 통해서 그의 놀라운 지혜를 엿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50장 2절에 “그 수종 의사에게 명하여 향 재료로 아비의 몸에 넣게 하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일반적으로 장례식을 치를 때에 향 재료를 넣는 사람은 장의사입니다. 그 일은 의사의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한자로도 장의사의 ‘사’자는 ‘社’(모일 사)자를 쓰고, 의사는 ‘師’(스승 사)자를 씁니다. 이 둘은 우리말 발음이 거의 같지만 하는 일은 전혀 같지 않습니다. 장례식을 치를 때 향 재료를 넣는 일은 의사의 일이 아니라 장의사(Mortician)의 일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수종 의사(His servant physician)로 하여금 향 재료를 넣게 하였습니다. 왜 요셉은 수종 의사에게 시켜서 향 재료를 아비의 시신에 넣게 하였을까요? 이것이 요셉의 지혜입니다.
애굽 사람들은 시신을 미라로 만들 때, 반드시 시신에 넣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자의 서’(The Book of the Dead)라는 책이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부적과 같은 것인데, 온갖 주문과 마술의 내용을 기록해서 죽은 사람이 사후 세계의 여러 가지 심판을 잘 통과할 수 있도록 안내해 주는 책입니다. 애굽의 장의사들은 시신 안에 반드시 이것을 넣었습니다.
‘사자의 서’의 내용을 보면 사람이 죽은 이후 심판에 대해 기록되어 있는데, 그 심판은 사람의 심장 무게를 달아보는 심판입니다. 사람의 심장을 꺼내어 신의 깃털과 무게를 비교해서 그 무게가 신의 깃털보다 무거운 사람은 죄가 많기 때문에 사후 세계에 들어갈 수 없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자의 서는 대단히 종교적인 부적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런 행위를 원치 아니하였습니다. 그래서 장의사를 부르지 않고 수종 의사에게 향 재료를 넣게 하였던 것입니다. 의사는 의학적이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시신이 썩지 않도록 하기 위해 향 재료를 넣는 것이지 어떤 종교적이고 이교신앙적인 행동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요셉은 향 재료를 넣되 불필요하게 애굽 사람들과 종교적인 문제로 마찰을 빚지 않도록 지혜롭게 장례를 치렀습니다.
장례를 기독교식으로 치룰 때, 많은 예배를 드립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중요한 예배가 입관, 발인, 하관예배입니다. 그 중 하관예배는 시신을 땅에 묻으며 드리는 예배인데, 땅 속에 관을 두고 예배를 드린 후 취토를 하고 흙으로 덮습니다. 그런데 하관예배를 드릴 때, 일반적으로 관 뚜껑을 조금 열어둡니다. 그러면 가족들 가운데 불신자가 부적을 손에 쥐고 있다가 목사가 기도를 할 때, 급하게 내려가 그 구멍 사이로 부적을 넣고 올라오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그래서 예배를 드릴 때 누군가는 부적을 넣지 못하도록 관을 지켜보고 있어야 합니다.
요셉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기에 사자의 서와 같은 부적을 넣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 야곱의 이름은 죽은 자의 책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산 자의 책인 ‘생명책’(The Book of Life)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아버지 시신에 향 재료를 넣어도 불필요하게 마찰을 빚지 않으려는 지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창세기 50장 4~5절에도 요셉의 지혜는 매우 돋보입니다. “곡하는 기한이 지나매 요셉이 바로의 궁에 말하여 가로되 내가 너희에게 은혜를 입었으면 청컨대 바로의 귀에 고하기를 우리 아버지가 나로 맹세하게 하여 이르되 내가 죽거든 가나안 땅에 내가 파서 둔 묘실에 나를 장사하라 하였나니 나로 올라가서 아버지를 장사하게 하소서 내가 다시 오리이다 하라 하였더니” (창 50:4~5). 여기에 요셉이 바로의 궁에 이런 말을 합니다. “내가 아버지 부탁을 받고 가나안 땅에 올라가 장례를 지내야 하기 때문에 바로의 궁에서 이를 허락해주기 바란다”는 내용입니다.
여러분, 요셉은 애굽의 총리입니다. 바로 왕을 뵙기 원하면 언제든 일대일로 독대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폐하, 아버지의 장례를 치러야 하기 때문에 가나안 땅에 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스스로 애굽의 총리라는 자기 권력을 남용하지 않았습니다.
애굽에서 가나안 땅으로 간다는 것은 타국으로 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도 외국으로 나가려면 반드시 외무부의 허가를 받아야 하지 않습니까? 외국으로 나가는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사항을 체크해야 하는 법적인 절차가 있는 것입니다. 여권도 필요하고, 도장도 찍어야 합니다. 요셉은 지금 총리의 신분으로, 밑에서 일하는 직원들과 공무원들을 무시하고 바로에게 직접 말하겠다고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일반 국민들이 외국으로 나갈 때 거쳐야 하는 것과 똑같은 절차를 공식적으로 밟았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가정적이고 개인적인 문제이고, 아버지의 특별한 부탁을 받아서 약속한 것이기 때문에 꼭 허락을 해 주셔야 합니다. 저는 가나안 땅에 갔다가 반드시 돌아올 것입니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5절 후반에 “내가 다시 오리이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8절에 “어린 아이들과 양떼와 소떼만 고센 땅에 남겼으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을 고센 땅에 남기고 가나안 땅에 갔던 것입니다.
제가 1986년도에 도미한 후 5년간 공부를 했는데, 당시만 해도 목사들은 미국 비자를 받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미국 대사관에서 목사들의 말을 잘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목사들이 돌아온다고 해 놓고 미국에 가면 돌아오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이후 미국 유학을 가야할 후배들이 비자 문제로 굉장히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저도 세 번이나 비자 발급이 거절되었는데, 두 번째 거절될 때 미국 영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네 아내와 아이들을 한국에 두고 가면 비자를 발급해 주겠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당신네 국가에서는 아내와 아이들과 떨어져서 공부합니까?” 그랬더니 세 번째는 비자를 발급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어린아이를 남겨놓고 간다는 것은 반드시 돌아오겠다는 확실한 보장인 것입니다.
요셉은 정상적이고 공식적인 절차를 다 밟았을 뿐만이 아니라 반드시 돌아온다고 하는 확신을 주었기 때문에 바로 왕 측에서 어떤 불필요한 오해나 염려를 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요셉은 참으로 지혜롭게 아랫사람들을 무시하지 않고 정상적인 절차를 밟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6절에 “바로가 가로되 그가 네게 시킨 맹세대로 올라가서 네 아비를 장사하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로의 말은 아주 명백합니다. 달리 해석될 수 있는 애매모호한 말이 아닙니다. 요셉은 지금 애굽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는데 바로 왕으로 하여금 불필요한 염려나 의심을 받지 않도록 일을 지혜롭게 처리한 것입니다. 요셉은 이렇듯 큰일을 치르면서도 지혜롭게 일을 잘 처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마 10:16). 성도들은 뱀 같은 면도 있어야 하고 뱀 같지 않은 면도 있어야 합니다. 뱀 같은 면이라고 하면 뱀처럼 지혜로워야 한다는 것이고, 뱀 같지 않은 면이라는 것은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순결하고 온유한 비둘기 같은 성품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이 두 가지 요소를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했습니다.
사람이 성공한 인생을 살기 위해서 꼭 대단한 학식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좋은 학교를 나왔다고 해서 꼭 성공하는 것도 아닙니다. 유학을 갔다 왔다고 해서 꼭 성공하는 것도 아니고, 잘 생겼다고 성공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이 성공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혜(Wisdom)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학벌이 좋지 못해도 성공합니다. 장사를 하면 매출이 크게 늘어납니다. 그러나 지혜롭지 못한 사람은 엄청나게 공부를 많이 했는데도 성공하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람의 성패는 지혜에 달려 있습니다. 지혜는 가지고 있는 지식을 활용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17세에 노예가 되어 40년 세월을 보냈습니다. 요셉도 이제 나이가 57세가 되었습니다. 요셉은 인생 중 가장 낮은 노예가 되었었고, 최고 높은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산전수전 공중전, 해상전, 지상전을 다 겪어 보면서 인생의 지혜를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의 지혜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것이었습니다. 꿈을 해석할 줄 아는 지혜가 산전수전을 겪는다고 얻을 수 있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요셉에게 꿈을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심으로 그는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지혜가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1장 5절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꾸짖지 않으시고 지혜를 넉넉히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지혜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흑암의 지혜이고, 다른 하나는 밝은 지혜입니다. 전자는 세상적이고, 정욕적이고, 마귀적인 지혜입니다. 그래서 이런 지혜를 가진 사람은 남을 잘 속이고 거짓말을 잘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살아야 인생에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자신들을 소위 ‘정치 9단’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들의 지혜는 캄캄하고 더러운 지혜입니다.
우리 성도들에게 필요한 지혜는 야고보서 3장 17절에 기록되어 있듯이 깨끗하고 화평하고 온순한 지혜입니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약 3:17). 우리는 날마다 기도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로 채워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요셉은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Ⅲ. 야곱의 장례식이 예표하는 진리
애굽에서부터 가나안 땅으로 올라가는 행렬은 어마어마한 것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장례식을 따라갔습니다. 7~8절에 “요셉이 자기 아비를 장사하러 올라가니 바로의 모든 신하와 바로 궁의 장로들과 애굽 땅의 모든 장로와 요셉의 온 집과 그 형제들과 그 아비의 집이 그와 함께 올라가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9절에 “병거와 기병이 요셉을 따라 올라가니 그 떼가 심히 컸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애굽의 모든 장로들과 바로 왕의 신하가 다 따라갔고, 온 집안 사람이 다 따라갔으며, 병거와 기병이 호위하는 어마어마한 행렬이었습니다.
성경은 이들이 요단강 근처에 아닷마당이라는 곳에 도착했다고 밝혀줍니다. 아닷이라는 사람이 소유하고 있는 타작마당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이곳에 7일간 머물며 애곡하였습니다. 7일간 애곡을 하는 것은 장례절차를 따라 애곡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사람들이 그 장엄한 모습을 보고 ‘아닷마당’이라는 곳을 ‘아벨미스라임’이라고 지명을 바꾸었습니다. ‘아벨’은 ‘애통’(Mourning)이라는 뜻이고, ‘미스라임’은 ‘이집트 사람들’(Egyptians)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아벨미스라임은 ‘애굽 사람들의 애통’(The mourning the Egyptians)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아벨미스라임의 위치를 요단강 근처라고 했는데, 학자들은 요단강 동쪽인지, 서쪽인지 의견이 분분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요단강 동쪽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사해와 여리고의 중간쯤일 것이라고 보기 때문에 이 장소는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할 때 지나간 경유지가 됩니다. 요셉은 아닷마당에서 7일간 애곡하고 아버지의 명을 따라서 막벨라 굴에 시신을 장사하였습니다. 막벨라 굴은 마므레에 있었고, 마므레는 헤브론의 북부지역이었습니다.
여러분, 헤브론은 17세의 요셉이 노예로 팔리기 전에 살던 곳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헤브론을 40년 만에 와 보게 된 것입니다. 어릴 때 뛰어놀던 옛 동산에 온 것입니다. 어릴 때 본 큰 길은 어느 새 골목길이 되어 있었고, 그렇게 커 보이던 집도 오두막집이 되어 있었습니다. 요셉의 감격은 말로 다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은상씨가 작사하고 홍난파씨가 작곡한 ‘내 놀던 옛 동산’이라는 곡은 “내 놀던 옛 동산에 오늘 와 다시 서니 산천의구란 말 옛 시인의 허사로고, 예 섰던 그 큰 소나무 베어지고 없구료”라는 가사로 되어 있습니다. 옛날에 엄정행씨가 부른 노래를 매우 감동적으로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요셉은 지금 40년 만에 내 놀던 옛 동산에 오게 된 것입니다.
요셉을 따라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큰 무리가 애굽 땅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큰 무리가 요셉을 따라 애굽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다는 것이 무엇을 예표하는 것일까요? 이것이 가깝게는 출애굽을 예표하는 것이고, 멀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서 허다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죄와 마귀의 지배를 벗어나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인물이고,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큰 무리가 되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앉아 예배하고 있는 우리들 가운데 이 무리에서 빠지는 사람이 한 명도 없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창세기 50장의 예표가 실현된 것이 요한계시록 7장 9~10절입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계 7:9~10). 각 나라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천국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찬송하고 있는 모습인 것입니다.
결론
야곱은 이 땅에서 147년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인생은 세상에 큰 유익을 준 인생이었습니다. 시편 12편 1절에 “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가 인생 중에 없어지도소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경건한 자가 죽고, 충실한 자가 없어지는 것을 시편기자가 애통해하는 것입니다. 왜 경건한 자가 죽으면 애통해야 합니까? 그것은 경건하고 충실한 사람의 삶이 그만큼 인간사회에 많은 유익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한 사람이지만 얼마나 많은 유익을 주었습니까? 그 아들 요셉을 통하여 애굽의 온 백성을 기근에서 살려내었고, 그의 넷째 아들 유다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가 나오게 되어 온 세상에 엄청난 유익을 끼친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하나님’이라 불리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야곱은 짧은 인생 살면서 실수도 많이 했고, 죄도 많이 지었습니다. 형을 속였고, 장자권을 빼앗아 달아났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에서의 잘못도 있는 것입니다. 에서는 장자권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먹은 망령된 사람이었습니다. 야곱이 사기꾼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야곱이 사기 친 것을 ‘1’이라고 한다면, 그가 이 세상에 끼친 공헌은 ‘10,000’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로 사람을 평가할 때 그가 저지른 실수 ‘1’만 가지고 이야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가 끼친 공헌 ‘10,000’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는 이 사회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의 삶이 온 세상에 유익을 끼치는 삶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 번 왔다 가는 인생, 온 세상에 악영향만 미치고 가는 인물이 있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그런 삶을 살아서는 안되겠습니다. 온 세상에 많은 유익을 주고, 떠날 때에도 자식들에게 사랑을 받고, 떠난 후에는 우리의 영혼이 영적인 가나안 땅, 천국으로 들어가는 성도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효자 요셉이 받은 복
창 50장 1~9절 / 김홍도목사
많은 불신자들이 크리스천은 부모님께 제사를 안 드린다고 해서 불효의 종교라고 오해하고 있는데, 그것은 잘못입니다. 기독교는 불교, 유교, 도교 그 어떤 종교보다도 효(孝)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받은 십계명을 둘로 나눌 수가 있는데, 하나는 대신 계명, 즉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우상숭배하지 말라", "하나님의 이름을 망녕되이 일컫지 말라",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대인 계명, 즉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지켜야 할 계명인데, 그 중에 제일 첫 계명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고 한 말씀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보다도 앞서있고,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는 계명보다도 먼저 있는 계명입니다. 그러므로 부모에게 불효하는 죄는 살인죄, 간음죄, 도적질죄 보다도 더 큰 죄임을 알아야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계명은 첫 계명이며, 동시에 다른 계명은 거의 다 "하지 말라"는 소극적인 계명이지만, 이 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적극적인 계명입니다. 또한 이 계명은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이 붙은 첫 계명입니다. 에베소서 6장 2-3절에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축복의 약속이 붙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 "효"(孝)는 모든 원리와 도덕의 기본이 되며, 모든 질서의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고 효도를 잘하는 사람은 좋은 국민이 되고, 좋은 시민이 되고, 좋은 회사원이 될 것입니다. 효가 무너질 때 가정이 부패하고, 가정이 부패하면 국가도 부패합니다.
옛날부터 한국에 두 가지 자랑할 것이 있었는데, 하나는 금강산이요, 다른 하나는 효(孝)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금강산은 휴전선이 가로막혀 볼 수 없게되고, 효도는 찾아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한국사람이 관광이나 기타 핑계로 부모를 모시고 가서 버리고 오는 건수가 일년에 800여건이나 된다고 합니다. 믿어지지 않는 일입니다. "그것이 사실이냐?"고 물어보니까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가지고 어떻게 가정이 복을 받고, 그 나라가 복을 받겠습니까?
성경에 모범적인 효자 한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바로 야곱의 열 한 번째 아들 요셉입니다. 오늘 요셉의 효행과 그가 받은 복을 생각하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요셉은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했습니다.
야곱이 열 두 아들 중에 요셉을 제일 사랑하고 예뻐하고 제일 좋은 채색옷을 입혔다는 것은 요셉이 그만큼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했기 때문입니다. 효도는 뭐니뭐니해도 부모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기쁘게 하는 것이 진정한 효도라고 봅니다.
중앙청 뒤쪽에 효자동이라고 있는데 그런 이름을 붙이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집에 아들 며느리가 밭에 일 나간 사이에 그 아버지의 실수로 손자 아기가 이불 밑에 깔려 죽었는데, 마침 며느리가 점심 때 들어왔다가 그 사실을 발견하고, 시아버지가 그 사실을 알면 속상할까봐 얼른 죽은 아이를 들쳐업고 남편한테로 달려갔더니, 남편도 죽은 아들을 보자 할아버지의 마음을 상하게 한 "불효자식"이라고 야단치며 뺨을 냅다 한 대 쳤더니, 그 뺨을 맞고 죽었던 아이가 다시 살아났다고 합니다. 이 소문이 퍼져서 그 동네를 효자동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요사이 젊은이들이 들으면 비웃을는지 모르지만, 한국은 예로부터 효행이 지극한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날, 부모를 양로원에 갖다 버리고, 관광가서 버리고 오는 일이 일년에도 800여건이나 된다고 하니 얼마나 끔찍스런 일입니까? 그런데 요셉은 지극한 효자로서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한 효자였습니다.
2. 요셉은 부모에게 순종했습니다.
요셉은 부모님이 들에서 양을 치는 형들에게 점심을 갖다 주라고 할 때, 여러 가지 위험을 무릅쓰고 순종했습니다. 형들이 세겜에 있다고 해서 거기 갔더니, 형들이 머나먼 도단으로 옮겨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없다고 핑계 대고 돌아올 수도 있는데, 맹수가 들끓는 광야 길을 걸어서 형들한테로 갔습니다. 요셉을 시기하던 형들이 살기 등등해서 요셉을 보자, 웅덩이에 빠뜨려 죽이려 하다가 마침 애굽의 상고들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은20량에 팔아먹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의 옷을 양의 피를 묻혀 가지고 와서 부모에게 "혹시 요셉을 우리에게 보냈습니까?"하고 물어 볼 때, 야곱은 기절할 듯이 슬퍼하며 통곡했습니다.
이렇게, 요셉은 살기가 등등한 형들이 자기를 해칠 것이라는 사실을 예측하면서도 순종했고, 들짐승들이 들끓는 광야의 머나먼 길을 걸어갔습니다. 이렇게 부모의 말을 잘 들었습니다. 보기 드문 순종입니다.
에베소서 6장 1절에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고 말씀했습니다.
3. 요셉은 물질봉양을 잘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5일장이나 10일장이 아니라 70일장을 지냈습니다. 당시 몸을 썩지 않게 하기 위해 의사들이 몸에 향 재료를 넣는데 만도 40일이 걸렸다고 했으니, 얼마나 많은 시일이 걸렸습니까? 돈은 얼마나 썼겠습니까? 그리고 총리대신이 된 후에도 머나 먼 조국에서 부모 형제를 모셔다가 잘 사시도록 물질로 봉양을 잘했습니다. 그는 총리대신이 되었어도 부모를 봉양하기까지는 성공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47장 12절에 "또 그 아비와 형제들과 아비의 온 집에 그 식구를 따라서 식물을 주어 공궤 하니라"고 했습니다. 부모님뿐 아니라 부모님이 나으신 형제들의 식구까지도 물질로 봉양을 잘했습니다.
옷을 해 드리고, 음식을 해 드리고, 용돈을 드리는 물질 봉양이야말로 참으로 중요한 효도라고 봅니다. 부하면 부한대로, 가난하면 가난한대로 최선을 다해서 물질로 봉양할 때 부모의 마음이 기쁠 것입니다. 자식들은 부모에게 거리낌없이 용돈을 달라고 졸라대지만, 늙으신 부모님들은 용돈을 달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용돈을 넉넉히 드리면 그것도 다 후에 복 받을 씨를 심는 것입니다.
자기는 입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다 쓰면서 자기를 낳고 키우고, 교육시킨 부모님에게는 돈 한 푼 가지고 발발 떨면서 깍쟁이 노릇하는 것은 복 받을 일이 못됩니다. 디모데전서 5장 8절에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않는 자는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 보다 더 악하니라"고 했는데, 하물며 부모를 돌보지 않고 양로원에 갔다 버리고 몇 년이 되도 찾아보지도 않고 용돈 한 푼 안 드린다면 얼마나 큰 죄악입니까?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 자라고 했습니다. 신명기 21장 18-21절에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 아비의 말이나 그 어미의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부모가 징책하여도 듣지 아니하거든 그 부모가 그를 잡아 가지고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거든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 죽일찌니 이 같이 네가 너의 중에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21장 17절에도 "그 아비나 어미로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찌니라"했고 21장 15절에 "자기 아비나 어미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찌니라"고 했는데, 치는 정도가 아니라 요사이는 부모를 죽이는 사람들이 종종 있으니 세상이 얼마나 악합니까?
4. 요셉은 형제를 사랑으로 돌보았습니다.
요셉은 부모님을 잘 공경했을 뿐 아니라 부모님이 나으신 형제들, 부모님의 손자들까지 잘 먹여 살리고 돌아보았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훌륭한 효도라고 봅니다.
아버지 야곱의 장례식이 끝나자, 전에 요셉을 팔았던 형제들이 혹시 요셉이 이제라도 복수하지 않을까 두려워 떨면서 요셉에게 이르기를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이르기를 너희는 요셉에게 이같이 이르라 네 형제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데 그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였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의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하고 말하자 요셉은 그 말을 듣고 기가 막혀 울었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 앞에 엎드려 절하면서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하고 말했습니다. "제발 살려만 주십시오" 하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 때에 요셉은 대답하기를 "두려워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했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두려워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하고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습니다.
진정한 효도는 부모님이 낳으신 형제 자매들 중에 굶주리거나 헐벗고 고생할 때 힘이 있으면 그들을 돌봐주는 것이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이요, 차원 높은 효도라고 봅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않는 자는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하니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 막내 여동생이 부모 형제들의 마음을 많이 썩혔는데, 시집가서도 일찍이 과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 모친의 마음은 늘 그 딸한테 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들네 집에 와 계시라고 해도 자꾸 따로 사시겠다고 하며 아파트를 한 사달라는 것입니다. 그 속셈은 막내 딸 집 장만해주고 싶어서였습니다. 20여 년 전 아들들 중에는 내 집 가진 사람이 없는데도 돈을 모아서 잠실에 작은 아파트를 사 드렸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도 모르게 우리들도 모르게 장사한다고 홀랑 팔아 없앴습니다. 그 후에 또 집을 사내라고 해서 남양주에 작은 아파트를 사 드렸더니 딸에게 주고 돌아가셨습니다. 왜 어려운데 사 드렸는가하면 어머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5. 영혼을 천국으로 모시는 것이 참 효도입니다.
요셉은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내가 죽거든 고향 땅 막벨라 굴에 장사해달라고"고 한 말씀을 명심했다가 막벨라 굴에 장사 지냈습니다. 나는 이것을 영혼의 고향 천국으로 인도한 것으로 해석하고 싶습니다.
참된 효도는 100여 년 살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육신만 잘 모시는 것이 아니라 그 영혼이 구원받아 영원한 천국으로 모시는 것이라고 봅니다. 예수 안 믿다가 영원한 지옥으로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못 본체하고 육신만 보양한다면 불효 중에 불효일 것입니다. 요셉은 그런 의미에서 찾아보기 드문 효자였습니다. 결국 요셉은 그 모든 고난과 고통을 극복하고 애굽의 총리대신 즉 국무총리가 되어서 자기 민족을 기근에서 구원할 뿐 아니라 애굽나라를 기근에서 구원했습니다. 요셉은 엄청난 축복을 받았습니다. 요셉은 구약성경에서 유일하게 예수님의 모형으로 해석합니다. 우리도 효도하여 자자손손 하나님의 축복받는 가정들이 됩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