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글라데시의 교훈
면적 14만 7,570㎢(세계 93위), 인구 1억 7,470만 명(세계 8위), 1인당 GDP 2,688달러(세계 112위). 세상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는 가난한 나라 방글라데시에서 지지난 주 큰 정변이 일어났습니다. 한때 민주화의 아이콘으로 불리던 셰이크 하시나(Sheikh Hasina Wazed, 1947~ ) 여성 총리가 독재자, 불공정의 상징으로 규탄받으며 정권의 종말을 맞은 것입니다.
방글라데시 대학생들의 시위 광경
20여 년 군림해 온 정권이 무너지는 데는 채 몇 주가 걸리지 않았습니다. 하시나 총리는 시위대에 쫓겨 그녀의 아버지가 세운 나라를 도망치듯 떠나야 했습니다. 인도로 피신한 그녀의 종착지가 어디가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방글라데시의 길지 않은 역사 속에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정변, 도를 넘는 정쟁을 보고 들으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셰이크 하시나 전 총리는 방글라데시가 아직 동 파키스탄이라 불리던 1947년 다카 인근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Sheikh Mujibur Rahman, 1920~1975)은 언어, 민족, 문화 등 여러 면에서 이질적인 (서)파키스탄의 탄압에 맞서 독립운동을 벌인 민족 지도자였지요. 1971년 마침내 파키스탄에서 분리 독립하면서 라흐만은 방글라데시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1975년 발생한 쿠데타 와중에 라흐만 부부와 아들 형제들이 모두 피살되고, 하시나는 여동생과 함께 해외를 떠돌아야 했습니다.
1981년 조국으로 돌아온 셰이크 하시나는 아버지가 이끌던 아와미연맹(AL)의 총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군사정권에 항거하는 시민들의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습니다. 그동안 체포되거나 암살 시도를 겪기도 여러 번이었지요.
한편 1975년 쿠데타로 하시나의 아버지 라흐만을 숙청했던 지아 울 라만(1936~1981)은 이후에도 거듭된 쿠데타에서 살아남아 1977년 7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1982년 쿠데타에서 결국 피살되고 맙니다. 9살 연하의 부인 베굼 칼레다 지아(Begum Khaleda Zia, 1945~ )도 정치 일선에 뛰어들었지요. 방글라데시 국민당(BNP)의 당수가 되었습니다.
혈육의 원수이자 정적이기도 한 셰이크 하시나와 칼레다 지아, 두 여성은 한때 손을 맞잡고 야당 연합을 결성해 군사독재 정권에 대항해 싸웠습니다. 1991년 두 사람의 힘으로 후세인 무함마드 에르샤드(1930~2019) 군사정권을 무너뜨렸습니다. 칼레다 지아는 방글라데시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되었고요. 재임 기간 그녀는 대통령제를 의원내각제로 바꾸고, 산업 발전에 적잖은 성과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경제상황이 악화할 때마다 되풀이되는 파업과 시위로 1997년 셰이크 하시나가 이끄는 AL에 정권을 내주게 됩니다.
셰이크 하시나는 2001년 BNP의 칼레다 지아에게 패배, 잠시 정권을 잃었으나 2009년 재집권, 최근까지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지켜왔습니다. 하시나도 인도와 물 공유 협정을 체결하고, 의류산업을 촉진하고, 갠지스 강을 가로지르는 파드마 대교를 건설하는 등 대규모 인프라 프로젝트를 추진하며 기대 이상의 경제적 성과를 이루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정쟁 속에 아버지와 남편을 잃은 두 여성의 30년 통치 기간에도 권력투쟁의 소음은 끊임이 없었습니다. 버스 폭탄 테러, 실종, 살인 등 군사독재 때나 다름없는 공포가 나라의 일상이 되었지요. 지난 1월 선거에서 하시나가 네 번째 임기의 총리직을 굳혔지만 야당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선거의 공정성에 의문을 나타냈습니다. 하시나 정권이 권위적이고 억압적이라는 비난도 그치질 않았습니다. 그녀를 비판하던 노벨 평화상 수상자 무함마드 유누스(Muhammad Yunus, 1940~ ), 야당 지도자 칼레다 지아 등은 수없이 기소당하고 감옥을 드나들어야 했습니다.
정권 몰락의 직접적 원인은 독립 유공자 자녀를 위한 공무원 할당제 시비였습니다. 극심한 실업난 속에 공직의 약 30%를 독립 유공자 자녀에게 우선적으로 할당한다는 정책에 대학생들이 반발, 시위에 나선 것입니다. 매년 약 40만 명의 대학 졸업생 가운데 상당수가 안정적인 공직에 몰리고 있었습니다.
무함마드 유누스 셰이크 하시나
그런 공직 3,000개 가운데 3분의 1가량을 원천적으로 빼앗긴다는 데 대학생들은 분노했습니다. 게다가 명분이 독립 유공자 우대일 뿐 정권에 힘이 되어줄 기득권 세력의 강화책이라는 게 시위 학생들의 생각이었습니다.
지난 7월 18일 처음 시위가 시작되자 정부는 최루탄, 고무탄, 심지어 실탄까지 발사하고, 휴교령과 통금령을 내리며 강경 진압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초기 대응에서만 100명 가까운 사상자가 발생하며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었습니다. 21일 대법원이 독립 유공자 공직 할당률을 5%로 대폭 낮추고, 2%는 소수 민족과 장애인 등 취약계층에 돌리도록 중재안을 내면서 소요는 다소 진정되는 기미였습니다. 그러나 28일 시위를 주도한 학생 지도자 3명이 구금되면서 사태가 다시 험악해지기 시작했습니다. 29일 시위가 재개되었고, 8월 4일 하루에만 100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자 진압군도 작전을 포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5일 오후 셰이크 하시나 총리는 사임을 발표하고 여동생과 함께 군 헬기로 이웃 나라 인도로 도피의 길을 떠났습니다. 분노한 시위대가 한때 국부로 불리던 하시나 총리의 아버지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의 동상을 파괴하고, 집권당 사무실에 불을 질렀습니다. 6일 군부와 시민단체, 각계 대표단은 시위대 학생대표들과 논의 끝에 무함마드 유누스를 과도정부 최고 고문으로 선임했습니다. 담보 없는 소액 대출로 서민들에게 민생 회복의 길을 열어준 그라민은행 설립자 유누스가 이제 방글라데시를 이끌어 갈 새 정부 탄생의 대임을 맡게 된 것입니다.
방글라데시 소요 사태는 우리 국내의 과도한 정쟁의 위험뿐만 아니라 현재 시행 중인 국가 유공자, 5.18 유공자 취업 가산점 시혜의 위험성을 돌아보게 합니다. 국가 유공자들에 대한 보상과 생활·의료·교육 지원은 국가의 당연한 의무일 것입니다. 그러나 취업 우선권을 부여하는 정책은 위정자들에게는 손 안 대고 코 푸는, 안성맞춤의 지원책이겠지만 평생의 일자리를 얻기 위해 날밤을 새우는 청년들에겐 부당한 일자리 탈취로 비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함께 취업 시험을 치르는데 그들에게만 과목마다 전체 문항 중 5~10%를 미리 맞은 것으로 동그라미 쳐 주는 불공정한 짓으로 비칠 수도 있습니다. 좋은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 졸업을 미루고, 수십 수백 장의 취업 원서를 쓰고, 캥거루 소리 들어 가며 양육 책임을 다한 부모 밑에 빌붙어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겐 마치 일자리를 도둑맞는 기분이 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한때 병역의무를 마친 사람에게 5% 가산점을 부여하는 혜택이 여성단체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큰 사회적 논란이 되었습니다. 병역필자 가산점 제도가 헌법상 보장된 평등권, 공무담임권, 직업선택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헌법소원 심판이 청구되었습니다. 결국 이 제도는 헌재 재판관 전원 일치 위헌 결정이 나면서 폐지되었습니다. 그로 인한 시비는 지금까지도 남녀 성 대결적 양상의 갈등으로 해소되지 않은 채 우리 사회에 남아 있습니다.
병역의무를 마친 사람을 위해서는 헌법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가산점을 부활시키려는 노력보다 군 복무 기간 중 사회 진출에 도움이 될 자기개발 프로그램의 시행 등 보다 체계적이고 공정한 지원방안을 찾는 노력이 필요해 보입니다. 국가 유공자나 5.18 유공자에 대한 가산점 시혜 역시 그런 관점에서 재고되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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