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변화시키려면
여름이 오는가 했더니 처서(22일)를 며칠 앞두고 있습니다. 평소에는 세월 가는 것을 느끼지 못합니다. 새벽 6시면 일어나서 소설을 쓰고, 8시에 아침을 먹는 것으로 하루가 시작됩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거의 혼자 하루를 보냅니다. 밤 11시가 되면 내일 무엇을 해야겠다는 계획 같은 것도 안 하고 그냥 잠자리에 듭니다. 이튿날은 다시 어제와 같은 패턴으로 하루를 보냅니다. 어찌 보면 단순하기 짝이 없는 일상이지만 습관이 돼서 시간이 지루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흔히 하는 말로 나이 60이 넘으면 ‘인생 내리막길’이라 해서 세월이 빠르게 흐른다고 합니다. 이팔청춘 때도 하루는 24시간이었고, 나이 70살이 되든 80살이 되든 하루는 24시간입니다. 그렇다고 나이가 들면 더 바쁘게 사는 것도 아닙니다. 나이가 들수록 행동반경이 줄어드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행동반경이 줄어들면 시간이 더디게 흘러가야 하는데 체감하는 세월이 빠르게 느껴질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어떤 기관의 의뢰를 받아서 잡지에 기고를 하려고 105세 노인을 인터뷰한 적이 있습니다. 노인은 두 칸짜리 방에 좁은 부엌이 딸린 집에 살고 있었습니다. 노인을 부양하는 이는 85세의 큰아들입니다. 85세의 아들이 하루 세끼를 해주는데 반찬은 김치하고 자반고등어를 즐겨 드신다고 했습니다. 노인은 2홉들이 소주 한 병을 드셔야 하루가 간다고 하셨습니다. 인터뷰를 하는 도중에도 소주를 소주컵 절반 정도 따랐습니다. 그 술을 천천히 드시고 손가락으로 소금 몇 알을 찍어 드시는 것으로 입술을 닦았습니다.
장수 비결을 물으니까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 끼도 굶어 본 적이 없다”라면서, 밥만 잘 먹으면 오래 산다고 하셨습니다. 더불어서 지금도 시력이 좋아서 콩을 가리거나, 완두콩을 까는 일, 깨를 터는 일을 하는 등 바쁘게 사시는 점이 장수의 비결이라 하셨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젊은 나이에 선운사에 입산을 했습니다. 선운사에 입산하고 나서는 소식이 끊겼습니다. 어느 날 고향 동네에 있는 절의 주지로 왔습니다. 친구 아버님이 태고종 스님이셨는데, 선운사에서 제법 스님의 틀을 갖추고 정진하고 있는 자식을 부르신 것입니다. 자식은 어린 시절을 보낸 동네에서 중노릇하기 싫어서 오지 않으려고 했답니다. 하지만 은사스님의 권유로 결국 고향땅을 밟았습니다.
객지에서 온 스님도 아니고, 동네 사람들이 가족사를 꿰차고 있는 친구가 스님이라고 목탁을 두들기고 있으니 존경심이 일어나겠습니까? 신도들을 제외하고는 뭐한 말로 사이비 중으로 치부했습니다. 친구는 이미 각오를 했다는 얼굴로 조롱과 멸시를 참으며 스님의 길을 묵묵히 걸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니까 동네 사람들도 스님으로 대우를 해주기 시작했습니다.
맑은 공기가 흐르는 산에 살겠다, 텃밭을 가꾸느라 적당히 노동을 하겠다, 신도들을 관리하느라 바쁘게 살다 보니 얼굴도 부처처럼 윤기가 자르르 흐르고 매우 건강하게 보였습니다. 스님 자신도 돌아가신 큰스님(아버지)처럼 90세는 거뜬히 살 수 있다고 장담을 했습니다. 스님이 워낙 건강해 보이니까 그 말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그런 스님이 어느 날 갑자기 사바세계를 훌쩍 떠났습니다. 새벽에 글을 쓰기 전에 카톡을 확인해 보니 스님의 양자가 보낸 카톡부고가 와 있는 걸 보고 망연자실했습니다. 사람의 운명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 스님이 선운사에 계속 있었으면 적어도 주지 스님은 됐을 겁니다. 그런 친구가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지 못해 산골에 있는 손바닥 크기의 절 주지로 살다가 바람에 날리는 마른 풀잎 신세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105세 노인은 왕소금 안주 삼아서 소주 한 병씩 마시고도 마당에 쪼그려 앉아 깨를 털고 있는데, 명색이 스님이라 육식을 멀리하고 술도 마시지 않던 친구는 유서 한 장 남기지 않고 가 버렸습니다.
그 친구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한동안은 삶의 허무를 안겨주었습니다. 3개월 정도 세월이 흘러서 친구들과 술자리를 가졌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볼 때는 노인들이 대낮부터 웃고 떠들며 낮술을 마시는 모습으로 보였겠지만, 저를 포함한 친구들은 자신이 노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어린 시절에 실수를 해서 망신을 당했던 일이며, 자식들하고 사이에 있었던 일, 농사 이야기 등을 두어 시간 동안 이어갔지만 어느 누구 하나 죽은 스님 친구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돌이켜보면 ‘죽음’이라는 관념에 최초로 사로잡혀 있던 경험은 군대서 복무를 할 때였습니다. 어느 해인가 작은 추석날 서울역 계단에서 압사사고가 있었습니다. 그 이듬해 압사사고를 우려한 서울역에서는 입석표를 무작정 팔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첫 휴가를 나간 친구는 고향에 가지 못했습니다.
서울 친척집에서 축구를 하다 급성 심장마비로 죽었습니다. 그 이후 30세 때 농민회 소속으로 삭발 데모를 하던 친구가 경운기 사고로 죽고, 30대 후반에는 사우디아라비아 가서 돈 벌어 산 땅을 몇 배나 불려 “이제 먹고살 만하다고 자랑하던 친구가 밤사이에 저승으로 갔습니다. 죽음은 이렇듯 항상 곁에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 세월이 빠르게 흘러간다고 인식하는 관념의 저변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깔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젊었을 때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서 세월이 더디게 흐르고, 세월이 더디게 흐르니까 스트레스도 많이 받게 됩니다.
제가 좋아하는 말 중에 ‘오늘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과거는 변화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성공한 사람들에게는 뼈아픈 과거가 오늘을 있게 한 밑거름입니다. 그렇지 않고 유야무야 세월을 보낸다면 뼈아픈 상처 일 뿐입니다.
Chopin 즉흥 환상곡 C-sharp minor Op. 66: No. 4 (Arranged for string quartet by Dave Scherle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