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지금까지의 이야기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다 옛날 얘기 아니냐?
지금 치는 풍물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영좌니 좌상이니 군사니 모두
풍물패의 직접적인 구성원이라고 보기 어렵지 않는가?
또한 그렇게 형식적이고 한문투의
놀이방식이나 형태는 봉건사회의 잔재가 아니가?
하는 의문도 함께 말이다.
일면 타당한 문제 제기 들이다.
그 의문에 대한 답은 이렇다.
옛날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다.
과거에 대해 막연한 동경과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자는
것도 아니다. 과거의 풍물굿에서 굿을 이끌
책임과 권한을 왜 상쇠에게 주지 않았을까? 라는 이유를
깊이 음미하고자 함이다.
그 의미를 북, 장구, 꽹과리, 징을 두들기는
지금의 우리들 모습과 견주어 보자는 것이다.
회복하고 갖춰가야 할 것이 없는가?’는 되새겨 보고
넘어가야 될 것 아닌가?
그러면 상쇠가 대장이 될 수 없었다는 사실에서
추출해야 할 의미의 핵심은 무엇이겠는가?
앞에서 살펴본 대장들에 대해 한 번 더 음미해 보면 답이 나온다.
영좌, 좌상, 공원은 두레에 등장하는 대장이다.
두레가 무엇인가.
농사일을 목적으로 하여 일정 기간 결성되는
노동조직이자 굿이다.
두레에 등장하는 풍물은 일굿
(두레굿, 풍장굿, 풍물굿, 만두레굿,
모내기굿, 호미씻이굿, 장원놀음…)을 위한 문화행위이다.
즉, 일을 위한, 일로서의 문화이고 예술임을 알 수 있다.
이 경우, 풍물은 일을 만났을 때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화주나 좌상은 걸궁과 걸립에 등장하는 대장이다.
걸궁과 걸립이란 무엇인가?
공공사업에 필요한 사람을 모으기 위해 결성하는 조직이자 굿이다.
걸궁(걸립)에 등장하는 풍물은 돈을 모으기 위한
돈굿(서당걸립, 절걸궁, 다리걸궁, 배걸궁…)을 위한 문화행위이다.
즉, 돈을 모으기 위한 문화이고 예술임을 알수 있다.
이 경우 풍물은 돈을 만든다는 경제행위를 만났을
때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처럼 북치고 장구치고 꽹과리치고 징치는 짓거리,
그 짓거리는 그 자체만으로 큰 의미가 없었다. 바로 이 점이다.
두레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풍물이냐 걸립을
효과적으로 해내기 위한 풍물이냐,
군사적인 목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풍물이냐,
피로나 기분을 잘 풀 수 있는 풍물이냐’가
풍물의 주된 존재 의의였음을 주목해야 한다.
바꾸어 말하면 풍물이라는 것은 생활이라는
큰 토대와의 관계속에서만
그 의의가 살아난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기예를 팔아 생존수단으로 삼는
전문 연희풍물이 풍물의 전부가 될 수도 없었고,
중심이 될 수도 없었다.
즉, 살아가는데 부딪히는 당면과제
(일, 사업, 치병, 신앙생활)를 어떻게 하면
효율적이면서도 원하는 바대로 성취해 낼 수 있을까?라는
일상적이고 근본적인 현안에 대해 풍물이라는 것이
일익을 담당해야 할 몫(역할)이 무엇이겠는가? 가 중요했다는 뜻이다.
이 말은 풍물이 풍물 그 자체만으로는
존립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다시 한 번 더 강조하지만 풍물(굿)이라는 것은
생활과의 관계속에서만
그 생명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러니 풍물과 생활의 당면과제를 결합시키고
총괄할 수 있는 존재가 반드시 필요해 진다.
예술가’라고나 할까,‘놀이꾼’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예술가나 놀이꾼은 이성보다는 감성이 더 발달된 사람이고,
땅을 파거나 고기를 잡기보다는 노래하고
춤추고 두들기기를 더 좋아하는 성향임에 분명하다.
게다가 치배를 통솔하여 악과 소리와 놀이를 책임지는 상쇠에게
이 이외의 다른 영역을 요구하거나 책임이 지워지는 것은
분명 무리가 있다.
비유하여 표현하자면 어느 동네나 지역의 문화뿐만 아니라
경제와 정치와 국방과 종교와 외교까지
상쇠에게 집중시키는 것이 가능했겠는가?
상쇠가 다른 분야의 전문성까지 겸비한다는 것은
물리적으로나 생활공동체의 역의관계로 보나,
에술가의 속성으로 보나 무리스럽다.
굿을 하고자 하는 영역의 전문가나
공동체의 중심인물이 책임의 자리에 앉아서
직면한 사안을 조정하고 이끌어 가는 것이
조직관리면에서나 능률면에서나 효율성에 있어서 맞는 구도요
적절한 장치임이 분명하다.
풍물은 풍물 그 자체만으로 보지 않고
풍물을 공동체나 생활과의 관계속에서 바라보면 분명 그렇다는 뜻이다.
이처럼 풍물굿이 생활문화로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기 때문에 설사 365일 내내
굿만 치는 풍물꾼이나 상품으로서의 연희풍물이라 하더라도,
일로서의 풍물, 재원마련으로서의 풍물,
전투로서의 풍물, 제의로서의 풍물,
풀이로서의 풍물을 수행하는 자리(판)에서
자신의 기예를 파는 경우가 많았다.
문화의 수요와 정서가 그랬다는 말이다.
기예를 파는 풍물꾼들이 비록 생존수단으로
기예를 팔더라도 기예 그 자체는
일반인들의 구체적인 생활에 좋게 역할을 함으로서
꾼(풍물꾼)들마저 일반인들의 생활에 직접 동참하여
직접적으로 역할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 셈이다.
요즘 식으로 표현한다면 문화의 공급 즉,
문화의 유통망이 그렇게 형성되어 있었다는 말이다.
그럼으로서 풍물(굿)이 풍물을
향유해야할 대중들의 생활과 유리되지 않을 수 있었고
업으로 하는 풍물꾼들의 뛰어난 재주가
현실과 유리되거나 귀족화되는 것을 막아줘
참다운 예술로 역할 할 수 있도록 해줬다.
또한 상쇠를 대장으로 내세우지 않는 것은
문화(굿)을‘고상한 예술’이라고만 생각하지 않았고,
단순히 소비상품으로만도 취급하지 않았으며,
통치수단의 일환으로만 생각하지 않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너무 특별한 것으로 필요이상 대접하지도 않았고,
하찮고 천한 것으로 비하하지도 않았다.
그저 다른 생활의 방편과 똑 같이 취급하였다.
오히려 문화의 여러 가지 긍정적인 기능과 역할에
일찍부터 주목하여 모든 생활방식을 굿화 시킴으로서
삭막하고 치열한 생존경쟁의 싸움터를 여유있고
부드러운 공존의 삶으로 전환시키는 지혜를 발휘하였다.
그런 미학이었다.
자 이래도 과거를 다시 반추할 이유가 없을까?
이런 정신까지 고리타분하다고 할 수 있을까?
이 정신이 맞다면, 이 정신이 현재에도 발현될 수 있는
방식의 개발과 수요창출, 그리고
유통망 건설이야말로 진정 우리가 해야할 일이지 않겠는가?
그런데 영좌, 좌상, 화주, 군사는 그 생성토대로 보나
행동하는 모습으로 보아 계급적이고,
왜래문화적이고, 봉건적인 요소가 깔려있음도 부인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풍물굿에서는 그렇지 않은
진짜 우리의 대장, 풍물의 대장은 없었을까?
물론 있었다. 대포수가 바로 그렇다.
대포수가 진정한 우리의 대장이다.
대포수! 사냥꾼이라는 말이다.
말 그대로 하면 뭐 대단한 존재도 아니다.
사냥좀 잘 하는 사냥꾼이 뭐 어떻다는 것인가.
게다가 요즘 민속경연대회나 농악경연대회에서 흔히 볼 수 있
는 신식 대포수의 모습에서 대장의 풍모를 찾기란 어렵다.
워커까지 구색을 맞춘 예비군복
(혹은 군복차림)에 베낭이나 망태기를 들쳐맨 대포수.
누군가의 뱃속에 이미 들어가벼렸을 것임에 틀림없는 꿩이나
토끼의 가죽 껍데기가 달랑 거리고… 짓궂은 사람들은
살아있는 생닭을 매달아 구경꾼들의 웃음보를 자극하기도 한다.
장난감 같은 목총을 무기로 하여
사냥하기에 여념이 없는 어릿광대짓!
시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샘솟아나는 놀이정신이
분명 꿈틀거리지만 대장다운 풍모를 찾기란 불가능하다.
완전히 웃음거리로 전락돼 있다.
그러나 대포수가 머리에 쓰는 모자, 등에 짊어지는 사냥물,
어깨에 짊어진 총의 본래 의미를
음미해 보면 그리 단순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