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5일 충실한 그리스도인
예수님은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을 위선자라고 하셨다. 위선자는 속과 겉이 다른 사람, 겉은 선하지만 속은 그렇지 않은 사람이겠다.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은 우리가 자기가 먹으려고 텃밭에서 기르는 상추, 고추, 깻잎 같은 것들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그런 것들까지 십일조를 계산해서 하느님께 바치고, 마시는 물에 혹시 눈에는 안 보이는 부정한 벌레 같은 게 있을까 봐 그것도 채로 걸러서 마셨다. 그들은 율법을 정말로 철저히 열심히 지켰다.
그런 그들을 예수님은 위선자라고, 거짓말쟁이라고 부르셨다. 왜냐하면 그들의 그런 율법 준수는 하느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마태 23,5) 그런 걸 보고 사람들이 선생이라고 불러주고 존경하는 걸 그들은 속으로 은근히 즐겼던 모양이다. 예수님이 투시력이 있어서 그들 마음속을 들여다보셨다기보다는 그들 언행을 보고 그들 마음을 아셨을 거다. 그들은 사람들의 칭송과 찬사에 마음을 빼앗겨서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잊었다. 우리 하느님은 겉모양이 아니라 속마음을 보시는 분이다. 십일조는 하느님께 대한 내 마음의 표현이다. 가난한 과부가 동전 두 닢, 자신의 생활비를 모두 헌금함에 넣었던 거처럼 말이다. 우주 만물이 다 하느님 것인데 우리가 뭘 얼마나 바칠 수 있겠나. 우리가 하느님께 바칠 수 있는 건 돈 얼마, 과일 몇 상자가 아니라 하느님께 감사하며 기쁘게 봉헌하는 마음이다. 그들은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했다.
우리에게도 그렇지만, 자선과 기도와 단식은 유다인들의 삶을 떠받치는 기둥 같은 것이었다. 예수님은 자선과 기도와 단식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 이미 가르쳐주셨다.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너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마태 6,3.6.17) 이웃을 속이려는 게 아니라 하느님께만 몰래 드리는 거다. 그리고 여기서 받지 못한 상과 칭찬의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상, 하느님의 칭찬을 기대하는 거다. 아침저녁으로 바뀌고, 앞에서는 칭찬하고 뒤에서는 욕하는 사람들의 칭찬, 고문 기술자와 내란 친일 반역자들에게 줬다가 뺏는 훈장, 그런 상을 기대하는 게 아니다. 영원하신 하느님, 숨은 일도 다 찾아보시고 꼼꼼히 기록해 두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칭찬을 바란다.
하느님과 약속한 것들을 지키지 못했다고, 죄를 지었다고 고백하는 교우들을 만난다. 그 약속은 대부분 기도를 언제 얼마나 하겠다든가, 성경을 정기적으로 읽겠다든가 하는 것들이다. 수도자나 성직자처럼 공적으로 서약한 게 아니고 혼자서 신심적으로 한 약속이라서 그걸 죄라고 부를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런 걸로 마음 아파하고 송구스러워하는 마음은 참 좋다. 약속이라기보다는 개인적인 바람이겠지만 말이다. 드러나지 않게 하느님과 한 약속을 지키려는 마음, 하느님과 관계 맺음이다. 그 약속 안에 기도나 성경 읽기만 아니라 가장 작은 이들을 얼마나 어떻게 섬기겠다는 구체적인 계획도 있으면 정말 좋겠다. 사실 기도와 성경 읽기는 하느님을 위한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다. 자선과 선행은, 특히 작은 이들 돌봄은 주님께 직접 해드리는 것이다. 자선과 선행은 밥 먹듯, 기도는 조용히 혼자서, 희생과 단식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하는 그리스도인, 그들이 충실한 그리스도인이고, 그런 우리들은 하느님이 세상 창조 때부터 우리를 위하여 준비해 두신 선물을 받는다.(마태 25,34)
예수님, 매일 결심하고 매일 못 지켰어도, 오늘 또 새롭게 결심하고 실천하려고 노력합니다. 제가 주님께 뭘 드릴 수 있겠습니까?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려는 작은 지향을 드립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드러나지 않고 내적인 기쁨을 찾게 도와주소서. 아멘.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