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3:22~28 세례요한과 예수님
(요 3:22) 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침례를 베푸시더라
(요 3:23)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침례를 베푸니 거기 물이 많음이라 그러므로 사람들이 와서 침례를 받더라
(요 3:24)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요 3:25)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과 더불어 정결예식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요 3:26) 그들이 요한에게 가서 이르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침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요 3:27)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요 3:28) 내가 말한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시기심이 심한 사람이 있습니다. 시기심은 나도 고통스럽고 상대방도 고통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임진왜란 때 원균이 이순신 장군을 시기한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의 시기심으로 이순신 장군은 고문을 받고 백의종군을 했지만, 원균 자신도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많은 군인을 죽게 하고 자신도 전사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시기심은 본성이라 극복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세례요한은 충분히 예수님을 시기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 시기심을 극복하였습니다. 그가 어떻게 시기심을 극복할 수 있었을까요?
22~26 요한의 제자들은 요한에게 시기심을 부추겼습니다.
요한이 세례를 베풀자 많은 사람이 요한에게 나왔습니다.
그가 세례를 주자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요단강 사방에서까지 나왔습니다. 요한의 인기는 대단했습니다.
요한을 그리스도 엘리야 그 선지자로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세례를 주자 요한에게 오던 사람들이 예수님에게로 갔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자신들은 점점 초라해지고 예수님은 점점 커지니 요한이 그 사람들을 막아주기를 바랐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에게 시기심을 부추겼습니다.
이런 시기심은 우리 본성입니다. 우리나라 속담에서는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하였습니다. 동생이 태어나면 형은 사랑을 빼앗겨 아시한다고 합니다. 그것은 형이 동생을 시기한다는 말입니다. 이 시기심은 앞서 서론에서 본 것처럼 우리를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먼저 시기심은 나를 고통스럽게 합니다. 성경에서는 시기심은 뼈를 썩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사울은 다윗의 인기를 시기하여 심히 번민하였습니다. 악령이 그에게 임하여 고통하였습니다. 다음으로 시기심은 자신을 망하게 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고통스럽게 합니다.
사울의 시기심으로 다윗은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다윗의 사람들도 고통을 받았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이런 시기심을 극복하지 못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러나 시기심은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은 시기심을 극복했고 우리도 충분히 극복할 수 있습니다. 시기심의 뿌리를 알면 극복할 수 있습니다.
시기심의 뿌리는 첫째, 비교 의식입니다. 내가 비교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는 시기심이 없습니다. 부모는 자식에 대해서 시기하지 않습니다. 부모는 자식이 잘되면 기뻐하고 시기하지 않습니다. 목자는 양들이 잘 되는 것이 기쁨입니다. 그러나 자녀들 사이에는, 양들 사이에는 비교하고 시기합니다. 내가 시기하는 사람들이 잘 되면 기분이 좋지 않고 잘못되면 기분이 좋습니다.
둘째, 시기심의 뿌리는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기 때문에 시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하나님을 더 드러내고자 하면 시기심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요한은 이런 시기심을 어떻게 극복했을까요?
첫째, 하나님의 주권을 믿어야 합니다.
(요 3:27)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요한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세례받으러 가는 것은 하늘이 주신 것임을 알았습니다.
이제 요한의 시대는 가고 예수님의 시대가 오는 것을 알았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이 있음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만민 구원역사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음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을 믿으면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을 시기하면 상대방을 고통스럽게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를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입니다. 그런데 가인은 아벨을 시기하여 돌로 쳐 죽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지 않고 하나님을 대적한 것입니다.
둘째,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해야 한다.
(요 3:28) 내가 말한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요한은 예수님과 자신의 정체성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요, 자신은 예수님의 선구자로 발견했습니다. 릴레이 경기에서 요한은 예수님에게 배턴(바통)을 넘겨주고 떠날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요한에게서 예수님에게로 가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다음 주자인 예수님이 잘 달리면 자신에게도 유익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높아질수록 요한도 높아집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을 발견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 앞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얼굴에는 입과 귀와 코와 눈이 있습니다. 그들은 서로 시기하지 않고 서로를 도와줍니다. 귀와 코와 눈이 잘 되는 것이 입에도 유익합니다. 귀로 잘 듣고 코는 냄새를 맡고 눈은 보아야 입도 맛있게 먹을 수 있습니다. 입과 눈과 코와 귀는 몸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해야 비교 의식이 사라집니다. 우리는 서로를 비교하거나 시기의 대상이 아닙니다.
나는 나입니다. 나는 나의 역할에 충실하면 됩니다. 상대방은 상대방의 역할을 잘해야 합니다. 상대방이 잘되는 것이 나에게도 유익한 것입니다. 우리는 나의 일에 충성하는 것이 남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알고 각자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고 다른 사람이 잘할 때 박수를 쳐주어야 합니다.
우리나라가 일본이나 중국에 시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일본 경제가 성장하는 것이 우리 경제에 유익합니다. 중국 경제가 안정되는 것이 우리 수출에 도움이 됩니다. 그것은 일본이나 중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라가 잘 되는 것이 일본이나 중국에 유익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시기심은 죄악 된 본성입니다. 시기심은 자신의 뼈를 썩게 하는 것이요,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공동체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시기심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넉넉히 시기심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때 시기심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사울은 시기하여 스스로 망했지만, 사울보다 더 시기심에 사로잡힐 만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사울의 아들 요나단입니다. 당연히 자기가 왕위를 이어받을 수 있었습니다.
다윗이 왕이 되면 자신은 왕위를 잃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시기를 극복하고 오히려 다윗을 도와주었을까요? 하나님을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다윗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요나단도 하나님을 사랑하였습니다. 그들은 서로 만났을 때 서로 마음이 통하였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여 자신이 가장 아끼는 칼과 군복을 주었습니다.
다윗을 보호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 시기심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또한 비교 의식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나를 존귀한 존재로 발견해야 합니다. 높은 자존감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시고 심히 기뻐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돈이 없어도 사람들이 보기에 못생겼어도 좋은 직장이 아니어도 하나님은 우리를 심히 기뻐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나의 높은 자존감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 기뻐하는 자녀로 발견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 앞에서 존귀한 존재라는 것을 알고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시기하지 않고 함께 잘 되는 공동체를 만들 수 있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