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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소설에 등장하는 지명, 인물, 단체, 사건 등은 실제와 전혀 무관한 허구입니다
울랄라남양 님 인물표 제공♡
쁘띠망크림 님 캘리그라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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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 . 검은 절벽
Writer . 쁜틳♡
Start . 12. 01. 10
불펌. 도용을 금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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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하룻강아지야. 이 나라 정치판은 말이다, 네년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무섭단다.
< 검은 절벽> 01
24일 새벽, 이십대 초반의 인기 여배우 K는 자주 다니는 클럽에서 한 남자를 만났다.
형형색색으로 번들거리는 사이키 조명과 자지러지는 웃음소리 비명소리, 그런 것들이 숨 쉴 때마다 폐부를 훑고 나오는 어두침침한 라운지 위에서, 남의 이목 따위야 안중에도 없다는 기세로 난간을 부여잡고 1층 무대를 향해 마구 비명을 지르고 있던 그녀는 언제부터인가 젊은 남자 하나가 자기 옆에 다가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남자는 오래전부터 그녀의 팬이었노라며 그녀에게 병에 든 술을 건넸다. 평소라면 이런 어쭙잖은 수작이야 차갑게 코웃음치고 무시해버렸을 그녀였지만, 오늘은 이상스레 마음이 들떠 사로잡히는 느낌이 있었다. 남자와 그녀는 시시껄렁한 농담들을 주고받으며 웃고 떠들고 술을 마셨다. 남자의 얼굴은 오랜 시간 쳐다봐도 왜인지 제대로 분간키 어려운 인상이었다. 그러나 드문드문 비치는 조명 불빛에 엿보이는 얼굴 윤곽과 그 안에서 유독 두드러지는 눈매며, 특히 차가운 혀로 귓가를 핥는 것 같은 남자의 목소리들에 그녀는 금세 홀리듯 취하고 말았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남자는 슬쩍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서는 밖으로 나가자고 속삭였다. 그녀는 취한 채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숨을 한 번 깊게 들이마셨다. 남자에게서는 강렬한 스킨 냄새가 났다.
곧장 그녀의 차로 향한 두 사람은 두 번 섹스를 가졌다. 처음엔 술기운에 휩쓸려 뭐가 뭔지도 모른 채 지나갔다. 그러나 두 번째에는 차츰 정신이 들어 그녀는 남자의 입술이 닿는 곳마다 감각세포가 날뛰는 듯 짜릿한 전율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이런 데에 있어서 남자는 먼젓번의 점잖기만 하던 수작이나 그 은근한 목소리와는 달리 거칠고 무자비했다. 그녀는 탈진으로 온몸이 축 늘어질 때까지 남자에게 흔들리고 매달리며 비명을 질러댔다. 언제 정신을 놓았는지도 모르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남자는 멀끔히 옷을 다 차려입고 운전석에 앉아 차를 몰고 있었다. 창문을 열어놓았는지 찬바람이 눈두덩 위로 불어왔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잔잔한 음악이 바람결에 부서졌다. 속도 계기판이 160을 넘어가는 것을 보고 그녀는 잠긴 목소리로 자기가 운전하겠다며 떼를 썼다. 그는 그러라고 했다. 차가 신호등 바로 밑에서 멈췄다. 도로 위 그녀의 차 말고는 주황색으로 길게 늘어선 가로등 밖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그는 차에서 내리기 전 뭔가 잊어버린 사람처럼 다시 되돌아와 그녀의 입술에 진한 입맞춤을 남겼다.
같은 날 오전 7시, 인기 여배우 K씨가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었다는 뉴스가 처음 전파를 탔다.
가드레일을 뚫고 도로 밖으로 추락한 K씨의 자동차가 처음 발견된 것은 그로부터 2시간 전인 새벽 5시 무렵이었다. 처음 K씨를 발견한 목격자의 말에 따르면 K씨는 처참하게 찌그러진 자동차 운전석에서 핸들에 머리를 박고 숨져 있었다고 했다. 전날 K씨가 자주 다니던 클럽에서 술을 마시다가 새벽 1시 경 밖으로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는 지인들의 진술을 종합해, 경찰은 이 사건을 음주 운전으로 인한 안타까운 사고로 결론지었다. 젊은 배우의 갑작스런 죽음에 사람들은 충격과 슬픔을 금치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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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0일 아침.
ㅡ ……참으로 충격적인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전(前) 청와대 경제 수석비서관 고(故) 이창경 씨와 부인 박자영 씨가 부검 결과 자살이 아닌 살해당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수사 결과 용의자로 ‘민주주의와 자유를 수호하는 시민연대’(이하 민자련) 간부 이진호 씨가 지목되었으며, 오늘 오전 이 씨를 비롯한 민자련 간부 세 명에게 구속 영장이 발부되어……
라디오를 끄자마자 전화가 걸려왔다. 새벽부터 영운을 애타게 찾는 주인공은 그의 양아버지 김근학이었다. 용건이야 뭐, 전화벨이 울린 그 순간 바로 직감했다.
ㅡ …… 서인석이 도지사 후보로 나가는 것도 우스운데 덜컥 당선이라도 된다면 나한테 더 이상 기회는 없다. 그 돼지새끼, 분명 내년 총선 공천 과정에도 개입해서는 분명 내 모가지부터 잘라낼 거야. 그 전에 우리가 먼저 싹을 잘라버리는 거다. 이번만 잘 넘기면 분명 치고 올라갈 수 있어.
ㅡ …….
ㅡ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라, 영운아. 믿을 사람이 너 말고는 없다는 거 네가 더 잘 알잖니? 네가 분명 성공할 거라는 건 믿어 의심치 않아. 이번에 그 돼지새끼 목을 따고 나면 내가 그 사이를 치고 올라갈 테고, 그럼 너도 내 오른팔로서 더 이상 음지에서 숨어 활동하지 않아도 되지 않겠느냐?
ㅡ 알겠으니 이만 끊죠. 지금 운전 중이라서.
영운은 핸드폰을 조수석으로 거칠게 내던지고는 있는 대로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이른 비가 부슬부슬 날려 차창에 자국을 남긴다. 기분 전환이라도 할 겸 라디오를 다시 틀어보지만 나오는 거라곤 죄다 청와대 비서 부부 살해 사건뿐이다. 그는 도로 라디오를 끄고 단조롭게 입 끝만 슬쩍 올렸다 내렸다. 이주 전 그렇게 떠들어대던 인기 여배우 K의 죽음 따위는 이제 관심 밖으로 내몰린 지 오래다. 그는 대중에게 잊혀진 여배우 K의 죽음에 깊은 애도를 표하며 엑셀을 밟았다.
영운의 직업은 정치계에서 활동하는 로비스트다. ('표면적으로'는 그랬다.) 외국처럼 활성화된 직업이 아니라서 제 직업을 소개하고 나면 상대방은 “네?”하고 되묻기 일쑤다. 보통 음지에서 활동하는 일이 많은 직업이라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없는 일이지만, 어쨌든 그에게는 ‘B'라는 멋들어진 닉네임도 있었고 보수도 그런대로 좋았다. 그렇다고 B로서 그가 활동하는 일이 그다지 많은 것도 아니었다. 귀찮고 시간 오래 걸리는 일보다야 빈둥빈둥 놀고 약에 흠뻑 취해 클럽에서 마음에 드는 여자와 원나잇하는 시간이 넘칠 만큼 충분했으니, 이 라이프에 이렇다 할 불만이 있을 리가 없었다. 육체적 쾌락에 흠뻑 젖어 짐승처럼 즐기는 것을 유일한 낙이요, 미덕으로 아는 쾌락주의자인 그에게 있어서는 최고로 이상적인 삶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 한 때는 그랬지.
그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가차 없이 씹어 먹기라도 할 기세로 빗속을 거칠게 내달렸다. 머릿속으로는 계속 아까의 통화 내용이 맴돌았다. 영운의 양아버지이자 현 창조당 소속 국회의원인 김근학이, 같은 당 소속인 서인석을 이번 도지사 선거에서 낙선시키기 위해 영운을 서인석의 도지사선거캠프에 스파이로 보내버렸다고 했다. 김근학이 서인석을 미워하는 이유야 단 한 가지뿐이었다. 자신이 내년 총선, 나아가 내후년 대선에 진출하는 데 서인석이 걸림돌이 된다는 거였다.
그래, 그런 게 뭐 어쨌든 아무런 상관없다. 그런데 왜 그 살찐 걸림돌을 내가 치워야하냔 말이야.
줄기가 봄비답지 않게 제법 굵어졌다. 불쾌한 감정을 추스르려고 새벽부터 빗속을 질주한 것인데 마음이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점점 이성의 끈이 얇아져갔다. 이럴 때, 그가 가장 견디기 어려워하는 파괴욕과 수시로 찾아드는 분노를 어찌해야 좋을지 모를 때에는 여자가 절실해진다. 모든 이성이란 이성의 끈을 잘라버린 뒤, 욕구에만 충실한 짐승이 되어 여자를 정신이며 몸이며 만신창이가 되도록 할퀴고, 취하고, 파괴해버리면 비로소 그의 온전한 이성이 되돌아오는 것이다. 아아, 아랫도리가 뜨거워지고 손가락이 초조함으로 떨렸다. 이런 이른 아침에 어디로 가야 여자들이 기꺼이 다리를 벌려줄까. 머리 위에서 신호가 빨간색으로 바뀌었다. 평소처럼 가볍게 무시하고 지나갈 요량이었다. 그런데, 별안간 차 앞으로 불쑥 뻗어진 흰 팔이 그의 차와 그의 상념마저 모조리 멈춰버리고 만 것이었다
인도 쪽에서 내밀어진 팔이다. 그는 거의 핸들에 코를 박을 지경으로 차를 멈춰 세우고는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 빗속에서 우산도 쓰지 않은 채 한 여자가 차 옆에 바짝 붙어 서서 안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여자가 대뜸 제 소매로 운전석 쪽 창문의 빗물을 쓱쓱 닦아냈다. 닦아내고 보니 한 눈에 봐도 장작개비처럼 비쩍 마른 여자였다. 앙상하게 마른 뺨 위로 툭 튀어나온 광대뼈와 비에 젖어 삶은 미역처럼 보이는 검은색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가, 창문 좀 내려달라며 검지를 까딱거리고 있었다. 여자의 그 꼴에 질려 그가 욕지거릴 쏴주는 것도 포기하고 다시 출발하려하자, 이번엔 여자가 문고리를 잽싸게 잡고는 창문에 제 얼굴을 바싹 댔다.
ㅡ 길 좀 물어볼게요!
이걸 그냥 받아버려? 오늘 맨몸으로 나왔다는 사실을 미친 듯이 후회하며 다시 엑셀을 밟으려던 참이었다. 여자가 손을 놓지 않자 그는 짧은 한숨을 쉬고, 똑바로 여자를 노려보며 사납게 말했다.
ㅡ 얼굴에 바퀴자국 내버리기 전에 손 떼.
그 말에 여자가 겁을 집어먹고 정말로 손을 뗐는지 어쨌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는 서슴없이 엑셀을 밟아버렸다. 한시라도 빨리 세차를 새로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할 수만 있다면 저런 끔찍한 몰골을 가진 여자들을 모조리 총살해버리고 싶은 생각이었다. 백미러로 돌아본 그 이상한 여자는 온통 비를 맞으며 그 자리에 박혀 멀어지는 차 꽁무니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는 입술을 비죽이고는 갈 길을 재촉했다.
ㅡ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그러니까 영운이 막 13살로 접어들었던 어느 추운 겨울날, 그는 당시 보수당 최고위원의 측근이었던 김근학의 비공식적인 양자가 되었다. ‘비공식적’인 입양 절차에는 호적상의 편입이라든가 그런 복잡한 절차 같은 것이 필요치 않았다. 그래서 단지 김근학이 한 일이라고는 열악한 고아원 시설에서 추위에 동상 걸린 발을 벅벅 문지르고 있던 열세 살짜리 남자애 하나를 물건 사듯 데리고 온 것뿐이었다. 14년 전 그 겨울날 김근학이 기별도 없이 작고 말라비틀어지고 추위에 빨개진 코를 훌쩍이고 있던 남자애를 본가로 데려오자, 집안사람들은 처음엔 이 애를 어찌 대해야 좋을지 몰라 혼란스러워했다. 그러나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게 제 방에만 쥐 죽은 듯 박혀 있다가, 식사 때가 되면 귀신같이 나와 밥 한 그릇을 금세 해치우고는 또 홀연히 사라져버리는 그 애를 나중에는 누구랄 것도 없이 제 때 맞춰 물만 주면 되는 선인장쯤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 뒤 14년이다. 그사이 영운은 젖비린내 나던 꼬맹이 시절의 애티를 벗고 매력적인 이목구비와 날선 눈빛과 조소를 즐겨하는 입매를 가지게 되었다. 먹고 버린 고기 꼬챙이처럼 비쩍 마르고 땅콩처럼 조그마했던 애송이는 이제 몰라볼 만큼 껑충 키가 컸고 갖은 운동으로 다져진 몸이 균형 잡혀 보기 좋은 미남자가 되어 있었다. 그 흔한 말 한 마디 미소 한 줌 없이, 식사 때만 되면 귀신 같이 밥그릇만 비우고 다시 제 방으로 들어가 잠자코 있으면서도, 뭘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어 집안사람들을 근거 없는 공포에 떨게 하던, 종국엔 넌더리나는 무관심으로 일관하게 만들었던 13살짜리 남자애였다. 그 애가 지금처럼 깊은 생각에 잠겨 코끝을 찡그리고 있는가하면 문득 입술을 움직여 익살스런 조소를 짓는 모습을 집안사람들이 보게 된다면, 이 애가 그때 그 지독히도 메말랐던 그 애인가하고 놀랄 일이다. 원체 몸이 허약하고 심약했던 사모님, 그러니까 이제는 얼굴마저 기억에서 희미한 김근학의 아내 되는 사람은 아침저녁 시간에 으레 그의 앞에 놓아주던 밥그릇을 뎅그렁 떨어뜨리고는 ‘오, 세상에나’하고 비명을 지르겠지. 희미하긴 하지만 그 자신의 기억 속에서도 예전 그는 지독하게도 표정이란 게 없었다. 어쨌든 5년가량 발붙이고 살던 집이란 곳에서 선인장 취급을 받아왔던 그였다.
그는 지금 그 조소를 즐겨하는 입매를 한껏 일그러뜨린 채 자신의 애마인 메르세데스 벤츠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바글거리는 앞에‘믿음으로 보답하는 도지사, 기호 2번 창조당 서인석’이라고 쓰인 플랜카드가 유세용 차에 걸려 그의 시선이 닿은 끝에서 펄럭거리고 있었다.
현재 영운의 업무는 서인석 후보의 도지사선거캠프의 참모로서 그의 유세를 돕는 것이었다. 표면적으로는 그렇고 사실은 서인석과 대립 관계인 김근학의 사주를 받고 스파이로 잠입한 것이다. 결국 반강제적으로 이따위 돼먹지도 못한 스파이 짓거리를 하게 됐다. 많은 청중들 사이에 영운이 고용한 사람들 열 명 정도가 섞여 청중들의 호응을 유도해주고 있는 것을 보며, 그의 입매가 슬슬 비뚤어졌다. 그의 꼬인 심사를 비웃듯 서인석은 사람들 앞에서 열정적인 연설을 펼치고 있었다. 젊은 세대에 속하는 정치인답게 내뱉는 목소리마다 힘이 있고 자신만만하다.
창조당 대표 윤구진을 비롯한 정계에 뼈가 굵은 기성세대와 서인석이 오래전부터 어떻게 관계를 유지해왔던가는 모르지만, 정치적 수완이 뛰어난 서인석에게 윤 대표가 깊이 의지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대중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윤 대표뿐이 아니라, 창당 8년 만에 창조당을 야당 1위당으로 끌어올린 공적으로 이미 창조당에게서도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된 서인석이다. 그를 지방선거가 실시된 이래 여당인 보수당이 한 번도 승기(勝氣)를 뺏긴 적 없다는 K도에 출마시키고 전폭적인 지지를 아끼지 않는 당 내의 계획도 이러한 믿음으로부터 던져진 승부수라 할 수 있었다. 대선을 2년 앞둔 이 시기에, 젊고 야심만만한 이 정치가에게 큰 힘을 실어주는 것이 이번 대선에 그를 출마시킬 목적으로부터 비롯된 계획이 아니냐는 추측이 평론가들 사이에서 오고 가기도 했지만, 아직 공식적으로 발표가 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서인석이 상승세를 타고 있는 이런 상황에서 김근학이 애가 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무튼 영운은 그런 사내를 (표면적으로는) 제 손으로 떠받들어줘야 한다는 사실이 여간 마음에 들지 않았다.
ㅡ 이제껏 보수당이 여러분을 위해 한 일이 무엇입니까? 나라 경제 살리기라는 명목 아래 피해를 입은 건 오히려 힘없고 선량한 도민 여러분이었습니다. 이제 저 서인석은 여러분 앞에서 K도 도민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보필하는 믿음 있는 도지사가 될 것을 약속드립니다. 존경하는 도민 여러분! 도민을 우롱하지 않는 깨끗한 정치, 서민의 숨을 트여주는 사려 깊은 정치, 마지막으로 여러분의 믿음에 배신하지 않는 정치를 제가 앞장서 이끌어나가겠습니다. 믿음이란 이름으로 기호 2번 서인석을 기억해주십시오!
작위적인지 무언지 알 수 없는 환호소리가 터져 나온다…….
영운은 밖으로 내려와 차에 기대어 서서 그 장면을 계속 주시했다. 서인석이 목이 터져라 믿음을 외치며 자신 있고 거만한 표정으로 두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그러자 맡은 일에 충실하게 연신 두 손을 내지르며 환호성을 질러대는 고용인들과 무언지도 모르고 따라서 호응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 와중에 바람이 불어 부산스레 펄럭거리는 플래카드 따위가 영운의 온 감각을 어지럽게 만든다. 그는 오른손 엄지와 검지로 총 모양을 만들어 연설을 끝마치고 막 단상에서 내려오고 있는 서인석의 머리를 겨누는 시늉을 했다. 쓰리, 투, 원, 빵! 익숙한 총소리가 입가에 흩어지자마자 머리에 총구멍이 난 채 바닥에 점점이 핏자국을 남기고 있는 서인석이 눈앞에 그려졌다. 눈을 감았다 다시 떴다. 서인석은 재빨리 제 차에 올라타 다음 구역으로 이동할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그는 뜻 모를 표정으로 의자 등받이 위에 비죽 솟은 서인석의 머리꼭지를 응시하며 자신도 출발할 채비를 했다. 그때였다.
퍽! 소리와 함께 크고 작은 돌멩이와 계란들이 서인석이 탄 차로 날아들었다.
ㅡ 이 사기꾼 놈아!
모여 있던 사람들이 미처 다 떠나지 못한 참이었다. 네다섯 명 남짓 되는 사내들이 고함을 질러대며 저마다 나무 피켓을 들고서 서인석의 차와 대치하고 있었다. 난데없는 일이 벌어지자 대기하고 있던 경호원 셋이 욕설을 뱉으며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영운도 따라가려다가 생각을 고쳐먹고, 차에 느긋하게 기대어 하는 양을 바라보기로 했다. 경호원의 제지에도 아랑곳없이 이번에는 밀가루가 날아들었다.
ㅡ 농사지을 땅을 죄다 먹어버리면 우리는 어떻게 먹고 살라는 거냐! 뒷돈 받아 처먹고 기업에 땅 팔아먹고는 보상 하나도 없이 농민들 내쫓아버리는 쓰레기 놈아, 니가 그러고도 사람이냐? 니가 그러고도 양심 있는 놈이냐! 너 이 새끼야 내려 봐! 내려서 삼자대면 하자고!
계란과 밀가루로 범벅이 된 차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구경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경호원들이 그들을 데리고 자리를 옮기려 했다. 생각지도 못한 전개에 영운의 입가에 슬쩍 웃음이 걸렸다. 불과 5분 전까지만 해도 수많은 도민들 앞에서 믿음의 이름으로 기억해달라던 인간이다. 그런 자가 뇌물 수수와 사기죄를 저질렀다며 지금 농민들의 공격을 받고 있는데, 그렇다면 지금 저 차 안에서 숨죽이고 있을 서인석은 과연 어떤 식으로 이 위기를 헤쳐 나갈지? 서인석이 이 사태에 어떻게 반응을 하던 흥미로운 결과가 될 것이라고 영운은 은연중에 생각했다. 그에게도 자못 기대가 되는 순간이었다. 경호원에게 붙들려 주먹질 발길질을 해대던 사내 하나가, 별안간 차를 향해 나무 피켓을 던졌다.
창문이라도 금이 갈 거라 예상했지만, 다음 순간 나가떨어진 건 창문이 아니라 웬 여자였다. 여자가 갑자기 달려 들어와 피켓을 몸으로 막아낸 것이었다.
구경꾼들 사이에서 비명이 터졌다. 물 젖은 종이처럼 바닥에 널브러져있던 여자는 곧 고통스런 기색도 없이 발딱 일어나서는 입고 있는 정장을 툭툭 털며 사내들 쪽으로 또박또박 걸어갔다. 사내들은 방금 제가 저지른 짓과 지금 벌어진 상황에 저희들이 놀라 꼼짝없이 얼어붙어 있었다.
ㅡ 방금 일에 대한 사과는 필요 없으니 됐습니다.
여자가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서인석의 반응을 기대하고 있던 영운에게는 웬 불청객인가 싶었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이 난데없는 등장인물에게 향해 있었다. 여자는 그 시선들에도 아랑곳없이 모두가 들으란 듯 일부러 목소리를 한층 더 크게 냈다.
ㅡ 정당한 이유 없는 시위와 폭력적 행위, 명예 훼손과 그로 인한 정신적 피해, 시간 낭비, 또 그로 인한 물질적 피해. 이것에 대한 법의 심판을 받으려면 그런 것들 일일이 신경 쓸 겨를도 없을 테니까요.
ㅡ 뭐야?
한 차례 군중들 틈으로 웅성임이 지나갔다.
ㅡ 서인석 후보께서 부당한 방법으로 땅을 매입하고 그것을 부적절한 방식으로 기업에 넘겨줘 이익을 챙겼다는 것 그리고 적절한 보상을 하지 않았다는 것, 명확한 증거를 제시할 수 있습니까?
ㅡ 지금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이 여자가!
ㅡ 서 후보께서는 의원직을 맡기 전 그러니까 15년 전, 기업 간부 시절 때 그 지역의 땅 수천 평을 소유하고 계셨고, 그 땅을 개발하고자 시에서 승인을 받았을 때 지역 주민들에게 일일이 동의를 구한 뒤 개발 참여 희망 기업 간에 경합을 붙여 정당하게 수주 기업을 선정했습니다. 물론 주민들에게는 적절한 보상을 마친 지 오래입니다. 그런데 보상 한 푼 받지 못했다니요? 지금 제 손에 보상 내역 서류가 있는데 이래도 계속 우길 겁니까?
여자가 모두가 볼 수 있게 일부러 손에 든 서류 봉투를 머리 위로 높이 들어올렸다. 소매 안으로 흰 팔이 조금 삐져나왔다. 영운의 눈매가 저도 모르게 조금 가늘어졌다. 사내가 당황했는지 한층 더 언성을 높여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다.
ㅡ 웃기지마! 그게 더러운 조작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ㅡ 231-2번지 김창례 씨, 232-6번지 김국춘 씨, 210-1번지 노병훈 씨 그 외 32명!
여자가 서류를 꺼내 또박또박 읽은 것이었다. 서류에 머물렀던 여자의 시선이 다시 사내에게 향하자 사내가 움찔 어깨를 떨었다.
ㅡ 뭐, 뭐야.
ㅡ 3년 전 보상을 마친 주민 분들의 이름입니다. 모두 70대 이상의 노인분이셨고 함께 사는 자제분들은 하나도 없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ㅡ 뭐?
ㅡ 그러니까, 3년 전 끝난 일을 이제 와서, 게다가 이런 젊은 사람들이 와서 따지는 것부터가 잘못된 일이란 말입니다. 아직도 인정할 수 없다면 다 같이 이분들에게 가서 확인해볼까요?
사내는 이제 완전히 할 말을 잃고 얼굴만 벌겋게 붉히고 있었다. 군중들 사이에서 드문드문 웃음소리가 들렸다. 여자가 차분한 음성으로 분명하게 말을 맺었다.
ㅡ 이런 조작을 할 거면 좀 더 제대로 조사한 뒤에 들이댔어야죠. 앞으론 이런 엉성한 수작은 씨알도 안 먹힐 테니 당신네 윗사람에게 잘 전해주시죠.
잠깐 정적이 흐른 뒤에, 마침내 사내들이 겁을 집어먹고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다가 피켓까지 버리고는 달아나버렸다. 경호원들이 고함을 지르며 그들의 뒤를 쫓아가버리자 모여 있던 사람들도 하나둘씩 흩어지기 시작했다. 고용인들이 달려와 엉망이 된 서인석의 차를 분주하게 닦아냈다. 그동안에도 여자는 계속 영운에게 등을 보인 채 그 자리 그대로 서 있었다. 일이 싱겁게 끝나버렸다. 실망한 영운이 다시 뒤틀린 심사가 되어 제 차에 올라타려 할 때였다. 갑자기 여자가 제 자리에서 비틀거리며 한 손으로 제 머리를 싸쥐는 게 보였다. 피켓으로 맞은 상처가 이제야 터진 모양이었다. 여자가 손수건으로 상처를 누르고 영운 쪽으로 비척비척 몸을 돌렸다. 차에 타려던 것도 잊고 가늘게 눈을 찌푸리고 있던 그와 여자의 눈이 스치듯 마주쳤다.
제일 먼저 그의 눈에 들어온 여자의 얼굴과 다리는, 무섭도록 말라 있었다. 종아리가 마치 그의 검지 같았고 얼굴은 머리카락을 전부 묶어 올려 더 비쩍 마르고 창백해보였다. 오히려 여자의 몸보다 여자가 입고 있는 옷이 더 커 잘못하면 벗겨지기라도 할 지경이었다. 남의 것을 주워 입은 듯 여간 어색해 보이는 게 아닌 차림새로, 한 손으론 머리를 싸매고 있고 다른 한 손으론 서류 봉투를 들고서 여자가 잠시 멈춰 서서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곧 여자가 그에게 걸어와 서류 봉투를 옆구리에 끼고, 한 손을 그 앞에 내밀었다.
너처럼 괴상한 몰골의 여자한텐 인사 안 받아, 라고 말하려다가, 아예 말도 섞기가 싫어서 마음을 고쳐먹었다. 다시 차에 올라타려는데 갑자기 온 몸에 마비가 온 것처럼 움직이던 것이 멈췄다. 다시 여자에게 고개를 돌렸다. 여자는 계속 손을 내민 채 그대로 서 있었다. 그 순간 안개가 끼어 희미하던 기억이 걷히고, 거짓말처럼 또렷한 이미지가 눈앞에 스쳤다. 굵은 비아래 빗줄기 사이도 통과할 것 같이 깡마른 여자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마르고 창백한 얼굴에 툭 불거진 광대뼈, 죽은 수초처럼 생기 없는 머리카락과 장작개비 같은 흰 팔……. 흘끗 시선을 옮겨 지금 그의 앞에 내밀어진 여자의 손 안쪽을 보았다. 빗속에서 얼핏 보았던 것과 같이, 아물고 벌어지고 아물기를 열 번도 넘게 반복했을 상처가 여자의 손목 위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 순간 그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주일 전이던가? 빗속에서 본 그 최악의 여자가 다시 나타나 앙갚음이라도 하듯 담담한 표정으로 손을 내밀고 있다. 우연이라면 기막힌 우연이었다. 알 수 없는 뭔가에 의해 농락당한 기분이 들자 걷잡을 수 없는 분노 같은 것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그는 입가에 가까스로 비릿한 조소를 머금고 여자의 손을 부서뜨릴 듯이 잡았다.
ㅡ 처음 뵙겠습니다. 서인석 후보님의 선거캠프 홍보부에 배정된 지호경이라고 합니다. 이번 선거에 함께 활동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이 여자는 아마 그를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처음 뵙겠다고 말하는 여자의 눈이 거짓 하나 없이 담담하고 차분하다. 여자의 머리를 감싼 손수건이 어느새 붉은 피로 흥건하게 젖었다. 이상하게도 여자의 피가 전에 없이 그의 비위를 건드렸다. 구역질이 치밀자 그는 대꾸도 없이 여자의 손을 팽개치고 차에 올라타 버렸다. 그리고 나머지 일정도 멋대로 무시해버리고는 곧장 호텔로 여자를 불러서 밤새도록 몸을 뒹굴어댔다.
다음날, 장작개비, 그러니까 지호경인가 뭔가 하는 여자가 머리에 거즈를 붙인 꼴을 해서는 차를 몰고 그의 오피스텔 앞에 나타났다.
오늘은 유난히도 화창한 날이었다. 매우 중요한 지시가 있기 전에는 기분 내키는 대로 일하는 영운에게는 결근을 하라고 하늘이 내려주신 축복처럼 느껴지는 날이었다. 그러나 그걸 알 리 없는 저 빌어먹을 여자는 짜증나게도 오늘 돌아야 할 구역이 많다며 열심히 그를 재촉하고 있다. 어떻게 주소를 알아냈느냐는 둘째 치고, 어이가 없어 할 말조차 잊은 채 서 있는 그에게 다가와, 어제 일은 까맣게 잊어버린 양 다시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는 여자의 넉살이 그의 신경을 박박 긁었다. 가만 보니 저 머리에 붙어 있는 거즈도 짜증을 돋운다. 그는 여자의 손은 잡지 않고 더러운 하수구 속이라도 들어다보는 양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ㅡ 어제 악수하지 않았나?
그가 오랜만에 느껴보는 이런 기분에 잠시 모든 생각을 잊었을 때, 예의 그 담담한 대꾸가 돌아왔다.
ㅡ 그쪽 소개는 듣지 못했죠.
ㅡ 말 안 해도 알고 있잖아?
대답이 궁해졌는지 여자가 슬그머니 손을 내리고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기 시작했다. 눈초리마저 짜증나는 여자. 맑은 하늘 아래서 보는 얼굴이지만, 역시나 특별한 점이라곤 눈곱만치도 없다. 단조로운 이목구비와 여전히 헐렁하고 어색한 정장 차림, 구두를 신었어도 부러질까 염려해야 하는 것은 구두굽이 아니라 오히려 제 자신의 다리일 것만 같다. 어지간히도 고집불통인지 그가 제 입으로 직접 이름이라도 말해주지 않는 이상 이 상태로 하루 온종일을 보낼 것처럼 보였다. 이런 날에, 드라이브는커녕 이 볼품없는 여자와 온 하루를 썩어야 한단 사실이 그를 최고조로 짜증나게 했다.
갑자기 그가 자신에게 향한 여자의 두 눈을 뽑아버릴 기세로 여자에게 달려들어 여자를 차로 밀어붙였다.
ㅡ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눈앞에서 자꾸 깔짝대지마.
여자의 눈이 겁을 먹고 커다랗게 떠졌다. 그가 목을 조를 듯이 여자의 목을 한 팔로 누르자 팔 아래서 맥박이 팔딱거렸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생생한 감촉이었다. 여자의 목은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 같이 지나치게 가늘어서, 그는 가능하다면 그 부러지기 쉬운 모가지를 부러뜨려 여자가 다신 입을 열지 못하게 해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ㅡ 함, 함께 활동하라는 지시를 전해 듣지 못했나요, 후보님께?
ㅡ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그 돼지새끼한테 내 일에 간섭할 권리 없어.
날카로운 그의 시선에 여자의 머리에 붙은 거즈가 스쳤다. 거즈에 묻어나온 붉은 피가 본능적으로 그의 혈관을 타는 듯이 끓어오르도록 했다. 그가 잠시 치밀어 오르는 열기를 주체하지 못할 사이 여자가 의외의 순발력을 발휘하여 재빨리 그에게서 벗어났다.
그가 잠깐 비틀거릴 사이 또 여자의 시선이 물끄러미 그에게 닿았다.
ㅡ 이 계집애가 건방지게,
ㅡ 계집애라고 불릴 나이는 훨씬 지났습니다. 그러니 지 참모라고 불러주시죠. 또는 조금 더 친해지면 호경 씨도 허용해드리죠. …… 이래가지곤 그쪽과 친해질 기회는 전혀 없을 것 같지만.
손가락 하나라도 튕기면 엿가락 부러지듯 부러질 것 같이 생긴 여자가 벌벌 떨면서도 제 할 말은 다 한다. 오히려 그가 말문이 막힌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양아버지인 김근학 앞에서도 할 말 못 할 말 안 가리고 퍼부어대던 그였으니 이런 상황에 익숙지 않은 것도 당연했다. 그는 또다시 물끄러미 닿는 여자의 시선이 벌써부터 지긋지긋해지려 했다. 그래, 이런 여자랑 같이 눈엣가시 같은 서인석 아래서 일해야 한다고?
일이 참 잘 돌아가는군! 그는 그렇게라도 소리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ㅡ 너, 아직 내 소문 못 들었나보다?
여자는 긍정도 부정도 없이 잠자코 있었다.
ㅡ 내가 이래봬도 능력 있는 로비스트긴 한데, 여자를 꽤, 아니다, 무한히 밝히거든. 하루라도 여자랑 옷 벗고 뒹굴지 않으면 잠을 잘 수가 없어, 잠을. 근데 나도 비위란 게 있으니까 너 같은 여자는 가릴 줄 아니 그건 별 상관없을 테고. 근데 나, 내가 생각해도 참 파렴치한 놈이긴 해. 이 일이야 그냥 심심해서 부업으로 하는 거고, 틈만 나면 여자 사냥에 돈 낭비에 약까지. 내가 이런 놈이야. 나랑 일하는 거 무지 힘들 거라고.
ㅡ 절 걱정해주시는 겁니까?
ㅡ 난 못생긴 여자 걱정하는 거, 제일 경멸해.
ㅡ 상관없습니다.
ㅡ 아, 진짜 성가시네. 이래도 안 떨어지겠다고?
여자는 또 잠자코 있었다. 그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ㅡ 그래, 난 분명히 경고했어. 이젠 내가 안 봐준다. 나중에 가서 울며불며 빌어도 소용없으니까 그리 알아.
그가 그렇게 말하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조수석에 올라탔다. 뒤따라 탄 여자가 천천히 차를 출발 시켰다.
그는 의자 등받이를 뒤로 젖히고 두 다리를 앞에 걸친 자세로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이주일하고도 이틀 더 된 빗속을 희미하게 부유하고 있었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건지 누구라도 잡고 물어보면 좋을까? 다시는 만나지 않았으면 했던 여자가 서인석의 참모가 되어 나타났고, 이젠 자신의 동료라며 그의 앞에 나타나다니. 어쩐지 누군가가 자신의 머리 위에 앉아있어 인형극을 하듯 조종하고 있는 것만 같아 기분이 불쾌해졌다.
ㅡ 그쪽은 뭐라고 부르면 됩니까?
별안간 여자의 침착한 물음이 날아왔다. 대답하기도 귀찮아서 그는 한 팔로 두 눈을 가리고는 짤막하게 대꾸했다.
ㅡ B.
ㅡ 인터넷 많이 하십니까?
ㅡ 뭐?
또 뭔 헛소린가 하고 그의 입가가 씰룩댄다.
ㅡ 인터넷에서 쓰는 닉네임 말고, 진짜 이름말입니다. 현실 세계에서 그쪽을 부르는 이름이요.
ㅡ 이제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지금.
그의 목소리가 한층 더 사납게 변했다.
ㅡ 너한테 알려줄 이름도 없고 알려주고 싶지도 않아. 네가 그 목소리로 내 이름 부르는 건 더더욱 끔찍하고. 웬만하면 그냥 그쪽이라고 계속 부르지? 아예 안 불러주면 더욱 좋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사나운 대꾸에 여자가 상처 받고 울음이라도 삼키고 있을 줄 알았는데 잠시 후에 담담한 물음이 날아들었다.
ㅡ 그쪽은 제가 싫습니까?
ㅡ 어.
ㅡ 왜요?
마치 ‘양치 후엔 과자를 먹으면 안 된단다’하는 엄마의 말에, ‘왜요?’하고 묻는 아이 같은 말투다. 그는 짧은 한숨을 뱉고는, 고개를 완전히 창문 쪽으로 돌려버리고 툭툭 대꾸했다.
ㅡ 너무 볼품없이 생겼어.
ㅡ 단지 그것뿐입니까?
ㅡ 성격도 맘에 안 들어.
ㅡ 단지 그것 뿐?
ㅡ 무엇보다 그 뻔뻔함이 제일 짜증나지. 이제 입 닫아. 시끄러워.
여자는 말 잘 듣는 개처럼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문득 생각의 자취가 여자의 머리에 붙은 거즈로 향했다. 머리가 찢어졌는데도 아무렇지 않아하는 걸 보면 참 독종이다 싶었다. 아픔이란 걸 느낄 줄 모르는 여자인가? 아무튼 이제까지 알던 여자와 몇 차원 다른 여자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는 또다시 불쾌해져서 여자에게서 완전히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수많은 잔상들이 빠른 속도로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서인석이 도지사 후보로 나가는 것도 우스운데 덜컥 당선이라도 된다면 나한테 더 이상 기회는 없다……. 이번에 그 돼지새끼 목을 따고 나면 내가 그 사이를 치고 올라갈 테고, 그럼 너도 내 오른팔로서 더 이상 음지에서 숨어 활동하지 않아도……’ 그렇게 말하며 핸드폰 너머에서 껄껄 웃는 김근학의 목소리가 귓가에 지겹도록 울린다. 양아버지가 아니었다면 소리 내어 웃는 그 입술을 칼로 도려내고 싶다고 생각했던 게 몇 번짼가. 나를 우습게 봐도 유분수라고 김근학 앞에서 길길이 날뛰었던 그였지만 결국엔 그 피둥피둥 살찐 돼지새끼 밑에 참모랍시고 들어가게 됐다. 처음 서인석과 조우했던 날 그가 뭐라고 했던가? 아, 영운이 김근학의 사주를 받고 온 스파이라는 걸 꿈에도 알 리가 없는 돼지는 퉁퉁한 손을 내밀며 잘 해보자고, 악수를 청했었지. 잘 해보긴 뭘 잘 해. 조금 있으면 모가지가 날아갈 인간이. 영운은 그렇게 쏘아붙이고 싶은 걸 가까스로 참았었다.
다시 눈을 감았다 뜨니 또 다른 목소리가 울린다. ‘당신이야말로 이 사건에 관심이 많은가보네요?……’ 이제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아름다운 여배우가 속삭였던 말. ‘참으로 충격적인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고(故) 이창경 씨와 부인 박자영 씨가 부검 결과 자살이 아닌 살해당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수사 결과 용의자로 민주주의와 자유를 수호하는 시민연대 간부 이진호 씨가 지목되었으며, 오늘 오전 이 씨를 비롯한 자민련 간부 여섯 명에게 구속 영장이 발부되어……’ 딱딱한 아나운서의 목소리. 이진호. 그 이름 석 자가 뇌리에 박히는 것과 동시에 그의 얼굴이 눈앞에 떠오른다. 마른 얼굴, 무미건조한 표정이 누구보다도 잘 어울리는 이목구비. ‘지금 뭐 하자는 거야?’언젠가, 분노로 낮게 깔린 영운의 물음에 그 표정 없는 얼굴로 영운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던 그.
그런 그가 며칠 전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이젠 그 기분 나쁜 건조한 표정을 다시는 볼 일이 없는 것일까.
다시, 눈을 감았다 뜬다. 용의자 이진호를 비롯한 민자련 간부들이 모조리 구속되자 하루아침에 지휘 계통이 무너진 민자련의 남은 대원들은 정부의 갑작스런 조치에 수차례 규탄 시위를 벌였다. 진압대와 민자련 사이에서 전쟁을 방불케 하는 충돌이 몇 차례 발생했다. 많은 부상자가 터져 나왔고 많은 대원들이 연행되었다. 연일 보도되는 시위 영상, 울려 퍼지는 작위적인 환호성, 서인석의 거만한 표정, ‘선거 끝날 때까지 잘 부탁하네.’라며 악수를 청하던 서인석의 퉁퉁한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기만 했던 기억들이 차례차례 뇌리를 스친다. 약에 취한 것처럼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오른다. 곳곳에 핏자국이 낭자하다. 누가 흘린 피일까.
13살의 기억, 어마어마하게 높은 천장을 가진 집, 성가시단 눈빛으로 내려다보는 10개의 눈동자, 거실 가득 풍기는 향내, 웃음소리, 나의 방, 나의 침대, 나의 책상. 그것들에게 파묻혀 몇 날 며칠을 보내다가, 그는 어느 날 방으로 기어들어온 흰 쥐 한 마리를 머리를 잘라 죽여 버렸다. 쥐의 쇳소리 같은 비명이 천둥처럼 고막을 울렸다. 그 뒤로 차례차례 다른 비명도 울려 퍼진다. 살려 달라 애원하고 분노로 고함을 지르고 아프다며 울먹이고 흥분으로 달아오른 비명소리들.
아아, 여긴 대체 어디인가. 인간의 가장 추악한 밑바닥만을 오롯이 투영하고 있는 이곳은. 결국엔 지옥에 떨어져버린 것인지, 아니면 오랜 시간 헤맨 끝에 찾아낸 오아시스처럼 달디 단 지상낙원이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인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다시 눈을 감았다 떴다. 취한 듯 제대로 가누기 힘들었던 몸의 감각이 차차 되살아나고 비로소 이성이 차갑게 본능을 식혔다. 빠르게 눈앞을 스쳐 지나가던 잔상들이 걸음을 늦추기 시작했다. 누군가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귀에 물이 찬 것처럼 소리가 뭉개져서 들려왔고, 몸이 무겁게 아래로 내려앉았다 뜨는 것을 반복했다.
어디선가 차갑지 않고 포근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만 같았다…….
ㅡ 일어났습니까?
창문이 조금 열려 있었다. 어깨 너머에서 담담한 목소리가 그렇게 물어왔다. 그는 창밖에서 살랑거리며 불어오는 바람을 얼굴로 맞으며, 찡그린 표정을 지었다. 시동이 꺼진 차는 한참 전부터 주차장에 서 있었던 듯싶었다.
ㅡ 너무 깊이 잠들어서 일부러 안 깨웠습니다.
젠장,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자버렸군. 그는 의자를 바로 세우고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오래 기다린 사람 치고 여자는 화난 기색 하나 없었다.
ㅡ 덕분에 30분 늦었습니다. 한 소리 각오하시고 얼른 가는 게 좋을 겁니다.
ㅡ 제기랄, 머리가 깨질 것 같군 그래.
여자가 나가려다 말고 갑자기 그를 붙잡았다.
ㅡ 뭐.
ㅡ 한 가지 잊은 말이 있어서 말입니다. 어제, 후보님 차 막고 사기 시위 벌이던 작자들이요.
ㅡ 보수당 쪽에서 보낸 치들이라고? 상관없어. 됐지? 그럼 잡담 끝. 이만 좀 가지?
나가려는 그를 또 여자가 붙잡았다.
ㅡ 왜!
ㅡ 저도 사기 친 거 맞긴 합니다.
ㅡ 뭐?
지을 줄 아는 표정이라곤 하나도 없는 줄 알았던 여자가 놀랍게도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ㅡ 그 땅, 후보님이 A기업에 뒷돈 받고 팔아넘긴 거 맞습니다. 알아보니 주민들도 죄다 일자무식인 노인분이라 보상 문제도 얼렁뚱땅 넘어갔더군요. 그 자들이 어설퍼서 그런 거지 진짜 주민들에게 확인하라 할 정도로 배짱 있었으면 그대로 모두 다 죽을 뻔했습니다. 앞으로도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그쪽도 미리 알아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말하는 겁니다.
잠자코 얘기를 듣고 있던 영운의 눈매가 묘하게 변했다. 그랬단 말이지? 몇 번 입술을 되씹으며 지금 들은 말을 고스란히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고개만 한 번 끄덕이고 다시 나가려는 영운의 등 뒤에 대고 여자가 이번에는 중얼거림인지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ㅡ 이번 선거 마치고 나면 다시 기자로 돌아갈까 합니다. 아무리 이 나라 정치판이 썩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내 가치관이란 게 있는 건데, 그거 속이고 나 자신 속여 가며 이 일 하는 거 양심이 아파서 더는 못해먹겠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하소연을 왜 나한테 지껄이는 거야. 그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대꾸도 없이 차에서 내려섰다.
업쪽 = B 또는 댓글
쪼꼬맛리본 님 이름표 제공♡
네 안녕하십니까 쁜틳입니다..허허.. 평생 못 올릴 줄 알앗는데 이렇게 1편 올려놧네유
아 증말! 말도 많고 탈도 많앗던 검은 절벽입니다ㅠㅠㅠ
이쁘게 봐주셧으면 좋겟.. 좋겟서요!!!
언제나 처음 시작할 땐 떨리죠ㅎㅎ 지금도 무척 떨리는데
일단 꽃잎방의 장점은 표현의 자유가 더 넓다는 거지만..
1편에서 보시다시피 절대로 건전한 내용은 아닙니다..
지금도 수위 땜시 리턴당할까봐 수위조절하고 잇긴 한데.. 하..
아무튼!
비록 검은 절벽이 절대로 행복한 내용의 소설은 아니지만..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들이 제 소설로 말미암아 행복해지셧으면 좋겠습니다^ㅇ^
이해가 가지 않는 내용이나 질문, 오타, 지적 등은
댓글이나 쪽지로 남겨주세요! 기쁘게 받겟습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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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eYou 님 코멘창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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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쏘!!!!!!새벽에도달려와주다니감동이야ㅠ.ㅠ
B
오....비젬도 그렇고..미스테리한 분위기다ㅎ.ㅎBㅋㅋㅋㅋㅋ인터넷많이하시나봅니다ㅋㅋㅋ계속진지했는데 저기서 빵ㅋㅋㅋ
ㅋㅋㅋㅋㅋ진지한분위기 속에 은근슬쩍 유머 한번 넣어봣서요..ㅋㅋㅋ
B
감사합뉘당^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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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는!!!!곧 공개가 됩니당 즐겁게 감상해주셔요ㅎㅎ
B 헐 분위기 개 쩌러여 정치이야기도 좋아하는데 너무너무 재밌네요!!!
핱 감사합니당 제가 많이 부족해서 좀 비약이 심한 내용이 튀나올수도 잇겟지만.. 실망시키지않게 노력할게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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핫 칭찬종합선물세트네여..ㅠ.ㅠ 좋게 봐주셔서 넘넘 감사합뉘당 앞으로 더 확화 끌리게 쓸게요!!!
B... 왘ㅋㅋㅋㅋ 진짜 대박이예여..... 딱 들어왓을때 흐르는 비젬부터 오묘하다 했는데 진짜 내용이 뭔가 심오하고 정치이야기 이런쪽인데도 흡입력이 쩌는거같아요 ㅠ.ㅠ 뭔가 비밀들도 많고 ㅋㅋㅋ 여러모로 앞으로 이야기가 너무너무너무!!!!!!! 궁금해집니당 ㅎ.ㅎ 다음편 기대할께요 ♡ 춫
왘ㅋㅋ큐ㅠㅠㅠ 추천까지ㅠㅠㅠㅠ 넘 감사드려요 진짜 글 올릴 때 걱정많이 햇는데 좋게 봐주시니 그저 부끄럽고 행복할 따름입니다..ㅠ.ㅠㅎㅎㅎ 뭔가 떡밥들이 많긴 하지요? 제가 떡밥 뿌리는덴 자신잇어도 도로 줍지를 못하니.. 앞으로 걱정되긴 하지만..ㅠ.ㅠ 응원해주신 거 꼭 기억하게 열심히쓰겟습니당ㅎㅎ
B 우와 진짜 재미잇어요! 분위기 장난아니네요 다음편기대할게요~
기대해주시다니ㅜㅜ열심히써서곧돌아올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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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지않으셧다니 증말로 다행입니다!!!! 앞으로 좀더 어렵게 써도 되겟다는 용기를 얻엇서요!!!!ㅎㅎ 2편은 1편보다도 더 깁.. 깁니다.. 허허 기대많이해주세요♡
B/분위기 짱
인빠님도짱!!!! 3편 업쪽을 보내달라는 뜻이겟지효?? 그렇게 믿고 싶습니당!!ㅎㅎ 담주에 3편에서 뵈어요~~ㅎㅎ
잘읽었어요...
헛감사합니다^ㅇ^
우왘ㅋㅋㅋㅋㅋㅋㅋ짱이다/b
님도짱!ㅎㅎㅎ
B/완전짱이에요!! 진짜재밌어요
재밋게읽어주셔서 감사해요^ㅇ^ㅎㅎ
소름끼치ㅠㅠㅠㅠ잼딩ㅋㅋ
앜소름이끼칠정도라니ㅠㅠㅠㅠㅠㅠㅠ감사합뉘당!!
추천글 읽고 왓는데 진짜 재밋어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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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악 정말감사합니다!ㅠ.ㅠ 혹시 가상 링크타고 오셨나요? 지금 5편까지 연재되어있으니 제 닉네임으로 검색하셔서 읽어주세용!!ㅎㅎ 아차차 오타 지적 감사드려요!!!
B!! 재밌어요 !!
감사합뉘당..♡
우와 ~ 진짜 퀄리티가 장난 아니예요 ~ 정말 정치와 관련된 소설 이번이 두 번째인데 진짜 반갑네요 ~ ㅋㅋㅋ
감사합뉘당!! 앞으로 더더더 맛깔나게 쓸게영!!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