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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1. 김삼웅 선생 글에 대한 느낌
이 책의 저자는 김삼웅이다.
이 책 <백범 김구 평전>은 내가 읽은 그의 두번째 작품이다.
첫번째는 <단재 신채호 평전>이다.
참고로 그의 저작 순서는 백범 김구 평전이 먼저이고 단재 신채호 평전이 나중이다.
..
그의 글에 대한 느낌은 지루하지 않다는 점이다.
내가 읽은 그의 두편의 작품은 모두 책굵기가 만만치 않아서
읽기 전의 부담감은 있지만,
일단 책을 펴고 나면 쉽게 페이지가 넘어간다.
왜 그럴까 생각을 해봤다.
먼저 그는 쉬운 단어들을 사용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부담감을 줄였다.
그리고 단순히 한사람의 이야기만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관련된 시대적 사건이나 인물에서도 폭넓게 서술함으로써,
이해도를 넓혔다.
마지막으로 다른 문학작품이나 유명인의 명언 등을 곁들여
지은이의 감상을 넣어줌으로써 딱딱할 법한 평전에 부드러움을 더하고 있다.
...
요컨대 나에게 이 책은 한국독립운동사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
인터넷 검색을 해봤더니
지은이 김삼웅은 현재 독립기념관 관장을 맡고 있다.
2. 평민의 아들로 태어난 백범
그의 어린 시절 이름은 창암이였다. 김창암
안동 김씨의 양반집안이지만,
수백년 전 역모에 휩싸여 황해도 내려와
평민으로 정착한 그런 집안에서 태어났다.(1876)
그가 태어난 1876년은 강화도조약이 맺어진 해로써
조선이 기울어져 가는 그런 시점이었다.
창암은 부모님의 소원대로 공부를 열심히 하여 과거급제만이
기울어진 가세를 일으켜 세운다 생각하고,
열심히 공부하고 과거에도 응시를 했다.
그러나 당시 과거는 부패의 온상이었기 때문에
이미 합격자가 더 정해진 상태에서 형식적으로 치루었다.
창암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관상학을 공부하게 된다.
자신의 얼굴을 보면서 열심히 공부하였지만,
자신의 얼굴에서 흉격, 빈격을 보면서 실망하고,
"얼굴 좋음이 몸 좋음만 못하고, 몸 좋음이 마음 좋음만 못하다"라는 문구를 보고,
그는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로 한다.
3. 국모의 보복을 하다
그러던 중 창암은 동학에 입도하고 이름도 창수로 바꾼다.
그리고 황해조의 애기접주를 맡으면서 동학군 선봉이 서서
의병활동을 지위하게 된다.
그리고 치하포에서 명성황후 시해에 참여했던 일본인 장교를 살해하게 된다.
그는 자신은 국모시해에 대한 보복일 뿐 죄가 없다며 도망가지 않고,
당당히 인천 감옥에 투옥하게 된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면서 김구는 유명해지기 시작한다.
..
그는 사형 선고를 받지만 항상 꿋꿋했으며,
인천 감옥 안에서는 죄수들에게 글을 가르키기까지 한다.
죽음을 준비하고 있던 몇시간 전에 고종황제의 사형중지로 그의 형 집행은 연기된다.
주위 사람들의 권고로 그는 탈옥을 하게 되고, 방랑의 길을 떠나게 된다.
...
탈옥을 한 그는 공주의 마곡사에서 중이 되어 생활하지만,
그가 할일은 따로 있었음을 깨닫고,
환속을 하게 된다.
4. 계속되는 감옥살이
그는 변화하는 국내외 정세를 보면서,
새로운 학문과 사상만이 위험에 처해 있는 나라를 살릴 수 있다는 생각에
새로운 신앙인 기독교에 입교하게 되고,
애국계몽운동에 나서게 된다.
이 시기에 을사늑약이 체결되면서, 전국적으로 의병운동이 일어나고,
죽음으로 반대하는 이도 있었다.
이때 김구는 교육만이 갈길이다면서 교육구국활동을 하게 된다.
황해도 지역에서 교육 지도자로써 활동하다가
안중근 의거로 인해 한달 동안 구속당하기도 한다.
결국 1910년 나라는 망하게 되고,
안중근의 사촌동생 안명근이 독립운동을 하는 도중 일본순사에게 붙잡히는데,
김구는 이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된다.
이것은 황해도 지식인, 교육인, 부호 등 반일 세력을 감옥에 넣기 위한
조작 사건으로 105인 사건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이 사건으로 김구는 서대문 감옥에 갇히게 되고,
온갖 고문을 받고, 굶주림에 시달리게 된다.
그가 가장 견디기 힘든 고문은 '우대'였다고 한다.
일본에 충성만 하면 즉각 석방을 하고, 정치도 할 수 있게 해 준다는 회유였다.
하지만 김구는 끝까지 그 고통을 참아냈다.
그리고, 서대문 감옥에서 백정과 범부를 본따 호를 백범이라 지었다.
그는 서대문 감옥에서 인천 감옥으로 이감되었는데,
예전에 사형수 김창수임을 아무도 알아보지 못해 다행스럽게 위기를 넘긴다.
감옥생활을 마감하고,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그 이전에 해왔던 농촌계몽운동을 계속하게 된다.
훌륭한 인재 양성만이 진정한 독립을 하는데 밑거름이 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5. 임시정부와 함께한 망명생활
김구와 임시정부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삼일 운동 후 김구는 중국으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창설에 큰 역할을 하게 된다.
그의 중국 망명생활은 오직 임시정부의 존속을 위해서였다.
그의 생각은 임시정부가 있어야 대외적으로
우리 나라를 국가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임시정부 초창기부터 문제되어 왔던
정부 내 당파싸움이 있었었도
그것을 통합하려고 했지, 도망가지는 않았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임시정부의 당파 싸움에 진저리를 치며
독자적인 독립운동을 추진했던 것과는 달리
김구 선생은 앞서 이야기했듯이 그래도 임시정부를 지켜야 한다는 의지가 있었다.
모두 찐한 눈물의 역사가 된 지금
누구 옳고, 그르다고 논하는 것보다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행한 목적이 무엇이었느냐를 생각해보면 된다.
그들 둘은 개인적인 이해관계를 생각한 것이 아니고,
모두 나라를 위한 의견차이였을 뿐이라는 생각에 나는 두 분 모두에게 존경을 표한다.
이승만 같이 임정에서 대통령 탄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 대통령 행세를 한 사람도 있는데,
그리고 그런 사람이 광복 뒤에 다시 대한민국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는 사실에
썩은 미소가 절로 나고,
이승만 한명에 놀아난 당시 우리 국민들이 원망스럽기까지 하다.
..
임시정부와 나라에 혼을 쏟다보면 가족을 챙기지 못하는 법.
김구는 아내 최준례가 병상에 누웠는데, 가보지도 못하고,
임종도 못지키고 만다.
..
초기 임시정부는 계속되는 당파싸움으로 세력을 잃어가게 된다.
이 즈음 김구는 한인애국단을 결성하게 되고,
도쿄에서 이봉창 의사의 의거와 상하이에서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직접 지휘하게 된다.
이 의거의 성공으로 임시정부는 다시 뭉칠 수 있는 계기가 되지만,
김구는 현상금이 걸린 채 쫓기는 신세가 된다.
그는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중국의 가흥 지역에서 피신생활을 하게 된다.
이 때 주애보라는 중국 처녀 뱃사공과 유사부부 행세를 하게 된다.
중국 작가 하련생이라는 사람이 이때의 김구와 주애보의 사랑과 회한을
소설로 그려 <선월>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하었다.
이 책은 나의 읽을 책 목록에 추가되었다.^^
..
5년간의 피신생활을 마치고,
다시 활동을 하게 되는데, 다시 임시정부의 활동은 쇠퇴를 하게 된다.
이때 김구는 중국 국민당의 장개석과 회담을 하게 되고,
중국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게 된다.
그래서 김구는 한인특별반을 설치하고 독립군을 양성하게 된다.
비록 중국의 내전에 있어서 국민당의 횡포를 막지 못했고,
미국의 후광만을 믿었기에 패배한 장개석이었지만,
김구와는 각별한 사이인 듯 하다.
그리고 우리나라 광복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카이로 회담에서 우리나라 독립을 보장하는 데 큰 역할을 한 사람이 장개석이었다.
이것은 김구와 장개석의 두터운 친분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라 생각된다.
...
김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임시정부는 계속 분열로 가게 된다.
민족혁명당과 한국국민당을 계속하여 창당하면서 임시정부의 통합을 추진하지만,
노선이 다른 여러 계파로 인해 임시정부는 점점 영향력을 잃어간다.
그 와중에 불평분자로 보이는 동족의 피격에 큰 부상을 당한다.
이 사건으로 평생 갈비뼈에 총알을 갖고 살게 되며
이것이 신경을 건들게 되어 이어 김구는 손을 떨게 된다.
그래서 김구체, 떨림체, 또는 총알체라는 그의 특유의 글씨체가 태아났다고 한다.
...
김구는 중일전쟁이 일어나고,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우리나라의 독립도 가까워 왔음을 직시하게 된다.
임시정부는 여러곳을 거쳐 중경에 거처를 마련하고,
다시한번 통합을 추진하면서 김구는 임시정부 주석에 취임하여
대일 항전을 지휘하게 된다.
그리고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여 일본에 선전포고하기도 하고,
광복을 대비하여 건국강령을 마련하기도 한다.
..
김구의 광복준비는 신속하면서 철저하게 준비되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광복군의 국내진입을 얼마 앞두고,
일제의 항복 소식을 듣게 된다.
우리 광복군에 의한 광복이 아니라,
외세의 힘에 의한 광복이다.
김구가 바라지 않던 최악의 시나리오가 이루어진 것이다.
당시 정세를 바르게 읽고 있었던 김구는
이런 광복은 또다시 우리민족을 다른 외세의 영향권 안에 들게 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어찌했든 일제의 항복과 함께
길고 긴 망명생활도 끝이 나고,
김구와 함께 한 임시정부도 문을 닫고,
새로운 대한민국 정부의 문을 열기 위한 희망을 가지고 국내로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6. 백범의 예상대로...
백범선생의 걱정대로 한반도는 우리 민족에 의해서 아닌
외세에 의한 군정이 실시되고 있었다.
그것도 남쪽과 북쪽과 따로이다.
지리적으로 남북으로 나뉘고, 사상적으로 좌우로 나뉘게 된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다.
이 때, 나라를 이끌어가는 사람들이
김구 선생처럼 자신의 이익을 버리고 나라를 생각했으면,
미국과 당시 소련이 자신의 이해관계를 계산하지 말고 약소국을 생각했다면,
그랬다면 우리는 지금 북쪽에 있는 절경의 산수를 마음편히 볼 수 있었을텐데..
그 순간의 몇년동안 그 몇명의 이기주의와
자신들의 이익밖에 모르는 제국주의국가들때문에
힘없고, 착한 이들은 전쟁으로 가족을 잃고,
그 아픔을 간직하고 수십년 동안 살아가고,
아름다운 산천에는 아직도 얼마나 많은 지뢰가 묻혀 있으며,
저만치 앞에 있으면서도 가지 못하는 땅이 얼마나 많은가?
우린 광복이라는 큰 선물을 받았지만,
그건 선물이 아니라 우리가 가지고 왔어야 하는 우리 것인데....
너무나 잃은 것이 많다.
지구상에 수많은 나라가 안타까운 사연을 가지고 있겠지만,
우리나라의 안타까움만 하겠는가?
...
백범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원은
미군정이 임시정부를 정부로 인정하지 않는 바람에
개인자격으로 아무 환영없는 쓸쓸한 환국을 하게 된다.
김구 선생이 들어온 줄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강북 삼성 병원 본관이 위치하고 있는 경교장에 숙소를 정하고,
성명발표를 하고 나서야
유명, 무명인들이 경교장을 찾아와 김구를 환영하게 된다.
김구는 남북 통일된 정부를 만들려고 노력하지만,
미국과 소력은 각각 남북을 나누어서 신탁통치를 결정한다.
각계각층에서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운동이 일어나게 되고,
그 중심에는 김구선생이 있었다.
김구 선생은 평양으로 건너가 김일성 등과 회담을 갖기고 하고,
3천만 동포에게 읍고하기고 하지만, 결국 통일국가 수립은 좌절이 된다.
미군정은 이승만 등 미군정에 협조하는 세력과
다루기 쉬운 일제시대 간부를 했던 친일세력을 이용하여
1948년 5월 남한 단독으로 정부를 수립하고, 8월에 대한민국 정부를 세운다.
7. 그는 갔지만,
비록 통일정부는 이루지 못했지만, 백범 선생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희망을 나를 버리지 않는다. 다만 내가 희망을 버릴 뿐이다"
라는 말이 있다.
슬기로운 백범 선생은 결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통일정부가 출범하면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건국실천원양성소를 세우고, 젊은이들을 다방면에 걸쳐 가르쳤다.
그러나 이 노력도 말도 안되는 총소리 하나로 물거품이 되고 만다.
1949년 6월 어느날..
경교장에 육국소위 안두희는 김구 선생을 만나러 온다.
각계 각층의 인사들이 김구선생을 만나러 왔기에 아무 의심없이 안두희도 만났을 것이다.
그를 만난 서재에서는 4발의 총성이 들렸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너무나 허무한 끝이었다.
우리 민족에게는 큰 희망이 무너진 것이었다.
일제가 엄청난 현상금이 걸려 있을 때에도 피해간 죽음이었는데,
광복조국에서 동족의 총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
당시 판결은 안두희의 단독범행으로 판결났지만,
그것을 믿는 이 누구이겠는가?
당연히 이승만이 지시하지 않았겠는가?
민족의 거목을 쓰러뜨런 파렴치 살인마가 전쟁이 났다고
석방되고 다시 포병장교로 복귀하고, 대위로 예편하여
1953년에는 완전이 복권이 되었다고 하니..
그 이후에도 잘먹고 잘 살다가
결국 96년이 되서야 자택에서 피살되었으니....
이런 사실을 모르고 살았었야지 열이나 덜 받지...
이 생각하면 할수록 열받는다.
뭐 이런 나라가 다 있나?
김구가 죽은 이후 이승만은 신났을 것이다.
이승만 정권 시절에는 김구의 백범일지가 금서가 될 정도였으니..
1960년 4.19혁명 이후 김구 암살 진상을 밝히려는 노력이 있었지만,
곧 5.16 박정희 군사구데타가 있어서 그 노력은 다시 미래로 기약하게 된다.
그리고 군사정권이 끝난 1995년이 되어서야 국회에서
김구 선생 암살 조사 위원회가 만들어져 진상을 추정하게 되었다.
....
그는 갔지만,
그의 영혼은 여전히 우리나라를 보호하고 있다.
그리고, 그가 꿈꿔왔던 대한민국은 아직도 이루지 못했다.
그의 우리 백성과 나라를 위한 평생 노력과
한맺힌 억울한 죽음을 달래주기 위해서는
우리 후손들이 그가 못이룬 그의 소원을 이루어져야
우리 백성들이 그에게 진 빚을 갚는거라 생각한다.
8. 혁명가의 어머니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다.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은 고리끼의 소설 <어머니>에 나오는 어머니보다 더 혁명적이었다.
어머니의 기개는 김구가 못쫓아갔으며,
어머니의 애국정신도 김구가 쫓아가지 못했다.
국모시해의 보복을 위해 김구가 인천감옥에 투옥되었을 때
면회온 어머니가 하신 말씀이
"평양 감사가 된 것보다 더 기쁘다"였다.
그리고 상해에서 백범과 함께 지낼 때
나석주가 자신의 옷을 저당잡혀 백범의 생일을 위해 고기와 반찬거리를 마련하여
어머니에게 드렸더니
어머니는 그날 밤 김구에게 회초리를 사정없이 후려치기도 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했다.
"독립운동을 한다는 사람이 자기의 생일 같은 사소한 일을 동지들에게
알려서 그의 옷을 저당에 생일을 차려 먹다니..."
또 남경에 머루르고 있었던 일이다.
임시정부 요인들과 백범을 따르던 청년들이 곽여사의 생신을 차려드리고자
돈을 모으고 있었는데, 이사실을 안 곽여사는 자신의 생일을 차려줄 돈을 주면
자신이 먹고 싶은 것을 만들어 먹겠다고 하였다.
생신날 곽여사는 생일 축하연을 한다고 임시정부 국무위원들과 청년들을 초대하여
손님들이 모이자 식탁 위에 보자기를 풀었는데, 거기에는 권총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한다.
"독립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이 생일이 무슨 놈의 생일인가.
그런 데 쓸 돈 있으면 나라 찾는 일에 쓰도록 하게.
이 총으로 왜놈들을 한 놈이라도 더 죽여야만 내 속이 편안하겠네."
....
9. 김구 선생을 기리며...
사십 이후의 얼굴은 자신이 만든다고 링컨이 이야기했다.
사진 속의 김구 선생은 늘 넉넉한 웃음과 인자함이 배여있다.
그의 원칙을 중시하면서도 인간적인 삶.
그리고 나라를 위하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자신보다 백성과 나라를 먼저 생각한 고귀한 영혼이
얼굴에 드러난 것 같다.
분명 내가 지금 이땅에서 편안하게,
사소한 것에 불평하며 살아갈 수 있는 이유에는
백범 김구 선생이 있다.
다시한번 고마움과 존경을 느끼며...
헛되이 살지 않을 것을 다짐한다.
비록 나랏일은 하지 않지만,
김구 선생이 원하는 나라를 만들어가는데 누가 되진 않도록 하겠다.
김구 선생이 있어 지금의 우리나라가 있으니,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는 자신의 욕심을 버리고,
김구 선생이 생각했던 나라를 만들어하는 것이
고마움에 대한 보답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김구 선생이 원하던 나라가 온 백성이 원하는 나라이고,
진정한 독립된 대한민국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럴 날이 꼭 오리라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