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호수가 마을... Hallstatt
잘쯔캄머굿의 진주라고 일컬어지는 할슈타트는 12,000년전부터 인간이 살았던 흔적이 남아 있는 고대 도시로 1997년 다흐슈타인과 함께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의 문화 유산으로 지정 되었다.
오스트리아 짤츠부르크에서 기차로 약 2시간 거리에 있는 최고의 휴양지 할슈타트는 로마시대에 세워진 아름다운 마을로 그림같은 호수와 산으로 둘러쌓여 있습니다.
알프스산맥의 거친 암반으로 이뤄진 산과 깨끗한 호수가 만들어내는 환상적인 자연경관에 조용히 자리잡고있어, 완벽한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운 모습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Sound of Music의 촬영장소인 아름다운 호숫가 마을..
고대 소금광산과 4,500여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이 호반의 마을은 '짤츠캄머쿠트의 진주'로 불리울만큼 호수로 둘러쌓인 모든 마을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곳입니다.
할슈타트에는 약 1,200명이 살고 있으며, 작은 광장은 담쟁이 덩굴로 덮힌 게스트하우스와 자갈길의 좁은 골목으로 둘러쌓여 있습니다. 이 장난감 같은 마을은 약 20분이면 어디든 도달할 수 있다.
할슈타트는 할슈타트 호수의 이름이기도하고 할슈타트 마을의 이름이기도 한데 할슈타트 마을은 호수를 따라 산비탈에 집중적으로 형성되어 있어 골목이 좁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유럽여행중에 느낀거는 싼 물은 무조건 탄산수 - 라는것.아름다운 마을 광장에서 공짜 샘물이 솟아나고 있었다.마을의 샘물을 받아서 마시기로 했다.
할슈타트 마을의 중앙광장으로 크고 작은 행사가 이곳에서 열린다고.중앙 광장을 거쳐 할슈타트의 계단식 가옥들을 구경한 후 ,소금광산을 향하여 발걸음 을 옮겼다
할슈타트, 마을은.동화속 마을처럼 아기자기하다 산에서 흘러내리는 폭포는 마을의 생명수로 사용되고 있으며 오래 전부터 사용했던 방앗간이 빠르게 흐르는 물을 이용해서 아직도 돌아가고 있다.
할슈타트는 할슈타트 호수의 이름이기도하고 할슈타트 마을의 이름이기도 한데 할슈타트 마을은 호수를 따라 산비탈에 집중적으로 형성되어 있어 골목이 좁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우수에 젖은 할슈타트(hallstatt) 호수 짙은 그림자와 바닥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맑은 호수는 여행객의 마음을 설레이게 한다
고도가 2000m나 되는 높은 산들 사이로 수많은 호수가 늘려있는 아름다운 할슈타트 맑고 잔잔한 호수와 짙푸른 숲과 눈 쌓인 산이 조화를 이루어 경치가 그를 수 없이 아름답다
할슈타트 호수와 집들은 항상 사진 작가들의 모델이 되지만 그 아름다움을 이사진 한장으로 표현 하기는 어렵다
#.영산강살리기 사업의성공과 지역경제, 지역문화 발전을기원했습니다.
국토해양부와 환경부는 해당 지방자치단체들과 함께 22일(일) 본격적인 4대강 살리기 사업의 시작을 알리고 성공을 기원하는 ‘4대강살리기 희망선포식’(기공식)을 개최하였습니다.
이 중 영산강 6공구(승촌보 사업 예정지)에서 있었던 ‘영산강살리기 희망선포식’에는 해당 광역시·도 및 기초 지자체장과 지역주민, 관계부처 장관 및 4대강살리기 추진본부장(심명필) 등 정부 관계자와 국내외 귀빈들, 시민·환경단체와 시공사 관계자 등 2,000여 명이 함께 참여해 영산강 살리기 사업의 성공과 지역경제, 지역문화 발전을 기원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도 참석한 이 행사는 KBS를 통해서 전국에 생방송으로 중계되었는데요,
이 날 현장에서는 상영되었지만, TV 시청자들은 접하지 못한 영상 하나를 공개합니다.
과연 영산강은 깨어날 수 있을까요?
영상으로 만나보겠습니다.
#.임 방 울(1904년~1961년) 쑥대머리
임방울 님
임방울 명창은 1904년에, 팔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안은 세습 예술가 집안이었고, 본 이름은 승근인데 방울 같은 소리를 내며 크라고 방울이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 그는 어릴 때 외삼촌이자 국창이라 불리던 서편제의 김창환 명창에게 기초를 닦았고, 자라면서 여러 명창들에게 배운 뒤, 15세 무렵에는 동편제의 유성준 명창에게 소리공부를 했습니다. 유성준 명창은 성질이 급하고 괴퍅해서 어린 임방울은 기다란 담뱃대로 머리통을 수도 없이 얻어 맞았다고 합니다. 같이 공부하던 여자애들을 맨발로 북 위에 한 시간씩 세워두기도 했다니, 제가 연기했던 「서편제」의 유봉보다 더 지독한 선생님이었나 봅니다. 임방울은 목소리가 맑고 청아하면서도 슬픈 느낌을 주고, 고음과 저음이 시원시원하게 터져나오고, 어떠한 경우에도 목이 쉬지 않을 정도로 좋은 성대를 타고 났습니다. 그런데 변성기를 맞아 소리가 마음대로 나오지 않자 골방에 틀어박혀 문을 걸어 잠그고 연습에 몰두했다고 합! 니다. 이 무렵의 임방울 명창에 대한 전설같은 이야기가 전해 옵니다. 그가 무덤가에서 하루종일 소리공부를 하는데 원하는 소리가 죽어도 안나오자 "마마(천연두)에 걸리면 목이 트인다는데 마마나 걸려라!" 하고 소원을 빌었더니 과연 천연두에 걸려서 소리가 트이고, 그 대신 얼굴이 얽었다는 것입니다. 이 얘기는 '믿거나 말거나'입니다. 이처럼 소리 공부에 전력을 기울인 뒤, 그는 대명창이 되겠다는 청운의 꿈을 품고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그가 스물을 갓 넘은 1925년 9월, '조선명창연주회'가 매일신보사 주최로 열렸습니다. 명창들의 노래를 듣기 위해 관객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습니다. 먼저 그의 외삼촌인 김창환 명창과 당대 최고의 명창인 송만갑 명창, 이동백 명창, 정정렬 명창들이 특별출연으로 무대에 올라 소리를 했습니다. 그뒤를 이어 무릎 위로 올라간 짧은 검정 두루마기를 입고, 땅딸막한 키에, 약간 얽은 데다가 별로 잘생기지 않은 얼굴의 임방울이 무대에 나타났습니다. 초라한 행색의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하여 판소리 「춘향가」중 <옥중가(獄中歌)>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쑥대머리/임방울
쑥대머리 귀신형용, 적막옥방의 찬자리에 생각난 것이 임뿐이라
보고지고 보고지고 한양낭군 보고지고 오리정 정별후로 일장서를 내가 못봤으니 부모봉양 글 공부에 겨를이 없어서 이러난가 여인신혼 금슬우지 나를 잊고 이러난가 계궁항아 추월같이 번뜻 솟아서 비치고저
막왕막래 막혔으니, 앵무서를 내가 어이 보며 전전반측의 잠못 이루니 호접몽을 어이 꿀수 있나 손가락으 피를 내여 사정으로 편지헐까 간장의 썩은 눈물로 님의 화상을 그려볼까
녹수부용으 연캐는 채련녀와 제룡망채엽의 뽕따는 여인네도 낭군 생각은 일반이라 옥문밖을 못나가니 뽕을 따고 연 캐겄나 내가 만일으 임을 못보고 옥중원혼이 되거드면 무덤 근처 있는 돌은 망부석이 될것이요 무덤 앞으 섯는 남귀는 상사목이 될것이요 생전사후 이 원통을 알아줄이가 뉘 있드란 말이냐, 아무도 모르게 울음운다.
이 노래는 변사또의 수청을 거절하다 곤장을 맞고 옥에 갇힌 춘향이가 한양으로 떠나 간 이몽룡을 그리워하며 부르는 노래입니다. 목에 칼을 쓰고 산발한 머리가 마치 쑥대처럼 생겼고, 얼굴은 창백하게 귀신처럼 생겼다고 해서 '쑥대머리 귀신형용'이란 충격적인 가사로 노래를 시작합니다.
이처럼 참혹한 지경에서도 일편단심 사랑하는 님을 간절하게 그리워하는 여인의 심정이 너무도 절실하게 묘사된 명곡입니다. 오페라로 치면 <남 몰래 흐르는 눈물>이나 <공주는 잠 못 이루고>와 같은 대표적인 아리아인 것입니다.
뱃속에서 바로 소리를 뽑아서 내는 통성에 약간 쉰듯 칼칼하게 터져나오는 수리성을 섞어, 춘향이의 비통처절한 심정을 애절하게 토해내는 임방울의 판소리는 단박에 청중을 휘어잡았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춘향이의 심정이 절망적인 시대의 정서와 어울어지면서 관객들을 열광의 도가니에 빠뜨렸습니다. 이 노래가 바로 불후의 명곡이 된 <쑥대머리>인 것입니다. 그 공연 이후 임방울은 하루 아침에 명창의 반열에 올랐고,
콜럼비아 레코드나 빅터 레코드나 OK 레코드와 같은 유명 음반사가 앞다투어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의 출세작 <쑥대머리>가 실린 음반은 한반도와 만주와 일본까지 불티나게 팔려나가, 각 음반사마다 120만장이라는 경이적인 판매기록을 세웠습니다. 그후 1930년 전국명창대회에서 장원의 영광을 차지한 임방울은 본격적인 소리꾼으로 나서서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공연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명성을 얻기 시작한 즈음, 광주의 기관장들이 환영파티를 열어 준 '송학원'이라는 요릿집에서 운명의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임방울이 소년시절에 광주의 부잣집에서 고용살이를 했는데, 그 집에 동갑내기의 아름다운 딸이 있었습니다. 소녀와 소년은 철부지의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소녀의 부모가 반대하는 통에 소년은 그 집을 떠나야 했고, 소녀는 어느 부잣집 아들에게 시집을 갔습니다.
그후 소녀의 결혼 생활은 실패로 끝났고, 광주에서 송학원이란 요릿집을 차리고 예명을 김산호주로 지은 소녀는 광주 유지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는 여주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바로 그 날, 그 자리에서, 명창이 되어 돌아 온 임방울과 여주인 김산호주가 십여년도 훨씬 흐른 뒤에 해후를 한 겁니다.
그동안 서로를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던 두 연인은 곧바로 불같은 사랑을 불태웠습니다. 임방울은 2년 간 송학원의 내실에 숨어 살며 세상과 담을 쌓고 지냈습니다.
세상에서는 임방울이 잠적했다는 소문이 무성했고, 전속계약을 한 OK 레코드 회사에서는 그의 행방을 찾느라 혈안이 되었습니다. 미색이 빼어났던 김산호주는 천하명창 임방울을 2년 동안 송학원의 내실에 숨겨 놓은 채, 사랑의 포로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임방울은 자신의 목소리에 이상이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토록 기름졌던 목소리가 탁해지고, 고음이 마음대로 나오지 않고, 소리를 조금만 질러도 땀이 뻘뻘 나는 것이었습니다. 대경실색한 그는 어느 날, 산호주에게 알리지도 않은 채 지리산으로 떠나 종적을 감추었습니다.
그는 지리산 토굴에 숨어 살며 소리공부에 매달렸습니다. 임방울의 행방을 알지 못한 채, 미칠듯한 그리움과 슬픔에 빠진 산호주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습니다. 천지사방을 수소문한 끝에 간신히 임방울의 행방을 알아 낸 산호주는 임방울이 소리공부를 하는 토굴 앞에서 만나기를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임방울은 끝내 그녀를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깊은 절망에 빠져 집으로 돌아 온 산호주는 임방울을 애타게 그리다가 병이 깊어져, 마침내 30세도 안된 꽃 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산호주의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온 임방울은 죽어가는 애인을 가슴에 껴안고 슬피 울며 즉석에서 자신의 비통한 마음을 노래로 만들어 불렀습니다. 그것이 바로 <추억>이라는 노래입니다.
앞산도 첩첩허고 뒷산도 첩첩헌디 혼은 어디로 향하신가 황천이 어디라고 그리 쉽게 가럇든가 그리쉽게 가럇거든 당초에 나오지를 말았거나 왔다가면 그저나 가지 노던 터에다 값진 이름을 두고가며 동무에게 정을 두고 가서 가시는 임을 하직코 가셨지만 세상에 있는 동무들은 백년을 통곡헌들 보러 올 줄을 어느 뉘가 알며 천하를 죄다 외고 다닌들 어느 곳에서 만나 보리오 무정허고 야속헌 사람아 전생에 무슨 함의로 이 세상에 알게 되어서 각도각골 방방곡곡 다니던 일을 곽 속에 들어서도 나는 못잊겄네 원명이 그뿐이었든가 이리 급작스리 황천객이 되얏는가 무정허고 야속헌 사람아 어데를 가고서 못오는가 보고지고 보고지고 임의 얼굴을 보고지고
이후 박초월 명창 등과 <동일 창극단>을 만들어 전국 순회공연을 다니기도 하며 최고의 명창으로 대중들을 울리고 웃기던 임방울 명창은, 1961년 공연 도중에 피를 토하고 쓰러져 치료를 받았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57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상 처음 국악예술인장으로 치러진 임방울 명창의 장례식에는 200여 명의 여류 명창들이 소복을 입고 길을 가며 상여소리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행렬 끝에 100여 명의 거지가 눈물을 흘리며 따라와 눈길을 끌었습니다. 공연 때마다 거지들은 무료로 관람시켰던 임방울 명창에 대한 추모의 표시였습니다
.
10여세부터 여러 스승으로부터 '서편제'와 '동편제'를 모두 사사받아 자신의 고유한 가풍을 수립한 전설적 명창 임방울. 민족사의 흐름에서 가장 불행했던 시기이자,
판소리 역사에서 가장 시련과 수난이 많았던 일제 침략기에 민초들의 한을 노래한 명창 임방울. 김창환, 이동백, 송만갑 같은 선배 가객들처럼 조선시대의 벼슬 하나 지낸 바 없고,
후배 명창들처럼 인간문화재로 대접 한 번 받아보지 못한 불운한 시대의 진정한 광대 임방울. 평생 양복 입기를 싫어하며 흰색 한복 두루마기를 즐겨 입고,
수많은 여인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소외된 민초들의 아픔을 위로해주던 아름다운 가객 임방울. 공연 때 마이크 쓰기를 꺼려 했고, 입에 발린 공치사나 돈 받기를 외면했으며,
번돈은 불우한 이웃에게 아낌없이 써버려 유족에게 아무런 유산도 남기지 않은 풍류남아 임방울. 조선왕조가 저물어가는 때에 태어나 민족사의 혼란 속에서 유랑의 생애를 마친 임방울은 우리의 비극적 시대를 대표하는 명창이었습니다.
그의 출생지인 광주시 광산구 송정공원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