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식학의 중심사상 - 묘주스님/동국대 교수
유식학의 중심사상(1) -무의식의 정신세계-묘주스님/동국대 교수 유식론서(唯識論書)는 주로 유식학(唯識學)의 내용을 설명하는 논서입니다. 그 중에도 여러 가지 논서가 있는데, 일반적으로 섭대승론(攝大乘論), 유식삼십론송(唯識三十論頌), 성유식론(成唯識論) 등이 읽히고 있습니다.
이런 유식학의 여러 논서에서는 정신 세계 중 의식 영역뿐만 아니라 무의식의 영역까지, 즉 정신 세계의 심층에 이르기까지 아주 자세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수행자의 당면과제인 번뇌(煩惱)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생기는 것이고, 그런 번뇌를 사멸(死滅)하는 과정과 그에 따른 여러 가지 심리작용의 종류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 깨달음의 경지라고 하는 것은 어떤 상태인가에 대해서도 상당히 자세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럼, 왜 유식론에서는 정신 세계에 대해 이렇게 자세하게 밝히고 있겠습니까? 불교의 모든 경전을 통틀어 팔만대장경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팔만대장경을 한 손에 꽉 움켜쥐었다가 펴보면 손바닥에 남는 글자가 딱 하나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마음 심(心)자입니다. 팔만대장경은 불교의 교리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설명해놓은 경전과 논서들입니다. 근데 그 팔만대장경의 모든 초점이 결국 마음 심자, 즉 마음의 문제를 다루는 것에 맞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은 불성(佛性)의 존재라고 하는데, 그것은 마음을 깨달으면 부처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합니다.마음은 물질이 아니니까 눈에 보이는 게 아닙니다.물질이라고 하는 것도 사실 모습에 따라서 변합니다. 우리가 흔히 마시는 물도 항상 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얼음이 되었다가도 수증기로 변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물질은 고정된 게 아닙니다.더구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일정한 형상이 없습니다. 따라서 마음을 육안으로 보려고 해서는 절대 안됩니다. 마음은 눈으로 보여지는 존재가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봐야하는 것입니다.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이 마음의 세계에는 중요한 도리(道理)나 만법(萬法)이 다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유식학에서는 마음의 세계를 어떻게 현실적으로 인식할 것인가를 비롯, 무의식 즉, 심층의 세계에서는 어떤 작용이 일어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자세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보고, 듣고, 느끼는 작용을 하는 영역을 말하고, 무의식은 그러한 의식 영역의 저변에 있는 세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의식의 영역도 잊어버리고 살 때가 많은데 그 의식의 저변에 있는 무의식의 세계까지 생각하기는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가 평소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내용이 무의식의 영역 안에 그대로 다 저장되기 때문에 일상 생활에서는 무의식의 영역이 더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저녁,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도로에서 뻑하는 소리가 나서 쳐다봤더니 어떤 차가 사람을 들이박고 도망가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너무 당황하여 언뜻 본 차의 기종이나 색깔을 기억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이 죽었으니까 너무 놀랐던 것입니다. 차번호도 본 것 같은데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 것입니다. 유일한 목격자가 정확한 것을 모르니까 경찰들도 그만 그 사건을 덮어두려고 했습니다. 그러면 유가족들이 얼마나 원통하겠습니까? 그래서 가족들은 이 목격자를 정신과 전문의에게 데리고 갔습니다. 최면을 걸면 무의식 영역 안에 저장되어 있던 기억이 되살아난다는 것을 언뜻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경찰관과 함께 그 목격자를 정신과 전문의에게 데리고 간 것입니다. 정신과 의사는 그 목격자에게 최면을 걸고 당신은 언제 어디에 있습니다. 지금 무슨 사고가 나지 않았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그 목격자가 몸을 부들부들 떨더니 지금 차가 사람을 치어 놓고는 그냥 도망간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그 차번호를 보셨습니까? 하고 물으니 이 목격자가 차번호를 봤다고 하면서 차번호를 정확하게 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 뺑소니 범을 잡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사람의 무의식에는 잠시 스쳐간 차번호까지도 그대로 저장이 되어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일상에서 보고 듣고 생각하는 모든 내용들이 다 무의식 영역 안에 그대로 저장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무의식들이 쌓이면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하는데도 점차 변화를 일으키게 됩니다. 여러분들도 불교를 믿고 난 뒤부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좀 달라져 있다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예를 들면 누가 나에게 안 좋은 소리를 했을 때, 예전 같았으면 아마 금방 화를 내거나 앙갚음을 하려고 오랫동안 가슴속에 담아둘 것입니다. 그런데 불교를 공부하면서부터는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상당히 너그러워져 있기 때문에 그 만큼 평정을 빨리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의식의 세계는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평소 무엇을 보고 듣고 생각하느냐가 그대로 저장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나의 잘못된 행동이나 말을 알거나 보고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고 나의 심층에 저장이 되기 때문에 항상 조심해야 되는 것입니다. 무의식 영역에 대해 대단히 깊게 연구한 유명한 분석심리학자인 칼 융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융이 수 십년 간의 연구 끝에 내린 결론이 있습니다. 의식의 영역이 섬이면, 무의식의 영역은 바다와 같다. 우리는 보고 듣고 느끼는 의식의 작용이 아주 크기 때문에 의식이 전부인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의식이 하는 역할이 섬과 같으면 그 밑에 있는 무의식의 영역은 바다와 같다는 겁니다.
우리가 잘 느껴지지는 않지만 우리 인간의 내면에는 바다보다 더 광활한 세계, 불가사의한 세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서구에서 이런 무의식 세계를 과학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이후부터 였지만 불교에서는 이미 1500년 전인 5세기 때에 대단히 자세하게 연구했습니다. 현대의 심리학에서는 그 용어를 무의식 또는 잠재의식이라고 하지만 우리 불교에서는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고 합니다. 아뢰야라는 말은 무엇을 저장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의식선상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인식과 행동의 결과가 하나의 씨앗으로 저장이 되기 때문에 아뢰야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한자로 번역하면 장식(藏識)이라고도 합니다. 1500년 전부터 아뢰야식에 대해서 자세하게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불교는 과학이 아니고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아뢰야식은 지금과 같으면 선승, 참선하는 분들과 같은 당시의 요가 수행자 즉, 유가사들이 조용히 내면의 세계를 관조(觀照)하는 것에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몸과 마음을 차분히 가라 앉혀서 내면의 정신 세계를 관찰하고 나아가서는 무의식의 세계까지도 관조를 하는 것입니다. 점점 더 깊이 들어가 10재 중 8재 정도가 되면 그 무의식의 작용이 그대로 다 관찰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했기 때문에 이 무의식의 영역을 아뢰야식이라고 명명하고 그 작용을 대단히 자세하고 깊이 있게 설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뢰야식은 어떤 작용을 하겠습니까? 먼저 모든 인식과 행동의 결과가 그대로 다 아뢰야식에 저장이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저장되는 형태를 종자라고 합니다. 종자는 씨앗이란 뜻인데 씨앗은 곧 열매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장되는 형태를 씨앗이라고 표현한 것은 꽃이 지면 열매를 맺습니다. 또 그 열매는 나중에 다시 싹이 트고 또 자랍니다. 결국 열매는 결과이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인식과 행동의 결과가 아뢰야식 안에 저장이 될 때, 그 형태를 종자라고 하는 겁니다.
결과이면서 그것이 저장되어 있다가 또 새로운 결과를 불러오기 때문에 종자라고 하고 특히 업의 종자이기 때문에 업종자(業種子)라고 합니다. 또는 이것이 하나의 에너지가 되기 때문에 습기(習氣)라고도 합니다. 즉 창고 안에 물건 집어넣듯이 저장하는 것이 아니라 이 자체가 에너지의 흐름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기운 기자를 써서 습기라고 합니다. 또 삼업(三業) 즉, 입으로 짓는 구업(口業), 몸으로 짓는 신업(身業), 생각으로 짓는 의업(意業)의 결과로서 저장이 되기 때문에 업종자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때가 되면 우리의 행동과 생각에 대한 결과가 다 나타나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인과법(因果法)이라고 하는 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결코 남이 대신해 줄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도 인과법은 어떻게 대신 받아 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다만 참회(懺悔)하고 악업(惡業)의 종자를 선행으로 다스리면 악업의 세력은 약화된다고 했습니다. 악은 선으로 다스릴 수밖에 없기 때문에 선행을 해서 악업의 종자를 다스리면서 자꾸 뉘우치면 업장이 소멸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업장이 있는 사람이 선행을 베풀지 않으면 그것을 고스란히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에 팔자가 좀 기구한 여인이 있습니다. 결혼을 두 번이나 했는데 만나는 남자마다 걸핏하면 때리고 욕을 하는 등 난폭한 남자를 만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내가 또 남자를 잘못 만났구나. 이것은 순전히 내가 아직 나에게 맞는 남자를 못 만났기 때문이다고 생각하고, 새벽에 짐을 싸서 도망을 쳤습니다. 한참 도망을 치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팔자가 앞장 서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망치는 것을 포기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팔자라는 것도 결국은 업종자입니다. 사주팔자도 나의 의지하고 상관없이 그 날 그 시에 태어왔기 때문에 받은 것이 아니고, 결국은 내가 전생에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그 날 그 시에 태어나서 그 사주팔자를 받은 것입니다. 이처럼 팔자라고 하는 것도 아뢰야식에서는 업종자인 것입니다.
하지만 팔자도 다스릴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팔자도 결국은 인연법(因緣法)이니까, 그에 상당하는 노력을 한다면 다스릴 수가 있는 겁니다. 내 안에 쌓여 있는 아뢰야식의 업종자가 인(因)이 되면, 연(緣)은 삼업입니다. 말과 생각과 행동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또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주팔자가 굉장히 좋게 타고났는데도 별로 신통스러운 일을 못 보는 경우도 있고, 사주팔자가 굉장히 안 좋게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참회하고 기도하고 계속 선행을 베풀고 하다 보니까 그게 또 전화위복이 되어서 아주 잘 사는 경우가 있는 겁니다. 그것은 인은 별로 안 좋았지만 연을 잘 가하다 보니까 좋은 결과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유식학의 중심사상(2) -업은 윤회의 주체-묘주스님/동국대 교수 아뢰야식(阿賴耶識)은 윤회(輪廻)의 주체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하늘나라로 간다고 하지만 모든 사람이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죽어 다시 사람으로 태어날 수도 있고, 짐승으로 태어날 수도 있고, 또는 아귀와 같은 배고픈 세계에 태어날 수도 있고, 싸우기를 좋아하는 아수라의 세계에 태어날 수도 있다는 겁니다. 이것을 ‘육도윤회(六道輪廻)’라고 합니다. 업(業)에 의해서 이 여섯 가지 세계를 윤회합니다. 그러니까 하늘나라에 태어났다 하더라도 그 복이 다 하면 다시 인간으로 내려와야 하고, 지옥에 떨어졌다 하더라도 악업이 다 소멸되면 다시 위의 세계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끊임없이 돌고 도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윤회의 주체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뢰야식입니다. 왜냐하면 아뢰야식의 업종자는 전부 저장됩니다. 우리가 생전에 아니면 전생에 지은 갖가지 선업(善業)과 악업(惡業)의 업종자가 아뢰야식에 저장되어 있기 때문에 이 업종자의 업에 의해서 윤회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유식론에 보면, 아뢰야식이 빠져나올 때에 이미 다음 세상에 좋은 곳으로 갈 것인가, 나쁜 곳으로 갈 것인가 하는 징조가 나타납니다. 좋은 세계로 갈 사람은 영혼이 다리에서부터 가슴과 머리 쪽으로 빠져 나온다고 했습니다. 임종이 가까워지면 갑자기 팔, 다리가 굳어진다고 주물러 달라고 하다가 한 30분이나 1시간 정도 지나면 돌아가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비교적 좋은 세상인 인간 세계나 하늘 나라로 간다는 것입니다. 반면 아뢰야식이 머리와 가슴에서 먼저 빠져 나오는 사람들은 나쁜 곳에 갈 징조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금생에서나 전생에 악업을 지은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정신을 먼저 잃은 뒤 사지가 굳어져 갑니다. 그런 경우는 남아있는 가족들이 천도재를 지낼 때, 그 만큼 더 신경을 더 써줘야 할 것입니다. 옛날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중국 송나라 때, 이부상서(이조참판)인 ‘범중암’이라는 분은 어머님이 돌아가시자 ‘내가 어머니께 마지막으로 해드릴 것이 무엇인가?’라고 생각한 끝에 정성스럽게 천도재를 지내, 그 공덕이 어머니께 가도록 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과감히 관직을 던져 버리고 온 집안 식구를 이끌고 ‘현묘사’라는 큰 절로 들어가 49일 동안 천도재를 봉행했습니다. 그리고 절에서 재만 올리는 것이 아니라 이 절을 위해서 무엇인가 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모든 남자 식솔들에게는 청소 등 바깥 일들을 하게 하고, 여인들에게는 후원에 가서 200명 대중들의 공양준비와 갖가지 일을 돕도록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초재, 이재, 삼재가 지났습니다. 그런데 삼재를 지내고 난 그 날 밤 꿈에 어머님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들아, 참 고맙다. 내가 전생에 악업이 두터워서 악도에 떨어지게 생겼는데 네가 공덕이 되는 경을 좀 읽어다오. 그러면 그 공덕으로 인해서 악도에 떨어지는 과보가 좀 다스려 지겠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음날, 대감은 공덕이 많은 ‘금강경’, ‘지장경’, ‘법화경’, ‘원각경’, ‘아미타경’ 등 여러 경전 중에서 금강경을 선택해, 다른 식솔과 함께 하루 4번씩 읽었습니다. 그리고 5일째 되던 날, 또 대감의 꿈에 어머니가 나타나셔서 “아들아, 정말 고맙다. 그렇게 모든 사람들이 일심으로 금강경을 독송해준 덕택에 이제 내가 하늘나라에서 태어나게 생겼다. 그리고 어제는 관세음보살님께서 나타나셔서 직접 금강경을 읽어 주셨다. 그러니 네가 관세음보살님께 감사의 절을 좀 올려다오”라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분이 관세음보살님인지 어떻게 알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어머님께 “어느 분이 보살님이십니까?”하고 여쭈니 “내일 아침, 대중스님들께 가서 물어 보기를 어제 오전 중에 금강경을 독송할 때 반만 읽고 나간 스님이 어느 분인지 물어 보거라. 그 분이 바로 관세음보살님이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다음날 아침에 대중 스님들께 “어제 오전에 금강경을 반만 읽고 가신 스님이 계십니까?”라고 물어보니, 어느 스님 한 분이 아주 멋쩍은 듯이 “접니다”하면서 “법당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 반면 후원에는 사람이 적어 너무 바쁜 것 같아 그 사람들을 돕기 위해 반만 읽고 나갔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대감은 ‘이 스님이 관세음보살님의 화신이구나. 보살님이 잠시 몸을 나투셨구나’하고 일어나서 무슨 말을 하려고 하니 그 스님이 입을 막으면서 “여기에 있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대감이 스님을 향해 큰 절 삼배를 올리고 일어나 보니 스님은 사라지고 안 계셨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단적인 예입니다. 그런데 수행자 중에도 열심히 수행을 하시는 분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분도 계시듯이 일반 불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어머님을 위하는 대감의 정신은 반드시 본받아야 합니다. 이처럼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천도재를 지내면 망자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에게도 공덕이 간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유식학적으로 볼 때, 영혼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죽은 다음 49일 동안은 공덕의 영향을 강하게 받기 때문에 천도 이야기가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극선업이나 극악업, 즉 선업을 많이 짓거나 악업을 많이 쌓은 사람은 바로 하늘나라 아니면 지옥으로 곤두박질을 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드물고, 선업과 악업을 섞어서 짓는 사람들은 보통 49일 안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 때나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7일마다 그 연이 갖추어진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중음(中陰)이라고 합니다. 즉 사람이 죽은 뒤 다음 생을 받을 때까지의 칠칠일(七七日)을 중음이라 합니다. 이는 극히 선하거나, 극히 악한 업을 지은 사람은 죽으면서 곧 다음 생을 받으므로 중음이 없지만 보통 사람에게는 이 중음으로 있을 동안에 다음 생의 과보가 결정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아뢰야식 안에는 업종자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주일마다 주어진다는 ‘연(緣)’이 갖추어져야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사람으로 태어날 인연이라면 초이레까지 인연이 갖추어진다는 것입니다. 초이레 동안 인연이 생기지 않으면 다음 두 이레로 넘어갑니다. 또 그 기간동안 ‘연’이 생기지 않으면 세이레로 넘어갑니다. 이런 식으로 7번까지 가면 대체로 연이 다 갖추어 진다는 것입니다. 어떤 영혼이 사람으로 태어날 인연이 되면 모태 안으로 들어갑니다. 영혼이 아무리 멀리 있더라도 인연이 되면 순식간에 들어가기 때문에 거리는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모태 안에 들어가는 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수태, 즉 임신인 것입니다. 이처럼 새 생명이 탄생되고 어떻게 발달하는가에 대해서는 아뢰야식 안의 업종자와 바로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과학에서는 임신을 수정란의 세포분열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이것을 ‘갈라람’이라고 합니다. 임신하고 나서 일주일 동안의 생명체를 ‘갈라람’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수정란에 아뢰야식이 탁태(托胎)된 것입니다. 물론 유식론서에서는 수정란이라는 말은 쓰지 않고 부모의 정혈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아뢰야식이 탁태가 된 생명체가 바로 ‘갈라람’입니다. 그런데 부모의 수정란에는 부모의 염색체가 있습니다. 바로 이 염색체 안에 유전인자가 있고 또 유전인자가 어떻게 결합하느냐에 따라서 아들이냐 딸이냐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같은 아들이나 딸이라도 모습이나 성격이나 지능이 다르게 결정되는 것입니다. 똑 같은 부모를 두고 있는 사람도 생김새나 성격이나 행동의 차이가 나는 것은 유전인자의 결합 방법의 차이 때문인 것입니다. 과학적으로는 유전인자가 어떻게 결합되는 것인가 하는 것이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유전인자가 똑 같은 형태로 결합될 확률은 2의 46승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유식학에서는 유전인자가 어떻게 결합될 것인가 하는 것은 ‘갈라람’의 시기에 아뢰야식에 있는 업종자의 세력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아이가 임신되는 순간에 이미 성별뿐만 아니라 성격, 행동 등 그 아이의 개인적인 모든 것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아뢰야식은 윤회의 주체이면서 그 안에 업종자가 있다고 했습니다. 때문에 이미 임신이 되는 순간부터 그 태아는 엄연한 하나의 인격체가 되는 것입니다.
요즘 과학에서는 임신 초기의 태아는 단순한 유기체일 뿐이고 4개월쯤 지나야 의식이 생겨나고, 이 때부터 하나의 인격체로 인정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과학은 실제 검증되는 것만 이야기하기 때문에 임신초기의 태아를 단순한 유기체로 보지만 유식학에서는 아뢰야식이 깃드는 순간부터 하나의 인격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임신이 되는 순간에 이미 윤회의 주체가 들어가 있기 때문에 단순한 물질이 아니고 엄연한 인격체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태교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임신 초기부터 편안한 음악이나 명상의 말씀, 스님들의 법문 같은 것을 들으면 아이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래 성질이 아주 사나운 업종자라 하더라도 태아가 엄마 배속에 있는 10개월간 꾸준히 태교를 한다면 대단히 성격이 온화해지고 지혜로워 진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생각도 아기에게 큰 영향을 미칩니다. 엄마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 하는 것을 아이는 다 안다는 것입니다. 그 예가 하나 있습니다. 교육을 많이 받고 좋은 직업을 가지고 있는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은 부모와 달리, 어렸을 때부터 아주 부모속을 썩이는 겁니다.
특히 엄마에게 많은 적대감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 같은 현상이 갈수록 심해지자 부모는 아들과 함께 정신과 전문의에게 갔습니다. 그런데 전문의가 아무리 진찰을 해 봐도 원인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의사는 ‘이것은 분명 모태 안에 있을 때나 전생의 문제다’라고 생각하고 그 아이에게 최면을 걸어 태아 때로 되돌아갔더니 이 아들이 흥분하면서 “죽여, 죽여” 하는 것이었습니다. 태아 때,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의사는 어머니에게 ‘이 아이를 가졌을 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하고 여쭈니 그 아이의 엄마가 “결혼 전에 이 아이를 임신했는데, 그 당시 시댁에서 결혼을 반대해 아이를 없애려고 병원 앞까지 몇 번이나 갔었지만 차마 지울 수가 없었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태아도 엄마의 생각을 다 안다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아이를 지우기 위해 병원으로 가면 태아는 ‘나를 죽이려 하는구나’하고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태아는 어머니가 병원 앞에 있으면 불안에 떨다가, 어머니가 병원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돌아서면 그때서야 안심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여러 번 반복하니까 태아가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애가 태어나면서부터 어머니한테 그렇게 적대감을 보이고 했던 것이죠. 이 사실을 알게 된 어머니가 아들의 손을 꼭 잡고 정말로 참회의 마음으로 용서를 구했답니다. 이렇게 아들의 가슴에 맺힌 한을 풀고 나니까 아들의 성격도 많이 부드러워졌다고 합니다. 이것은 임상사례집에 있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아기를 가졌을 때, 어머니의 생각이 태아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유식학의 중심사상(3) -훈습(薰習)과 현행(現行)-묘주스님/동국대 교수 우리가 보통 태아영가 또는 수자령이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태아는 임신 첫 주부터 엄연한 인격체라고 생각하지만 불가피한 사정으로 인해 낙태(落胎)를 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불교에서는 낙태행위를 살인에 버금가는 행위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불교는 극단적인 종교가 아닙니다. 계율(戒律)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바탕에는 항상 중도정신(中道情神)이 깔려 있습니다. 중도라는 것은 계율을 지켜야 할 때는 철저히 지켜야 하지만 불가피한 상황에서는 얼마든지 파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스님들은 살생(殺生)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전쟁이 일어나면 승군이라고 하여 살생을 합니다. 이것이 바로 불교에서는 열고 막는 게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입니다. 낙태 문제도 이와 같습니다. 될 수 있으면 낙태를 사전에 예방하여야 하겠지만 낙태를 할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경우가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반드시 후속조치를 취해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천도재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태아영가 즉 수자령은 낙태를 하고 나서 10년 정도까지는 어머니의 주위를 돌면서 엄마를 그리워한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태아영가는 성인영가보다 빨리 다른 곳으로 잘 못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10년이 넘으면 그 그리움이 증오로 바뀝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부모나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힐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태아영가가 끼칠 해가 무서워 천도재를 지내기보다는 도의적인 면에서, 그리고 세상을 보지도 못하고 죽은 태아를 연민하는 마음으로 천도재를 지내줘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천도재를 지내면 그 공덕(功德)으로 인해서 태아영가가 설사 다른 몸을 받아서 살고 있다 하더라도 천도재의 음덕이 곧 공덕으로 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아뢰야식(阿賴耶識)은 모든 인식(認識)과 행동(行動)의 결과를 전부 저장시키는 역할을 하고, 또 그것이 윤회(輪廻)의 주체가 되기 때문에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뢰야식은 그 안에 저장되어 있는 종자를 유지하고, 신체의 기능을 유지하는데도 작용합니다. 한 마디로 명줄과 같은 것입니다. 아뢰야식은 군의 총사령관이 군대의 모든 것을 통제, 지휘하듯이 신체의 모든 대사들을 통제하면서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평소 아뢰야식 안에 어떤 내용이 저장되느냐에 따라 건강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대부분의 병이 심인성(心因性), 즉 마음에서 비롯된 병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바로 아뢰야식이 바로 신체기능을 총괄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가 살아가면서 남을 미워한다거나 스스로 비관하는 그런 생각은 안 하는 것이 좋습니다. 아무리 속상해도 ‘다음에는 다 잘 되겠지’ 하면서 낙천적으로 생각을 해야지 ‘죽고 싶다’라고 하는 생각을 자주 하게되면 그것이 그대로 아뢰야식 안에 저장이 됐다가 나중에 건강에 막대한 영향을 끼쳐 결국은 죽음의 방향으로 이끌고 가는 것입니다. 즉 아뢰야식 안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것이 저장되기 때문에 남을 미워하면 그 증오의 마음이 또 다시 저장되고 이것이 결국 세포들을 죽이는데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뢰야식의 인식대상, 즉 아뢰야식도 하나의 식(識)인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眼識)이라고 할 때는 바로 시각(視覺)을 이르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에서는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 무색성향리촉법(無色聲香味觸法)’ 이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바로 ‘안이비설신의’는 인식의 주체이고 ‘색성향리촉법’은 인식의 대상인 것입니다. 그러면 심층에 있는 아뢰야식도 하나의 식이기 때문에 분명 대상이 있습니다. 바로 그 대상은 다음의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종자(種子)입니다. 아뢰야식 안에 저장되어 있는 종자는 늘 끊임없이 대상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종자들을 그대로 유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신체기능(身體機能)입니다. 아뢰야식은 이 신체기능을 인식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무의식 영역에 있으면서도 신체의 현상들을 늘 보고 있습니다.
셋째는 자연계(自然界)입니다. 자연계라는 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것을 의미합니다. 비록 자연계가 무의식의 영역에 있지만 아뢰야식에서는 이곳도 인식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과거나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의 것, 멀리 있는 것도 인식하고 있는 겁니다.
이 같은 현상 때문에 아뢰야식은 미래에 일어날 어떤 일을 인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혹 가까운 장래에 좋은 일이나 안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꿈에 나타나는 경우가 있는데, 이처럼 미래의 일을 미리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아뢰야식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자연계를 인식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낮에는 의식이 너무나 생생하게 깨어 있기 때문에 그 같은 꿈을 꿀 수가 없는 것입니다. 대신 의식이 좀 잠들 때인 밤에는 바로 그 상징적인 내용을 꿈으로 올려보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앞날에 일어날 일을 미리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의식이 예민하고 정신이 맑다는 것을 의미하니까 꿈이 잘 맞는다고 해서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아뢰야식의 인식대상이 자연계이다 보니, 이미 우리가 살아가는 이 모든 환경이 아뢰야식 안에 다 조성이 되어 있습니다. 씨앗으로 조성 되어 있기 때문에 때가 되면 아뢰야식에 저장되어 있던 상황이 외부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즉 내가 어떤 사람을 만난다거나 무슨 일을 한다거나 하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이미 아뢰야식 안에 그 같은 상황이 다 조성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아뢰야식 안에 어떤 내용을 저장할 것이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평소 삼업(三業), 즉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내용들이 모두 저장된다고 하니 남이 알고 모르고를 떠나서 항상 바른 마음을 가지고 바르게 행동해야 됩니다. 또 인과법(因果法)처럼 업종자로 저장이 되어 있는 모든 것이 때가 되면 스스로 결과를 불러오는 것이므로 자주 참회를 하고 업장을 다스려 가는 신앙생활을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식과 행동의 모든 결과가 아뢰야식 안에 저장이 될 때, 그것을 종자 또는 습기라고 했습니다. 종자라는 것은 씨앗이라는 뜻인데, 씨앗은 꽃이 피고 열매를 맺고 난 뒤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고 또 그 씨앗을 심었을 때 꽃이나 열매가 피게 됩니다. 그래서 씨앗은 어떤 결과이면서 새로운 가능성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든 행동의 결과가 아뢰야식 안에 저장이 되고 또 저장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때가 되면,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불러오기 때문에 하나의 가능성을 내재(內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종자는 업의 종자인 것입니다. 선업(善業)이든 악업(惡業)이든 업의 종자입니다. 또 업종자(業種子)라고도 하고 업습기(業習氣), 습기(習氣)라고도 합니다. 결국 반복적으로 익혀지는 에너지의 흐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과 생각과 행동이 하나의 성격으로 나타나서 거의 같은 방식으로 반복적으로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정신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흐름, 즉 에너지이므로 이 습기는 특수한 정신적인 에너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업종자의 작용의 원리는 훈습(熏習)과 현행(現行)입니다. 훈습이라는 것은 8식 가운데에서 아뢰야식을 제외한 나머지 7가지 식의 모든 결과가, 말과 생각과 행동의 모든 결과가 아뢰야식 안에 종자로서 저장이 되고 또 이미 저장되어 있던 종자들이 계속 반복적으로 저장이 되고 힘이 커지는 것을 말합니다. 훈습은 결과로써 저장이 되고 이미 저장되어 있는 종자에 새로운 영향을 반복적으로 미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행은 종자가 아뢰야식 안에 저장이 되어 있으면서 새로운 훈습에 의해서 순간순간 변하기도 하면서 때가 되면 떠올라서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불러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업종자의 작용의 원리는 훈습과 현행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인지해야 합니다. 첫째는 일단 훈습이 된 것은 반드시 현행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법구경’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선(善)의 열매가 익기 전에는 착한 사람도 고통을 받는다. 악(惡)의 열매가 익기 전에는 나쁜 사람도 즐거움을 받는다. 그러나 선의 열매가 다 익으면 착한 사람은 복을 받고, 악의 열매가 다 익으면 나쁜 사람은 벌을 받는다’
어떤 사람은 선업의 종자를 나름대로 쌓았지만 현실적으로 바로 어떤 응답이 오지 않을 때 답답해 하기도 하고 실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법구경의 말씀처럼 때가 되면 지은 만큼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단 훈습이 된 것은 반드시 현행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과법입니다. 두 번째는 훈습된 것이 현행되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현행되려면 반드시 그 전에 훈습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훈습, 즉 반복적으로 익혀야만 현행이 된다는 것입니다. 앞날을 내다보고 어떤 소원을 성취하려면 미리미리 대비를 해서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아뢰야식 안에 업종자로써 저장이 되면 그 결과를 반드시 나중에 받게되는 것입니다. 스스로 결과를 불러옵니다.
우리가 살면서 악업을 지을 수도 있고 때로는 전생에 지은 악업으로 인해서 금생에 고통을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평소에 업장을 소멸하기 위한 참회발원(懺悔發願)이 없다면 그 업장이 나타날 때가 되면 말리지 못합니다. 평소에는 판단력이 좋은 사람이더라도 지은 업에 대해 대가를 치를 때가 되면 아무런 소용이 없게 돼 결국에는 업장을 소멸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지은 업에 대해서는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되는 것이고 그리고 그 대가는 꼭 치러야만 끝이 나는 것입니다.
유식학의 중심사상(4) - 8식(八識) -묘주스님/동국대 교수 유식학에서 보면 우리의 정신세계에는 여덟 가지 식(識)이 있습니다. 여덟 가지 식이란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과 말나식(末那識), 아뢰야식(阿賴耶識)을 말합니다. 아뢰야식은 우리 정신세계의 가장 심층에 있는 식이고 아뢰야식과 의식 사이에 있는 식이 말나식입니다. 그런데 ‘반야심경’에 보면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이란 말이 있는데 ‘안이비설신의’는 인식(認識)의 주체(主體)이고‘색성향미촉법’은 인식의 대상을 나타냅니다.
이처럼 반야심경이나 아함경에 보면 우리의 정신세계를 의식까지만 다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말나식과 아뢰야식이 후대에 와서 깊이 연구되어진 것은 아닙니다. 다만 반야심경에서는 우리 주변에서 쉽게 인식될 수 있는 공(空) 사상을 이야기하는 것이므로 말나식이나 아뢰야식과 같은 심층적인 식을 말하지 않았을 뿐이지 그 개념은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8식 가운데 앞에 다섯 가지 식인 안식(시각), 이식(청각), 비식(후각), 설식(미각), 신식(촉각)은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하나로 묶어서 5식(五識)이라고 말합니다.
감관 통해 외부세계 인식 이들은 우선 감각기관에 의존해서 외부대상을 인식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안식은 시각 즉 눈을 통해서 외부에 빛깔과 형체를 인식하고 이식은 귀를 통해서 소리를 인식합니다. 비식은 코를 통해서 냄새를 인식하고, 설식은 혀를 통해서 맛을 인식합니다. 그리고 신식은 피부로 느낌을 인식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자기영역만 인식하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안식은 보는 것만 가능하고 이식은 귀로 듣는 것만 알 수 있습니다. 나머지 비식과 설식, 신식도 각각 코와 혀와 접촉을 통해서만 인식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이나 대보살의 경지에 이르면 한 가지 식만으로도 5식을 통해서 인식하는 것과 똑같이 인식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즉 모든 감각을 공통적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하나만 봐도 나머지 것을 다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뛰어난 연주가는 눈으로 악보를 보는 순간 그 소리를 듣는다고 했습니다. 이는 정신이 신체를 완전히 제어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8식 중 여섯 번째인 의식은 5식으로 인식한 내용들을 종합,판단 해주는 작용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동시에 보고, 듣고, 냄새를 맡고, 촉감으로 느끼는 것을 한꺼번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억과 회상, 상상, 공상, 착각, 오판 등 무수히 많은 작용을 합니다. 의식 가운데 ‘몽중의식(夢中意識)’이란 말이 있습니다. ‘꿈속에서 일어나는 의식’이란 뜻입니다. 일반적으로 꿈이란 의식이 완전히 잠들지 않은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왜 꿈을 꾸는 것일까요?
꿈의 기능은 여러 가지 첫째 정신의 조화를 위해서입니다. 정신적인 스트레스는 아뢰야식에 그대로 저장되어 쌓이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해소되지 않고 쌓이기만 한다면 그 압박으로 정신병 현상까지 나타날 것입니다. 그래서 이 같은 증세가 나타나기 전에 그에 대한 징조가 꿈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정신은 자정능력(自淨能力)이 있어서 그것을 꿈으로 해소하고 보상을 받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곧 꿈을 꾸고 난 후 스스로의 자각으로 그 증세가 현저하게 줄어들면서 정신적인 조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다음에는 예지(豫知) 기능입니다. 이것은 아뢰야식 안에 있는 업종자의 세력에 의해서 과거 업에 대한 결과로서 가까운 장래에 일어날 어떤 일을 꿈으로 나타내 미리 알게되는 것입니다. 꿈이 유난히 잘 맞는 사람은 그만큼 마음이 맑고 예민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나식은 ‘나, 내것’의 작용을 일으키는 식입니다. 즉 심리학에서 사용하는 ‘자아의식(自我意識)’이란 말과 같은 말입니다. 우리의 팔만사천 번뇌 중에서 근본이 되는 것이 바로 탐욕과 성냄, 어리석음인 ‘탐(貪)·진(瞋)·치(癡)’입니다. 이것은 ‘나, 내것’에서 시작됩니다. 모든 식은 인식의 대상이 있습니다. 말나식의 인식 대상은 외부의 것이 아니라 그 밑의 아뢰야식입니다. 여기에서 ‘나, 내것’이라는 착각이 일어나는데 왜냐하면 아뢰야식은 이미 저장되어 있는 업동자의 세력 때문에 그 작용이 한시도 중단 될 때가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작용이 중단되려면 업동자가 순식간에 다 사라져야 하는데 업은 결코 순간에 없어질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아뢰야식은 진정한 내가 아닙니다. 악업의 종자도 저장이 되어 있기에 진정한 내가 아니라 ‘임시적인 나’일 뿐입니다. ‘진정한 나’란 바로 ‘불성(佛性)’입니다. 그것은 결국 8식이 완전히 지혜로 전환되었을 때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말나식은 밑에 있는 아뢰야식을 인식대상으로 하다 보니까 ‘나, 내것’의 작용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여러 가지 번뇌가 일파만파로 전개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뢰야식에 업동자가 있어서 꿈을 받을 때도 누가 판단을 내려서 보내는 것이 아니라 때가 되면 본인이 그 세계로 간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뱀으로 태어날 운명을 가진 사람은 중음신으로 떠돌다가 때가 되면 뱀 속으로 들어가게끔 되어있습니다.
평소에 바른 생각을 지녀야 그 과정을 보면 눈앞에 보이는 굉장히 멋진 집에 마음이 끌려, 그 안으로 들어가 보면, 아주 멋진 남자나 여인이 있는데 그 사람을 끌어안게 되면 그게 바로 뱀인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뱀이 사람으로 바뀌어 보이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에 ‘원리전도몽상(遠離顚倒夢想)’이란 말이 있습니다. 본성을 한번 떠난 후 다시 본성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생각이 이러 저리 휘둘려 다니면서 꿈인 듯 생시인 듯 희미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음식도 익은 음식이 좋듯이 때가 되면 업도 익은 업이 좋기 때문에 그 순간 좋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즉 전도몽상 때문에 한 순간 화려한 모습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 들어간 순간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그래서 평소에 지혜를 닦고 뒤바뀐 생각을 버리고, 바른 생각을 가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특히 임종 무렵에는 정신을 맑게 가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평소에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아미타경’에 보면 임종시에 ‘나무아미타불’ 열번을 염송하면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님이 오시기 때문에 십대왕을 거치지 않고 극락세계로 바로 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임종이란 극한 순간에는 정신을 똑바로 차릴 수 없기 때문에 나무아미타불을 열번 염송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해인사의 혜암스님께서는 어떤 역경에 처하면 정신이 아주 맑아지신다고 하셨습니다. 어려움이 닥치면 몇 개의 전구를 켠 것처럼 머리속이 환해진다고 했습니다. 혜암스님은 죽음의 순간은 우리가 겪는 역경 중에서 가장 극한 상황이기 때문에 그 순간을 잘 이겨내기 위해서는 많은 공부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분은 많은 역경을 찾아 다니셨습니다. 심지어 6·25 때에는 공비가 주둔한 사찰까지 찾아다니시며 그 환경에서 화두를 들으며 공부를 하실 정도입니다. 그래서 이젠 어떤 역경 앞에서도 마음이 차분해지고 판단이 바로 선다고 했습니다. 8식은 수행에 의해서 지혜로 전환됩니다. 유식학의 목적은 ‘전식득지(轉識得智)’입니다. 즉 식을 전환시켜 지혜를 얻는다는 것입니다. 또한 ‘성불’이라 하여 중생의 마음을 부처님의 마음으로 바꾸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전식득지’는 불교전체의 목적입니다.
다음으로 아뢰야식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있는 그대로가 훤히 보인다 하여 ‘대원경지(大圓鏡智)’로 전환되는데, 크고 원만한 거울과 같은 경지라 하여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있는 그대로를 환히 비춘다는 말입니다. 현재의 것만 아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것도 아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을 ‘일체지자(一切智者)’라 합니다. 예들 들어 과거를 훤히 아시기에 교화를 하실 때 그 상황에 맞게 교화를 하시는 것입니다.
시간·공간을 초월한 지혜 한 보살님의 아들 일곱명이 하루는 역모죄를 뒤집어쓰고 처참하게 죽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 가서 하소연을 하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며칠 전 7명의 아들이 같이 놀러 나갔다가 외나무다리에서 어느 대신의 아들과 만나 서로 양보하라며 시비가 붙자 대신의 아들을 던져 버리고 지나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앙심을 품은 대신의 아들은 아버지의 권세로 아들들을 무술시합에 부르겠다며 무기를 가지고 궁궐로 들어오라고 유인해 궁 안에 무기를 들고 들어오는 아들들을 역모죄를 씌워서 죽였다는 것입니다. 그때 부처님께선 “당신의 일곱 아들이 전생에 대신의 아들을 억울하게 죽인 일이 있었소”라고 그 과정을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은 그 때가 되어 그 죄업을 받아 일곱 아들이 죽은 것이고 이것으로 일곱 아들의 죄업은 다 소멸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들은 보살님은 인과법의 도리를 훤히 깨우쳐 전화위복이 되어 그 자리에서 ‘아라한’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아뢰야식은 선업, 악업의 종자로 가득차 있으나 수행만 잘 한다면 ‘대원경지’로 전환할 수 있는 엄청난 가능성이 모든 중생의 내면에 있습니다. 또 말나식은 ‘평등성지(平等性智 : 평등, 성품, 지혜)’로 전환되는데 이것으로 전환되면 ‘나, 내것’의 작용이 원천적으로 없어집니다. 경전에 보면 부처님은 ‘일체중생을 친자식처럼 여긴다’는 말이 그대로 맞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식은 ‘묘관찰지(妙觀察智)’로 전환되는데 아주 미묘하게 있는 그대로를 관찰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교화 할 때도 ‘수기설법’, ‘대기설법’을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교화를 하실 때 사람을 보고 그 사람에게 가장 적절한 법문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보편적인 심리와 개성에 맞춰서 가장 적절하게 법을 설하시는 이유가 바로 ‘묘관찰지’가 가능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5식은 ‘성소작지(成所作智)’로 전환됩니다. 할 바를 이미 다 이루었다는 뜻으로 정신이 신체를 제어한다는 뜻과도 통하는 말입니다. 공부를 하면서 ‘육신통’ 가운데 일부만 열려도 스스로 신통해 진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아직 완전히 목표에 도달하지도 않았는데 신통한 경지가 나타나자 자만하여 “나는 성인이 되었다”고 자랑합니다. 그러나 아뢰야식 속에는 아직 미세한 악업이 남아 있기 때문에 그 후로 정지된 수행이 마장이 되어서 천기를 누설하거나 ‘동타지옥’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불’을 목표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성불의 목표는 바로 네 가지 지혜, 즉 ‘대원경지’, ‘평등성지’, ‘묘관찰지’, ‘성소작지’인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의 목표이고 우리가 가야할 지점입니다. 이 모두의 가능성이 우리 안에 다 있다는 것을 염두해 두시기를 바랍니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