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리의 귀결
주님께서는 세상을 심판하시려 합니다. 그리고 그분은 그분 자신의 집에서 그것을 시작하시려 합니다.
심판이 언제나 유죄판결(condemnation)인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심판은 유죄판결이 오기전 회개로의 마지막 부르심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얼마나 많이 교회에 출석했는가, 또는 우리가 얼마나 많은 진리를 알고 있는가 하는 것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위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는가에 의해 심판받게 될 것입니다.
성경 말씀에 의하면 진리를 알면서 그대로 살지 않는 것은 오직 더 혹독한 심판을 초래하게 됩니다.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인자하심(kindness)과 엄위하심(severity)을 보도록" 경고했습니다. (롬 11:22)
많은 사람들이 기만당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엄위하심을 보지 않고 하나님의 인자하심만 보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의 엄위하심만 보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기만당하게 됩니다. 진리를 알기 위해서는 우리는 반드시 그분의 인자하심과 그분의 엄위하심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은혜의 시대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마음대로 계속 범죄할 수 있으며, 하나님은 그것을 간과해 주실 거라고 많은 사람들이 가정하고 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가장 참담하고 비극적인 속임수입니다. 우리는 지금 은혜와 진리의 시대에 있습니다(요 1:17)을 보십시오.
우리 하나님은 친히 말씀하신 대로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구원은 그분이 자신의 말씀을 지키는 실제에 달려 있습니다. 그분처럼 되도록 부르심을 받은 그분의 백성들도 또한 자기들의 말을 지키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예"는 타협함이 없는 "예"를 의미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며 우리의 "아니요"는 타협함이 없는 "아니요"를 의미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람에게 한 우리의 말을 파기시키는 것은 좋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한 우리의 말을 파기시키는 것은 인간의 가장 큰 어리석음이 될 수 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이것의 일관(consequences)을 허물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그것을 성령께 거짓말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다 주고 있던 사람들과 행동을 같이 하게 되길 원했습니다. 한편으로 그들은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었습니다." (행5:2)
우리는 그러한 약속을 하고는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는 것보다 그리스도의 충복이 되는 것에 대해 아무런 언질도 하지 않는 편이 훨씬 더 좋을 것입니다.
(교회가 여기에 있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우리가 말하는 그대로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관계를 연결하는 다리는 신뢰입니다. 신뢰가 없이도, 당신은 용서받을 수 있으며, 심지어 사랑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관계를 가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신뢰의 강한 정도는 모든 관계의 강함 정도를 결정할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회복하도록 도와 주는 교량 건축자(bridge-bulder)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신뢰할만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몇 몇 공적인 사역단체들의 거짓말 또는 불충실함이 포착되거나, 그들에게 주어지는 기부금을 잘못 사용하는 것이 포착되었을 때, 가난의 영은 교회에 침투하는 주요한 침입로를 확보했습니다.
이것에 대한 과잉 반응으로 많은 사람들은 주는 것을 멈추어 버렸습니다. 또한 그렇게 함으로서 그들의 삶에 심각한 영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와 사역단체들에 대한 약속을 파기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는 가장 높은 성실을 표준하여 유지되고 있던 사역단체들도 상처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약속을 깨트려버린 사람들은 한층 더 심각한 상처를 입었습니다.
약속을 깨트리는 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리고 약속 파기에는 되 튀겨오는 반동(repercussion)이 있음을 성경은 분명히 밝혀주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 약속 파기로 인해 고통당하고 있습니다.
1. 권위에는 책임이 따릅니다.
시대의 끝에 경제는 모든 사람들이 직면하게 될 주요한 시험들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은 분명하기 때문에, 만일 우리가 어둠 가운데서 빛이 되고자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재정적인 문제들에서 더 높은 성실함의 표준에 따라 살아가야 하는 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권위는 책임과 함께 옵니다. 아담에게 온 땅과 땅 위의 모든 짐승들을 다스리는 권위가 주어졌습니다.
그가 타락했을 때, 그의 다스림 안에 있던 모든 것들(수많은 사람들을 포함하여)이 고통받았습니다. 다윗 왕이 사람의 수를 계수함으로 범죄했을 때, 수만명의 자기 백성들이 죽었습니다.
이것은 공정하지 않다고 우리는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책임이 없다면 진정한 권위도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권위가 많으면 많을 수록, 우리의 실수로 인해서 우리가 가진 권위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상처 받게 되는 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권고합니다. "우리가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고전11:31)
우리가 어떤 잘못된 길에서 깨달도록 성령을 보내달라고 기도하고 또 하나님의 은총의 표시로서 교정을 받아들이면,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살펴본다면 그것이 올 때 우리는 더 악한 심판으로 고통받지 않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가족들을 섬기는 것과 그분의 모든 자원들을 관리하는 청지기가 되는 것은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가 만일 이것을 하도록 부름 받았다면, 우리는 반드시 가장 높은 성실을 기준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커다란 책임감을 반드시 이해하지 않으면 안되며, 그리고 그것에 상당할 정도의 진지함으로 그것을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 책임을 진지하게 만드는 것은 단순히 돈이 아닙니다.
우리 책임을 진지하게 만드는 것은 주님의 가족들의 성실함(integrity)입니다.
마지막이 되기 전에, 이 세상에 흔들리지 않거나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어지게 될 때, 세상은 교회를 바라보게 될 것이며, 그들의 말이 곧 그들의 계약(bond)인 완전히 신뢰받을 만한 사람들을
보게 될 것인데, 왜냐하면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이 신뢰할 만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증거하는 것의 강력함정도는 우선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있는가에 의해 결정되며, 그리고 그 다음 우리의 말이 얼마나 신뢰 받을 수 있는가에 의해 결정되어지게 됩니다. 만일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면, 우리는 그분처럼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말도 또한 진실해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이러한 중대한 주제들을 거론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우리는 지금 가장 중대한 시대로 접어들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좋은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즉,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 순수하고 거룩한 두려움의 결여는 아마도 교회가 오랫동안 덫에 빠져 기만당해 왔던 어리석음과 속임 당함의 주된 이유일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던 경우는 결코 없었습니다.
궁극적으로 온 세상이 임하게 될 심판은 근본적으로 세상이 그분을 매우 하찮게 대우한 결과입니다.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자기의 아들을 주신 하나님은 사소한 잘못에 우리를 정죄할만큼 무정한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직면하는 어려움들과 압박들을 알고 계십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가 때때로 비틀거리게 될 것을 알고 계시지만, 그분의 은혜에 대해 주제넘게 건방스러운 것과 그리고 모든 것을 드리기로 헌신했던 때를 취소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비극을 초래한다는 것을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말씀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또한 그 말씀을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2. 두려움이 자유로 바뀌어 질때
폭풍이 밀려오기 시작할 때 여러분의 집을 반석 위에 지으려고 시도하는 것은 이미 너무 늦게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순종하도록 권고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유의해봅시다.
"이로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시32:6)
"여호와는 그 경외하는(fear) 자 곧 그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 저희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며 저희를 기근 시에 살게 하시는도다" (시33:18-19)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fear) 자를 둘러 진치고 저희를 건지시는도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fear)하라.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34:6-10)
성경에 있는 가장 위대한 약속들은 주님을 두려워하는 (경외하는:fear) 자들에 대한 것입니다.
주님을 올바르게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의 다른 어떤 것에도 두려움도 갖지 않습니다. 그분을 알면서도 올바르게 그분을 경외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가장 커다란 인류의 비극들 가운데 몇 가지에 떨어지기까지 타락해 왔습니다.
요한은 주님과 친밀했습니다. 반면에 유다는 단순히 그분을 잘 알았습니다. 거기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억측을 낳게 되는 하나님과 친밀함은 아마도 가장 끔찍한 기만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이 얼마나 경외하고 두려워해야 할 분이신가 하는 귾임없는 계시를 낳게 하는 하나님과 친밀함은 순종을 낳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충복(bondservant)이 되기로 헌신하고 나서도 계속해서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비극적인 우매함이 될 것입니다.
진리를 알고 진리로 살아가기로 우리 자신들을 헌신하고 나중에 그것을 하지 않는 것은 위선, 바로 그 자체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하는 것은 주님의 가장 맹렬한 정죄를 예약하는 것과 다름없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어린 양의 피로서 값을 치르고 구속되었지만, 그분께서는 우리가 주님을 섬기도록 강요하시지 않습니다. 순종이 요구되어집니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반드시 순종하기로 선택해야 합니다.
거기에는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죄의 결과로 고통받는 일 없이 몇 년간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침내 우리가 뿌리는 것을 거두게 될 것인데, 마치 솔로몬왕이 전도서 8장 11절에서 진술했던 것처럼 거두게 될 것입니다.
"악한 일에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않으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
하나님께서 신속하게 우리의 죄를 심판하지 않는 것은 종종 우리의 죄가 그분께서 대수롭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곤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두워진 마음에서 오는 기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신속히 징계하지 않으시는 것은 그 자체 안에 그들을 한층 더 단단한 무감각으로 끌고가는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주님께서 심판을 더 빨리 실행하신다면, 우리는 너무 악해질 만큼 구부러지지 않을 거라고 우리는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자유를 제지하게 되고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향한 우리의 헌신을 증명할 수 있게 됩니다.
만일 그들이 신속한 심판이 임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어느 누가 불순종하겠습니까?
주님께서 불순종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주시는 자유가 주님께서 순종해서 우리의 헌신을 증명해 보일 수 있도록 우리에게 주시는 자유와 동일한 자유입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심지어 진리가 편리하지 않거나 겉으로 보기에 합당해 보이지 않을 때에도 진리로 살아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