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장 유즈 아사프로 다시 태어난 예수
카쉬가르에서 예수와 나훔은 카라반 일행과 작별을 고한다. 그들은 길기트로 향한다. 길기트 다음 정류장이 탁실라이다. 탁실라에 도착하면 우선 이 길고 고통스러웠던 여정이 끝나는 것은 물론 근 이 십 년 만에 도마와 상봉하게 되는 것을 생각하면서 예수는 자못 흐뭇해진다. 예수와 나훔은 길기트에서 며칠 쉬어가기로 한다. 카라코람의 눈과 얼음이 덮친 한 골짜기에서 나훔과 예수의 나귀가 부상을 입었기 때문이다. 눈도 제대로 뜨기 어려운 눈보라 속에서 방향도 모르는 채 얼음 위를 걷다가 얼음이 꺼지면서 나훔과 말이 개울에 빠진 것이다. 물에서 기어 나온 나훔은 이에서 딱딱 소리가 나도록 덜덜 떨었고 나귀는 발목을 삐고 말았다. 해발고도 4,000미터에서 8,000미터나 되는 이 산악지대에서 사람이 통과할 수 있는 틈을 찾아 몇 미터라도 전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카라반 대장이 위험지역을 세심하게 표시해 준 지도와 나훔의 경험과 노련한 판단력이 없었더라면 이 지역을 무사히 헤쳐 나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예수도 몹시 지쳤다. 그들은 몇 명의 힌두 수도사들이 살고 있는 바위동굴에서 치료를 받고 음식을 얻어 먹으며 며칠 쉬고 있다. 예수는 어두운 동굴 한 모퉁이를 찾아 정좌하고 생각을 정리한다. 그리고 그는 긴 기도와 명상에 몰입한다.
어느 날 한 수도사가 예수를 찾아와 그를 데리고 멀리 다른 동굴로 가서는 거기에 있는 한 요가 수행자를 손으로 가리킨다. 이 수행자는 촛불 하나가 깜빡거리는 어둠 속에서 눈을 감고 연꽃자세 lotus position, (결가부좌: 結跏趺坐)로 흔들림 없이 앉아 있다. 그는 남쪽에서 온 인도 탁발승 托鉢僧이라고 한다. 그는 이 동굴에서 이러한 자세로 지난 4년 동안 명상을 하고 있다. 깜빡거리는 촛불에 비친 그의 몸은 살 거죽과 뼈만 남아 해골 같이 보였다. 몸에서 썩는 냄새가 진동한다. 그는 마치 백 살 노인처럼 보인다. 그의 얼굴에는 있어야 할 평화와 미소가 그려져 있지 않고 고통과 죽음이 나타나 있다. 누군가가 하루에 한 번씩 음식을 날라다 준다고 하였다. 예수를 데리고 간 수도사는 이 탁발승이 죽을까봐 염려가 되어 예수를 그에게 데려 간 것이다. 원조를 청한 것이다. 이 수도승 생각에, 멀리서 온 이 히브리 노인이 뭔가를 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예수는 그 탁발승을 한참 내려다보다가 그에게 조용히 말한다.
"선생이시여, 저는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고행과 참회를 통해서 신에게 가까이 가고자 하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지금 신 자신의 몸을 학대하고 해치고 있습니다. 당신은 지난 수년 동안의 명상에서 신과 당신이 하나이고 동일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까? 선생이시여, 당신은 당신자신이 바로 신의 한 출현 出現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당신의 생명과 삶은 신이 당신에게 준 선물입니다. 아끼고 소중하게 다루고 즐겨야 하는 겁니다. 당신의 육체는 당신의 영혼과 함께 신의 구체물입니다. 그것을 소중하게 다루고 또 사랑하는 것이 옳은 일이 아닐까요?"
예수는 그의 표정을 읽고 있다. 그는 이 탁발승이 자기 말을 듣고 있는지 아닌지 관찰하고 있다. 그러나 이 승려의 표정은 변하지 않는다. 예수는 그에게 묻는다. "내 얘기를 계속할까요? 그만 할까요?" 그 고행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이제 희망이 보인다. 예수는 다시 말한다.
"당신의 목소리는 바로 신의 목소리입니다. 당신의 팔 다리도 신의 것입니다. 신은 그것들을 당신의 삶에 유용하게 쓰도록 당신에게 주었습니다. 내가 보건데, 신은 당신이 이와 같이 신이 주신 팔 다리, 눈과 코와 입을 이렇게 학대하고 포기하는 꼴을 보면, 그는 아마도 당신을 책망할 것입니다. 그는 아마도 당신이 차라리 저 절벽에서 떨어져 죽는 것을 보는 것이 더 나을 거라고 생각할 겁니다. 자, 그러지 말고 일어나십시오. 바깥으로 나가 해를 쪼이십시오. 신이 창조한 따뜻함과 포근함을 느끼십시오. 목소리를 내어 사람들과 말을 하십시오. 신이 당신에게 준 소중한 선물들을 마구 팽개치지 마십시오."
그 고행자는 한참 동안 힘없는 눈으로 예수를 응시한다. 그의 움푹 패인 눈에서는 눈물이 흐른다. 해골같은 바짝 마른 얼굴에 눈물이 마구 흐른다. 어렵게, 어렵게 입을 열어 그는 말한다. "그동안, 내가 이 동굴에 앉아 있는 동안, 아무도 나를 찾아와 이렇게 호의와 온정을 가지고 말을 건넨 사람이 없었소. 또 그것도 그렇게 엄연하고 권위있게. 당신은 진실을 말하고 있소. 나는 당신의 말을 듣고 있었소. 나는 밖으로 나가겠소."
고행자가 일어나려고 팔 다리와 몸을 비틀며 안간힘을 쓴다. 그는 일어설 수가 없다. 쇠약할 때로 쇠약해 졌고 일부 썩어 있는 그의 몸이 그의 의지대로 될 리가 없다. 그는 다시 한 번 일어서려고 애를 쓴다. 이때 예수는 그를 끌어안고 힘을 주어 그를 일으켜 세운다. 고행자는 예수한테 온 몸을 맡기고 매달린다. 그는 나훔과 주변에서 보고 있던 사람들의 도움으로 동굴로부터 천천히 실려 나온다. 몇 년 만에 처음 보는 태양에 눈이 부셔 눈을 뜨지 못하고 그는 손으로 눈을 가린다. 이러한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모든 사람들은 다시 한 번 예수를 쳐다본다. '도대체 이 사람은 누가인가?' 나훔은 생각한다. '이 노인이 바로 예수일 것이다. 이 노인은 이적을 행하였다. 나는 그것을 바로 옆에서 보았다. 예수는 길기트의 한 동굴에서 또 하나의 이적을 행한 것이다. 이것은 그가 행한 여러 이적들의 하나로 기록이 될 것이다.
각국의 다양한 동굴 수행처
예수와 나훔은 짐을 정리하고 힘차게 발을 내디딘다. 이제는 예수와 나훔과 나귀 한 마리뿐, 안디옥에서 구입했던 동물 중에서 나귀 한 마리를 남기고 나머지는 카쉬가르에서 이미 처분해 버렸다. 이 나머지 여정이 카쉬가르 이전과 다른 점은 여기가 티베트 고원이기 때문에 사방이 눈 덮인 고산이고 하루 종일 맑은 태양을 만끽할 수 있는 것이다. 가끔 깍아진 듯한 돌산 중턱에 곰파 Gompa, 수도원들이 바위에 조개처럼 달라붙어 있는 것을 멀리서 볼 수 있다. 햐얀 페인트로 점을 찍은 듯한 이 곰파들은 회색 바위산을 배경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멀리서 황색 도포를 입은 라마승들의 움직임이 개미같이 작아 보일 듯 말듯 한다. 그들은 어째서 그렇게 사람들이 접근할 수 도 없는 높고 험한 곳에 곰파를 지었는지! 이 지방은 한편 힌두교의 고장이기도 하다. 길을 가다보면 터번을 두르고 도포를 입은 힌두교인들을 지나치게 된다.
이 지방의 평범한 남녀들, 아이들, 그들은 무슨 기쁜 일이 있는지 항상 웃음을 머금고 있다. 이들은 다 가난하지만 모두들 행복해 보인다. 이들은 궁핍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거나 궁핍을 아예 초월한 사람들 같다. 예수는 생각한다. 로마나 팔레스티나의 삶은 자기 자신도 그렇게 살았지만 서로 다투고, 욕하고, 미워하고, 속고 속이고, 죽고 죽이고, 쫓고 쫓기고의 연속이 아니었던가? 벌써 몇 천 년을 그래왔지 않았던가? 왜 꼭 그래야 하나? 그럼 이 지역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모두가 성인인가? 이러한 것들은 예수를 곤혹케 한다.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다. 예수는 생각한다. '세상에는 내가 아직 모르는 것이 너무 많구나.'
나훔과 예수는 걸으면서 다시 여러 이야기를 나눈다. 한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로 이어지고,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오래 전 이 여정의 초엽 니시비스에서 하던 이야기로 돌아간다. 나훔은 예수에게 다시 묻는다.
"아사프 선생님, 예수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요? 그는 정말로 신의 아들입니까? 하나님의 화신 化身입니까? 물을 포도주로 바꾼 것이 사실입니까? 물 위를 걸어 다녔다는 데, 보리떡 다섯 개의 떡과 두 마리의 생선으로 몇 천 명을 먹인 것도 사실인가요? 죽은 지 나흘이나 된 사람을 '나오너라' 한마디로 죽었던 그를 동굴에서 걸어 나오게 한 것은요?"
한꺼번에 장황하게 쏟아져 나온 나훔의 이 많은 질문에 예수는 잠시 난감해한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질문들은 전혀 생소한 것도 아니다. 자신이 로마나 팔레스티나에서 이교도는 물론 유대인한테서도 이런 질문을 많이 받은 바 있고 심지어 자신의 사도들한테서도 받은 바가 있지 않았던가? 당연한 의문이요, 의혹이고, 궁금증을 갖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한 것이리라. 예수는 잠시 생각한다. 예수는 나훔의 진지한 태도를 보고 이제는 말을 해주어도 좋은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예수는 천천히 말을 꺼낸다. "여보게, 나훔 아비자! 실은 내가 자네가 생각하는 바로 그일세." 나훔은 별로 놀라지 않는다. 그러나 나훔은 수 많은 생각과 감정이 뒤섞여 한참 동안 그를 바라보고 또 바라본다. 나훔은 갑자기 말을 잃었다. 사실 그는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 머리의 움직임이 갑자기 정지한 느낌이다.
그는 조용히 걸으면서 마음을 정리하고 싶었다. 사실 그가 낌새를 챈 것은 벌써 몇 백 킬로 전 수사 지방에서였다. 길기트에서 그가 목격한 사건은 확신을 갖게 한 것이었고, 나훔은 그가 분명히 예수라고 생각했었다. 다만 자기가 상상했던 예수는 신에 가까운 그런 존재였는데 이 노인은 너무나 인간적이라는데 차이가 있다. 이번 여행에서 예수는 다시 붙잡혀 처형될 위험을 피해 유즈 아사프 Yuz Asaf, Yus Asaph라는 이름으로 여행을 하고 있다. 유즈 Yuz는 요셉의 카슈미르식 표기이다. 즉, 유즈 아사프는 '요셉의 아들 Son of Joseph'이란 뜻이며, 또한 '병 치유된 자들의 인도자'라는 뜻도 있다. 예수에게는 여러 가지 다른 이름들도 있는데, 예수는 이사 Isa, Issa라고도 하므로 하즈랏 아시 Hazrat Isa, 위대한 자 이사라고도 불린다.
바위산 속에 위치한 「라마유르 곰파」 (인도 라다크州都 레Leh에 소재)(좌) / 곰파 내부(우)
예수는 이어서 말한다.
"나훔 아비자, 유즈 아사프라는 이름은 내가 젊어서 인도에 왔을 때 얻은 오래 된 나의 인도 이름이라네. 자네가 보다시피 나는 자네와 똑같은 인간이라네. 그러나 나는 많은 명상과 끊임없는 기도, 고행, 그리고 공부를 통해서 하나님과 많아 가까워졌네. 나는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인 것을 알고, 인간에 대한 그의 의도와 계획을 알며 그가 인간에게서 무엇을 기대하는지를 잘 알고 있네. 우리가 어려움에 빠졌을 때 나는 항상 기도로 간구한다네. 그러면 그는 내 기도를 꼭 들어 주신다네. 그러한 하나님을 나는 믿고,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나처럼 그를 믿어주기를 바라는 것이지." 예수는 잠시 생각하는 것 같다.
"사람들이 나를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고 신의 권화 權化라고도 하는 것은 맞는 말이지." 나훔 아비자, 당신이나 나나 우리가 다 하나님의 구체물이고 체현 體現이고 현시 顯示가 아니겠나. 그러니까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의 자식이고 하나님의 화신 化身이지.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의 분신이지. 그래서 우리는 모두 신성 神性을 가지고 있지. 나는 부단히 정진하고 기도하고 명상을 해왔네. 그것을 통해서 나는 깨달음을 얻었고 깨달음은 앎이 되었지. 깨달음과 앎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과 점점 가까워지고 그 분과의 연결이 용이해진다네. 이렇게 해서 나는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의도와 계획과 그가 인간에게서 기대하는 바를 알고 있지" 예수는 한참 쉬었다가 다시 말을 잇는다.
"그리고, 나훔 아비자, 자네가 들은 나의 이적이야기는 대충 이런 걸세. 모두가 다 구전이 아니겠나. 무슨 얘기든 이야기가 구전에서 다시 구전으로 옮겨지다 보면 윤색은 물론 와전도 있고 가감도 있고 과장도 있을 수 있지. 또한 인간은 상상력을 가진 동물이기 때문에, 얘기가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으로 옮겨질 때마다 계속 변하고 가감되게 마련이지. 어떤 동기에서든지 고의로 나에 대한 이야기를 , 또는 나의 제자에 관한 이야기를 좋게 또는 나쁘게 만들어 낼 수도 있어. 실은 내가 로마나 팔레스티나에 있을 때 이런 잘못된 구전들을 바로 잡아 보려 했네만 솔직히 말해서 역부족이었네." 예수는 계속한다.
"나훔 아비자, 사실 더 중요한 것은 나의 설법이 대부분 비유라는 것이지. 자고로 유대인들은 수사학에 능했지. 비유도 그 중에 하나이지만, 사물이나 일, 또는 어떤 현상을 설명할 때 그것을 바로 묘사하지 않고 그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성질을 가진 사물에 빗대어 말함으로써 뜻을 더 쉽고 더 명백하게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지. 나는 자주 비유를 쓰고 내 제자들도 마찬가지지. 따라서 비유에는 표면에 나타나 있는 한 얘기가 있고, 깊이 숨어있는 다른 얘기가 있어 항상 이중성을 가지고 있지. 사실 이것이 비유의 묘미이긴 하지만 그러나 표면에 나타난 이야기를 액면에 그대로 믿고 이를 옮기고 또 임의로 바꾸고 윤색하다 보면 몇 사람 뒤에는 별의 별 얘기가 다 나오게 마련이거든. 사실 이것이 비유법의 문제이기도 하지. 내가 행한 여러 이적 이야기들은 비유로 해석해야할 것들이 많아."
나훔은 아무 말이 없다. 그는 자신의 머릿 속을 덮고 있던 갑갑함은 사라지고 수정처럼 투명해지는 것을 느꼈다. 갑자기 모든 것이 선명하게 되었다. 더 이상 물어 볼게 없어졌다. 앞으로 그는 그저 아무 말 없이 예수의 말을 열중해서 듣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들은 계속해서 걸어간다.
[출처] < 예수의 마지막 오딧세이 > ( Jesus' Final Odyssey ) 제20회|작성자 래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