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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2024년 8월 26일에 가진 루터칼빈신학회 제2회 공개신학세미나에서 '십자가 신학과 신앙'이란 주제로 발표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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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신학과 신앙
목 차
Ⅰ. 서 론 : 들어가는 말
Ⅱ. 루터의 십자가 신학
1. 십자가 신학이 등장하게 된 시대의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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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십자가 신학이 형성된 사상적 배경
첫 번째 배경인 사상적 배경이다. 십자가 신학은 루터 당시에 이르기까지 중세교회를 지배해 왔던 사상과 연관이 있다. 중세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말하면서 영광의 추구에 있어 왔다. 이는 십자가의 신학에서 ‘영광의 신학’으로 말해진다. 이 신학에는 십자가에 정작 있어야 할 구원 얻게 하시는 하나님의 지혜인 예수 그리스도는 없고, 인간이 잘 될 수 있는 추구에만 있는 인간의 지혜가 대신하고 있다. 그런 까닭에 루터는 십자가 신학에서 인간의 지혜에 의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지혜에 의해서 비로소 알 수 있는 ‘숨어 있는(은닉된 계시인) 하나님에 의한 고난의 십자가’를 말한다.
그런데 이렇게 루터가 십자가 신학을 발견하는 데는 영향을 끼친 사상들이 있다.이에 대해 맥스라스(McGrath)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루터가 갑작스럽게 참된 신학을 의식하게 되고, 나아가 그것을 바탕으로 교회를 개혁해야 할 그의 신적 소명을 의식하게 되었던 계시의 불가항력적 순간을 경험했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 유혹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에게 있는 모든 증거들은, 루터의 신학적 통찰이 인문주의와 새 길의 유명론, 그리고 그 자신이 몸담고 있었던 어거스틴 수도회의 신학, 이 세 가지의 주요한 사상적 흐름의 영향 아래 비텐베르크에서 체류하던 오랜 기간에 걸쳐 생겨난 것임을 말해준다. 루터의 십자가 신학이 출현할 합류점을 규정하는 것은 ......이 세 가지의 사상적 흐름인 것이다.
루터가 십자가 신학을 주장하게 된 데에는 이처럼 어거스틴 수도회를 통한 어거스틴의 신학 사상과 르네상스를 이끈 인문주의와 스콜라주의의 유명론으로부터 받은 영향이 자리하고 있다. 이렇게 루터가 영향을 받은 사상적 배경으로 세 가지의 경우를 드나, 모든 학자의 공통된 견해는 아니다.1) 여기서는 맥그라스의 견해에 의해서 기술해 나간다.
(1) 먼저 어거스틴2)을 통해서 루터가 신학적 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이해이다.3) 루터가 이처럼 어거스틴의 영향을 받음에 있게 된 것은 그의 대학생활과 수도원 생활이 관련 있다. 그는 1483년에 아이스레벤(Eisleben) 시골 공부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그를 법률가로 키우기 위한 아버지의 열망으로 명문 에르푸르트(Erfurt) 대학에 들어갔다. 그 학교는 스콜라학파와 인문학파의 사상이 교류하는 것으로, 이곳에서 스콜라철학과 라틴의 고문학을 공부하면서 자연스럽게 인문학파에 속한 사람들과 사귐을 가졌다. 이를 통해서 그는 인문주의학자 베셀(John Wessel)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으나, 그의 사상이 이들과 일치하지는 못하였다. 그런 그는 학업을 마친 후 다시 법학을 공부하고자 하였으나, 갑자기 대학을 떠나서 서방교회의 수도주의를 따르던 어거스틴파 수도원으로 들어가 수도생활을 하였다. 그 이유는 여름 방학을 마치고 1505년 7월 2일에 친구와 함께 학교가 있는 에르푸르트로 돌아가는 길에 스톳테른하임(Stotternheim) 근처의 한 산 속에서 갑자기 벼락을 동반한 폭풍우를 만남으로 비를 피하려고 나무 밑에 있다가 낙뢰가 떨어져 함께 동행 하였던 친구가 즉사하고,4) 자신마저 죽을 뻔한 일을 겪고는 너무나도 놀란 나머지 성 안나(St. Anne)를 부르짖으며 구원을 요청하는 비명을 지르고는 쓰러졌다. 그때 그는 "성 안나여, 저를 도와주소서, 제가 수도사가 되겠습니다."라고 하는 서약을 했고, 곧 폭풍우는 그쳤다. 루터가 이처럼 성 안나를 부르짖으며 찾은 것은 성 안나는 마리아의 어머니, 즉 예수의 외조모인 안나로 로마가톨릭교회 신자들은 성 안나로 지칭하는데, 광산 지대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위기에 처한 사람을 구해준다고 마음속으로 믿어 오고 있는 광부의 수호자였는데,5) 이는 루터의 아버지도 숭배에 있어 온 것으로 루터 또한 아버지의 영향에 있은 때문이었다. 루터는 그렇게 친구의 죽음과 함께 자신마저도 죽을 뻔한 경험을 겪고서는 공포를 느끼며 두려움 속에서 보름을 방 속에 처 박혀 은둔하고서는 자신이 부지중에 구한 수도사가 되겠다고 서약한 기도를 놓고 고민하였다. 그리고는 마침내 "하나님과의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되고, 그 약속을 지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는 말을 남기고 기도한 서약을 지키고자 결심하여 스타우핏츠(Johann Van Staupits) 감독이 원장으로 있는 수도원에 들어갔다. 더욱이 수도자가 되면 보통 사람보다도 영혼의 구원을 얻을 수 있어서 안전할 것이라는 것이 당시에 유행되었던 사상이기에 루터 또한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으로부터 자신의 생명을 안전히 도모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
그런 루터는 어거스틴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은 후 1507년에 신부 안수를 받았으며, 여기에서 성경 연구의 기회를 얻어 어거스틴 연구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교리를 접하게 되었다. 그러한 그는 스타우핏츠의 추천을 받아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연구를 하고 그 대학의 교수가 되도록 힘을 썼다. 이에 루터는 마침내 1512년에는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으며, 교수로 취임하여 어거스틴 신학을 강의하기도 하였으며. 시편과 로마서, 갈라디아서 연구에 열중하면서 그에게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그는 어거스틴 신학의 연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되었는데, 그의 성경 연구에 의해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인간에게 그리스도를 통해서 용서와 구원이 임하는 믿음의 의에 의한 하나님의 은혜로 연결되는 발견에 이르게 된 것이다. 수도원에서 기도와 금식과 고행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풀 수 있을 줄 알았던 루터는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얻고 구원을 얻는 진리에 비로소 눈을 떠 발견하게 된 것이다.
(2)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믿음의 의의 깨달음은 그가 법학공부를 하기 위하여 대학생활을 하며 배우고 접한 스콜라학파와 인문학파의 사상이 지닌 문제점도 파악하기에 이른 것도 후에 루터가 ‘십자가 신학’을 주장하게 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스콜라학파의 사상은 중세 전체를 지배하였던 사상으로서 중세 로마가톨릭교회의 공식적인 신학이었던 스콜라 신학6)을 의미한다. 이 사상은 피터 롬바르드(Peter Rombardus, 1100-1160)에게서 신학의 체계가 제시되었고,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에 이르러 그 절정에 달하게 된다. 이러한 스콜라신학은 신앙과 이성을 조화시키고자 철학을 도입하여 신학의 이해를 가지려는 것으로, 기독교 진리의 신앙을 이성에 의한 철학적 합리적 논증에 의해서 탐구하여 설명하려는 시도에 있어, 신앙과 이성을 대립적인 관계에 의해서가 아니라 서로 보완적인 관계에 의해서 이해함으로써 신의 존재를 이성적으로 증명하려고 하였다. 이 과정에서 기독교 신앙이 이성에 의해 뒷받침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스콜라주의자들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찾으려고 했다. 그런 까닭에 스콜라신학은 플라톤(Platon, BC 428/427-348/347)으로부터 보이티우스(Boethius)에 이르기까지 여러 고대 철학자들의 저술물들을 연구하였으며, 그 철학자들 중에서 가장 큰 관심을 끈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eles, B.C. 384-322)였다. 스콜라신학은 그 연구를 통해 기독교 신앙에 이성을 끌어들임으로써 철학의 범주에 갇히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루터가 이러한 스콜라신학과의 접촉에 있게 될 때 윌리엄 오캄(William Occam, 1285-1347)이라는 사람은 루터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는 실재론(realism)을 반대하는 유명론(nominalism)7)을 주장한 자로서 신학적 진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직 신앙만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의 도움을 받지 못한 이성은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러한 오캄의 사상은 루터가 대학 시절에 스콜라학파의 사람들과 사귐을 가지나 거리를 둘 뿐만 아니라, 후에 ‘스콜라신학에 대한 논박(Disputatio contra scholasticam theologiam 1517)’을 써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철학의 형이상학에다가 기독교적인 의상만 걸치고 하나님의 은혜 외에 인간의 이성에 의한 능력을 내세우는 부류의 신학에 대해 비판을 가하였으며,8) 루터의 십자가 신학에 큰 영향을 주는데 특히 루터의 ‘칭의 교리’ 중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계약적인 개념에 큰 영향을 끼친다.9)
하지만 루터는 오캄을 비롯한 스콜라주의자들과 완전한 결별에 있는다. 오캄은 비록 신앙에 이성이 개입하는 것을 반대했지만, 신앙 의인화를 위해서는 작은 전제 조건으로 겸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기에 먼저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이는 계약 신학이라고도 하는데,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계약은 의롭다 하심을 얻기 위한 작은 인간적 노력, 곧 겸손을 통해서 은혜를 주신다고 여겼다. 루터는 이러한 오캄의 사상을 영향 받기는 하였으나, 그와 차별을 가졌다. 루터는 겸손하려고 노력하지만 그 속에 교만이 도사리고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루터는 인간의 작은 겸손의 노력조차 하나님 앞에서는 악한 죄임을 인식하였으며, 그에 따라서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오는 오직 ‘믿음에 의한 의’를 말하였다. 이것이 루터의 ‘이신칭의’ 또는 ‘이신득의’에 의한 구원 사상이다. 다음의 글은 이러한 이해를 돕는다.
오캄의 사상적 영향을 받은 루터도 인간 본성이 억누를 수 없는 ‘이전의 선한 것들의 잔여분’(resideu of former goods)을 소유한다고 믿었다. 그러한 그는 1515년 후기에 특별히 초기 시편에 관한 강의와 설교에서 마치 율법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 위한 사람들의 모습(figure)이고 준비이듯이,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을 행하는 것(Factio quantum in nobis est)은 우리로 하여금 은총을 가져다준다며 신적 은총의 수용을 위한 기질로서 자신의 최선을 다할 필요성이 있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이는 그의 『로마서 강해』에서도 보게 되는데, 시작 부분에서 synteresis – 양심 - 로 기우는 경향을 보인다. 이것은 로마서 1:20에 관한 주해에서 분명해진다. 여기서 루터는 “신학적 synteresis가 모든 인간 안에 존재하며, 모호하게 될 수 없다”고 주석한다. 시편 41편에 관한 주해(scholia)에서 루터는 “synteresis와 선을 향한 욕망은 인간 안에 존재하는 억제할 수 없는(inextinguishably)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루터는 점차 비엘과 많은 중세 후기의 스콜라 주의의 논리를 거부하기 시작한다. 특별히 루터는 그의 유명한 저서 『스콜라 신학에 대한 논박(Disputatio Contra Scholasticam Theologiam)』에서 비엘과 중세 후기 스콜라주의의 기본 전제들을 거부한다. 비엘에게 있어 synteresis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접촉점을 자아에게 제공한다. 루터는『스콜라 신학에 대한 논박』의 논제에서 이를 거부하며, “의지가 본성적으로 올바른 도덕적 인식과 일치한다는 진술은 잘못되었다. 이것은 스코투스와 비엘에 반대 된다”고 말한다. 이렇게 루터는 초기 『로마서 강해』를 통해 지지했던 synteresis를 거부한다. “이러한 강한 욕망(원죄)은 언제나 우리 안에 있다. 그러므로 만일 하나님의 사랑이 은혜를 통해 시작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결코 우리 안에 있을 수 없다.” 루터는 로마서 3:10에 관한 주석에서 스콜라주의적 인간론과 도덕적 이론에 대해 반박한다. “우리는 전적으로 악에 기울어져 있어서, synteresis에서 분명해진 선을 향하게 하는 그 어떤 부분이 우리 안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루터는 또한 스콜라 신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에 기초해서 죄와 은총을 다루는 것에 대해 반박한다. “스콜라 신학자들은 죄와 은총에 대해 충분하고 분명하게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원죄가 완전하게 제거될 수 있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 고대 교부들이 … 성서가 행한 방법을 따라 전적으로 다르게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스콜라 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의 방식을 따라 말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행한 사역의 정도에 기초해서 죄와 은총을 논한다.”
(3) 루터의 ‘십자가 신학’에 영향을 준 사상적 배경으로는 인문학파의 영향도 기여하였다. 인문학파, 곧 인문주의는 ‘humanism’란 용어에서 보듯이 인간성을 볼 수 있는 인간이 근본이 되는 사상 체계에 있는 것을 뜻한다. 박경수는 『십자가 신학 : 오직 십자가만이 우리의 신학이다』의 서평에서 루터의 칭의론은 세 흐름의 영향을 받았다고 분석한다면서 그 중에 하나인 인문주의의 영향을 언급하였다. 루터는 분명 인문주의와의 거리를 두고 있었지만 유사점 또한 지니고 있었다면서, 루터와 인문주의 모두 스콜라주의를 거부했고 초대교회와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했으며, 수사학에 관심을 가진 점에서 종교개혁은 인문주의에 빚을 지고 있었으니 인문주의는 종교개혁의 ‘촉매제’ 혹은 ‘산파’의 역할을 하였다고 보았다. 루터와 인문주의 모두 당시의 로마가톨릭교회가 부패하며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로부터 변화에 있는 개혁을 해나가야 할 것에는 뜻을 같이하고 있었으면서도 그러함에도 루터가 인문주의와 거리를 두었으며, 이는 ‘십자가 신학’에서 인문주의와의 차별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인문주의가 인본주의 사상을 뿌리로 하고 있는 반면에 십자가 신학은 그 뿌리가 신본주의 사상인 것에 있다. 이는 인문주의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는 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론』(De libero arbitrio, 1524)에서, 그리고 이를 반박한 루터의 『노예 의지론』(De servo arbitrio, 1525)에 대한 재반박의 성격인 『광신』(Hyperaspistes, 1526-27)10)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인간을 그들의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이해함에 있어서 에라스무스는 인간의 의지에 의한 자유한 선택을 주장한 것이다. 이에 반해 루터는 인간의 의지는 어느 주인에게 속했느냐에 따라서 그 주인을 따른다는 것으로 인간의 의지의 결정은 주인에게 있다는 주장을 피력하였다. 그리고 그에 따른 주께 의존된 절대적 신앙이 잘 표현되고 있는 것이 십자가 신학이다. 이렇게 인문주의는 루터와 가진 대립된 논쟁에 의해서 루터의 십자가 신학이 형성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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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진오는 그의 박사학위논문 “루터의 십자가 신학과 그 현대적 발전에 관한 연구 : 몰트만의 신학적 수용과 발전을 중심으로” 에서 ‘루터의 십자가 신학의 형성 배경’으로 (1) 유명론 (2) 신비주의 (3) 어거스틴주의를 기술함으로써 맥그라스(McGrath)와 차이를 보였다. 필자는 신비주의가 루터의 ‘십자가 신학’에 영향을 끼쳤다는 견해에 대해서는 찬반이 있으므로 본 글에서는 다루지 않는다.
2) 어거스틴은 ‘은총 교사/박사’(Doctor Gratiae)로 불린다. 그의 작품과 신학의 교리적 강조점이 하나님의 은총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은총의 주제를 새롭게 숙고하며 자신의 삶의 경험에 관한 신학적 성찰을 바울서신에 대한 학문적이 주석과 결합시켰다.
3) 어거스틴이 심플리키안에게 보낸 그의 질문에 답하는 편지에 의한 어거스틴의 은총론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1) 공로와 상관없이 부르시는 은혜 (2) 부르신 자로부터 오는 택하심 (3) ‘적절한 부르심’과 홀로 역사하시는 하나님 (4) 은총과 자유의지 : 믿음에 대한 선택조차 은혜로 오며, 믿는 자들로부터 선을 행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한편, 인터넷에 올려 있는 자료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한 것을 볼 수 있다. (1)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며, 은혜는 그리스도의 값으로 얻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2) 은혜는 우리가 전적으로 자신의 힘에 의지 하지 않는 다는 것을 뜻한다. (3) 하나님의 사랑이 미치지 못할 죄인은 없다. (4) 따라서 구제 불능으로 보이는 사람에게도 임한다(고전 15:9-10). (5)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총은 자유의지보다 선행한다. (6) 신앙은 찾고 지성은 발견한다.
4) 루터와 친구가 함께 길을 가다가 친구가 번개에 맞아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루터와 친구가 길을 가던 바로 앞의 바위 혹은 나무에 벼락이 떨어졌다고도 하는 이야기도 있다. 필자는 이 중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전자의 견해에 의하여 기술한다.
5) 광부의 수호자인 성 안나의 숭배 사상은 6세기부터 동방교회에서 시작되어 콘스탄티노플과 예루살렘에 성 안나를 기념하는 성당이 건축되었고, 8세기에는 로마로 도입되었었으며, 10세기에는 서방교회에도 두루 퍼져 성 안나를 숭배하여 봉헌되는 성당들이 급속히 늘어나면서 성모 마리아의 부모에 대한 숭배를 확산시켜 14세기에는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그 결과 1584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Gregorius XIII)가 7월 26일을 성 요아킴과 성 안나의 기념 축일로 지정하였다.
6) 스콜라신학은 스콜라적 방법을 사용하여 신학의 체계화를 시도한 스콜라학파의 신학 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다. Martin Grabmann은 그 방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스콜라적인 방법이란 초자연적 진리를 사유하는 인간 정신에 내용적으로 근접시켜서 구원의 진리를 체계적이고 유기적으로 종합적인 기술을 할 수 있게 하고, 또 이성의 관점으로부터 나온 계시 내용에 대한 항변들을 물리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성 내지 철학을 계시 진리들에 적용함으로써 신앙내용에 대한 최상의 통찰력을 얻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 정의에는 ‘신앙과 이성, 계시와 사변, 신학과 철학 간의 종합’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7) (1) 실재론(realism)은 플라톤의 철학인 이데아 사상을 신학의 방법론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실재하는 보편적인 것 – 보편적으로 실재하는 것 - 을 신학적인 근거로 두고 이해를 가져나가는 것이다. 이는 신인식론을 말함에 있어서 상대적인 유명론과 차이를 갖게 되는데, 실재론자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자연법칙에 있는 보편성에서 인간의 이성의 기능을 긍정하여 신앙을 말한다. 즉, 이성이 있어 신을 인식할 수 있는 작용에 있다고 봄으로써 이성에 의해 신앙에 이른다고 본다. (2) 이에 반해 유명론(nominalism)은 인간이 알고 있고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이성들이 만들어낸 기존 개념을 터득하는 것에 불과하며 인간의 이성이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더 많은 개념이 있을 수 있다고 보면서, 보편적 실재로 이성을 주장하며 신앙에 작용하는 것을 거부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관인 물리학, 수학, 법학 등에서 보게 되는 입증되는 개체인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의한 신앙을 말한다.
8) 루터는 종교개혁 과정에서 당시 학문으로 확립되었던 스콜라신학을 철저하게 성경을 사용하여 반박하였는데, 당시 스콜라철학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 근거하여 제공하였던 신학개념들과 사고의 범주들을 중심적으로 비판하였다.
9) 오캄은 신앙 의인화를 위해서는 작은 전제 조건으로 겸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기에 먼저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이는 계약 신학이라고도 하는데,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계약은 의롭다 하심을 얻기 위한 작은 인간적 노력, 곧 겸손을 통해서 은혜를 주신다고 여겼다. 루터는 이러한 오캄의 사상을 영향 받기는 하였으나, 그와 차별을 가졌다. 루터는 겸손하려고 노력하지만 그 속에 교만이 도사리고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루터는 인간의 작은 겸손의 노력조차 하나님 앞에서는 악한 죄임을 인식하였으며, 그에 따라서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오는 오직 ‘믿음에 의한 의’를 말하였다. 이것이 루터의 ‘이신칭의’ 또는 ‘이신득의’ 사상이다.
10) ‘히페라스피스테스’(Hyperaspistes)는 그 뜻이 ‘광신’으로 번역이 되는가 하면 ‘방패’로 번역되기도 한다.
*발제자 : 이 천 우(개혁성경신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