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봉 김정호 선생을 추모하며
선생의 약사 1947. 경북 상주 출생 1968. 대구전신전화국 입사 2003. kt 퇴직 1997. 한국방송통신대학 행정대학원 졸업. 행정학 석사 2020. 대구문화재단 인생나눔교실 멘토 2013-2019. kt 그룹 희망나눔재단 스마트 강사 2016. 역)수필문예회 회장 2020. 매일시니어 기자 2021. 대구시각장애인 수필 강의 2021. 영남수필문학회 회장
수상 2006. 수필과비평 신인상 수상 2016. 대구수필가협회 문학상 2020. 수필과비평 문학상
저서 2003. 자서전 《이룬 꿈 못다 이룬 꿈》 2010 수필집 《목화꽃 향기되어》 2016 수필집 《홀씨하나 떨어져》 2021 수필집 《이상향은 어디에》 2022 수필선집 《봄·여름·가을·겨울》
3.18일 이른 아침, 서봉 김정호 선생의 부음을 접했을 때 둔기로 맞은 듯 심한 현기증이 일었습니다. 생자필멸生子必滅이란 신의 섭리 앞에 한없이 왜소한 인간의 한계를 절감했습니다. 선생은 3. 10. 수필문예대 개강식에 임의 저서를 챙겨 수강생에게 선물하겠다고 했지요. 그러나 하루 전,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았어요. 참석이 어렵겠다."는 전화를 받았지요. "이 또한 지나가겠지요." 솔로몬의 말을 주워섬기며 위로했지요. 그 후, 안부를 여쭐 때마다 특유의 낙천적인 말투엔 병색이 전혀 묻어 있지 않았습니다. 새벽닭 울음과 동시에 날아오던 임의 카톡이 며칠 동안 울리지 않았습니다. 나 또한 코로나에 확진 받던 14일 오전만 해도 "그저 열이 좀 있네~. 박 회장도 조심하소." 임의 목소리 귀에 맴도는데, 청천벽력 같은 비보에 망연자실했습니다.
선생의 열정과 봉사 정신은 대단했습니다. 임의 열정은 선천적으로 타고났다면, 선생의 봉사의 삶은 세상 살면서 터득한 것이겠지요. 배움에 고픈 선생의 향학열은 형설지공螢雪之功의 대명사였습니다. 타고난 선생의 리드십은 임을 그냥 두지 않았지요. 대구수필문예회 회장 재임 중에는 특유의 리더십을 발휘하여 문예회를 도약의 선상에 올려놓았습니다. 능력을 인정 받아 대구수필가비평작가회 회장·대구문협이사·수필가협회 이사에 발탁되어 여러 단체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오셨습니다. 최근에는 영남수필문학회 회장을 맡아 문학회 명성을 세상에 드높이고자 노심초사 하신 것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선생의 열정 뒤에는 늘 봉사란 단어가 당신의 의식세계를 지배 했슴은 틀림없겠습니다.
선생과는 수필이 끈이 되어 십 개 성상을 지내는 동안 애증이 교차하였지요. 선생이 수필문예회 회장으로 계실 때 저는 총무를 맡았습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임의 열정을 그때 많이 배웠습니다. 서로 성격은 달랐지만 소통, 이해하며 공통분모를 찾고자 노력한 것을 선생은 아실 것이외다. 때론 선생이 불끈할 때, 당신의 성정을 알기에 한 발 물러서지요. 뜸을 들인 후, 반론을 제기하면, "맞네. 당신 말이 맞아요. 미안하외다."삼박하게 인정하며 상대를 배려하는 큰 그릇의 소유자였습니다. 선생은 진정 리드의 덕목을 갖췄기에 저희의 귀감이었습니다.
선생의 수필집 《목화꽃 향기 되어》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한집에 같이 사는 아내도 목화꽃을 유별나게 좋아한다. 꿈에 목화꽃을 자주 만난다. 가을이 다 갈 무렵 비탈진 뙈기밭 가득 한 목화밭이다. 수명을 다하여 바짝 말라가는 줄기와 가지에 눈송이처럼 하얗게 목화가 달린다. 거기에는 목화를 따는 할머니가 계신다. 검은색으로 물들인 치마는 목화 이랑에 가려 보이지 않고, 하얀 무명 저고리 입고 목화 따는 할머니만 보인다. 할머니는 그렇게 살았다. 그러한 할머니는 곧 목화였다. ' 선생은 할머니께 깊은 애정을 가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작품 속에서 선생은 효자요, 훌륭한 남편이요, 존경받는 아버지였습니다. 자주 사무실에 들러 "박 회장, 지난날을 회억해보니 내 팔 너무 많이 흔들었어. 아내에게 너무 미안했어. 이것을 만회하고자 요즘은 둘만의 여행을 자주 다니지요." 나의 내면을 꿰뚫 듯 던지는 한 두 마디가 날 썬 촉 되어 나의 심장에 파문을 일게 한 것을 임은 짐작하셨겠지요?
또다른 수필집 《이상향은 어디에》서 나오는 임의 머리말 일부입니다. '숱한 세월 동안 수필을 위해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였다. 생각이 많다는 것은 인생이 힘들다는 말과 상통한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내가 선택한 길이다. 그리고 이제까지 바쳐온 정성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능력과 건강이 허락한다면 앞으로도 계속 글을 쓸 것이다. 수필을 쓰면서 후회 많은 나의 인생 여정을 돌아보고, 알 수 없는 내일일지라도 나름대로 예측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내일도 그리고 모래도 글을 쓸 것이다. 비록 후세에 길이 남을 명작은 못 되더라도 열심히 글을 쓰고 다듬을 것이다. 그 길이 나에게 주어진 숙명이기 때문이다.' 이 글만 보더라도 선생은 평생 글쟁입니다. 오로봉위필 五老峰爲筆 삼상작연지 三湘作硯池 청천일장지 靑天一丈紙 사아복중시 寫我腹中詩 하늘을 종이 삼아 오로봉 큰 붓으로 천의무봉天衣無縫, 글쟁이로 남으소서. 서봉 김정호 선생님, 이 세상 미진한 미련과 아쉬움 훌훌 벗어 던지시고 고통 없는 극락에서 영생복락 누리소서.
대표작/ 목화꽃 향기 되어 남자가 별스럽게 야생화를 좋아해서 아파트 베란다에 야생화를 가꾸고 있다. 적지 않은 50여 개 화분이 철따라 피는 야생화가 귀엽고 앙증스럽다. 야생화는 각자 나름대로의 특성과 개성을 지니고 있다. 그중에서도 목화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한집에 같이 사는 아내고 목화를 유별나게 좋아하는 이유를 알지 못한다. 꿈에 목화밭을 자주 만난다. 가을이 다 지나갈 무렵 비탈진 뙈기밭 가득 찬 목화밭이다. 수명을 다하여 바짝 말라가는 줄기와 가지에 눈송이처럼 하얗게 달린 목화다. 거기에는 목화를 따는 할머니가 계신다. 검은색으로 물들인 치마는 목화 속에 가려 보이지 않고 하얀 무명 저고리 입고 목화 따는 할머니가 보인다. 할머니는 그렇게 살았다. 그렇다. 정녕 할머니는 목화이셨다.
할머니는 열네 살의 어린 나이에 열다섯 살 신랑을 서방님으로 맞아 시집왔다. 열일곱 되던 해에 첫 아들을 생산한 후, 하늘 같이 믿고 살았던 서방님은 돈 벌어오겠다고 훌쩍 일본으로 떠났다. 열여덟 새색시였던 할머니는 일본으로 떠나는 서방님에게 작별의 인사도 제대로못하고 운명처럼 살았다. 서방님 떠나가신 지 십여 년 만에 서방님이 잠시 다니러 와서 둘째 아들 만들어 주고는 바람처럼 떠나갔다.
시집살이 아무리 힘들다고해도 서방님 낳아주신 친 시부모, 서방님이 양자 들어간 양 시부모 네 분 어른을 한 집안에서 모시고 철없는 시동생, 시누이와 밤톨 같은 두 아들 의지하고 살았다. 할머니는 서방님 정 모르고 살다 보니 자식에 대한 애착이 어느 부모보다 더 유별났다. 자손이 귀한 집안의 내력으로 한 대 건너 한 대, 양자로 대를 이어온 집안인지라 아들 형제 점지해 주신 조상님들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았다. 그러다 해방이 되고 일본에서 돌아오신 서방님이 채 3년도 같이 살지 못하고 맹장염으로 추정되는 병으로 마흔 살도 못 채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예나 지금이나 농촌살이 다 그렇고 그런 것, 형편이 어렵지는 않았다지만 밭에서 하는 일 중에 밭 가는 쟁기질 같은 험한 일을 제외하고는 거의 여자들 몫이었다. 밭일 중에서도 목화 따서 물레 돌려 실 뽑아 베 짜는 일은 전적으로 할머니 몫이었다.
첫아들 열여덟 살에 장가보내 놓으니 운이 좋아서인가 이듬해 첫 손자 보았으나 첫 돌이 지나기 전에 저세상으로 보내고, 두 번째 손자로 내가 태어났다. 첫 손자 허무하게 잃어버리고 얻은 두 번째인 나는 선천적으로 몸이 약했다. 그런 나에게 할머니가 쏟은 정성을 참으로 대단했단다. 첫돌을 얼마 앞둔 어느 날부터 불덩이 같은 열병으로 사경을 헤맬 때, 할머니는 어머니를 제쳐놓고 몇 날 며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업고 안고 간호하시다 돌 전날 밤 깜박 졸았다는데, 꿈속에 백발노인 나타나서 “새벽닭이 울 때까지만 견디면 죽지 않는다. 새벽 첫 닭 울 때까지 정성을 다해 간호해라.” 고 하셨단다. 드디어 첫닭이 울고 날이 밝았다. 돌날 아침부터 차차 열이 식어갔다. “조상님들의 음덕으로 손자 하나 건졌다.”며 할머니는 항상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툭하면 잔병치레하는 손자는 애물단지였겠지만 간호하고 보살피는 것을 낙으로 알고 사셨다.
아무리 손자가 귀여워도 할 일은 해야 했다. 그럴 때 할머니께서 항상 나를 옆에다 두고 일하였다. 집안에서 하는 일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들일을 할 때에도 항시 데리고 다녔다. 목화밭 김맬 때도 나는 할머니 곁에 있었고, 목화를 따는 가을에도 할머니 치마폭을 잡고 졸졸 따라다녔다. 그렇게 할머니를 따라다는는 것이 버릇처럼 되었다.
설익은 목화 열매를 참으로 많이 따 먹었다. 그것은 우리는 목화 다래라 했다. 군것질거리가 귀하던 시절 다래는 훌륭한 먹을거리였다. 쌉싸래하면서도 달짝지근한 맛을 잊을 수 없다. 할머니는 그렇게 사시다 어는 늦은 가을, 유언 한 마디 남기지 않으시고 이슬처럼 하늘나라로 가셨다.
어린 시절, 그때의 추억 때문인가. 나는 목화만 보면 할머니를 생각한다. 한여름 하얀 꽃으로 피어나는 목화도 아름답지만, 찬 서리 내리는 늦은 가을이면 무리 지어 피어나는 순백 목화는 경건의 극치이다. 그것이 바로 할머니의 자태이다. 덜 익은 목화 다래를 한입 가득 베어 물고도 싶다. 서리 내리는 늦을 가을, 때 묻지 않은 모습으로 곱게 피어나는 목화를 한 소쿠리 따보고도 싶다. 옛 추억 잊지 못해 목화를 야생화 반열에 올려놓고, 때맞춰 씨를 넣어 정성을 쏟고 싶다.
박기옥 프로필 수필집: 《고쳐지은 제비집》《소금 세례》 논픽션소설: 《박사리의 핓빛 목소리》 소설: 《기왓골 메아리》 향토사: 《와촌의 발자취》 수상: 제1회 갓바위스토리텔링·제2회매일시니어문학상 최우수상·경산시민상(문화)·경북작가상 외 다수 역)경산문협회장·경산시립도서관운영위원장. 현)대구수필문예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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