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덕여관과 이응로 화백
고교시절 가벼운 차림으로 텐트와 배낭하나 달랑 메고 영등포에서 장항선을 타고 예산 수덕사로 향했다. 수덕사 역에서 버스를 타고 먼지가 풀풀나는 비포장 길을 털털거리고 달려 수덕사에 도착했다. 그러니깐 그때가...여름 방학이 끝나갈 무렵, 수덕여관에 방을 잡았다. 그곳에서 하룻밤을 자는데 혼자 잠자기가 적적하여 그 집에 있는 10살 정도의 아이의 방학 숙제도 해주고 같이 잠을 잤다. 연로한 분이 계셨는데 어찌나 친절하시던지 하룻밤 방값만 계산을 한 후 밥값도 안받고 그냥 이틀을 머물고 왔다. 그곳에서 이틀을 머무른 후 집으로 돌아오고, 그후 그 아이의 큰 누나 쯤 되는 "정"某 씨와 펜팔을 하게 되었다. (나 보다 두살 어린...)
군대를 다녀오고 오랜 시간이 흘러 그곳이 그 유명한 수덕 여관이란 것을 알았다. 다리를 건너 들어가면 그곳에는 일엽스님의 이야기가 있고 그와 동갑내기인 나혜석의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며 한국 화단에 큰 족적을 남긴 이응로 화백의 이야기가 가슴 짠하게 베어있는 곳이다. -한국의산천-
▲ 고암 이응로 화백.
▲ 고암 이응로 작품 활동지 기념비 ⓒ 2007. 한국의산천
수덕사 일주문 옆에 있던 수덕여관 앞에 세워진 표석, 현재 이곳 수덕여관은 모두 철거한 상태로 다시 복원하게 된다.
이응로(李應魯) 1904∼1989. 충청남도 홍성출생. 호는 죽사(竹史)·고암(顧菴)
1924년 서울로 올라와 김규진(金圭鎭)에게 묵화를 사사하여 그해부터 조선미술전람회(鮮展)에 묵죽(墨竹)을 비롯하여 묵매(墨梅)·묵란(墨蘭) 등 사군자의 그림으로 거듭 입선하고, 1938년부터는 수묵담채의 사실적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하였다. 1944년까지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 계속 입선과 특선에 오르며 전통화단에 뚜렷이 진출하였다. 1945년 8·15광복 직전에 귀국하여 배렴(裵濂)·장우성(張遇聖)·김영기(金永基)·이유태(李惟台)·조중현(趙重顯) 등과 전통회화의 새로운 방향을 탐구한다는 모임으로 ‘단구미술원(檀丘美術院)’을 조직하여 1946년부터 동인전을 가졌고, 조선미술가협회 상임위원이 되기도 하였다. 1957년 조선일보사 주최 제1회 현대작가미술전에 참가하고, 다음해에도 초대를 받는 등 현대적인 작가상을 스스로 확립하다가, 1958년 국제적 도전으로 부부관계였던 제자 화가 박인경(朴仁京)과 더불어 독일을 거쳐 프랑스의 파리에 정착, 그간의 수묵화 한계를 과감히 벗어난 서구(西歐) 미학의 콜라즈(collage)로 파격적인 변신을 나타내었다. 서울에서 가져간 화선지 외에 버려진 모든 종이를 재질삼아 콜라즈로 형상시키고 바탕도 무엇이든 이용한 그 실험적인 조형행위는 먹물 또는 은근한 색상 부여로 동양적인 정신성과 은밀한 형상창조로 이내 국제적 평가와 주목을 받게 되었다.
▲ 고암 이응로 화백의 사인이 있는 바위 ⓒ 2007. 한국의산천
객수(客愁)에 잠 못 이루며 뒤척이던 어느 겨울 밤, 문득 방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니 탐스런 함박눈이 펑펑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굵은 함박 눈이 하얗게 내려앉은 좁은 마당과 봉긋한 초가지붕은 어느새 둥덩산같이 솟아올랐다. 매화꽃 같은 눈송이가 하염없이 휘날리는 밤의 정취에 몰입한 나머지 겨울날의 살을 에는 듯한 한기(寒氣)조차 느낄 겨를이 없었다. 객수로 뒤척이던 차에 눈 구경까지 하느라 수덕여관에서의 그날 밤은 거의 뜬눈으로 지새우고 말았다. 그 뒤로는 수덕사를 생각할라치면 절 자체보다도 수덕여관이 먼저 떠오르곤 한다.
수덕여관은 그 독특한 외형으로 인해 길손의 마음을 잡아끈다. 위압적인 콘크리트 구조물의 여느 여관들과는 달리 초가지붕을 얹고 있어 옛날의 객줏집이나 시골의 민가를 보는 듯하다. 해방된 뒤로 여태까지 문짝 하나 허투루 고쳐 달지 않고 고집스럽게 옛 모습을 지켜왔다고 한다. 더구나 이곳에는 고암 이응로(1905~1992) 화백의 미망인인 박귀희씨(89세)의 애절한 망부(望夫)의 사연이 아로새겨져 있어 사람들의 가슴을 찡하게 만든다. 충남 예산 출신인 고암은 세계 화단의 주목을 받았던 현대 한국화의 거장이다. 그는 그림에 대한 소질을 타고났으나 화업(畵業)을 천하게 여기는 양반집의 가풍으로 인해 제대로 그림 공부를 할 수가 없었다. 17세때에 집을 뛰쳐나온 고암은 각처를 두루 돌아다니며 그림 공부를 하였는데 한때는 해강 김규진의 문하에 있기도 했다. 마침내 제10회 선전(鮮展)에서 '소낙비가 쏟아지는 날의 대밭'이라는 작품으로 특선을 하였고, 그 뒤에 일본으로 건너가 본격적으로 그림 공부를 하였다. 해방이 되자 고향으로 돌아온 고암은 수덕여관을 사서 그곳에 잠시 머물렀다. 그러나 여관은 부인 박귀희씨가 맡아 운영하였고, 고암은 그림을 그리러 다닌다는 구실로 집을 떠나 있는 날이 더 많았다. 그리고 며칠 만에 돌아와서는 여관 손님처럼 머물다가 다시 훌쩍 떠나곤 했다.
당시 이미 화단의 주목을 받고 있던 고암은 서울로 올라가 미술대 교수로 재직하였다. 고향에 본부인을 둔 채 서울 생활을 하던 그는 이화여대 제자였던 박인경씨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1957년 고암은 자신의 예술세계를 더 넓은 무대에서 펼쳐보기 위해 박인경씨와 함께 프랑스 파리로 건너갔다. 그때부터 박귀희여사의 기약없는 기다림과 망부의 세월이 시작된다.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1968년에 박씨 할머니는 고암과 짧은 재회의 시간을 갖게 된다. 고암이 이른바 '동베를린 공작단 사건'에 연루되어 국내에서 옥살이를 하게 된 것이다. 친자식이 없었던 고암은 양자 둘을 두었는데, 그 중 장남이 6·25 때에 납북되었다. 파리에 머무르던 고암은 장남이 북한에 살아 있음을 알고 양아들을 만나기 위해 윤이상과 함께 북한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그 일이 동백림사건의 빌미가 되었던 것이다. 대전교도소와 전주교도소에서 옥살이하는 고암을 남모르게 옥바라지 해준 사람은 그에게 버림받은 본부인 박씨였다. 1년여 뒤에 출옥한 고암은 수덕여관에 잠시 머무르며 요양을 하다가 다시 파리로 훌쩍 떠나버렸다.
그때 고암은 수덕여관 뒤뜰의 우물가 양옆에 있는 두개의 넓다란 바위에 독특한 문자추상화를 새겨 놓았다. "1969년 이응로 그리다"라는 사인까지 새겨진 이 암각화(岩刻畵)는 한글의 자모음들이 서로 엉키는 듯하면서도 조화를 이루며 아름답게 풀려가는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 문자추상은 동양적인 전통과 정신을 서구적으로 변형시킨 동도서기(東道西器)의 한 시도였다. 수덕여관의 뒤뜰에 있는 암각화는 고암의 동도서기식 문자추상화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손꼽힌다.
박씨 할머니는 이 암각화를 바라보며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하지만 고암은 1992년 회고전이 열리고 있던 파리에서 끝내 다시 고국 땅을 밟지 못한 채 세상을 뜨고 말았다. 고암은 영영 돌아올 수 없는 사람이 되었지만 박씨 할머니는 그와 함께 보냈던 날의 추억을 간직하기 위해 이 여관을 옛 모습대로 지켜왔다고 한다. 초가집의 그윽한 운치나 객수가 아니더라도, 수덕여관에 녹아 있는 이런 애절한 사연을 알고난 뒤라면 누구나 잠 못 이루고 뒤척거리는 밤을 보내게 된다. [출처 " 예술의전당]
▲ 우물 옆에 있는 암각화 ⓒ 2007. 한국의산천 집은 다 철거 했지만 집 가운데 있는 정원수 한그루와 우물은 그대로 있다.
ⓒ 2007. 한국의산천
ⓒ 2007. 한국의산천
▲ 수덕사 일주문 옆에 있는 수덕교 ⓒ 2007. 한국의산천 이 수덕교를 통하여 수덕 여관으로 들어온다. 당시 수덕 여관 전면은 허리춤 높이의 쪽 마루와 난간이 있었고 안에는 방이 여렀 있는데 비교적 깨끗한 느낌이 드는 곳이었다.
▲ 해체작업중인 수덕여관 ⓒ 2007. 한국의산천 수덕 여관 입구에 서 있는 백일홍과 수덕교 다리표석.
▲ 수덕여관이라는 비석이 노천에 임시로 자리하고 있다. ⓒ 2007. 한국의산천
아무렇게나 길위에 나동그러진 수덕여관의 표석을 보니, 기약없이 기다리는 망부의 애닮은 한이 절절히 되살아 난다. 세월은 가도 아픔은 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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