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봉직후부터 네티즌들의 호감까지 태풍과 쌍벽을 이루던 영화 킹콩이 태풍을 바짝 추격하고 있다. 태풍에 비해 상영관수가 적다는 것과 런닝 타임이 세시간이나 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점유율은 더 높다고 볼 수 있다.
세시간. 가만히 앉아서 스크린에 몰두하기란 성인들도 쉽지 않은 시간이다. 하지만 영화 ‘킹콩’은 액션과 스릴, 특수효과, 사랑이야기를 적절히 버무려 관객들의 눈을 스크린에 고정시키는 데 성공했다. 특히 33년과 76년에 나왔던 흑백화면의 킹콩 영화를 기억하는 중장년층에게는 향수를, 처음 접하는 젊은 층에게는 새로운 신비감을 느끼게 만들어주고 있다.
= 그래픽 기술의 승리
한마디로 영화‘킹콩’은 헐리우드 블록버스터가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주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그간 블록버스터들의 성공에서 따온 모험담과 스릴이 살아있고 그래픽 기술의 발전을 한 눈에 알 수 있도록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며 전혀 새롭지 않을 것 같은 사랑이야기가 신선하게 다가오도록 만드는 재주마저 선보이고 있다.
새로운 블록버스터가 나오면 제일 먼저 관심이 가는 것은 그래픽 기술일 것이다. 이 영화도 젖은 킹콩의 털이 자연스럽다는 것이 화제의 중심이 될 정도로 킹콩을 얼마나 사실적으로 묘사했느냐가 최고의 관심사였다. 게다가 이 그래픽을 담당한 기술자가 한국인이라는 사실로 인해 더욱 주목받기도 했다.
영화가 시작된 지 한시간 반이나 지나서야 출연하는 킹콩의 그래픽 기술은 정교하다. 그래픽 기술의 현재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미세한 털의 움직임 뿐만 아니라 눈동자와 얼굴 표정까지도 실사와 흡사하다. 미니어쳐도 만들었던 33년도 킹콩과 탈을 뒤집어썼던 76년도 킹콩에 비해 사실감을 극대화하고도 남을 만큼 말이다.
더군다나 겉모습만 동물의 모습이지 하는 행동은 마치 멜로 영화의 남자 주인공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풍부한 표정 연기를 선보인다. 해뜨는 모습을 바라보는 킹콩의 외로움과 섬에서 떠나가는 앤을 바라보는 처절한 눈빛, 앤을 찾아 헤매는 킹콩의 연기는 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전혀 손색이 없다. 게다가 앤과 함께 있을 때 중간중간 보여주는 깜직한 모습이나 마초적인 모습은 실제 사랑에 빠진 남성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게 만들 정도다. 이 점이 다른 괴수 영화들과 이 영화를 확실히 구분짓는 차이점이기도 하다.
이 영화의 그래픽 기술은 킹콩의 표정연기만이 아니다. 섬에서의 모험담을 묘사하는데 무려 한 시간을 소요하면서도 관객들을 지루하게 만들지 않을 정도로 섬에서 일어날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에 대해 그간 헐리우드가 보여준 그래픽 기술을 종합적으로 선보인다.
심지어는 어찌 보면 황당할 수 있을 공룡시리즈들을 등장시키면서까지 쉼없이 등장인물들을 위험에 빠트리면서 자신들의 기술을 자랑한다. 영화 <쥬라기공원>을 연상시키는 이 장면들은 좀 길다 싶을 만큼 지루한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안도의 한숨을 쉴 만하면 새로운 난관을 조성해 관객들을 새롭게 긴장시키는 긴장감을 적절히 유지하고 있다.
= 영화를 풍성하게 만드는 캐릭터
이 영화의 장점은 다른 블록버스터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살아있는 캐릭터들이다.
감독은 킹콩의 출연으로 관객의 관심이 킹콩과 모험담에 집중되기 이전 한 시간 반 동안을 할애해 다른 출연진들의 성격을 묘사한다. 공황기인 1930년대 당시의 시대상과 주인공 앤에 대한 성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만큼의 시간을 할애해 앤과 킹콩의 정서적 유대를 더욱 자연스럽게 만들 뿐 아니라 그저 바비인형같은 외모로 야수에게 잡혀 공포에 떠는 여인으로만 여겨지던 여주인공 앤을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가는 꿋꿋한 여인상으로 창조한다.
주역 뿐 아니라 조연들도 개별 인물로서 뚜렷한 성격을 드러내고 있으며 그들간의 유대관계도 적절히 표현되어 활력을 불어넣는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전혀 흠잡을 데가 없는 것은 아니다.
반지의 제왕을 만든 감독답게 화려한 그래픽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잘 짜여진 구성에다 스토리도 탄탄하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는 반면 블록버스터다운 황당함도 없잖아 있다.
황당한 공룡의 등장이나 똑같은 난관을 당해도 결코 부상 당하지 않는 주인공들과 밀림을 뒹굴어도 갓 세수하고 나온 듯한 여주인공의 얼굴, 거대한 킹콩이 움직이는데도 금 하나 가지 않는 뉴욕 거리 등은 비현실적이긴 하지만 판타지 영화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괜한 트집이 되고 만다.
또 갑작스레 영웅(?) 흉내를 내는 남성들이나 동양인의 토속문화를 야만으로만 치부하는 등의 전형적인 미국식 사고방식이 거슬리긴 하지만 헐리우드에서 만든 블록버스터인데 그 틀을 벗어날 수야 없지 않겠는가.
또 한가지, 이 영화가 다분히 미국적이라고 광고하고 싶은 여러 인물들보다 가장 미국적인 캐릭터는 영화감독인 ‘칼’이다.
그는 돈이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하고 자신의 야망을 위해서는 자기 멋대로 주변을 이용하고 해석하는 데다가 어거지를 써서라도 밀어붙이는 성격이다. 마치 미국이 현재 전세계에서 저지르고 있는 모습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