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진에서 나는 비극적인 소식을 접했다. 6월 25일 동두천 덕정리 전투에서
죽음직전에 나를 구해준 은인 최태원 하사관이 전사했다는 비보였다.
청주에서 비로소 공병대가 대대형태로 전열이 정비된 후 나는 대대 작전참모로
최태원 하사관은 중대 선임하사관으로 각각 인민군과 맞서며 북진했다.
나는 대대본부에서 지휘를 하고 최 하사관은 공병대의 중대에 배속되어 있어
만나고 헤어지고 떠나고 하는 것은 순간순간이었다.
임관하고 수도사단 공병대대 3중대에서 소대장과 선임하사관으로 만난 우리는
각별한 신의관계가 있었다. 그가 군복을 벗을 뻔했을 때 나는 상관으로서 내 직을 걸고
그를 보호했고, 그는 죽음의 위기에서 나를 구해주었다.
내게 있어서 최 하사관은 각별했던 전우였고, 부하였다.
많은 죽음을 목도했지만 최 하사관의 죽음은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 아픔이었고
슬픔이었다. 그때 나는 쏟아져 내리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통곡했다.
나는 그의 시신을 수습해 성진의 무슨 초등학교 뒷산에 묻었다.
그리고 나무줄기를 하나 깎아 <최태원 전사지묘(戰死之墓)>라고 새겨 비를 세워주었다.
내가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그 뿐이었고, 그것으로 이 생(生)에서
그와의 인연도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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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쟁 당시 한 병사가 전사한 전우의 비목을 붙잡고 묵념을 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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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승장구라는 이면의 북진과정에서 최태원 하사뿐만 아니라 많은 전우를 잃었고
나 또한 숱한 생사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우리가 북진한 동해안가(東海岸街)는
인민군이 대전차 지뢰를 수없이 묻어 놓은 가시밭길이었다.
인민군의 지뢰는 미제(美製)와 달리 나무상자 속에 있는 소련제로,
여간해서 탐지하기 어려웠다.
그 이전 함흥으로 가는 길에서 내 바로 뒤를 따라오던 정찰병 쓰리쿼터가
지뢰에 날라 갔는데 그때 내가 죽지 않은 것은 운으로 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사실 6월 25일 결사대로 갔다가 살아난 것도 기적이었다.
그런 까닭에 나는 불사조(不死鳥)라는 신념을 갖고 전투에 임했다.
그것은 어쩌면 죽음의 공포를 견디기 위한 나의 자기암시나 자기최면이었는지도 모른다.
성진에서 길주(吉州)로 가는 터널에서 우리는 대역사(大役事)를 했다.
터널 중간에 기차가 불에 타 박혀 있었다. 터널을 통과해야 길주를 손에 넣는데
장애물이 빼도 박도 못하게 떡하니 버티고 있는 것이다. 별 수 없는 일이었다.
폭파하면 터널이 붕괴할 것이고 결국 우리는 용접기로 기차 한 대를 잘라냈다.
그 난해(難解)한 공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때 이북의 주민들을
복구대(復仇隊)로 썼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길주에 진군하며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더 이상 밀려날 수 없는 인민군의 격렬한 저항 때문이었다.
11월 4일, 마지노선을 놓지 않으려는 인민군의 필사적인 공격을 뚫고 결국 돌파했다.
도시를 점령할 때마다 우리가 기본적으로 해야 할 임무가 있다.
도시의 기본 시설인 전기, 수도 복구다.
청주에서부터 공병대 장교가 부족했던 터라 내가 정보, 작전과장을 겸직하고 있었다.
따라서 나의 주요 임무 중의 하나는 대대본부에서 수시로 공병대대의 활동을 보고받거나 파악하는 것이었다. 그 정보를 취합해 대대장에게 보고하고 사단장을 보좌해
작전계획을 수립하게 되는 것이다.
11월 9일 미 10군단이 이원(利原)에 상륙했다. 그들은 수도사단 공병대대에 자신들이
북진할 수 있는 길을 정찰해달라는 요청을 해왔다.
미 10군단의 주력은 해병 2사단, 미 7사단, 미 3사단이었는데 장비도 크고 많았다.
그때 공병대대의 작전, 정보과장인 내가
“어떠한 부대가 갈 수 있고 어떠한 장비가 갈 수 있는가,”를 정찰해 보고하라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나는 연락병과 선임하사관 둘을 데리고, 지프차를 타고
이원 아래의 홍원(洪原) 사이에 있는 북청(北靑)으로 갔다.
북청은 옛날에 북어가 많이 나는 곳으로 유명하다. 북어(北魚)라는 이름도
그래서 붙여진 이름인데 일제시대부터 함경도에서 잡은 북어들이 인기가 있었다.
북청에서 후추령이라는 함경북도 삼수갑산(三水甲山)으로 가는 길이 있다.
후치령은 함경남도 북부 해안가에서 시작되어 험준한 산악지대롤 수백㎞ 올라가면
삼수갑산으로 이어진다. 삼수갑산을 가는 길이 후치령인 것이다.
그 후추령을 넘어가는데 10월이지만 극심한 추위로 떨어야 했다.
그때까지도 방한복이 보급되지 않아 우리는 인민군한테서 노획한 광목으로 만든
내복을 입고 있었다. 그렇게 열악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보급품이 못 따라왔기 때문이기도 했다. 인민군은 막 도망가고 우리는 하루에 수십㎞씩 일사천리로 올라가니 미처 따라오지 못 했던 것이다.